[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한동안은 남의 손바닥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또는 무심코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손바닥을 펴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옆 눈을 굴려서 그 손바닥을 세심히 보곤 한다. 물론 본인이 누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본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선서를 할 때도 TV를 통해서 그 분의 손바닥을 유심히 봤다.
그것은 내가 한창 운명에 대해서 생각할 때였다.
군산공장 근무도 서울공장 근무도 뿌리치고 부산 내려올 때는 나는 나름대로 각오는 했다.
독자로 태어나서 넉넉지 못한 시골살림에서도 내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자란 나는 정말 막무가내의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서는 효자고, 동네에서는 예의바른 아이로, 학교에서는 착하고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친구들에게는 미움 받지 않는 아이로 그렇게 인식되어 오면서 나는 정말 그런 아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그래서 더운 온실에서 자란 아이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착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모범생이라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고집불통인 최고집으로 불렸고, 사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샐러리맨으로 살았다. 그래서 지나고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나의 부하 직원이었던 많은 후배들이 엄청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회사의 간부사원 교육에 갔다. 그 때가 1997년 12월 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육을 마칠 때쯤에 회사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고 그 발표가 교육 마지막 날인 토요일 오후에 있다고 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적중했다. 한창 IMF 위기에 몰려 국내 경제가 곤두박질을 할 때였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할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IMF(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하에서 IMF 구제금융을 수용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날은 대학동기생들의 매년 개최되는 부부동반모임이 경주에서 있는 날이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회사에서 해고되었다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물론 동창생들의 모임에서도 어느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군산 라이신 2차 증설이 완료된 후 나는 다시 부산공장으로 내려왔다.
물론 나의 부산행을 아무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번만은 정말 군산공장을 떠나는 게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미련은 없었다. 나는 다시는 가정이 있는 부산을 떠나지 않고 회사 생활을 마치고 싶은 생각을 했다. 부산공장의 운명이 멀지 않았다는 걸 느끼면서도 외로움을 뛰어넘지 못하는 시골가정의 외아들만이 갖는 천진난만한 성격(?)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후일 생각해 보면 교사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아내의 생활력에 의지한 나의 나약함이었을 것이다.
회사생활은 그다지 활기차지는 못했다. 공장주변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폐수공해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대기공해를 집중적으로 지적하는 민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회사는 물론 이에 대비해서 서울공장과 부산공장을 이전할 부지를 이미 군산 바다 매립지인 공단에 확보해두고 있었다.
창업회장님과 함께 우리 회사를 이끌어 오신 사장님이 회장직을 맡고 계셨고 부산공장의 부장 시절 때부터 오너회장님과 호흡을 맞추어 오신 그 분은 회사의 창업회장님 만큼이나 절대적이신 분이었다. 나는 라이신 증설 시부터 그 분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회사 내에서도 모두가 그 사실을 인정해오고 있었다.
나는 그 분 만큼 회사를 위해서 일 하시는 분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약이 몸에 베이신 분이었다. 사무실에서 복사 용지 관리를 직접 하셨고, 현장의 용접봉 관리도 직접 하시는 분이셨다. 지나가는 길에 중요하지 않은 내용물을 이면지가 아닌 새 복사용지로 여사원이 복사하다가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호되게 꾸중하셨고 그것이 상관이 시킨 일이라면 과부장들도 호되게 당하였다.
공장 순시 중에 수리업체 직원들이나 자사 수리원들의 실수나 부주의로 아직도 사용할 수 있는 정도 길이의 용접봉을 우연히 보았다가는 공사 감독자나 공무부서 과부장들도 예외 없이 호통을 당하곤 했다.
당시에도 회사가 어려울 때였고 오직 절약만이 회사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그 분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그 정신이야말로 당사가 언제나 적자 없이 회사를 운영해온 밑거름이 되어왔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입사해서 퇴사 시까지 한 번이라도, 월급을 단 하루라도 지체해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구매담당자가 수시로 나를 찾아오거나 전화로 “부장님, 회장님께서 전화가 왔는데 모일 시설용 원자재 철판 ( )매, 스테인레스 파이프 ( )M, 구매 사실을 확인하고, 최부장께 상의했는지 확인 전화 봤고, 부장님과 상의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알고 계시라고 보고드림니다.” 그렇게 회장님께서는 모든 구매 물품들 그 중에서도 고가의 물품이나 일상적인 용품이 아닌 물품은 꼭 확인을 직접 하셨다.
보통 1 개월에 한 번 정도는 부산공장을 방문하셨고, 그 때마다 그 분은 공장장실에서 나를 불러서 공장장과 내 앞에서 공장장께 “공장장이 결정하는 중요 사안이나, 비 일상작인 구매품 등은 결재 시에 꼭 최부장과 상의해서 결정해라.” 라는 말씀을 방문 시마다 말씀하시곤 했다.
2 대 회장님이 창업회장과 가장 가까운 인척이고, 지금 공장장도 창업회장의 5촌 조카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회장님과도 동일한 촌수의 인척이었다.
공장장은 당사 공채 3기로 공채6기인 나와는 3 년 선배인 셈이고 대리에서 초임과장 시까지는 선후배 관계로 절친한 편이었다. 3 기 선배들이 과장 진급이 조금 늦은 편이었다.
생각해보면 창업회장과 아주 가까운 인척이고 창업회장과는 가장 잘 손발이 맞아온 그 분의 회사 열정은 창업회장과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또한 가까운 인척인 공장장이 공장 운영에 차질 없이 잘 하라고 아주 좋은 의미로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시고 내가 공장장을 잘 보필해 달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보다 선배인 공장장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체면에 큰 상처를 남기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자리가 언제나 불편하고 거북했지만, 회장님은 회장 직을 그만둘 때까지 똑같은 충고를 계속하셨다.
내가 품질관리과장에서 몇 년 후에 다시 지금 공장장인 그 분에게 품질관리과장 업무를 인계 시에도 당시 사업본부장이셨던 상무님께서 “최 과장같이 열심히 일 해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전부 ㅇ과장께 인수 받고 배웠던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도 나 또한 그 분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나에게는 정말 나쁜 일이 될 것임을 나도 느꼈지만 공장장과는 끝까지 그 오해를 해소하기위한 노력을 하지 못한 나에게 큰 인간관계의 무지나 나의 고집불통의 성격의 한계가 있었음을 느낀다.
나는 그 분들의 나에 대한 신임과 사랑을 정말 깊이 느꼈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앞길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회장님께서 나의 입사 시 과장이었던 방계회사의 상무를 불러 식사를 하자고 할 때도, 회사를 그만 둔 전임 공장장을 불러 식사를 할 때에도 그 분은 공장장과 동행하지 않고 나를 동행해서 식사를 한 것도 나에게는 공장장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분은 얼마나 공사 구별이 확실한 지는 그 때 회식자리에서 먹은 식사를 내가 회사 경비로 지불하려는 것을 못하게 하시고는 혼잣말로 음식 값이 정말 비싸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 아마도 개인 카드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 분은 회사 일에도 언제나 내 것 같이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베이신 분이었다.
그 후 그 분도 나도 회사를 떠난 후에(그 때 나는 당사 대리점 업을 하고 있었음) 부산 공장에 들리셔서 공장장실에 나를 불러서 공장장 앞에서 “그동안 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란 말씀을 하셨고, 나는 “계시는 동안 회장님의 깊은 사랑을 받은 것만으로 충분 합니다”란 말씀을 드렸다.
그 후 몇 년 뒤 그렇게나 건강하셨던 그분이 작고하셨을 때, 직접 상문도 못간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내가 일본 동북대학에서 연구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의 후임으로 내가 품질관리과장을 맡게 되었고, 업무 인수인계 시에 그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조직관계의 업무에 대해서 선배로서 아주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고, 기술자로서 언제나 원칙대로만의 소신을 갖고 고집불통으로만 지내온 나에게는 그의 업무 인계를 받고 많은 것 깨달으면서 나는 그가 아주 유능한 사원임을 알았다. 아주 재치가 있고,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을 갖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가 갖지 못하는 것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부사원으로서는 나는 그의 위치와는 거리가 있는 새내기 과장임에 틀림이 없었다. 품질관리과장은 생산부에서는 아주 불편한 존재일 때도 있었다.
밤새워 만든 공산물이 품질 불합격을 받으면 출고가 정지되는 것이었다. 생산과장으로서는 재생하거나 폐기하는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회사에 많은 손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고 생산부장까지 책임을 져야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한다.
나는 설계분야에만 자라온 정통 엔지니어라 아무래도 임기응변의 기교에는 도통 무지였다.
가공식품과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부산공장에서는 가공식품의 애매한 불량품과 제조용기나 저장조 문제로 발생하는 석유제품의 이물질 불량은 정말 그 처리에 골치가 아팠다.
신임 품질과장으로 나는 주위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원칙대로 처리해버렸다.
마치 조선시대의 장원급제 신임 암행어사처럼 판단했던 나는 그 후 생산부서장이 되었을 때 얼마나 독불장군이었던가 하고 회상하게 되었다.
당시에 당사에서는 알파전분을 개발해서 상품화하고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오징어땅콩볼이란 알사탕 같은 과자를 A사에서 생산하였는데 여기에 알파전문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알파전분의 제조는 용도의 전분유액을 직경 1.5-2미터 크기의 원통 내부에 스팀으로 충진하여 드럼 표면에 소기의 균일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일정 속도로 회전하는 원통 표면에 유액을 균일한 두께로 코팅한 후 건조시켜서, 전분을 순간적으로 알파화한 후에 드럼표면에 코팅된 건조품을 칼로 아주 얇은 종이장과 같이 만들어서, 그 얇은 벗겨진 백설 같은 조각들을 분쇄하여 만들었다.
장치의 특성은 아주 정밀한 스테인레스 재질의 원통이고, 그 원통이 아주 정확한 원의 곡선을 그리면서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면 원통에 좁은 간극으로 떨어져 설치된 나이프가 원통에 얇은 알파전분을 벗겨내는 것이다.
스테인레스 재질의 철판은 일반 철판에 비해 열에 매우 민감하게 신축작용을 하기 때문에 회전의 정밀도와 유액 코팅의 두께 그리고 두간극의 정밀도에 의해 제품의 성상이 결정된다. 그 때 당사가 보유한 드럼건조기는 국산으로 원의 정밀도와 회전 시 발생하는 흔들림의 정밀도에 오차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튼 당시에 알파 전분의 출고 제품에 스테인레스 재질의 금속이 검출되는 사고가 있었고, 그 제품으로 오징어 땅콩볼을 제조한 B사의 엄중한 항의로 당사 영업부 담당과장과 공장 품질관리과장인 내가 그 공장을 방문했는데, 금속 이물질이 포함된 제품인 오징어 땅콩볼을 보여주었다. 내가 봐도 할 말이 없었다.
이 문제로 그 당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전분당공장인 부산공장에서 가장 큰 고객 중의 하나는 음료수와 과자로 유명기업인 L사였다. 그 회사는 또한 부산의 대표기업이기도 했다.
당시에 유행해서 현재까지 매출 신장이 이루어진고 있는 빵과 과자의 중간에 가까운 C파이라는 그 제품은 모든 세대에 인기가 있었다. 그 제품에는 아주 부드러운 맛의 마시멜로 (marshmallow)라는 크림 같은 물질을 사용했는데 그 마니멜로의 원료로 당사의 전분당 제품이 사용되었다. L사의 제품구입사양에는 별다른 성분에 대한 구체적인 사양이 언급되지 않았고, 당사에서는 생산 제품 중에 여러 제품을 테스트한 후에 상호 합의된 I당의 제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가공식품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성분이나 함량 기준으로 뚜렷이 특정화하지 못하고 제조자의 구미나 제조 당시의 조건에 따라서 합격 불합격으로 판정하는 것이 많았다.
L사의 제조부에서 만들어진 C파이의 제품에서 마시멜로가 문제가 없으면 합격이고 문제가 생기면 불합격으로 당사의 생산 책임자나 품질관리 책임자가 소환되어 L사의 생산라인 반장과 협의를 하곤 했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이란 너무나 정성적인 것이어서 충분한 사과와 납품한 원료를 교환해주는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생산부에서 반품된 동일 제품을 며칠 후에 납품해서 문제없이 넘어간 적도 있었지만, 당사에서도 L사의 제품에서 마시멜로의 상품이 당사제품의 어떤 성분에서 문제가 되는지 아니면 그들의 생산라인에 문제인지는 규정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제품은 L사에서도 대단한 기술 본존의 제품이라 상세한 제조 공정이나 제조과정은 절대 비밀 사항이라서 당사 기술진에서도 어떻게 도와줄 수도 없었다.
단지 납품 후에 언제나 합격해주길 기원할 뿐이었다.
L사 뿐 아니라 당사의 생산 라인에 간에 트러블이 발생한 일들이 있었다.
당시에 영업부의 요구로 가끔씩 상대사의 생산 담당과장이나 반장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는데 부서의 경비로 여의치 않아서 개인의 월급에서 충당한 적도 두어 번 있었다.
오후에 천성산 미타암을 찾았다.
자동차가 산 중턱까지 올라가기에 등산길은 30 여 분도 걸리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백팔 배만 했다.
12월 중순의 겨울 날씨는 약간 쌀쌀한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마에 약한 땀 여울이 지고 있을 뿐 나무 사이를 들락거리며 삐쭉삐쭉 얼굴을 내미는 다람쥐만이 스잔한 초겨울 바람에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나무가 소나무라고 누가 말했던가? 곱게 물들어 흰 눈처럼 소복소복 쌓여있는 노란 갈비가 포근한 침대처럼 펼쳐진 소나무 그늘에 바람이 불 때마다 따스한 햇살이 화살처럼 꽂히고 있었다.
주위 어딘가에는 참한 송이버섯이 얼굴을 내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막상 닥치고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곱빼기에 곱빼기를 생각해도, 도무지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부처님 같은 절대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어왔기에 절대자인 신이 항상 보호를 해줄 것이라고 믿어왔기에 언제나 어머님이 곁에서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 왔기에, 나는 갑작스런 이 상황에서 빨리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 해 12월 말일자로 회사에 사표를 썼다.
그리고는 1월부터 매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의 전분당제품의 대리점을 개설했다. 금정산 산성할아버지 도사님께 전화를 했다.
대리점 상호를 어떻게 이름지어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고, 그 분께서는 사업이 솔솔 풀려나간다는 [송해상사]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회사에 출근하면 휴게실 앞에는 자판기가 놓여 있었고 그 곳에는 회사를 떠난 후에 대리점을 운영하는 동료들이 3-4 명 언제나 모여서 서로 잡담과 제품의 영업 정보를 공유하는 터전을 삼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아내가 학교로 가고 나면 나는 사무실에 잠깐 들렸다가 20 여년을 한 결 같이 출근했던 회사로 나도 모르게 출근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를 만나러 가듯이 내 발길은 회사로 향했다.
회사의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에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영업부 아침 회의가 끝나고 나면 영업부에 들러서 과부장이나 담당자와 필요한 정보를 교환한 후에 사무실로 돌아온다.
사무실에 혼자만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정말 이 세상에 혼자가 된 느낌이 든다.
이 때 나는 가족의 귀중함을 깊이 깨닫기도 했다. 독신자들이 이러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견디어 나가는지도 처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과연 운명이라든가 사주팔자라든가 인간이 통제 불가능한 무언가가 정말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나는 명리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때 나는 고향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 옛 친구를 만났고, 그와는 금방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사주팔자를 재미로 봐준 적이 있었고, 60은 넘게 살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그 후 그 친구는 6 개월도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로 가고, 나는 그 친구를 잃는 슬픔으로 수 년 동안 혹독한 인고의 세월을 보냈고, 이 때 나는 명리학 공부를 하면서 단기로 수상학 강의도 들었지만, 친구의 죽음으로 한동안 명리학 공부를 쉬기도 했다.
친구의 장례식 후 그 날 저녁에 그의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 나는 그 분의 큰누님께 친구의 생년월일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사주팔자의 여덟자로 사람의 운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나자신이 신봉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 그래도 사람의 수명에 관한 것은 어느정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거의 어머님 벌에 가까운 그의 큰누님이 하시는 말씀은 사실은 친구의 태어난 시는 물론이고 태어남 일자도 정확하게 모른다고 했다. 당시의 어려웠던 농촌의 사정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으로 살았던 때였기에 거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물론 당시에 시골 집에 시계는 없었고, 동네에 시계가 있는 집은 한 집 밖에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 친구가 60-65 세 까지는 문제없이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렇게도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
그의 말로는 신기가 있었어 동네에서 점집을 했던 그의 어머님이 평소에 그에게 너는 명이 짧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했고, 60 살 을 넘겨서 산다는 나의 말에 그토록 환호했던 거였다.
지나고 생각하니 그래도 친구에게 기쁨을 준 것이 좋았는지? 아니면 단명하다는 그의 어머님 말씀에 충실했다면 좀 더 조심을 하고 건강관리를 했더라면 좋았을지는 알 수가 없다.
오늘 날에는 엤날의 명리학이 잘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유명한 고승이 평소에 자기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자기가 열반을 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해왔고, 그 분의 신통력을 믿었던 제자들은 그분 말했던 운명의 그 날 밤에 선방에 불을 밝히고 모든 제자들이 스님의 열반 시간에 모여서 염불을 낭송하고 젊은 스님들은 여차하면 선생님을 모시고 병원으로 달려갈 준비를 마치고 승용차를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은 닥아왔고 마침네 노 스님은 자리에 꽂꽂이 앉은 자세로 열반에 들어가는 기세에 놀란 제자들이 스승님을 업고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시켰고, 응급실에서 급히 수술실로 옮겨져 혈관 스탠드시술을 받았던 스님은 아무 일 없이 소생을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사주팔자도 맞지 않는다고도 하고, 엣날 같으면 죽을 운명에도 뛰어난 현재의 의술이 그 순간을 모면하면 다시 좋은 운세를 만나 장수하기도 한다고도 했다.
10 년 마다 오는 대운에서 어려운 한 고비를 넘기면 다음의 대운까지 무탈하게 보낼 수도 있다고도 했다. .
어쨌든 나는 내 인생에 큰 변화를 겪으면서 과연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해잔 운명이 있는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고,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음양오행의 변화와 사주팔자, 풍수지리 등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양사상은 중국의 고서에서부터 공부를 해야 했기에 방송통신대학 중국어과에 입학도 했다. 하지만 나의 욕심으로 1학년에 입학한 게 아니고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몇 년을 걸려 공부했지만, 그 때마다 시험기간이 되면 업무관계로 시험을 보지 못하는 때가 생겨서 아직도 학점 이수를 다 못해서 졸업은 못하고 만 년 휴학생 또는, 제적생으로 남아 있고, 새학기만 되면 제적생 구제의 입학 안내장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중국어과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반드시 끝을 볼 생각이다.
그래서 명리학 공부도 소기의 성과를 이룩하고 말겠다는 집념은 버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