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수정
이흥근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10월 13일 11시 55분에 21명이 출발하려고 했으나 비행기 정비 결함으로 2시간 지연되었다. 14시간 비행하여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를 만나 CATALONIA VERDI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 조식 후 몬세라트로 약 1시간 이동하여 산악열차를 타고 기암절벽을 관광하고 검은 마리아상과 소년합창단으로 유명한 몬세라트 수도원을 관람했다.
6만 봉우리의 성산 몬세라트는 주변이 기암괴석으로 형성되어 있고 코끼리 형상, 원숭이 형상 등 각가지 모양이다. 이곳은 가우디의 어릴적 마음의 위안을 얻어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자연의 신비함과 규모에 놀랐다.
위치를 바꿔도 나를 쳐다보는 신비한 눈동자를 가진 마리아상 앞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인근에 있는 미술관에 피카소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 노인에게 젖을 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대해 노인과 젊은 여인의 부자연스러운 애정행각에 대해 불쾌한 면을 표출한다. 이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감상하게 된다.
수의를 입은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음식물 투입금지라는 인간에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노인은 서서히 굶어 죽어 갔고 해산한지 얼마 안 된 그의 딸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를 위해 스스럼없이 가슴을 열고 자신의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던 것이다.
게르니카는 방탄유리로 둘러싸여 있다.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73년, 프랑코 장군을 지지했던 히틀러가 3시간 동안이나 무차별 융단 폭격으로 게르니카를 습격해 단 하루 만에 주민 7,000명 중 1,600명이 목숨을 잃고 8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대벽화로 그려 파리 국제전시회에 공개했던 그림이다.
이 그림의 색상은 흑색, 백색, 회색이었고 뚜렀한 선과 분할된 면들이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다. 목이 베여 피투성이로 쓰러진 군인, 죽은 아이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상처 입은 말, 버티고 서 있는 소의 모습이 전쟁의 무서움, 잔인함과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다른 그림은 몬세라트의 자연을 섬세하게 그려 마치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달리의 인상 깊은 작품은 1925년 작 <창가에 서 있는 소녀 >였는데 그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의 초상화였다. 그림 속의 소녀는 열린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로 이동했다. 구엘 공원에 갔다.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절친한 친구이며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으로 이름이 붙은 구엘 공원이다. 처음에 60가구를 분양하려고 했으나 세 가구만 입주했다고 한다. 가우디와 후원자인 구엘, 친구가 입주했다. 1883년 구엘 가문의 건축가로 임명된 가우디는 구엘과 그의 집안을 위해 35년간 일했다.
입구 나무에 종달새가 집을 짓고 먹이를 물어오고 먹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림에서만 보았던 것을 실제로 보니 새롭다.
건물 모두가 곡선이며 자연을 본떠 만들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의자는 누구나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타일을 박아서 운동장 둘레에 만들어졌다. 앉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곧은 직선과 완벽한 원이 거의 없으며 자연 그대로의 곡선을 살려서 가우디의 건축 개성이 넘치는 것은 몬세라트에서 영향을 맡았다고 한다.
도토리나무에 길쭉한 도토리가 가지에 많이 열렸다, 스페인에서는 도토리를 먹지 않는다고 하며 돼지 사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시벨레스 광장 분수대에는 사자 두 마리가 끄는 수레 위에 위엄있게 높이 앉아 있는 대리석 조각의 여신상이 오고 가는 사람들과 차량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스 신하에 나오는 농경의 신이자 제우스의 어머니인 시벨레스 여신상이다.
카사 밀라, 이 특이하고 아름다운 건물은 여러 가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이 건물을 건축한 당시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그 규모가 건축법을 위반했다고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아 파괴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몬주인 공원은 1992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1등으로 들어오던 그날 의 감격을 떠올리며 큰 소리로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경기도 지사가 손기정 선수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받은 기념으로 경기도에서 그 땅을 사 만든 공원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물은 오로지 자선과 기부로만 재정을 충당하기로 되어 있었고 헌금함에 넣은 돈으로 공사가 계속되고 입장료가 하루에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당신이 짓고자 하는 건축의 이상이 무엇입니까? ‘저기 보이는 나무가 나의 가장 좋은 건축 표본이자 스승입니다.” 가우디의 말처럼 성당 안은 성당이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숲 같은 외부와의 또 다른 경이로움을 선물한다.
하늘 높이 벋은 나뭇가지 모양 기둥 사이로 은은한 빛이 들어와 성당 안 곳곳을 빠짐없이 비춰준다.
1926년 6월 7일 평소처럼 산 필립네리 광장으로 산책을 나섰던 가우디는 광장으로 가기 위해 교차로를 건너다가 마주 오던 전차를 미처 보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사흘 후 31살의 나이에 시작해 43년의 시간을 바치며 매진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지하에 묻혔다. 1882.3.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란 비아가 시작되는 에스파냐 광장에는 중앙에 세르반테스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5개의 대륙을 상징하는 5 여신 조각상)가 있고 앞쪽에 돈키호테와 노새를 탄 산초 판사의 동상이 있다. 과거에는 왕궁을 호위하는 군인들 막사가 있던 곳이다. 왼편에는 1957년에 지은 35층 124미터 높이의 마드리드 타워가 있고 기념비 뒤편에는 1948년에 지은 23층 117미터 높이의 에스파냐 빌딩이 있다.
세르반테스는 1547년 스페인 알칼리데에 요나스에서 가난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1년 군에 입대 레판토 해전에 참가 왼팔을 잃었다. 귀국하던 중 해적들에게 습격당해 1580년까지 5년간 알제리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학교 교육은 거의 받은 적이 없다. 그의 자라난 환경과 모험 그리고 여행의 경험들이 그의 문학적 주제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1584년 18세 연하인 부유한 농가의 딸인 까딸리나와 결혼하였 다. 세금 수금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투옥당하기도 하고 빈곤한 생활을 했다. 1605년 제1부를 발표하면서 세상의 갈채를 받게 되었다. 그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스페인 오기 전에 도서관에서 돈키호테의 뮤직컬을 보고 와서 더 반가운 마음이든다.
호텔 조식 후 세비아로 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묘가 있는 세비아대성 당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화려하고 장엄하다. 1층에 왕 4명이 콜럼버스의 묘를 들고 서 있다. 앞에 두 왕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고 뒤에 두 왕은 고개를 숙이고 어둠은 표정을 하고 있다. 가이드는 앞에 두 왕은 많은 지원 하였는데 뒤에 있는 두 왕은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죽기 전에 스페인은 가지 않겠다고 유언 했다고 한다.
스페인광장은 수많은 분수와 벤치 등이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고 아름답다. 앉아서 사진을 찍고 그 당시를 생각해 본다.
황금의 탑은 과달키베르 강변에 서 있는 정 12각형의 탑으로 세비아 방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아카사르궁전을 외부에서 보았다. 페드로 1세가 정열을 기울인 아름다운 궁전이다. 스페인 특유의 이슬람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이다.
‘론다’로 약 1시간 이동했다. 아찔한 절벽에 위치한 론다. 내려다보니 가슴이 섬짓하다.
외관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을 관람하고 론다를 사랑한 헤밍웨이가 즐겨 걸었다는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헤밍웨이는 투우 경기의 광펜으로 투우 경기를 즐겼다고 하며 이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토산품 가게에는 사진과 손수건에 헤밍웨이 사진이 새겨져 있다. 누에보 다리는 협곡에 있는 두 도시를 이어주는 다리다.
호텔 조식 후 그라나다 관광으로 알함브라 궁전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을 가진 궁전은 폐르난도와 이사벨 여 왕도 그라나다 점령 당시 알함브라 궁전에 매료되어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항복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궁이다. 황궁의 모든 공간은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로 가득차 있다. 어느 곳에 시선을 던지든 회랑과 푸른 정원 코발트 및 연못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조화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탄이 나온다.
클래식 명곡으로 꼽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유명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사전에 들어서 곡이 연상되고 실지 와보니 아름답다.
이 궁전은 이슬람 지배 시절 아랍 양식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나자리에 궁전과 카르로스 5세 궁전, 그라나다 왕의 여름 별궁이었다. 꽃과 나무와 물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50미터 길게 조성된 수로 위로 가느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알함브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풍경이다. 수로 양쪽으로 색색의 꽃을 조화시킨 이곳에서는 죽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나사리에스 궁전의 아벤세헤스의방(비극의 방)에 죽임을 당한 귀족과 후궁은 지금은 죽은 저 나무 아래서 왕의 눈길을 피해 밀회를 즐겼다. 왕은 30여 명에 이르는 후궁과 신하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그들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한 나무마저도 물길을 끊어 고사시켰다고 한다. 고사목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 비가 오는데 많은 관광객이 줄을 서 있다. 네덜란드 스헤르토보스 출신의 보스는 출신 지역 때문에 보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쾌락의 정원>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피조물’ ‘쾌락의 동산’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왼쪽 패널에 그려진 ‘피조물’ 주제의 그림에는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이브의 탄생이 그려져 있다. 창조주로 보이는 사람이 아담의 갈비뼈에서 막 태어난 이브의 손을 잡고 아담에게 소개해 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쾌락의 동산’에서는 오직 쾌락만을 탐닉하는 나체의 남녀들이 다양한 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옥’은 두려운 모습이 가득하다. 이 그림에는 온갖 고문 도구와 괴물들이 등장하고, 그것들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의 절규하는 모습이 가득하다.
‘똘레도’는 옛 스페인의 수도로 약 1천여 년 동안 스페인의 중심지였다. 여기에는 로마 시대 유물부터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유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있어서 사실상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똘레도깜브론의 문을 지나면 유대인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똘레도’는 요새여서 도시구조가 복잡하게 설계됐다. 스페인은 화려한 여인 같은 나라 다양한 얼굴을 지닌 빛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