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 [금] 소서[小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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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천연기념물 324호 '붉은색 큰 소쩍새' 발견
천연기념물은 학술 및 관상적(觀賞的) 가치가 높아 그 보호와 보존을 법률로써 지정한 동물(그 서식지)·식물(그 自生地)·지질·광물과 그 밖의 천연물을 말한다.
천연기념물 324호- 올빼미,부엉이류(올빼미,수리.솔.칡.쇠부엉이,소쩍새,큰소쩍새)-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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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7.7선언 발표 1988년 오늘 노태우 대통령이 7·7선언, 즉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북한과 중국, 소련 등 공산권에 대한 개방정책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이다. 노 대통령은 이 선언에서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남북간 교역을 위한 문호 개방, 북한과 한국 우방과의 관계 개선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7·7선언은 제6공화국의 통일·외교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남북회담과 남북 경제교류의 촉매제가 됐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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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전두환대통령 아세안5개국 방문 중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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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경주 황남동 98호고분(황남대총) 발굴 시작
황남동 제98호 고분(황남대총)은 경주시내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瓢形墳)이다. 거의 원형이 유지된 무덤의 규모는 동서 80m, 남북 120m, 높이 22.2m(南墳) ·23m(北墳)로 1973년도부터 1975년도까지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의 발굴조사에 의해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분은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T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으뜸덧널은 당시의 지표(地表)를 45cm 깊이로 파고 그 위에 맷돌과 자갈을 깔아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덧널[木槨]은 내외 이중으로 설치되었는데, 내외덧널 사이는 잔자갈로 채워져 있었다. 다시 안쪽덧널 안에는 널과 껴묻거리[副葬品] 칸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널 안의 피장자(被葬者)는 금동핀 ·목걸이 ·허리띠 ·고리자루칼[環頭大刀]을 착용하고 있었고, 껴묻거리 칸에는 은관 ·금제관장식 등의 무기류가 들어 있었다. 피장자는 머리를 동쪽으로 둔 유골(遺骨) 일부가 남아 있어 60살 전후의 남자로 밝혀졌는데, 그 외에 20대의 여자 유골 일부가 안쪽덧널 안에서 더 수습되어 한 무덤덧널 안에 순장(殉葬)된 여자가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돌벽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딸린덧널에서는 둥근밑항아리와 굽다리접시를 비롯한 토기류, 덩이쇠[鐵鋌]를 비롯한 철기, 안장 등의 말갖춤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북분은 남분의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연이어 축조되었는데 남분과는 달리 딸린덧널이 없는 외널무덤[單槨墳]이다. 남분과 마찬가지로 덧널 안에는 널이 안치되어 있고 널 위 동쪽에 따로 껴묻거리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널과 껴묻거리 칸에는 금관 ·목걸이 ·허리띠 등의 장신구, 유리와 토제 등의 용기, 고리칼 등의 무기가 들어 있었다. 또한 덧널 위에서도 귀걸이 ·옥제품 ·말갖춤 ·토기 등 신라고분에서는 가장 많은 금제(金製)장신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북분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많은 반면 무기류가 적었으며 또한 ‘夫人帶(부인대)’라는 명문이 있는 허리띠끝꾸미개가 출토되어 부부묘(夫婦墓)인 북분과 남분 중 북분이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황남대총은 신라고분을 여러널무덤[合葬墓]과 홑무덤[單葬墓]으로 구분할 경우 어울무덤에 속하며, 형태상 표형분에 속하는 무덤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의 형식상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기원 4~5세기내 돌무지덧널무덤의 등장과 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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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경부고속도로 개통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오늘 완공됐다. 착공 2년 5개월 만이다. 총연장 428km, 왕복 4차선으로, 1968년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2번째로 개통된 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는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그리고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어 줬다. 이 도로를 건설하는데 연인원 900만 명이 동원됐는데 70여 명이 공사 도중에 사망했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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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UN안보리, UN군 최고사령부 설치안 가결
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유엔 회원국들이 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회원국이 제공하려는 원조형식에 관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한 6월 29일의 유엔 사무총장 서한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응은 신속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각종 원조제공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대한민국 방위작전을 통일화하기 위하여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에 7:0, 기권 3, 결석 1로써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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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제1차 중동전 발발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퇴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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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영국 추리소설 작가 코넌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 세상 떠남
영국의 추리 소설가 코넌 도일이 1930년 7월 7일 사망했다.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그곳의 에든버러대학을 나온 도일은 개업의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도일이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 셜록 홈즈는 도일보다 더 유명해 사립 탐정의 대명사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1887년 발표된 '주홍색의 연구'에 처음 등장한 홈즈는 단편소설이 '스트래드'지에 연재되자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몇 번이나 중단되었으나 독자들의 성화로 연재가 계속되어 장편소설 4편, 단편 소설 57편으로까지 이어졌다. 의사를 겸하면서 소설을 쓴 도일은 보어전쟁때 군의관으로 출전, 공을 세워 Sir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추리소설을 보급하는데 한 몫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소설 '마이카 클라크' 과학소설 '잃어버린 세계' 등도 썼다. /조선
- 'Stranger in a Strange Land'
1907 - 미국의 공상과학(SF)소설 작가 하인라인(Robert Heinlein, 1907~1988) 태어남
버틀러 출생. 1930년대 말에 데뷔하였는데, 독특한 미래관(未來觀)과 스토리를 꾸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인기작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까운 미래사회를 다룬 작품 《지구의 푸른 언덕》으로 제1급 과학소설 작가의 자리에 올랐으며, SF 그 자체의 질을 높여 새로운 가설(假說)에 근거한 사색적인 소설의 장르로 만드는 데에 공헌하였다. 그는 작품마다 문제를 제기하는 적극적인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휴고상(賞)을 받은 《더블스타》 《우주의 전사(戰士)》 외에, 《여름의 문》 《다른 별의 손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등 많은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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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이탈리아의 배우, 영화감독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 태어남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우를 지망, 병역을 마친 후 로마의 극단에 들어가 배우가 되어, 1920년대에는 인기 무대배우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영화에도 진출, 《신사는 거짓말쟁이》《나폴리의 산들바람》 등에 출연하여 이탈리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영화감독으로는 1939년 공동으로 제1회 작품을 연출하였고 《아이들은 보고 있다》(1943) 《구두닦이》(1946) 《자전거 도둑》(1948) 《밀라노의 기적》(1951) 《움베르토 D》(1952) 등 네오레알리스모를 대표하는 세계 영화사의 중요작을 만들었다. 로케이션을 중시하였고, 불행한 평시민 ·아이들을 통하여 삶의 어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따뜻하면서도 인간적인 배려가 작품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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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스위스의 아동문학가 슈피리(Johanna Spyri, 1827~1901) 세상 떠남
취리히 근교 힐첼 출생. 의사의 딸로, 14세 때 취리히로 가서 프랑스어와 피아노를 배웠다. 1852년 변호사 B.슈피리와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시청에 근무하였고, 그녀는 고아원, 불량소년 수용소, 여학교 교육, 상담역으로 있었다. 1870년경에 《헤르고란트의 소녀 이야기》를 썼다. 1884년 남편과 외아들을 잃은 후로는 독서와 여행과 저작에 전념하였다. 저서는 모두 ‘아이들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로, 건강한 생활로 가득차 있고 종교적인 깊이도 있다. 그녀의 작품 중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Heidi》(1880∼1881)가 가장 유명하며, 세계 아동문학의 고전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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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 샤갈(Marc Chagall, 1887~1985) 태어남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드파리 최대의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미술학교에 다닌 후, 1910년 파리로 나와 A.모딜리아니와 F.레제 등을 배출한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911년 앙데팡당전(展)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 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11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성공한 후 그해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모국에 머물면서 미술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고향에 미술학교를 열고, 1919년 모스크바의 국립유대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1922년 베를린, 19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畵商)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19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9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판화·벽화(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 파리오페라극장의 천장화 등)·스테인드 글라스·조각·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작품으로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과, 자서전에 《나의 인생 Ma Vie》(196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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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포이히트방거(Lion Feuchtwanger, 1884~1958) 태어남
뮌헨 출생. 역사소설에 뛰어났으며 반전적·혁명적인 작풍으로 유명하다. 1933년 망명하여 1936∼1937년 모스크바에 체재, 1941년 미국에 이주하였다. 작품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나치스를 풍자·탄핵하는 시대비판적인 성격이 강하다. 대표작으로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소설 《유대인 쥐스 Jud S
r Amerika》(2권:1947∼1948), 《고야 Goya》(1951) 등이 있고, 희곡으로는 《Warren Hasting》(19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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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태어남
보헤미아의 칼리슈트 출생. 부모는 유대인 상인이었으며, 어린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10세 때 피아노 리사이틀을 처음으로 열었고, 15세 때 빈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 후 졸업할 때까지 브루크너 ·월프 등과 교제하여, 그들의 영향도 받았다. 1877년부터 3년간 빈대학 철학과에서 역사와 음악사를 공부하고, 그 사이에 초기 작품인 《피아노 5중주》 《피아노와 바이올린소나타》, 오페라 《슈바벤의 에른스트공》 등을 발표하였으나, 그 후 파기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1880년부터 지휘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83년에는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파르시팔 Parsifal》에 접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88년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1891∼1897년 함부르크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를 거치는 동안,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189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1908년까지 재직하였고, 그 후 뉴욕에서 살았으나 1911년 심장병으로 지휘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빈으로 옮겨 거기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미완성인 제10번을 포함하여 모두 10개의 교향곡을 썼으나 본질적으로는 가곡 작곡가의 면이 강했고, 교향곡은 모두 가곡 작곡과 지휘활동의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9곡 이외에도, 중국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로 된 관현악곡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1908), 자작의 가사로 된 두 가곡 《한탄의 노래 Kindertoten lieder》(1880) 《젊은 나그네의 노래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1884) 등이 있다. 피아노반주를 좋아하지 않고 관현악반주로 된 가곡을 써서, 후세에 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세계는 때로는 절망감이나 염세관(厭世觀)을 강하게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괴기한 해학이나 초연한 탐미(耽美)를 보이기도 하였으며, 만년에는 종교적이라고도 할 만한 고독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 어느 것이나 대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으며, 맑은 색채를 풍긴다. 그는 근대음악 발전의 과도기에 속한 인물로 낭만파적인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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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44 -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병리학자 골지(Camillo Golgi, 1843/44~1926) 태어남
1843년 7월 7일 코르테노에서 출생하였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5년 파비아대학교를 졸업한 후, 파비아의 산 마테오병원에 근무하면서 주로 신경계통 질환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1873년 신경조직을 질산은으로 염색하는 방법에 성공하였으며, 이 방법을 써서 중추신경계통을 연구하여 이른바 골지세포와 골지체를 발견하였다. 그 후 파비아대학교에 돌아가 조직학 조교수가 되었으며, 1879년에는 시에나대학교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1881년 파비아대학교 병리학 교수로 옮겨가서 주로 말라리아에 관한 연구를 하여 삼일열(三日熱)과 사일열(四日熱)을 일으키는 원충의 발육환(發育環)을 밝혔다. 1906년 신경계(神經系)의 미세구조를 연구한 공로로 에스파냐인 S.라몬이카할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 'Self-portrait'
1833 - 벨기에의 화가, 그래픽 미술가 롭스(Félicien Rops, 1833~1898) 태어남
브뤼셀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유흥으로 유산을 탕진하여 신문에 만화나 삽화를 그려 생계를 이어갔다. 1865년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석판화)으로 벨기에 판화계의 대가로 인정받았으나, 그의 재능이 확실히 발휘된 것은 파리로 옮긴 1874년 이후의 일이다. 에칭 약 600종, 석판화 180종, 그 밖에 유화 ·수채화 ·펜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특징은 보들레르의 사상적 감화에 의한 일종의 악마주의이며 현대 도시문명의 이면을 해부한 신랄한 비판이다. 작품 소재는 대부분 파리의 카바레나 목로주점에서 택하였으며, 《술취한 멋쟁이》《돈 후안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무도회에서의 죽음》《성 앙투안의 유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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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 - 이탈리아의 정치가 셀라(Quintino Sella, 1827~1884) 태어남
통일 후 새 정부의 권력기반을 닦는 데 기여했다. 공학을 공부한 뒤 토리노에서 몇 년 간 교직에 있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1860년 피에몬테 자치지역의회에 진출했고 1862년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 2년 후 재무장관에 재임명되었으나 예산적자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제분업에 대한 과세는 처음에 반발을 샀지만 결국은 채택됨으로써 사태를 수습했다. 1870년 프랑스 수비대가 로마에서 철수하자 로마를 수복하여 이탈리아의 수도로 정하도록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설득했다.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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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 - 프랑스의 자동방직기 발명가 자카르(Joseph-Marie Jacquard, 1752~1834) 태어남
리옹 출생. 제본(製本)·활자주조소의 도제(徒弟)로 일하다가, 정교한 무늬를 짜내는 문직기(紋織機) 개량에 뜻을 두게 되었다. 1801년 발표한 '자카르직기'는 한 조(組)의 카드에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사용하여, 아주 복잡한 무늬를 자동적으로 쉽게 직조할 수 있어 견직물 공업에 혁신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1806년 그의 발명은 칙령(勅令)으로 국가에서 매수하였으며, 그 대가로 연금 지급 이외에도 국가로부터 많은 우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가 발명한 기계를 대구지방을 위시하여 여러 직물공장에서 현재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자료출처/cafe.daum.net/philthema 수정/왕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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