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특집]
부처님이
농부한명을 위해
천리를 가신 까닭은?
- ‘풍요로운 세상’을 위한 제언
/월호스님
봉축위원회가 정한
불기2560년 부처님오신날(5월14일)
봉축표어는
‘자비로운 마음 풍요로운 세상’.
불교신문도 특집호 대주제를
‘자비로운 마음 풍요로운 세상
’으로 정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널리 알리고
함께 실천하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월호스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
이라며 경전에 나타난
네 가지 사례를 통해
어떻게 마음 써야
자신과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내 생각과 신념을
강요하기에 앞서
상대방이 밥은 먹었는지
옷은 제대로 갖추어 입었는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작은 것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상대를 감동시키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목마른 이에게
물 한잔이라도 건네는
자비롭게 베푸는 마음을
연습해야 한다
▶천리 길을 걸어가신 부처님
부처님께서
제따와나에 계실 때,
새벽에 간다꾸띠에서
세상을 살피셨다.
그러자 한 농부가
수다원과를 얻을 인연이
성숙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30요자나를 걸어서
마침내 농부가 사는
마을 근처에 이르렀다.
1요자나는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써
대략 40리가량이 된다.
그러므로 농부 한명에게
수다원과를 얻게 하고자
천리 길을 마다 않고 걸어가신 것이다.
대자대비에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진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천리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농부는
그날 새벽 집에서 키우는 소가
도망가는 바람에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소를 찾아 헤매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집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오신 것을 알고 있던
농부는 너무 늦어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할까 염려하여
밥도 먹지 않고
부처님이 계신 처소로 오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 후에도
법문을 하지 않고
이 농부가 오기를 기다리셨으며,
농부가 도착하자
우선 음식을 주도록 하셨다.
마침내 농부가
음식을 다 먹은 후에서야
법문을 설하셨고,
이 법문 끝에 농부는
수다원과를 성취하였다.
평상시에는 공양 후에
곧바로 법을 설하시던
부처님께서 이날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야 법을 설하시니,
이를 의아히 여긴 제자들이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
“여래가 30요자나를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순전히 이 신도가
수다원과를 성취할 인연이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 아침에
숲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래서 여래는
‘배고픔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법문을 설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
이라고 생각해서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
배고픔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그리고는 게송을 설하셨다.
“배고픔이 으뜸가는 질병이요,
존재함이 으뜸가는 고통이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으뜸가는 행복인 니르바나를 이룬다.”
부처님의 농부에 대한 배려가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입만 열면 사랑을 외쳐대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생각과 신념을 강요하기에 앞서
상대방이 밥은 먹었는지,
옷은 제대로 갖추어 입었는지,
어떤 생각과 믿음을 갖고 있는지,
작은 것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상대를 감동시키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가난을 판 노파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논의제일(論議第一)의 제자인
마하 깟짜야나(마하가전연) 존자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우물가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노파를 만났다.
존자는 문득
집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으며,
지극한 연민심이 일어나
노파에게 연유를 물었다.
바싹 마른 노파는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주인이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학대하는 것이
못내 서러워 울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존자는 노파에게
‘가난을 팔라’고 권유하였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노파는
존자에게 되물었다.
“네? 가난을 팔라고요?
가난을 사는 이도 있습니까?”
“네, 제가 가난을 사드리겠습니다.”
노파는 가난을 팔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당장에라도
넘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긋지긋한 가난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가난을 파는 방법을 물었다.
“가난을 파시려면
다름 아닌 보시를 하셔야합니다.”
“뭐라고요? 그럼 그렇지.
나는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나 했네.
아니, 이보시오.
지금 내가 먹을 것도 없어
신세한탄하며
우물가에서 울고 있는 형편인데
무얼 보시한단 말이오?”
“할머니, 지금 우물에서
물을 한 그릇 떠서
저에게 주실 수 있으시죠?”
“네? 그거야 뭐 가능하지.”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시지요.”
존자는 노파가 떠준
물 한 그릇을 맛있게 마시고
노파에게 말했다.
“신세 한탄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얼른 부처님을 생각하고,
물 한 그릇이라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시는 것이
가난을 파는 것입니다.”
이 노파는 그로부터
며칠 후 죽어서
무려 천명의 천녀를 거느리는
천신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많이 가질수록
베풀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먼저 마음이 있어야 하고,
상대방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물 한 잔,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기를 바라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면
빈부의 차이는
크게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이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거지로 태어난 대부호
물라시리는
한 지방의 대부호였지만
남에게 베풀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는 자식들도 모르게
보물단지를 감추어놓고
혼자 즐기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죽어
거지여인의 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라시리가
거지여인의 태에 들어간 후부터
그녀가 속한 거지집단은
구걸이 도통 되지 않았다.
얻어먹는 것도
그만한 복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거지 여인이
재수 옴 붙은 아이를 밴 후부터
얻어먹는 것도
힘들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 생에 전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거지집단은
인원을 반반씩 나누어
구걸을 가는 방법을 통해
결국 이 여인을 찾아내
조직에서 즉각 추방시켰다.
이 여인은 홀로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겨우 연명해 물라시리를 낳았고,
그 또한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왠지
낯익은 과거 생
자신의 집 앞에 도달한 물라시리는
마침 문간에서 놀던
자신의 손자와 마주쳤다.
그 손자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물라시리의 모습에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으며
이를 본 하인들이 달려와
물라시리를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시던
부처님께서는 이를 말리고
그 거지아이가
바로 물라시리의
후생이라고 밝혀주셨다.
이를 믿지 못하는 가족들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거지 아이에게
과거 생에 숨겨둔
보물단지를 찾아내도록 하였다.
이 아이는 아무도 모르던
보배가 가득 담긴 보물단지를
세 항아리나 손쉽게 찾아내었다.
과거 생에
자신이 숨겨놓은 단지인 만큼
현장에서 기억이 돌아와
쉽게 찾아낸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네 남자가
벌겋게 달구어진
무쇠 솥 안에서 내려갔다가
끓는 물 위로 떠올라 고개를 내밀어
무언가 소리를 치고
다시 내려가곤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꿈 풀이를 해주셨다.
그 네 남자는
과거 생에 큰 부자로서
아주 친한 친구들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삶의 방향을 논의하고자 모였다.
“우리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이 돈으로 무얼 하면 좋을까?”
“고급스런 술이나 마시고
고급 요리나 즐기는 게 어때?
인생은 즐기는 거야.”
“요리란 요리는 모두 먹어보자.
먹는 게 남는 거지.”
“가장 화끈하게 즐기는 방법이 있지.
세상에 널린 게 여자고
돈만 왕창 주면
거절할 여자가 거의 없지.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말고 즐기자고!”
결국 그들은
먹고 마시고 간통을 즐기며
세월을 보냈고,.
죽어서 아비지옥에 떨어져
오랜 세월 고초를 겪은 후
다시 화탕지옥에 떨어졌다.
그곳에서
끓는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각각 한 구절의 게송을 읊으려다
다시 화탕지옥으로
가라앉곤 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네 남자가
하고 싶은 말을 완성해주셨다.
“우리가 가진 재산을
시주하거나 베풀지 않고
악행을 일삼으며 세월을 보냈네.
펄펄 끓는 화탕지옥에서
6만년을 보냈는데
언제 끝이 오려나?
여기서 벗어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보시를 많이 하고
계를 지키고 선행을 하리라.”
이상 네 가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자비롭게 베푸는 마음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 바 가진 만큼 베풀 때,
베풀수록 갖게 된다.
특히 많이 가진 것은
복된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찬스다.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꾹꾹 숨겨놓거나 유흥에 탕진하면서
지옥고를 겪을 것인가?
복된 일에 잘 써서
자신도 좋고
세상도 풍요롭게 할 것인가?
스스로 선택한다.
자신의 작품이다.
[불교신문3202호/2016년5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