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날 1996년 5월 23일
보름전부터 준비해 온 지리산종주 산행하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화창한것이 산행하기엔 더없는 날씨다.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하여 업무를 마치고 퇴근 시간을 기다려 샤워를 간단히 한 다음 김영호氏를 기다렸다. 잠시후 영호氏를 만나 출발에 앞서 동기가 부탁한 침낭과 쌍안경을 최 주임으로 부터 빌려 어제 미리 배낭을 준비해 두었던 우리집으로 향했다. 배낭의 내용물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아내에게 ' 다녀오리라' 간단히 작별인사를 고하고 집앞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택시는 많지만 잘태워 주질않는다. 큰 배낭을 메고 그것도 셋이서 세워달라고 하니 당연할 것이다. 시간은 촉박해지고 하니, 걸어서 터미널 까지 가기로 하면서 틈틈히 뒤돌아 보면서 혹시라도 태워줄 택시가 오기를 바랬다. 때마침 우리앞에 택시가 서고, 우리를 반긴다. '웬일이까?' 싶어서 보니, 기사분이 마음씨 좋은 여자분이었다. 걸어가야 할 길을 태워주니고마울 뿐이었다. 조금여유있는 시간으로 시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16:00발 서대구행 버스표를 구입하여 버스에 몸을 실으니 버스는 곧장 출발한다. 지리산을 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들떠있고, 2시간이 소요된다는 서대구까지의 길은 와 이리 멀게만 느끼어 지는지, 어릴적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 아마 이랬을 꺼야! 경주도 지나지 않아 벌써 조급함을 보이는데 버스는 우리의 기분을 무시한채 직통 버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중간중간에서 승객을 탑승시키고, 자꾸만 시간을 지체하더니만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속질주를 한다.
버스는 고속으로 달음질을 하고 근무를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은 탓인지 우리도 모르게 모두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버스는 어느듯 서대구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아직 충분하였다. 그런데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 진입로에 들어서니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들의 정체 현상으로 터미널까지 무려 18분이나 소요되어 남원행 막차 출발8분 전에서야 서대구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뛰어내리듯 내린 우리는 배낭을 챙기고 미리 예매를 하고 기다리기로 한 상구를 찾았다. 그러나 기다린다던 상구는 보이지를 않는다. 버스표와 저녁용 김밥을 상구가 준비하기로 하였는데 나타나지 않으니 정말 큰일이다. '혹시 승강장에 미리 들어가 있지는 않을까?'' 대합실에도 없는것이 버스에 탑승하여 자리라도 잡고있나?' 생각하며 버스에 올라 찾아보았지만 상구는 보이지않고 버스는 출발시간이 다되었다고 탑승을 독촉하고, 찾기를 포기하고 표를 구입하니 버스는 출발시간 4분이나 지나고 있었다. 검표원이 마음씨가 좋아서 기다려 준것인지 아니면 자리가 빈탓에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로 봐서는 퍽이나 다행이다. 비록 평일이지만 남원행 막차는 빈자리가 없을 꺼라고 들었던터인지라, 더구나 내일은 남원 최대의 행사인 춘향제가있어 전야제인 오늘밤엔 사람이 많아 좌석 확보가 어려우리라 생각하였는데 ... 처음부터 계획이 어긋나는듯한 양상이 보여 며칠을 두고 고심하며 준비를 하였던 것이 기대에 못미치게 실망을 주는듯 불안하였으나 퍽이나 다행이다. 비록 똑똑한 내컴퓨터같은 아가씨덕에 버스비를 더 내었지만,(내 컴퓨는 지금도 오락가락하는것이 이 종주기나 다 쓸 수 있을런지, 버리는데도 8000원을 내야하는 286이니) 남원행 버스 짐칸에 배낭을 넣으려고 보니 이미 다른 배낭으로 가득한것이 모두들 지리산을 찾는것 같다.
이제 버스는 낙동강을 막 통과하고 있고 우리는 눈을 지긋이 감고 조급했던 조금전의모든일을 잊고 명상에 잠겨 본다. 서쪽하는에는 붉은 노을이 온 천지를 휘감아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하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은 오지 않는다. 어젯밤 오늘을 위하여 충분한 수면을 취하였던터에다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더구나 포항에서 대구까지 버스안에서 눈을 붙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20:40분, 2시간여를 달려온 버스는 남원시내를 통과하고 있고 시내 곳곳에는 춘향제 전야제(前夜祭)로 인하여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는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다. "이참에 춘향제나 보고 산에는 내일갈까?"라는 농담을 하면서도 내심은 모두 조금이라도 빨리 노고단에 오르고 싶어하는것 같다.
남원 터미널에 도착하여 노고단까지 가는 택시요금을 알아보기 위하여 조그만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구입한다음 물어보니 3만원정도면 될 것이라 한다. 이미 충분한 정보를 위하여 포항에서 시외전화로 확인하였지만 초행길에는 자주 알아보아야 바가지(?)를 쓰는일이 없는 법이니까. 터미널 앞에 나오니 어느방향 어디에서 택시를 잡아야 할지몰라하는데 경찰관이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어 '노고단 까지 가는 택시 어디서 타느냐'고 물어보니 택시승강장을 알려주면서 한마디 덧 붙인다. "만약 택시가 가지 않는다고 하면 알려주소, 버릇을 고쳐야뎅께" 무슨소리야! 손님이 가자는데 기사맘데로 그것도 돈을 주는데 안가는 택시가 있단 말인가. 이곳에도 택시들이 포항만큼이나 배짱인가보구나 하는생각을 잠시 해본다. 경찰관 예기로는 택시들이 버릇이 없다고 하며, 승객이 택시를 탈 수 없다고 하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택시인지, 시내 운행은 돈이 안된다고 승차거부하고 먼곳은 길이 험하다고 안가고 정말 엿장수 마음데로 인 모양이다. 경찰의 말을 뒤로하고 택시승강장에서 택시를 하나잡아 노고단까지 가자고 하니 4만원을 달라고 한다. 조금전 가게에서 3만원정도라고 하였고 지난번 포항에서 확인하였을땐 3만5천원 정도면 된다고 하였는데 괜히 속는 기분이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김兄은 4만원에 그냥타고 가자고 하여 탑승, 출발하니 이렇게 지리산의 산행시작은 택시타고 성삼제 까지 오르면서 시작된다. 비록 택시로서 오르는 지리산이지만 역시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급커브에 급경사의 반복, 택시기사는 짧막하게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내는 이길을 많이댕겨 운전에 자신이 있으니께 괜찮아뻔지는디 손님들이 불안하면 안전벨트를 멧쇼." 끼익-끽, 무슨소린가. 급커브를 곡예하는 택시바퀴들은 정령치에서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뒷 좌석에 않은 영호氏와 김兄은 안전벨트를 메고만다. 택시 뒷좌석에서 안전띠를 매는곳은 아마 여기가 처음이 아니싶다. 4만원이란 택시비가 아깝다던 생각이 금새 사라지고 만다. 어느 놀이동산에 가도 4만원에 셋이서 이런 스릴을 맛볼 수 있겠는가! 물론 요금은 수시변동이지만. 택시기사의 말에 의하면 낮에는 최저 2만 5천원에서 저녁10시이후엔 최고 10만원까지 받는곳이 이곳 정령치의 택시요금이라고 하니 그 경찰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듯도하고 정말 정령치의 택시요금은 엿장수 마음이 아니라 기사마음인가보다.
이윽고 노고단에 도착하여 요금을 지불하고 산행을 서두른다. 21:40분 초승달만이 우리를 보고 있을뿐 아무것도 보이지않고 다만 헤드 램프에 비추어진 정리된 비포장 도로만이 길게 산행의 방향을 알려준다. 이제, 앞만보고 걸어야만한다. 즐거운 산행이 되기만을 바라면서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한발한발 발걸음을 옮겨 오르는데 갑자기 봉고차가 나타나 고요한 산악을 울리고 흙먼지를 일으킨다. 입구엔 분명히 차량 통제 바리게이트도 쳐져 있었는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하긴 어느곳이던 빽 있는 놈들은 항상 있으니. 봉고차의 내부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차위에 배낭이 가득한것을 보니 등산할 사람들로 만원(滿員)인듯하다. 한참을 올랐던가, 노고단 산장으로 향하는 샛길이 보인다. 샛길을 접어드니 물소리가 요란한것이 개울이 있는 모양이다. 그곳에서 산행중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서울에서 왔다는 젊은 두 사람은 개울가에서 비박을 준비하고 있는데 침낭에 고개를 내밀고 누운 모습이 우습기도하고 한편으론 저렇게 잠자도 괜챦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5월의 날씨는 춥지않다고 하지만 이곳 지리산의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없고 특히 밤이슬까지 내리고 있는데... 우리도 개울에서 첫번째 휴식을 취하기로하고 여장을 풀고 보니 막 배가 고파진다. 저녁준비를 하기로한 상구가 오지않아 그동안 저녁도 먹지못하고 있었으니 뱃 속인들 가만있고 싶었을까! 저녁을 이곳에서 먹기로하고 쌀을 씻고 김치와 소세지 그리고, 고추장 장아찌로 반찬을 준비하는데 겨곡의 물은 너무도 차다. 아니 차다못해 손이 시리다. 저녁은 영호氏가 담당한다고한다. 군에서 짬장을 했다는 영호氏의 라면끓이는 솜씨는 이미 단석산에서 경험한적이 있었지만 다시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때 라면은 아마 산속이고 바같이라 먹었지 집이였다면... 눈물 젖은 찐빵을 먹어보았나 라고 했던...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밥이 되지를 않는다. 이미 뱃속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한참을 기다리다 불꽃을 보니 불꽃의 힘이 없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가 싶었다. 몇해전 오대산에 갔을때 날씨가 하도 추워서 부탄가스에 휴지를 둘러 불을 붙인후 버너를 짚힌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날씨 때문이 아닌 가스가 없었던 것이다. 가스를 새것으로 4개를 준비하여 왔는데 군 경력만 자신하던 영호氏가 빈가스로 밥을 하려 했던것이다. '역시 군 경력은 속일수 없는 모양이다.' 김이보락모락 오르는 코펠을 열고 밥을 퍼보니 윗부분은 설익고 밑은 숯검정으로 멋진(?) 삼층밥이 된것이다. 시장이 반찬이라 설익은 밥이며 누룽지는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반주로 시작한 나폴레옹은 몇번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이번 산행에는 좀 자제를 하기로 하고 두분의 나폴레옹을 모셨는데 벌서 한분을 보냈으니 앞으로 남은 2박3일의 산행이 걱정이다. 산장에 가면 두꺼비는 잡을 수 있다고 하니 별 문제는 없지만. 식사를 마치고 대충짐을 꾸려 돌게단을 오르니 불빛이 환한 노고단 산장이 나타난다. 여기저기서 많은 등산객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하고 넓은 광장곳곳에는 일찍올라온 등산객의 텐트로 가득하다. 우린 밤에 조금이라도 걸어 두는것이 좋다고 판단, 노고단 정상까지 가기로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5분여를 올랐을까 금방 정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정상이 가까운 곳에 있는줄 알았다면 차라리 편하고 안전하게 산장에서 텐트를 칠것을. 그렇다고 이미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기는 싫고 우린 그냥 정상에 텐트를 칠곳을 찾던중 산신제단 바로밑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아 2박 3일의 산행을 안전하도록 산신령님께 비는 마음으로 텐트를 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신령님을 만나러 자리에 누웠다. 자는둥 마는둥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신령님은 우릴 만나기 싫은지 잠도 오지않고 또 왜이리 추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김兄은 팬티만 입고 눕는데 부럽다. 나와 영호氏는 옷을 입은체로 그것도 양말까지 신고 누웠는데 추워서 도저히 잠이 오질 않는다. 조금만 뒤척여도 싸늘한 침낭이 살갛에 닿아 더욱 춥게 느끼어진다. 바람소리가 심하게 들리고 텐트위의 후라이가 펄럭이고 있다. 텐트를 칠때까지만 하여도 밤하늘엔 초롱초롱 별빛이 반짝이었고 바람한점 없더니만 갑자기 바람은 일기 시작한다. 산속의 날씨는 변화가 많다고 하더니만 잠시사에 아까와는 전혀 다른 날씨를 보인다. 바람소리에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다가 눈을 붙여본다.
§ 둘째날 5월 24일
군화같은 소리에 잠이 깨었다. 눈을 뜨고 랜턴 불빛으로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지나고 있다. 궁금해진 영호氏가 밖을 내다보더니 야간 산행중인 등산객들이란다. 그들중 한사람이 영호氏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겨우 잠이 들려고 하는데 깨워놓고 추워서 움직이기도 싫은 사람더러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니 발만 나오게 찍어주라고 한마디 던진다.산에서 마음을 곱게써야하는데... 훼방꾼들은 사라졌지만 한번깬 잠은 다시 잠들기란 쉽지않다. 이참에 우리도 계획을 바꾸어 출발하는게 좋을듯 해서 어떻냐고 물으니 모두 찬성이다.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는 않을 것이고 또 햇볕이 나면 걷기어려우니 차라리 야간 산행이 쉬울듯 하였다. 피곤하면 그늘진곳에서 두어 시간 낮잠을 자기로 하고 이슬에 젖은 텐트와 베낭을 꾸려 출발을 서두른다. 지도상에 돼지령이라 일컷는 비목령에서 라디오를 켜고 이어폰을 꼿아 오늘의 기상 상태를 알아보지만 잔잔한 음악소리와 낭낭한 목소리의 진행자는 오늘이 부처님오신날로 세속의 때를 지울 수 있는교훈적인 말씀을 들려 주고있고 가끔식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어린시절 시골서 자란덕에 새벽에 일찍일어나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자주 들었었는데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이였다. 지금은 많이 게을러져서 아니, 라디오 보다는 T,V에 더욱익숙해져 거의 라디오 방송을 들어보지 못하지만 이른 새벽에 듣는 라디오, 그것도 산속에서 듣는 라디오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적인 명언으로 정감있게 다고오고 있다. '환히 밝힌 연등처럼 오늘 하루 마음을 열고, 오늘이 지나 연등의 불빛은 꺼질지라도마음속의 불꽃은 끄지말라'는 진행자의 말이 가슴이 와닿는다. 주병선의 칠갑산이 흘러나오는 동안 돼지평전 초입세에 있는 조난자의 묘에 다다른다. 조난자의 묘는 나무판에 작게 쓰여 있을뿐 작은 돌 무덤이 전부이고 별다른 흔적이 없다. 출발하기전 읽어 본 조난자의 묘에 대한 일화는 1970년대 초 고교생3명이 세석에서 노고단을 향해 겨울 등반을 하던중 폭설속에 갇혀 조난당해 동사(凍死)한 곳이라 한다. 겨울산의 위험을 일깨워 주는 곳이다. 몇해전 회사직원 여럿이서 응봉산에서 조난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적이 있었는데 겨울산을 너무 쉽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많은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곳에는 아직도 이정표가 없다. 조난자의 묘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한참을 둘러보고, 희미하게 이어진길을 찾아드니 다행이도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고 잠시후 돼지평전이 보인다. 돼지평전의 어원은 마늘 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파먹던곳 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원추리로 유명한 지리산의 돼지령을 아직 어두운탓에 자세히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곧장 임걸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걸령에 도착하니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시계를 보니 처음 계획했던 시간보다 2시간 50여분을 일찍 도착했다. 잠을 설친 나머지 일찍출발 하였으니 당연하지만 여유도 있고하니 여기서 잠시 쉬어 그동안 참았던 노폐물도 좀 배출하고 심호흡도 가다듬는데 두명의 등산객이 올라온다. 새벽에 만난 반가움에 "반갑습니다"하고 인사하고 "어디서 오셨습니까?" "순천에서 왔는디,새벽 두시에 출발하였는디"라고 한다. 작은 배낭으로 봐선 멀리 갈것같지않고 세석이나 가는가 싶어 "어디까지가세요?'라고 물으니 "오늘중 천왕봉을 왕복한당께" "천왕봉까지 왕복요, 힘드실텐데요' "그래도 해봐야지요" 대단한 사람들이다. 한사람은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것이 가능하게 보여도 또다른 사람은 쌀찐모습이 벌써 땀에 젖어 있는데 무리일것 같다. 지리산을 무슨 운동장 TRACK정도로 알고있나. 아무리 자기 체력을 믿어도 100여리가 넘는 산악을 마라톤이라도 하겠다는건지, 해가 지기전 천왕봉에 도착하기도 벅찰일인데 왕복이라니, 두사람이 쉬는것을 보고' 수고하시오'라고 작별을 하고 노루목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그 동안의 평탄하였던 길이 서서히 경사도를 더하고 쌀쌀한 새벽공기는 헉헉대는 숨소리와 함께 안면이 서서히 이슬처럼 땀으로 젖어든다. 한시간여를 걸어 노루목을 통과하고 반야봉을 바라보면서 곧장 삼도봉을 향하니 육이오의 아픔을 간직한 반야봉은 시간이 없어 그냥지나치게 되니 아쉽다. 다음기회에 꼭 가보리라 생각해본다.
경상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등 삼도의 경계을 이루는 삼도봉은 지도상에는 낫낱봉으로 원래 삼도봉의 바위모양이 낫날같다고 하여 전해진것인데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날이봉으로 달리 부르고 있어 지금도 지도에는 날날이봉으로 기록 되기도한다. 삼도봉에서 등산객 또한사람을 만나니 청주에서 왔다는 나보다 조금은 더 말라 보이지만 근육질의 팔이며 다리는 단단한 해 보인다. 화엄사에서 어제밤 11시에 출발하여 밤새 걸었다고 하는데 조금도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없다. 자신보다도 커 보이는 80리터의 베낭을 메고있는것을 보니 이사람도 무척이나 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몸집이 작고 말라깽이지만 비만한 약골보다야 산에 오르기는 좋은조건을 갖추고 있다. 나역시 그렇지만 몸이 날씬한 김兄도 별명이산다람쥐(?)아닌가! 청주말라깽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뱀사골 도착하여, 이곳에는 식수도 있으니 아침은 여기서 해결하기로 하고 베낭을 풀었다. 뱀사골에 물이 있다고 하였는데 샘은 보이지 않고 이정표에는 뱀사골 산장을 가르키고 있어 식수를 뜨기위해선 200여 미터를 내려갔다 와야한다. 김兄이 자청하여 물을 뜨러 내려가고 영호氏와 나는 배낭속의 쏘세지, 라면,김치등 준비한 다른 먹거리를 꺼내어 버너에 불을 붙이고 기다린다. 부지런한 김兄은 별명처럼 산다람쥐같이 금방 달려 갔다오는데, 등산을 해보면 올라왔던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가 제일 힘들게 느끼어진다. '왕후의 밥에 걸인의찬!'이라고 하였던가? 비록 집에서 먹는 반찬처럼 다양하진 못하지만 산에서 먹는 밥맛이란 원래가 꿀맛이다. 그렇다고 집에서도 잘먹는 내가 아니지만. "식사좀 같이합시다" 조금전 삼도봉에서 만났던 말라깽이 아저씨와 부산에서 오셨다는 아저씨, 그리고 다른 한사람이 곁에서 우리처럼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 인사치레를 하니, "맛잇게 드세요" 라며 인사를 받는다.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정상까지 몇시간이나 걸리죠?" 버너에 불을 붙여놓은 한사람이 산에 자주온듯한 말라깽이에게 묻자 머묻거리는것 같아 우리가 준비한 지도와 거리가 복사된 종주계획도를 주며 일행이 4명계획하였는데 한사람이 오지 못하여 남는 것이니 가져가라고 했더니 고마워 한다. 부산에서 오셨다는 분은 우리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레 포향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자기도 포항에 대하여 잘알고 있다고 하면서 특히, 포항제철에 친구가 있다고 한다. 산에서 만나면 모두가 반갑지만 각자 따로와서 서로 인사하고 함께 하는 산행이 산사람들의 정이 아닌가 싶다. 아침을 마치고 풀어두었던 배낭을 꾸리고 있는데 뱀사골 산장쪽에서 나이들어 보이는 아저씨가 올라온다. 몸 앞뒤로 정부미 포대를 두른것이 공원내 쓰레기를 줍는 공원관리원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산나물을 뜯으로 다닌다고 한다. 산나물에 대하여 설명하는 아저씨에게 커피나 한잔하자며 코펠에 물을 끓이고 있으니 개발딱지라는 처음 들어보는 나물을 보이며 "긍게 이거 뜨거운 물에 살짝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맛있어버려"하면서 숲에서 어린싹을 가리킨다. "마누라가 산에 가면 나물이나 좀 뜯어오라고 하는데 어떤것이 먹을 수있는지 알아야지요" 사실 지금까지 여러산을 다녀봐도 내가 알고 있는 나물은 거의없다. 어떤것이 나물인지조차도. 산나물은 좋아하지만 집에서 해주는 나물 이름도 모르고 먹는게 나물에 대한 내지식의 전부다.
아침을 먹고난후 커피를 한잔하니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산행에 부담이 될까봐 담배를 안피울려고 일부러 사오지 않았는데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를 보니 더욱 간절하여 실례를 무릅써고 한개피를 청하니 기꺼이 하나를 주신다. 담배도 마약과 비슷한 모양이다. 담배를 끊으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몇번이고 실패를 했다. 영호氏도 안피운지 오래 되었다더니 못참겠는지 같이 피운다. 담배 피우는 동안 임걸령에서 만났던 순천에서 온 두사람이 도착하였는데 한사람은 벌써 지쳐보이고 다른사람은 다왔다면서 지친사람을 달래면 재촉한다. 부산아저씨를 비롯한 세사람이 출발하고 우리도 길을 채촉한다. 토끼봉으로 오르는길은 경사도가 점차 더해지는 힘든길로 등산객들이 많이 밟아서인디 패인길로 물길이 생겼으나 울창한 전나무,구상나무들과 진달래밭이 어우려져 다리의 피로는 조금 잊을 수 있다. 토끼봉에 오른는 길목에서 토끼 한마리가 뛰는것을 보고 역시 토끼봉은 토끼가 많구나하고 농담도 하지만 사실 토끼봉이란 토끼가 많아서 생긴이름은 아니였다. 토끼봉이란 이름은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方)으로 불리었다하니 그동안 지리산 종주를 위하여 공부한것이 도움이된다. 지리산 종주를 위하여 많은 준비와 공부를 했는데 과장하자면 논문(論文)도 쓸 것이다. 출발2주전쯤 계획을 세우고 교통편을 알아보기위하여 서대구,남원으로 시외통화를하고 지리산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서점에 들러 지도 구입과 다른사람들의 종주기 탐독,PC통신을 통한 자료발췌등을 퇴근후에 틈틈히 하여왔다. 이렇듯 지리산은 책상앞에서 이미 몇번의 종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이때가 가장 들뜬 기분으로 재미있다. 여행을 가기전 자료를 준비하는 시간이 가장 기대되니까. 이지면을 빌러 자료를 구하는데 협조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산 소개책자에서 사진으로 본 토끼봉에 올라서니 아직 꽃망울이 남아있는 진달래밭이 산속의 계절이 늦음을 말해준다. 4월이면 진달래가만개한 산아래와는 달리 아직도 피지않고 있는것이다. 토끼봉을 뒤로하고 총각샘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여 총각샘이라는 곳에 다다렀으나 샘은 보이지를 않는다. 갈수기에 마른다는 샘이라지만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이정표만이 샘터를 가리키고 있다. 총각샘에서 휴식을 취하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명선봉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다.
이미 다리는 더이상의 질주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서서히 다리에 무리가 오는지 조금씩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명선봉에서 뱀사골서 만난 세사람중 두사람을 다시 만나고 부산서 왔다는 양반은 나물 아저씨가 알려준, 처음 보는 개발딱지 나물을 뜯느라 조금 늦는다고 하는데 나도 나물이나 뜯어가면 집에서 사랑받는데... " 지리산이 웅장한 남성적이라 하면 설악산은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죠" " 우리도 이번 가을에 설악산을 종주할 계획인데 설악산은 험한곳이 많쟎아요" "설악산도 몇번 가 보았는데 쉽지만은 않죠" "지난번에 집사람과 애기를 등에 업고 지리산을 종주했었지요" 각자 지리산과 설악산에 대하여 비교도하고 추억담을 나누며 냉수와 오이로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한다. 명선봉을 지나 미끄런운 바윗길을 돌아서니 종주 왕복하겠다던 두 사람중 한사람이 종주를 포기한듯 옷이 흠뻑젖은 상태로 내려오고있다. "와 돌아오는교?" "앗따 힘들어 도저히 못하겠당께" "같이 가던 사람은요?" "혼자서라도 한다니께 계속 갔을꺼여" "수고하이소" "예, 수고하쇼" 처음부터 무리한 산행일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사람은 끝까지 한다니 대단한 베짱이다. 이사람은 배가 나온것이 산에 오를 사람은 애초에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울창한 침엽수림을 지나 흙으로된 내리막길을 내달으니 연하천산장이 나타난다. 작고 아담해보이는 것이 잘 단장된 시골집이나 돈 많은 사람들의 별장처럼 보인다. 산장에 도착하자 먼저 수통에 물도담고 목을 축이기 위하여 샘터에 가보니 노란색 바탕의 나무판에 검은 글씨의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죄송합니다는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몰지각한 인간들이 이곳에 오물깨나 버리는 모양이다. 산이나 강에 다녀보면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진 모습이다. 이젠 우리도 스스로 지킬것은 지킬 수 있는 정말 긍지있는 문하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 부터라도. 목을 축이고 쉴 곳을 찾았으나 명선봉에서 쉰지도 알마 안되었으니 계속가자고 하여 산장과 이정표를 배경으로 사진만 한컷 남기고 길을재촉한다.
연하천을 지나면서 주변에는 많은 공터와 야영하기에 좋은 평지가가 보인다. 연하천에서도 야영하는 등산객들이 많다고 하였는데 넓은 야영장에는 야영을 안한지 오래된듯 모래가 흐트러짐이 없다. 연하천을 3~40분 지나면서 높이 10여미터가 넘는 큰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형제바위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입석바위는 옛날 성불 수도하던 두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智異山女)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버려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원래 전설이란 구전(口傳)되는 것으로서 만들기 나름이다. 예전에 T.V를 보면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동네마다 전설이 없느곳이 없고 큰바위나 오래된 나무에는 으례히 설화(說話)가있는것을 보면 사람들은 작은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생명을 넣어 교훈으로 삼는 지혜를 가졌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이 바위 우측으로 조금 내려 돌아서면 나무뿌리와 모난 돌길이 펼쳐지는 곳이 벽소령 공터이다. 비탈길처럼 늘어진 벽소령까지의 길은 그리험하지 않으며 오솔길처럼 되어있어 산속의 기운을 맘껏 받을 수 있다.그런데 갑자기 소음이 요란하다. 헬기의 소음이다. 쌍안경으로 소음이 들리는 벽소령쪽을 보니 정부미 포대 같은 것을 잔뜩 쌓아놓고 운반하는 것 같았는데 벽소령에 도착하여 보니 벽소령 산장을 짓기 위한 자제 운반하는 헬기였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산장을 짓는다고 온산을 소음공해로 덮고 나무를 베고 산을 깍고 자연을 죽이고...
지도를 펼쳐 벽소령부근에 샘이 있다고 하여 찾아 보았지만 이곳 역시 샘은 보이지 않는다. 벽소령에서 길게 펼쳐진 작전도로를 따라오면 벼랑밑에 작은샘은 있으나 물한방울 없이 고갈된지 오래되어 보이는 지저분한 웅덩이만이 보인다. 지리산에는 여러개의 샘이 지도상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믿고 식수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아마 갈증으로 인하여 산행은 더욱 힘들 것이다.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km에 달하는 지리산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으로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 을 연결하는 산령으로 유명하거니와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 도로다. " 이 높은곳에 길 닦자면 힘들었을 거요" " 주민들 노역 많이 시켰을 거여, 죄없는 양민들만 고생 시킨거죠" 정말 이도로를 닦기위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절 보수 지급이 넉넉할때도 아닐것이고 큰산의 허리를 잘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생기려면 장비도 시원챦은 시절에 많은 사람들의 희생 없이는 불가한 일이다. 명선봉에서 쉬지않고 곧장 온 탓인지 길은 그리험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식 지쳐가고 있다. 다리는 아직 견딜만 한데 무거운 배낭으로 어깨뼈가 아파온다. 지난번 청량산에 갔을때 지리산 종주를 위하여 큰 배낭을 메어 보았지만 짧은 시간의 훈련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아니, 아무리 훈련을 했다고 해도 무거운 짐을 지면 다시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작전도로의 갈림길에 공원관리용 트럭이 보이고, "여기서 좀 쉬었다 갑시다." "그럽시다. 계획보다 4시간이나 단축하였으니 여기서 한숨자고 갑시다." 영호氏도 지친듯 쉬었다 가자고 한다. "많이 걸었는데 푹 쉬었다 가지요 , 바쁘지도 않은데" 배낭을 벗고 등산화의 끈을 풀고 자리를 잡아 누워보지만 편하진않다. 몇몇의 등산객이 휴식을 취하고 무리를 지은 몇팀은 발걸음을 계속하고, 혼자 인듯한 아가씨도 이정표를 몇번이고 확인하더니만 앞팀과 드불어 걸음을 내딛는다.김兄은 휴식도 취하지않고 뜀박질을 계속한다. "뭐하는교, 힘이남는교." "이래야 몸이 풀이죠,한번해봐요" "쉴 힘도 없는데 참죠 뭐" 30여분을 쉬어 힘을 축적한다음 덕평봉을 올라섰다 내려서니 산중턱에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가 선비샘이다. 산 중턱에 위치한 선비샘 주변에는 점심때가 되어서 라면을 끓이는 사람,김밥을 먹는 사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있다. 우리도 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샘에 물을 뜨러갔다. 샘은 전설과는 달리 파이프로 작게 연결하여 서서 물을 받을 수있도록 되어 있었다. 원래 선비샘의 전설은 산아래 상덕평(上德坪)마을에 평생 가난하고 천대 받으며 살아온 노인이 있었다 한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한번받아 보는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아무도 꿇는 사람이 없고 서서 물을 받고 있으니 편리함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노인의 소망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이정표를 보니 방향도 헷갈리고 거리는 더더욱 엉망이다. 중간중간에 세워진 이정표가 맞지 않는다고 김兄은 불만을 토한다. " 순 엉터리다. 연하천에서 천왕봉이 27Km 남았다고 했는데 갈수록 정상이 어떻게 더 멀어지나, 또 세워야 할곳에는 세우지 않고..." 선비샘에서 덕평봉을 감싸듯 다시 오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오던 길로 가는것 같다. "이길이 아니쟎아, 저위로 올라서면 다시 선비샘으로 내려오던 길로 가는데" "아니요, 이 길이 맞아요" 난 아무리 보아도 길을 잘못든듯하고 김兄과 영호氏는 이길이 맞다고하니 따라서 간다. 작은 대밭길을 지나서 다시 언덕을 뛰어 내려서니 머리에 스카프를 한, 사람이 쉬고있어 길을 물으니 곧장가면 된다고 한다. 이상하게 산에 와서 방향감각을 자주잃는다. 혼자서 왔다면 벌써 길을 헤메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향로봉에서 혼자 길을 잘못들어 동대산으로 가서 고생한 사람이 바로 영호氏였는데, 깊은산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었을때 무엇보다 침착해야하고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거나 왔던길로 되돌아 서라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번 지리산에 왔을때에도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길에 같은 일행중 장兄이 혼자서 길을 잘못 들어 여러사람이 걱정하고 본인은 온 얼굴에 소금을 발라가면서 긴장되어 쉬지않고 하산했던 일도 있었는데.... 칠선봉으로 오르는길이 갑자기 험하여진다. 서서히 티셔츠를 적신 땀은 조끼를 배어나와 온몸을 적셔버리고 숨은 자꾸 가빠오는지 '허~어헉 헉'거리고 어깨며 다리는 죽겠다고 주인을 원망한다. 다리,어깨주인이 머리인지,머리주인이 다리 어깨인지 판단도 되지않지만. 다행히도 햇볕은 구름속에 숨어버리고 없어 그나마 조금은 낫다. 온몸의 노폐물을 다빼내며 봉우리에 올라오니 벽소령에서 보았던 혼자산행하는 아가씨를 만나게된다. 선비샘에서 쉬지 않고 가더니만 여기서 쉬고 있다. 혼자서 빨리 왔다. 쉬운길은 아닌듯한데. "아가씨 혼자서 왔어요?" "예" "어디서 왔는데요?" "서울서 왔어요, 고향은 광주인데 서울에서 학교다니고 있어요" "어디까지 가세요?" "종주할려고 하는데, 종주할것같지는 않고 그냥가는데 까지 갈려고요." 대단한 아가씨다. 혼자서 지리산에 오르는 자체만해도 용감한데 종주코스를 타고 있다니, 남자들도 하기힘던 지리산 종주를.... 내가 알기로는 대체로 여자들은 노고단에서 임걸령이나 아니면 중산리나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거쳐 하산하거나 좀 산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간혹 중간중간 지릉(枝陵)과 지로(枝路)를 이용 세석에서 천왕봉 등산이 전부라고 하는데. 젊음이 부럽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도 늙은것은 아닌데 마누라가 가끔씩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늙어가나보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지리산을 감상해본다. 멀리 천왕봉에서 부터 연하봉이 보이고 이제까지 걸어온 지리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것이 작품사진이나 남기자고 폼을 잡아보지만 사진기가 말을 듣지않는다. 비싼 카메라인데 PANORAMA사진을 만들려고하니 뜻되로 되지않는다. 몇번을 만지다가 다행히 몇 커트 찍었는데 잘 나올지 궁금하다. 조금전 길을 알려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사람과 또다른 사람이 봉우리 올라서 휴식을 취하며 칠선계곡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다. 칠선계곡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많은 조난사고를 내는곳이고, 특히 여름장마철이나 우천시에는 계곡물이 금방불어 사람의 통행이 어럽다고 한다. 칠선계곡에 대한 설명을 하는것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아서니 7개의 암봉들이 나타나고 이정표에는 칠선봉을 가리킨다. 칠선봉에서 두어번 암봉을 넘어서니 경사 급한 바윗돌이 나타나니 이곳이 영신봉 오름길이다. 굵은 와이어 로프로서 오르막을 안내하고 있지만, 로프에 의지 한채 쉬고 또 쉬면서 올라선다. 지금껏 지리산에서 제일 힘든 코스다. 월악산 영봉을 오르는 듯한 길은 쉽게 끊이지않고, 지금까지 많은 산에 가보았지만 아직까지 월악산처럼 힘든 산은 없었다. 이내 김兄은 오바이터를 할것같다고 한다. 사실 나도 조금씩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다. 눈을 찌를듯한 나무가지가 가로지른 가파른 길을 올라서는제, 40代 중반으로 보이는 갸름한 아주머니가 반대편에서 내려오고 있다. 80리터의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것을 보니 종주라도 할 모양이다. "헉~ 헉 반갑습니다. 어디에서 오세요?" "예, 대원사에서 옵니다." "대원사요, 몇시에 출발했는데...." "치밭목에서 비박했어요." "아 그러세요, 수고하세요" "예, 수고 하세요." 그러면 그렇지 대원사에서 벌써 여기까지 올수 있나. 그러나 정말 대단하다. 갸름하고 우아한듯 전혀 산과는 거리가 먼듯한 아주머니가... 아까만난 아가씨나 이 여자분도 대단해 보인다. 비박까지 하면서 종주한다고 하니.지리산을 종주한다고 호들갑을 떨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움으로 와이어 로프를 불끈 잡고 오르니 영신봉이다. 영신봉에 올라 온몸에 젖은 땀을 식히고 시원한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키고나니 시원해진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방을 보니 두루 조망되는 것이 또하나의 절경이다. 그동안 오직 종주에만 신경을 쓰느라 지리산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걸었었다.
사방을 둘러보고 10여분으 걸으니 세석고원이 보인다. 세석은 입구에서 부터 진달래가 이제막 붉은 빛을 토하고 있어 아름다와 보였고 넓게 펼쳐진 고원은 시원함으로 다가왔다.이곳이 토끼봉보다 계절이 이른 모양이다.다만 철쭉이 만발할것 이라던 세석에는, 철쭉은 쫓망울도 맺히지 못하고 있다. 남원택시 기사말로는 지난 19일이 철쭉제를 지냈는데 지금 한창이니 때 맞추어 왔다고 하더니만 순 거짓말이쟎아. 조금 있으려니 덩빨좋던 순천서 왔던 마라토너가 온몸이 땀에 젖어 우리옆으로 터벅터벅 걸어 오고있는데 많이 지쳐 보인다. "벌써 천왕봉 갔다 오십니까?" "아, 예" "대단하네요, 오늘 노고단 까지 가겠어요?" "9시 까진 갈껀데요." "그럼 수고하세요." 4시가 넘었는데 지금 노고단 까지 간다는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우리가 오는 시간이 13시간 이상 걸렸는데 5시간만에 그것도 조금있으면 날이 저물어지고 렌턴도 없이 앞을 제대로 분간도 할수없을 텐데, 고생좀 하겠군' 세석산장을 아래두고 사방으로 길이 트여 있으니 백무동과 대성리쪽 그리고 종주코스가 만나는 곳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내려간다. 그리고 보니 오늘이 사월초파일, 휴무를 만나 가족나들이 모습도 간혹보인다. 우리도 세석고원 입구 작은 대밭옆 야영장인듯한 곳에서 짐을풀고 라면을 끓여먹기로 하고 배낭을 풀었다. 이번엔 서울에서 왔다던 여학생이 대성리 계곡으로 하산하는것이 보인다. 종주는 포기하는 모양이다. 배낭이나 복장을 보니 준비가 완벽하지 못한것이 하산하길 잘하는 것 같다. 아무리 젊음도 좋고 용기도 가상하지만 안전한 산행이 되어야지 무리한 등산은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것이다. 식수를 뜨러 셈터에 가니 많은 사람이 쌀을 씻고 양치질을 하는라 분주히 움직인다. 야영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것같다. 샘터 주위는 물론 헬기장주변에는 이미 비닐이나 텐트를 펴고 앉은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이곳 세석에는 텐트를 치는것을 금지하고있다. 헬기 이착륙시 프로펠러에 의하여 텐트가 날려서 사고가 날까봐 그런다고 하는데 어느정도는 이해도 되지만 세석산장을 새로이 단장하고 개인이 소유하면서 부터 통제가 되었다고 하니 왠지 좀 그렇다. 지리산에는 현재 노고단, 뱀사골, 연하천, 세석, 정터목, 치밭목, 로타리, 피아골등 모두 8개와 공사중인 벽소령까지 9개의 산장중 장터목 산장과 몇몇의 산장만이 공원 관리공단에서 관리하지만 나머지는 개인의 소유가 많다는 어느 등산객의 말을 들으니 황영만氏가 썼던 종주기중 노고단 산장에서의 기록이 잠시 생각난다. 이래서, 산을 좋아하는 등산객들을 위한다고 산을깍고 나무를 베면서 새로 짓고있는 벽소령도 잘한 짓이라고는 생각이 안들게 되는가 보다. 산장 여기저기를 구경이나 하자며 산장에 들어섰다.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통나무로 된 산장은 깨끗해 보였고 겨울 등산객들이 남긴 아이젠 발톱자국만이 작은 점을 이루어 놓았다.산장앞 베란다에 휴식을 취하려고 자리를 잡았다. 영호氏는 아예 침낭을 꺼내어서 누워버린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김兄과 나는 등산을 자주하지만 영호씨는 1년만에 오는 등산이란다. 어느날 갑자기 산에 가자는 우리의 제의에 승낙은 하고보니 많은 걱정이 되더란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세석고원에서 야호를 외쳐대는 얼빠진 여자들이며 작은 대밭 야영장에 좀 들어갔다고 호각을 불며 욕지꺼리를 하는 관리인이나, 들어도 못들은 척 자기볼일만 보는 젊은이들로 하여 세석도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남을 수 는 없어 차라리 일찍히 장터목에 도착하여 한숨 자기로 하고 피곤해하는 영호씨를 깨워 출발을 서두른다. 세석고원에서 촛대봉의 오름길은 주위의 아름다움과 깊게 파인 물흐름으로 잠시 피로를 잊기에는 충분하다.
촛대봉 오름길에 내아들 나이쯤으로 보이는 딸아이와 어머니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딸아이의 종아리를 주물러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 "이놈아, 네가 어머니 주물러 드려야지" 하고 어린이에게 한마디 던지자 어머니 딸아이 모두 웃는다.참으로 정겨운 모습을 보았다. 촛대봉에서 잠시 비탈길을 내려서면 기암과 고사목으로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타게 되는데 사방이 조망되는 바위가 보이고 이곳에는 관강객들로 보이는 많은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년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없이 좋아보이는데, 생활의 여유가 되면 나도 애들 키워놓고 마누라와 같이 산에나 오르면서 즐기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년초에 모처럼 큰마음 먹고 마누라와 함께 델타산악회편으로 제주도 한라산에 갔었는데 워낙 동작이 늦어 몇마디 잔소리좀 하였더니, 두번다시 나하곤 등산안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와서 생각하니 좀심한듯 하다. 두어 봉우리를 넘어서니 무리를 지어 올라오는 등산객들로 진행이 않된다. 지리산 등산코스종 가장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중산리나 백무동계곡에서 세석까지의 등산로에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운동화와 양복바지를 입고 올라오면서 세석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세석요, 두개 봉우리만 더가면돼요" 라고 하니 "다왔네" 라며 지처보니는 몸으로 바위를 기어가다시피 하면서 오른다. '다온것이 아니라, 힘들까봐 두봉우리라고 했지 아직 힘던 서너봉우리는 족히 남았을꺼요.' 헬기장이 있는 연화봉을 오르면 기암이 솟구쳐있고 싱그러운 초원위에 온갖식물들로 形形色色이다. 그동안 산을 느낄 수 없이 바쁜걸음으로 질주하였지만 세석에서 부터는 여유롭게 주위경관과 자연을 보며 걷는다. 일출봉에서 숲길을 지나면 넓지는 않으나 옛날 사천주민과 마천주민들이 물품을 교역하던곳 이라는 장터목에 이른다. 장터목에 이르면 입구 나무숲에서부터 텐트촌을 만나게 되는데 장터목에는 사람이 붐비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후5시35분 아직 이른 시간인데 여기까지 텐트를 치는것을 보니 장터목에는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싶어 이곳에다 자리를 잡자고하니 일단 장터목까지가서 결정 하자고 한다. 장터목 산장은 80여명의 등산객을 수용할 수 있으나 폭증하는 등산객을 수용하지 못하는지 산장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며 비박하려는 사람들이 부산히 움직이는것이 세석과 별반 다를 바없다. 우리도 산장가까이에 자리를 잡기위해 둘러보니 주변에는 무분별할 정도로 야영장이 파헤쳐져있고 작은 공간에도 사람들이 망가트려놓은 언덕을 보니 야영하려는 자신도 좀 부끄럽다. 그렇다고 자리를 안잡을 수 도 없고, 산장에서 남동방향으로 철조망이 쳐진 아래쪽에 자리를 보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얌체놈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날쎄게 세치기를 한다. 산속에도 세치기가 있다니 젊은놈이 버릇없이. 기분은 상했지만, 그래 살다가라며 나오는 욕을 억지로 삼킨다. 장터목은 두해전에도 찾은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하산하는 길이였고 계절도 여름이었는데도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적했던곳으로 기억된다. 물론그때는 시간이 아직 일러 중식시간쯤 되었으니 야영객은 없었지만. 자리를 빼았기고 조금떨어진 외진곳에 자릴 구하여 바닥을 고르고 나니 텐트를 칠만한곳이 된다. 그동안 야영객이 없었는지 흙은 약간 젖은듯 하였지만 비온후 한번도 사용한 흔적이 없다. 모처럼 초파일과 토요일, 일요일로 이어지는 연휴로 야영객이 늘어난 모양이다. 대충 텐트를 치고 나니 쉬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어제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오늘 14시간 이상을 산행했으니 피곤할만도하다. 저녁은 뒷전이고 피로도 풀겸 잠부터자자고 모두 탠트속에 들어서니 정말 편안한 휴식공간이다. 어깨가 아파오고 무릅도 아프고 오히려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니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곳이 없다. 미리준비한 소염제로서 서로의 어깨며 팔다리에 발라주고 나니 한결 시원해지는것 같다. 조금있으니 텐트속이 포근 하게 느끼어 진다. 침낭안에 몸을넣고 산행하면서 보았던것, 느끼었던것 들과 짧게짧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대충몇자 끄적거려 본다. 아담한 텐트속은 셋의 열기로서 서서히 덥혀지고 침낭속에 들어간 우리는 누구라고 먼저 할것도 없이 잠이 들었다.
재잘되는 소리에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40분이다. 두어시간 잠이 들었나보다 밖에 무슨일이 있나 일어나 나오니 바로옆에 아가씨로 보이는 몇이서 텐트를 치느라 한창이다. 물을 길러간 영호氏가 한참 후에야 돌아오며 산희샘에는 사람이 많아 계곡까지 가서물을 떠왔다고 한다. 그렇쟎아도 물이 작게 나오기로 소문난 산희샘이 갑자기 불어난많은 사람으로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내일먹을 밥까지 미리 짓기위해 코펠가득히 밥을짓고 김치와 햄으로 반찬하면서 식사를 하지만 햄이 상해서 먹을 수 없다. 찌게 꺼리로 준비한 일회용 육계장을 끓여 저녁을 먹는다. 산에다니는 사람들에게 일회용 찌게는 정말 잘 나왔다. 양념이 화학조미료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집에서도 화학조미료를 사용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깐, 물론 각종 양념이랑 된장,고추장을 갖고 다니면 더욱 맛잇을 수 도 있으나 배낭을 최대로 가볍게 해야하고 무엇보다 장만해야하는 불편 보다는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일회용 국이 산행시엔 최고다. 저녁을 먹고나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옆텐트에서 아가씨가 렌턴을 들고와서 불이 들어오지 않으니 좀고쳐 달라고 한다. 렌턴을 뜯어 보면서 "아가씨 어디에서 왔어요?" 하고 물으니 "저는 대구고요, 언니들과 다른애들은 광주에서 왔어예" "아가씨들만 온거요?" "예" "무슨 모임으로 온거요?" 하니 "노처들 모임이지예"라고 하는데 나이는 좀 있어 보인다. 김兄을 가리키며 " 노처녀면 여기에 노총각 있는데" "저는 됐고요, 언니 소개해 줄께요" 김兄이 쓸데 없는소리 한다고 하여 농담을 그만두었다 더이상 물어 볼 수 도 없고 빨리 보내야겠다고 생각되어 아가씨에게 "이 렌턴은 밧데리를 잘못끼워 방전이 다되었어요." "그럼 다른 밧데리 있는지 알아볼께요" 하고 자기들 자리에 갔다 오더니, "밧데리가 없으니 그냥 주세요" 라고 한다. "아가씨 온김에 우리 셋이서 사진 좀 찍으려고 하는데 여기 카메라로 사진이나 좀 눌러 주세요"라며 김형이 갖고온 카메라를 맡기고 포즈를 취하지만 찍히지를 않는다고 한다. "카메라가 또 말썽이네" "너무 비싼거라 기능을 몰라서 그러니 아가씨들 카메라 있으면 그것으로 좀 찍어 주세요" 하니 아가씨가 자기들 카메라를 가지러간 사이에 카메라를 건네받은 김兄이 몇번 쪼물딱 거리더니 된다고 한다. 아가씨에게 다시 우리것으로 찍어 달래서 포즈를 취하여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담배생각도 나고 내일 마실 물도 미리 준비 하기위하여 산회샘으로 향하면서 산장안 매점에 들러 담배를 달라고 하니 1500원을 달랜다. 조선 천지 담배가격은 같은줄 알았는데 50%나 비싸게 받는다. 산꼭대기 까지 운반하자니 그럴 수 도 있겠지 하며 물을 뜨러가는데 산희샘은 아직도 줄을 선사람이 길게 늘어서있다. 영호氏가 계곡에서 물을 떠왔다고 했는데 계곡으로 가자며 김兄이 앞선다. 산희샘에서 2∼30미터 내려서니 한 두 사람이 계곡에서 물을 뜨고 있을 뿐 한적한 것이 산희샘에서 줄서고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계곡이 있는것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계곡물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사람이 없어 줄을 서지않아 좋다. 물을 담아 텐트로 돌아오는데 단체로 온 학생들로 보이는 무리들이 지도자의 지시에따라 밥을 하고 야영준비를 하는데 시끌벅쩍하다. '오늘밤도 조용히 잠들기란 힘들겠구만.' 아직 주위에는 사람들로 도란도란 예기하는 소리와 아까보았던 많은 학생들의 텐트쪽에서 나오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내일 산행을 위하여 10시가 조금 넘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마지막 셋째날 5월 25일
몇시나 되었을까? 몸을 뒤척이다 일어났다. 김兄과 영호氏도 눈을 떴다. 헤드렘프를켜고 시계를 보니 3시다. 산이라서 그런지 일찍이 눈이 떠진다. 계획은 4시반에 기상이었는데 눈을 떳으니 준비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온 천지가 시꺼먼 암흑으로 감싸여 있다. 새벽임에도 부지런한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정터목은 깨어나고 있었고 밤새워 온 듯한 등산객들은 심호흡을 하면서 능선을 가로 지르고 있다. 텐트를 철수하고 배낭을 메고나니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기분으로 일어선다. 비록 잠자리가 불편하여 자는둥 마는둥 하였지만 오늘의 산행은 한시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고 그곳에서 충분한 휴식후 하산 할 것이라, 일단 심리적으로 부담이되지 않는다. 재석봉 오름길은 이미 도께비불로 줄을 있고 있다. 여러사람의 램프불은 진짜 도깨비불을 연상케 한다.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이 벌써 출발하였나보다. 많은 행열에 우리도 동참하여 오직 헤드렘프에 의지한채 돌뿌리만을 피하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재석봉 오름길은 경사가 심하고 여기 저기의 조그마한 평지에는 모두 텐트들로 즐비한 것을 보니 어젯밤 늦게 도착하여 미처 장소를 구하지 못한 등산객인 듯하니 어젯밤의 장터목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 붐볐는지 상상이 된다. 많은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와 재잘되는 소리에 간혹 텐트속에서 막 불빛을 밝히고 있으니 아마 저들도 노고단에서의 우리와 같이 다른 등산객으로 인하여 잠을 설치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아직 쌀쌀한 찬공기가 압안으로 들어화서 폐를 한번 둘러보고 하얀 수증기가 되어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주니, 허∼어흡 헉 허∼어헉 대는 소리가 더욱 함차다. 재석봉 중턱에는 구상나무와 잔나무들이 지난번 지리산을 찾아 이곳에 왔을때에는 재석봉 전채가 횡사목으로 가득 하였으나나 지금은 그나마 어둠이 치부를 가리고 있다. 황무지로 변한 재석봉은 자유당 말기 농림장관의 삼촌이 되는자가 거목들을 베면서 수난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여론화되어 말썽이나자 증거를 인멸하고자 불을 질러 나무들을 횡사 시켰다고한다.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자연이 훼손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도 금수강산 이라던 국토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허리가 잘려나가고 일부 몰지각한 놈(?)들에 의해 골프장으로 옷을 벗기운체 신음을 하고있다. 재석봉을 지나니 다시 암벽으로된 내리막길이 나타나는데 지난번에는 보지못 하였던것 같다. 아마 그때는 줄곧 달음질 하여 볼 겨를 없이 산행한 탓 인가보다. 험한 돌길이 계속 되는데 앞에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운동화에 렌턴도 없이 야간산행을 하고있다. 산을 쉽게 생각한는 사람이 많은 한 산에서의 조난및 산악사고는 결코 줄어들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최근 강과 저수지를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낚시면허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던데 등산면허제도도 검토하여야 사고도 줄이고 자연도 보호하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앞에선 청년들을 위하여 불을 밝혀 주어야하고, 나역시 조심 하면서 통천문에 다다른다. 통천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니 검은빛의 천지가 하늘로부터 서서히 푸른빛을 발하고있다.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하늘로 오르는 길목, 통천문에서 천황봉은 바로 고개를 들면 보이는 곳으로 깍아지른듯한 벼랑을 와이어 로프에 의지하여 오르게 된다. 이제는 하나 둘씩 불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제법 환하여 진것같다.
04시 45분 거대한 암석을 오르니 바로 정상이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온 등산객들과 이제 막 올라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정상! 사방을 둘러 보아도 거칠것 하나없는 장쾌한 전망을 가진 천왕봉은 하늘을 닿을듯 웅대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있다. 지리산 천왕봉! 국립공원 1호의 내륙 최고봉 천왕봉에 두번째 올라선 나였지만 이번에는 종주를 하였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찼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정상의 푯말을 보는 순간 서로의 환한 얼굴을쳐다보며 기쁨을 나누었다. "김兄! 그동안 수고했어요. 영호氏도." "진일氏도 수고했어요." "아직 일출이 시작되려면 한 시간 있어야 하는데 기념사진부터 찍읍시다." 종주 마지막 지점인 천왕봉에서 푯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로 여의치않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으며 사진을 대충 찍고 빈곳을 찾아 옮긴후 자유시간이라는 쵸콜릿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짙붉게 물든 동쪽하늘빛이 산맥의 윤곽을 선명하게 긋더니만 조금씩 밝은 빛으로 바뀌면서 길게 펼쳐진 구름띠에 태양이 고개를 내밀려고 하는지 몇몇의 등산객이 벌써부터 함성을 지른다. 5시 30분에 일출이 시작한다고 하였는데 산에서는 조금일찍 사작되는지 5시 20분 조금지나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일출을 보며 환호를 터트리고 있는데 설악산에서의 일출보다도 못한듯하다. 물론, 동해의 일출을 자주본 우리였기에 거기에는 비할바도 아니지만, 3代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부덕한탓에 완전한 일출은 보지못하지만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갖는다. 천왕봉은 언제 찾아도 웅장한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이미 전에도 중상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을 거쳐 백무동 까지 올랐던 적이 있었기에 천와봉의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 왔다. 오늘의 천왕봉은 어머니 가슴처럼 넉넉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짙은 운무에 돌풍이 몰아칠 때면 속인들의 분탕질에 분노하듯 준엄함을 보여준다. 천왕봉은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 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거대한 바위를 예로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치듯 흐르는 물보라 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천왕봉을 뒤로하고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길에 들어선다. 처음 계획은 대원사 방향으로 정했었지만 산행시간과 거리가 너무멀고, 무엇보다 시간에 촉박한 우리는 계획을 변경 할 수 밖에 없었기에 포항 출발전부터 중산리로 계획을 수정하였던 터라 여유를 갖고 하산한다. 법계사의 로터리 산장에 도착하여 라면을 끓여 어젯저녁 장터목에서 지은 밥과 햄을 반찬으로 아침을 먹는다. 곁에는 서울서 혼자왔다는 사람이 라면을 끊여 먹으면서 그간의 산행에 대하여 예기하는데 백무동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열차를 타고 왔는데 상행선표를 예매하지 않았다며 어차피 늦었다며 오히려 여유를 보인다. 새벽 일찍 올라오는 사람들과 우리처럼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로는 사람들로 가득한 법계사 계곡은 조식을 준비하는 사람, 세면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된다. 아마 이곳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의 중턱이고 식수가 풍부한 계곡의 샘터 때문인지 야우회온 피서객을 방불케한다. 칼바위를 지나 계곡의 물소리를 잔잔히 들르며 소로를 따라 내려서면 넓은 광장이 나타나는데 지난번 지리산에 왔을때는 보지 못한 신설 야영장이 최근에 지은듯 아직 깨끗한 단장을 하고있다. 넓은 주차장과 현대식의 건물이 많은 등산객들의 야영장으로 이용 될 것이며 야영장에서 50여 미터 내려서니 법계교가 나타나는데 흐르는 계곡물이 하도 맑아 잠시 내려가 발을 담그고 피로를 씻는다. 시원하다못해 차디찬 계곡물은 장터목 산희샘에서 발원 한다고 하니 더욱 깨끗해 보인다. 매표소를 지나 중산리에 도착하니 뱀사골에서 만났던 부산양반과 법계사에서 만난 서울양반이 함께 파전에 동동주로서 하산주를 하고있다. 우리도 시간의 여유도 있기에 파전과 동동주로서 하산주를 마시며그동안의 피로를 씻는다. 뚝배기에 담겨긴 동동주를 연신 두어잔을 하고나니 금방 취기가 오른다. 하산주를 마치고 20여분을 주차장까지 걸어오면서 부산양반,KOPEC(한전보수)에 다닌지 8개월이 되었다던 법계사에서 만난 서울양반과 그리고 하산주를 하는 동안 옆에서 식사하시던 또다른 서울양반과 함께 다정한 일행이 된듯 산행에 대한 서로의 느낌과 좋은 산행이 되었다는 인사를 하면서 지리산 종주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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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셨네요.
계속 아름다운 시간 후회없는 시간을 만들어 갑시다요.
지금와서 읽어보니 참 촌스럽네요.
그래도 오래전이라 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상이 웃깁니다.ㅎㅎㅎ~좋은 추억의 한페이지군요. 지금보니 우습죠?. 그때는 최고의 패션이었겠죠.
그렇죠!
그때는 칠부등산바지에 똑딱이 남방이였어요...ㅎ
예전에 동행을 제안받앗었는데 후회되네요^^
후회는 지나서 하는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 할 수 있다는 말...
양학산이나 한바퀴돌려 가려다 혹시나 읽을 꺼리가 있나해서 컴을 열었는데 당첨되었네요. 지리산 종주 아무나 하기 힘든것이기에 갔다온사람은 가슴 뿌듯이 추억을 더듬어 한번씩 회상해 보면 얼굴에 미소가득하겠습니다.글속따라 지리산 종주 편안히 잘 하고 갑니다..세월따라 담배값도 엄청 올라 버렸네요..언젠가 회원님의 글속에 담배와 헤어짐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쪼금 겁이나지만 지금이라도 종주 해보고 싶은 마음 꿀떡같사옵니다..
두번째는 2002년 월드컵 개막전이 있는 날이였습니다.
장터목에서 프랑스와 세네갈의 경기를 보았지요.
그때는 이런 산행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나름대로 크게 느꼈던 시절이었죠 ㅋㅋ
시간만 허락한다면 다시한번 종주산행 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년에는 지리산 둘레길 부터 돌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