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의 삶과 신앙
성경본문 : 에스더 4: 4-17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고하니 왕후가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를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5. 에스더가 왕의 명으로 자기에게 근시하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연고인가 알아 보라 하매
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7.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9.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고하매
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11.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하라
12.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대로 다 행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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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으면 누구나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합니다. 전통적인 사상 속에는 아이의 이름을 잘 지어야 그 아이가 큰 사람이 되고, 잘못 지으면 그 이름 때문에 아이의 일생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서 작명가를 찾아가서 많은 돈을 주며 아이의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은 단순히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고유한 풍습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 조상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름을 따서 자녀들에게 붙여주곤 했습니다. 성경에서 같은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신앙인들 가운데 아이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딴 이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 아들 '요한이'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처럼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여자들 이름 가운데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에스더'의 이름을 딴 이름들도 많이 있습니다. '에스더'라고 부르기도 하고, '애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 '애덕'이라는 이름은 '에스더'라는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어 부른 이름입니다.
그만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에스더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여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은 에스더여사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에스더의 삶과 신앙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모든 에스더 여사도회 회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에스더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서 우리 교회의 귀한 일꾼들로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에스더에게서 본받아야 할 모습은 그의 훌륭한 인품입니다.
에스더의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① 에스더 2:8-9절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한다는 명이 떨어지자 수산 성에 살고 있던 에스더가 왕비 후보로 왕궁에 뽑혀 갑니다.
그리고 왕비로 뽑히기 전에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라는 관리에게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런데 2:9절에 의하면 "헤개가 이 처녀를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헤개가 에스더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이 아니라, '에스더가 헤개에게 기쁨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운 덕성과 인품을 본 헤개가, 에스더 때문에 마음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저런 처자를 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참으로 참한 처녀였다'는 말입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품과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니까, '이 처자야말로 왕비감이구나' 싶어 '제대로 된 왕비를 얻게 된 것 같아 기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품은 반드시 행동과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덕스러운 행동과 아름다운 삶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② 에스더의 훌륭한 인품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구절이 2:15절입니다.
전국에서 뽑혀온 수많은 처녀들이 아하수에로 왕 앞에 가서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6개월 동안 왕비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왕궁 예절을 배운 후에, 하루에 한 명씩 왕에게 가서 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3절 말씀에 보면, 왕에게 시험을 보러 가는 처녀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요구한 모든 것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쁘게 화장을 해야하기 때문에 최고급 화장품을 달라고 하면 최고급 화장품을 주고, 제일 예쁜 옷을 달라고 하면 제일 예쁜 옷을 줍니다. 그러면 그 처녀는 자기를 가장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왕 앞에 가서 시험을 치룹니다.
그런데 2:15절에 보면, 에스더 차례가 되어서 에스더가 왕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에스더는 자기를 치장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헤개가 정한 가장 기본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에스더는 겉모양을 일부터 치장하거나 사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에스더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굄(사랑)을 얻게 된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여인천하'라는 역사드라마를 보십니까? 거기에 보면 중전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음모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중전의 자리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면서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음모에 휩싸이게 되기도 하고, 중전을 끌어내려야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야망 때문에, 중전의 자리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어떤 짓거리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마만큼 중전의 자리, 왕비의 자리는 왕궁에 있는 여인들에게는 탐나는 자리요, 욕심의 자리입니다.
그건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에스더 당시에는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왕에게 뽑히기만 하면 중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여인천하'에 나오는 것만큼 그 자리를 놓고 치열한 음모가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중전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처녀들에게 오직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 중전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전혀 자신을 치장하지 않습니다. 더 잘 보이기 위해서 지나친 화장도 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 참된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아름다운 여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주 '찬양가사 만들어 부르기'를 할 때 한 사도회에서 "제일 예쁜 사도회"라고 하니까 일부에서는 부러운 듯이 '야유'의 소리를 하셨습니다만, 제가 볼 때에는 여러분 모두가 예쁘고 아름다운 여인들입니다. 겉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열심히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우리 신앙인의 아름다움은 겉모양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값비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다 하더라도, 그건 진정한 아름다움일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진정한 아름다움, 하나님 앞에서 값진 아름다움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겉모양의 아름다움보다도 속사람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에스더의 훌륭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게 2:20절의 말씀입니다. 드디어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이 되었습니다. 이제 에스더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중전의 자리는 보통의 자리가 아닙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어마어마한 국토를 가진 세계 최대 강국이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북쪽까지, 그리고 위쪽으로는 터키까지, 굉장히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러기에 요즘으로 말하면 에스더는 미국의 대통령 부인쯤 되는 사람입니다.
원래 에스더는 유대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아비하일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비하일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 수하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고향도 아닙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포로민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개인적으로 아버지도 없이 사촌 오빠 밑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정황으로 본다면, 에스더가 바르게 자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아주 반듯하게 자랐습니다.
반듯하게 잘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바로 2:20절입니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에스더는 자신을 키워준 모르드개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면, 이제 어깨를 우쭐거리며 거들먹거리기 쉽습니다. 더구나 불행한 환경 속에서 자란 에스더로서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전이 된 에스더는 자신을 딸처럼 키워준 오빠 모르드개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2:20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 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중전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오빠인 모르드개의 말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 자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큰 부자가 되거나 큰 권력을 가지면, 그걸 누리기 위해서 옛날의 불행하게 살 때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입었던 은혜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빠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빠의 말을 순종합니다.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으로 미천한 신분의 자리에 있던 사촌 오빠를 나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서 굵은 베를 입고 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에 그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는 - 4절의 말씀에서 보여준 것처럼 -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전달해 줍니다.
에스더는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정말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줄 만큼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사치하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며느리 삼고 싶을 그런 여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인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겉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우리의 삶과 인격에서 풍겨나는 향기로움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과 인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인격을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빛이 우리의 삶 속에서 착한 행실로 드러남으로써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에스더 여사도회 회원 여러분과 우리 모든 교우님들도 에스더처럼 아름다운 인품과 삶으로 세상에 감동을 주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에스더에게서 본받아야 할 모습은 그의 신앙입니다.
대궐 문 앞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시위를 하고 있던 모르드개가 내시 하닥을 통해서 에스더에게 민족이 커다란 위기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만이라는 왕 다음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몰수하려는 음모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족적인 위기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에스더' 밖에 없음도 말해줍니다.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우리 민족을 구해 달라'고 왕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당시 왕궁 법도에 따르면, 아무리 중전이라 하더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나아갔다가는 '왕을 암살하러 온 사람'으로 간주하여 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왕이 금홀을 내밀어 그를 받아들인다는 사인을 줄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에스더가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에게 가서 자기 민족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전 왕후였던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 때문에 폐위되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아주 엄격한 기운이 궁궐 내에 흐르고 잇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걸 모르드개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을 구해내야 했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중전의 자리에 올라 있는 '에스더'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재촉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13-14절)
그 말을 들은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만이 민족을 구원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자신의 힘으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면 민족을 구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면 자기 민족도 멸망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에게 온 민족으로 하여금 금식하며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밤낮 3일을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백성들만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도 시녀로 더불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왕의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신앙의 결단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3일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갈텐데, 왕이 나를 긍휼히 여겨서 금홀을 내밀어 감사한 일이고, 만일 왕께서 금홀을 내밀지 않는다는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더라도 가겠습니다." 그게 지금 에스더의 마음이고 신앙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게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구해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가장 먼저 기도했습니다. 자신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 전부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게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해를 가져다준다고 생각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막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경제위기 속에서 나라를 살리겠다고 '구조조정을 한다, 기업들 간에 통폐합을 한다' 그럴 때에 파업을 해서라도 그런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좀더 크게 생각한다면, 개인이 살기 위해서 나라 전체가 더욱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외면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좀더 큰 것을 생각하고, 큰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큰 것(하나님의 나라와 의)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폐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민족이야 망하든 말든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모른 체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모른 체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 한 목숨 버려 우리 민족이 구해질 수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마음으로 왕 앞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바로 이런 신앙인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보다 크고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나보다도 사도회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도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도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신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내 몸이 더 고달플 것입니다. 삶이 더욱 힘들고 더 부지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에 요청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에스더 여사도회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에스더와 같이 삶 속에서 인격과 인품의 아름다운 향기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나보다도 사도회를 먼저 생각하고,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도, 에스더처럼, 삶으로 향기를 드러내며, 나보다도 사도회와 교회와 이웃과 민족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