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서론
(스 1-1)
역대상하에 뒤이어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나온다. 이들은 포로기 이후의 이야기다. 역대하에서 유대인들의 포로생활이 고레스칙령으로 끝나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역대하 마지막부분과 에스라 첫부분은 비슷하다. 바사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는 이야기로 끝나고 또 시작되었다. 전에 역대상을 강해할 때에 역대상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역사가 재편된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역대하 끝부분과 에스라 첫부분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에스라서 전체가 성전의 재건 및 유대인들의 성결과 관련되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역대서와 에스라서는 같은 저자에 의해 쓰인 것으로 본다. 많은 학자들은 포로이후, 아니 모세이후 최고의 율법사로 불리는 에스라가 이들을 저술한 것으로 본다.
에스라는 과연 모세 이후의 최고의 율법사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다면 에스라는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율법 중심의 삶을 살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모세 이후 열왕조까지는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중심의 신앙생활이었으나 포로기 이후는 회당중심으로 율법중심의 신앙생활로 변화되었다. 포로기 때에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포로기에는 회당중심으로 생활하였지만 에스라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율번적으로 모든 것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에스라가 율법중심의 랍비의 전통을 수립하였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서와 여러모로 닮았다. 에스라서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라면 느헤미야서는 무너진 성곽과 도시를 재건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 책은 모두 흩어진 신앙생활을 정립하여 포로 이후 참 신앙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이야기가 우리의 흩어진 신앙을 바르게 정립하는 면에서 매우 유익한 책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마음이 흩어지고 신앙생활이 느슨해질 때가 있는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할 수가 있다. 이 두 책은 성도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졌을 때 어떻게 이런 것들을 끊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에스라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구분된다. 첫부분은 1장부터 6장까지로 1차 포로귀환과 성전건축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두번째부분인 7장부터 10장까지는 2차 포로귀환과 신앙회복을 다루고 있다. 첫부분의 주요 등장인물은 스릅바벨이고 두번째부분은 에스라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이고 에스라는 아론의 후손이다. 즉 에스라서는 왕의 일과 제사장의 일을 나누어서 기술한 것이다. 왕의 기능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고 제사장의 기능은 성결케 하는 것이다. 이 두 기능은 죄에 빠진 인간의 영성을 회복하는 데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왕과 제사장의 기능을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과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먼저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4만여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최초로 한 일은 하나님의 단을 쌓아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가던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하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하였듯이(고전6:19-20)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에서 구하여 낸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의식을 소홀히 할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는 예배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스룹바벨이 인도하는 유대인들은 또한 초막절을 지켰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처음으로 맞은 절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성을 다해 초막절을 지켰다. 초막절은 추수가 끝나고 옛날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초막에서 1주일을 보내는 절기인데 이 때 많은 예물도 하나님께 드린다. 초막생활을 하며 지난날의 고통을 생각하고 지금의 은혜에 감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치 못하면 받은 은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잊기 쉬운 인간에게 기억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절기를 명한 것이다. 유대인은 이와같이 초막절을 지키면서 지난날 자신들이 나그네 삶을 살았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지난날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이제 새롭게 하나님 중심을 살기로 결심하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자세로 살기로 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지난날의 죄악된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준비를 하였다.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곳에 하나님의 전 지대를 놓았다. 예복을 입고 정성스레 다윗의 규례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전 착공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어려서 솔로몬의 성전을 본 기억이 있으므로 감회속에 대성통곡하기도 하였다. 지난 날의 영화가 뇌리 속에 스쳐가면서 70여년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한 것이 기억되어 슬픔과 기쁨이, 고뇌와 감회가 교차했다. 또한 지난날의 성전을 본적이 없는 세대들은 성전을 건축한다는 기쁨과 즐거움에 들떠서 노래하며 외쳤다. 그 때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전을 자기들의 손으로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성전을 짓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마음 속에 무너진 성전의 지대를 놓는 일을 해야 한다. 마음에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을 짓는 일은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전의 지대를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전을 지어갈 때 내 영성은 회복되어간다.
그러나 성전을 지을 때 모든 것이 다 잘 돼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방해꾼이 나타나서 방해를 한다. 유대인이 성전을 지으려 하자 인근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이 와서 자기들도 성전을 짓는 일을 돕겠다고 하였다. 사마리라인들은 물론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앗수르 사람과의 혼혈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이미 다른 종교와 혼합된 상태로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카톨릭과 같은 상태다. 이런 그들이 와서 같이 성전을 짓자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지금 어려운 상황에서 이거 잘되었다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배척하고 어렵더라도 자기들의 힘으로만 성전을 지을 것인가? 오늘날도 이런 유혹을 많이 받는다. 돈 많은 사람이 돈을 대주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성전을 짓자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똑같다. 결론부터 말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것이 유대인들의 태도였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당장은 좋을지 모르나 신앙이 변질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되므로 차라리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언지하에 자기들의 호의가 거절되자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조직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였다. 호의가 적대감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지역에 살고 있던 바사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또 바사왕에게 소를 올려 유대인들이 성전을 짓게 되면 반역을 할 것이므로 절대 성전을 짓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미 고레스왕은 죽었고 그 후대의 왕들은 고레스의 칙령을 잘 모르므로 정치적인 이유로만 판단하고 이들의 소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영을 내려서 성전을 건축치 못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 이처럼 성전 건축을 못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일할 때 방해꾼은 교묘하게 다가온다.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와서 유혹하기도 하고 아니면 때로는 위협이나 협박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7b-8a).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길로 걸어갈 때 이런 고난은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께 더욱 매달려야 한다.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방해꾼의 방해를 받고 세월만 보냈다. 벌써 10여년이 흘렀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레스왕을 모르는 왕이 등극하므로 성전건축은 더욱 어렵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을 독려하기 위해서 나타난 선지자가 있으니 학개와 스가랴다. 이들의 예언서는 뒤의 소예언서에 실려 있지만 에스라서에 나타난 이야기만 보더라도 이들이 성전건축을 얼마나 독려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당시의 왕인 다리오에게 글을 올려 고레스왕의 조서를 생각나게 한 것은 성전을 재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대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케 하였다는 사실은 후대의 왕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대가 허락한 것을 후대의 왕이 순종치 않는다면 선대를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리오왕은 즉시 국고에서 조사케 하였고 조사해보니 과연 고레스의 칙령이 있어서 다리오왕은 다시 조서를 내려 성전을 건축케 함은 물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제공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 이 무시무시한 조서가 내려지자 방해꾼들은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기가 살아 성전건축을 재개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묘하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를 받았을 때 오히려 기뻐하였을 것이다. 학개서에 나오듯이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바빠서 성전을 짓는 일을 소홀히 하였고 심지어는 귀찮게 여겼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되었으니 그들이 오히려 속으로 기쁘게 여겼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그냥 두시지 았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광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맞아야 할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로 4년만에 이 성전이 완공되었다. 스룹바벨이 지대를 놓은지 20년이 흐른 것이다. 솔로몬이 7년만에 성전을 완공하였는데 성전재건은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지대를 놓은지 20년만에,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한지 4년만에 완공을 보았으니 감회가 새로왔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많은 방해 세력과 어려움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섰을 때 얼마나 감회가 큰가? 개척교회의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성전을 지어서 중형교회로 도약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더나아가서 이 땅에서의 괴로움을 다 극복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바로 그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참는 것이다.
이렇게 성전이 준공되자 봉헌식을 가졌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유월절기를 드렸다. 솔로몬 성전에서 마지막 제사를 드린지 정확히 70년만의 일이다. 아니 70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소린가? 우리는 다니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1차로 바벨론에 끌려간 것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멸되기 20년 전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1차 포로때부터 정확히 70년 후에 1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성전이 파멸된 후 정확히 70년 만에 성전이 재건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만큼 오묘하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다니엘을 통해 주어진 70이레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성전건축이 완료된 후 또 60여년이 흘렀다. 7장은 바로 60여년의 공백이 있은 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본서를 기록한 것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재건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보고서 정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에스라서는 이렇게 긴 공백기를 두고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완공되어 60여년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에스라와 같은 율법사가 없었기 때문에 에스라때처럼 모든 것이 율법대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사사때처럼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대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때 준비된 인물이 에스라다. 에스라는 모세 이후로 최고의 율법사라 할만큼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에스라 이후의 모든 신앙은 에스라의 영향에 힘입었다. 이런 인물이 지금 바사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때의 왕이 아닥사스다왕이었는데 아닥사스다왕도 고레스왕과같이 조서를 내려 에스라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왜 바사국왕들이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보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바사국은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고 있었으나 오늘날 불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신을 포용하고 있었다. 왕을 신으로 섬기도록 한 것도 아니고 각 민족은 정치적으로는 바사국에 속해있었지만 자기들의 신을 섬기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바사국에 순종만 하면 무슨 신을 섬기든 상관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각 민족이 자기들의 신을 잘 섬기는 것이 바사국이 잘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바사국이 이런 정책을 쓰지 않았다면 유대인이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에스라는 왕의 조서에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갈 사람들을 모집하였고 이때 성인 남자만 1500여명이 귀환하였다. 그는 그 머나먼 길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귀환하였다. 에스라는 출발에 앞서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모든 다른 도움을 거절하였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귀환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에 따라 성전의식을 정립하러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삶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에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느헤미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사는 길을 가르친 것이다. 성전 중심의 예배를 회복하고 율법중심의 삶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때 에스라가 가장 안타깝게 여긴 것은 유대인의 통혼문제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통혼하여 유대인의 혈통이 흐려지고 있었는데 에스라는 이것을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왜 통혼이 나쁜 것인가? 솔로몬에게서 나타났듯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결혼하여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고 또 그것이 문제가 되어 유대인의 순수함이 자꾸 흐려지니까 에스라는 그 근본을 바로잡길 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에스라가 통회하며 기도하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고 같이 회개하였다. 그야말로 영적 각성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 사람의 회개가 이만큼 중요하다. 한사람만 바로 서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었다.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대로 하겠다고 하였고 에스라는 이방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고 단호히 말했다. 에스라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봐도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라고 의문이 갈 정도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으로는 그것이 그만큼 중요했다. 그들은 나라가 없다. 바사국에서 수많은 민족이 섞여서 산다. 그들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길밖에 없다. 에스라는 그것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면 이와같이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타협적이되고 결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유대인들은 결국 살을 찢어내는 고통을 택하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냈다.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자도 있었으나 자녀와 생이별 시켰다. 그 길만이 유대인으로서의 전통과 혈통을 세우는 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후대 사람들도 그 길을 걸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독스런 유대인이 탄생된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이런 결단이 필요하다. 만약 에스라가 이런 일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유대인을 찾아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서구유럽에서 이런 결단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서구유럽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되 또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올바른 길을 가는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것을 교훈 삼아 자를 것은 잘라 예수 안에서 순수함을 유지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