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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스테파노신부님
어느 새 올 한 해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성탄을 지낸 뒤 며칠 동안 지나간 시간들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 해를 떠나보내는 마음이 서운함으로 가득한데 모두가 집으로 떠나가고 고요만이 흐르는 집 분위기는 쓸쓸함까지 안겨주고 있다.
한국에 머물면서 사람 만나는 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던 지난 여름이 가장 오래토록 마음 속에 머물렀다.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아침, 저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는데도 결국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서운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로마로 돌아올 때 결국 내 ‘사람욕심’이 너무 과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나누는 관계에서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나도, 그리고 너도 함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해야만 하는 내 몫을 성실히 수행해야만 한다. 내 게으름 탓으로 내 몫을 남에게 떠넘기는 민폐를 끼치거나, 혹은 내 분수를 넘어 남의 몫까지 넘나드는 설레발을 치다보면 나와 상대의 행복은 깨질 수밖에 없다. 또 그렇게 되면 필시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선교사로서 어차피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지만 내 ‘사람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 몫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내 분수를 넘는 줄도 모르고 이리 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꼴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이게 뭐냐?’라는 핀잔을 피해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른 것 같다. 내 ‘사람욕심’이 아니라 그 분의 ‘부르심’을 따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내 분수에 맞게 만나는 것이 또한 앞으로의 내 사제 삶에 있어 큰 희생이 되겠다.
간디의 무덤 앞에는 그가 생전에 말했다는 ‘나라를 망치는 일곱 가지 사회악’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희생 없는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종교를 망치는 것 중 하나는 ‘희생 없는 성직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위한 희생이 종교의 ‘존재의 이유’를 떠받히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때 신도들에게 있어서 모든 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성직자들의 희생적 삶은 바로 성직자 자신들의 존재의 이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결을 지키며 가난하게 살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뜻을 품고 출가한 성직자의 생활이 혼인을 통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보다 더 화려하고 요란하다면 그는 정녕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깊이 물어야 할 것이다.
너무나 복잡하고 요란했던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나간 날들, 내가 바친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해 바친 희생이 과연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모든 인연들에게 부끄럽고 죄스럽다.
새해에는 단순한 삶과 기쁜 희생 그리고 마음의 평화!
“밭이랑에 물 대시고 흙덩이를 주무르시고 비를 쏟아 땅을 흠뻑 적신 다음 움트는 새싹에 복을 내리십니다. 이렇듯이 복을 내려 한 해를 장식하시니 당신 수레 지나는 데마다 기름이 철철 흐릅니다.”(시편65,10-1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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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가 다 아는 웃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한 번은 아버지가 목욕탕에 가서 “아이고 시원하다. 너도 들어와 봐라.”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들어갔다가 시원하기는커녕 매우 뜨거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네.”라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엄청 맞았던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호빵을 사서 아이에게 하나 주고 자신은 두 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배부르지?”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 먹어서 배부르면 두 개 먹은 놈은 배 터지겠네.”
그래서 또 맞았습니다. 맞으면서 아들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래 때려라, 니 새끼 죽지, 내 새끼 죽냐?”
한 번은 아빠와 엄마가 싸웠습니다. 엄마가 항상 아빠에게 지지 않으려고 대들었기 때문에 아빠도 격해져서 아내를 때리려 하였고 아내는 욕을 해가며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빠는 문에 서 있던 아들에게, “그년 어디로 갔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그년 저리로 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이런 우스운 이야기는 상황만 다를 뿐 우리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부모님도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성당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큰 아이가 학교에 안 간다는 것입니다. 아예 휴학이나 자퇴를 하라고 해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아이가 사귀는 자퇴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자퇴만은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여자 친구 말은 따르면서도 학교는 가기 싫어서 이도저도 아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에겐 부모님이란 안중에 없습니다. 오직 자퇴한 자신의 친구들과 그 중에서도 여자 친구가 자신의 전부입니다. 자신보다 어른인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친구들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보다도 부모님께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이들은 어쨌거나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은 존중하고 순종하는 집안이었는데도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면 정말 탐구대상일 것입니다.
남편이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자녀들이 적어도 자신의 친구들이 아닌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쯤은 배웠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 중 ‘동물적 본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미가 새끼를 가지면 수컷은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필요성이 없게 됩니다.
암컷 사마귀는 교미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수컷을 남겨두어야 할 때는 자신은 알을 품어야 하고 수컷이 음식을 가져다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본능은 종족보존이 생존의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여자는 자녀를 출산하면 자녀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반면 남편에 대한 애정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 여성은 아직 동물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같이 종족유지를 가장 큰 목적으로 사는 동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이 그렇게 동물적으로 산다면 자녀 또한 그런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새로운 씨를 받아줄 여자, 혹은 새로운 씨를 줄 남자 친구에게 모든 애정이 쏠릴 것은 당연하고, 안 된 일이지만 조금 있으면 늙어서 사라질 부모에 대한 애정이 사라질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동물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동물적인 대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이 아니고, 가정은 사랑을 바탕으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만약 가정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 가정을 만들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가정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이고,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가장 완전한 사랑의 학교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모델은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엔 ‘질서’가 있습니다. 아드님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님을 주시듯이, 남편도 아내를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인 ‘피와 물’을 교회에 성사의 모습으로 주십니다.
문제는 이 질서를 깨뜨릴 때 시작됩니다. 하와는 아담을 보지 않고 유혹자를 보고 그를 더 사랑합니다. 그의 말을 따르고 남편의 뜻과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도 거스릅니다.
물론 아담도 자신의 머리가 하느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더 사랑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카인입니다. 카인은 세상과 돈을 더 사랑하여 부모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동생을 죽입니다.
그러나 성 가정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부모를 정해준 것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이스라엘을 떠나자면 떠나고 다시 돌아오자면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 12살 때,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도,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하시며, 항상 남편은 자신의 위에 놓습니다.
요셉은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정결할 수 있었든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아담과 같이 하와 먼저 바라보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정배인 아내 마리아를 하느님의 뜻에 따른 가장으로서 보호하고 이끕니다.
이것이 성 가정입니다. 아버지에겐 믿음이 있고, 어머니에겐 사랑이 있으며, 자녀에겐 순종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성 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또 죽어서도 모두 하늘나라에서 다시 모일 수 있기를 빕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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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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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용 신부님
2011년이라는 시간이 이젠 기억의 항구에 닻을 내리는 날입니다. 한 해의 항해를 돌이켜보니 섭섭함과 아쉬움의 그림자가 지난 삼백예순 날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집니다. 등뒤의 그림자를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은 사람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등뒤를 바라보는 것은, 그것이 후회든 반성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사람은 자신의 근원에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등뒤를 돌아보는 눈길 속엔 틀림없이 근원을 향한 향수나 그리움이 스며 있습니다. 근원은 삶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입니다. 생명은 따뜻합니다. 모든 것을 품기 때문입니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은 따뜻함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 근원의 따뜻함을 요한 복음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은 우리의 모태입니다. 우주만물의 모태입니다. 등뒤를 돌아보는 것은 결국 모태의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원천적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한 해의 빛과 그림자를 되돌아보는 것이 그저 성공과 실패 여부를 셈하는 그런 돌아봄이 아니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셈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을 다하는 날, 하느님께서는 세상살이의 성패를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근원으로부터 온 우리 삶과 마음의 온기를 보실 것입니다.
새로운 한 해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동녘에서 떠오르는 빛을 기다리듯 사람이 되셔서 세상살이의 추위 한가운데 따뜻한 한 점이 되어 오시는 말씀과 그의 빛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열리기를 희망해 봅니다.
광주대교구 김정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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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조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날입니다.누구도 어제로 돌아 갈수 없는 2011년 12월 마지막 날입니다. 아쉬움도 돌이켜 돌아 갈수 없고 성취감도 그때 그 장면과 똑같이 그때로 돌아 갈수 없는 현재이며 주어진 전부입니다.
이 주어진 전부는 일 년 중 하루를 뺀 모든 날이 뒷받침 되어 준 오늘입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한 처음입니다. 이 처음은 우리 인간이 손수 만들어서 발아래 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 위에 역사가 출발을 할 수 있는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이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늘 상 시작이 있기에 마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요한 1,1)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주어진 선물은 말씀이신 하느님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있게 하셨고 인간은 주어짐 위에 우리 가운데 (요한1,14)라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어진 선물인 삶을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견해만이 중요하다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길은 막다름에 와서야 한길로 연결됨을 압니다. 그 막다른 길은 모두가 올 한해의 날 바로 오늘 지내는 이날입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있는 날입니다. 허면,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 지난날 “은총에 은총을 받았던”(요한1,16)날 위에 서 있는 오늘입니다.
지난 한해 참으로 내가 은총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둠속에서 숯검정만 묻히며 살아 왔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어두움이 짖은 터널 속이라도 빛을 보며 살아 왔는지를 자기를 아우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내 아내가 나에게 행복이고 내 남편이 나에게 은총이며 자녀가 어떻게 부모에게 생명인지를 알겠습니까? 나를 안다는 것은 바로 오늘을 주신 말씀을 알아 뵙는 증언의 눈인데 말입니다.
이 증언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음”(요한1,14)을 고백함으로써 살아온 역사의 강을 거슬러 원천수와 더 이상 흘러 갈 때 없는 현재인 바다와의 연결점에서 하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알게 되어 생을 한해를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 생명이신 빛이 아내를 비추었고 남편의 길을 밝혀 주었으며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고 생업을 이어가게 했으며 가정을 은총 속에서 인도해 주었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이웃의 배고픔 속에 양식으로 태어나게끔 나를 그들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한해의 돌아봄에 나만 있었다면 그분은 홀대를 받으시고 진정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세월이 된 것입니다.
허나 나만이 아니라 춥고 배고픔이라는 이웃의 찬 손이 데운 빛으로 나의 심장에 손짓을 한다면 오늘 그 못다 채운 하루를 채우십시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온전한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무리는 동시에 오늘의 시작입니다.
부산교구 박갑조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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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신부님
처음부터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함께
‘마지막 날 누구와 함께 있으면 좋을까’,
‘새 날을 누구와 맞이하면 좋을까.’
한번쯤은 생각해 봄직한 물음들입니다.
유럽에서는 마지막 날을 보내며 새 날을 맞이하는 순간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온갖 축포를 터뜨리고 축하주를 마십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는 ‘일 년 모은 돈을 이 날 축포에 소비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요란스럽습니다.
이 그럴듯한 날에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연인이거나 친구이기도 하고, 부모자식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함께하고 싶어도 함께할 이가 없는’ 이들도 그야말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눈 내리는 성탄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니 ‘하얗게 지새우는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섬유가루들이 먼지가 되어 날아다니니 ‘이 공장 안은 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이주 노동자,
가족들이 더없이 그리운 국제 결혼자,
올해 일한 것에 비해 아무리 셈을 해봐도 밑진 장사가 되고 말아서 내년에 또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가 막막해 쓴 담배를 꺼내 무는 농민,
이외에도 장애로 내 방쳐진 사람들,
이 멋진 순간에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함께할 이’를 찾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한 해의 저무는 순간과 시작되는 순간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합시다.
전주교구 박동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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