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칠불過去七佛
불타 석가모니와 그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여섯 명의 불타.
즉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을 모두 합해 이르는 말.
역사적으로 부처님은 석가모니불 한분이지만,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누구든지 석가모니처럼
보편적인 진리에 눈을 뜨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과거불過去佛 사상은 본생담 및 미래불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대승불교에서 전개된 부처관의 원천이 되었다.
기원정사祇園靜舍
인도 코살라 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에 있던 절로,
부처님 45년의 교화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문 곳이다.
부처님과 출가승들이 설법하고 수도할 수 있도록 당시의 대부호 수달이 건립해 기증했다.
어느 날 수달이 친구의 집을 찾았다가 그곳에 초대된 부처님을 뵙고는
환희심이 넘쳐 사원을 짓기로 서원한다.
수달이 태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땅을 팔라고 요청하자 태자는
"그러면 금화로 그 땅을 다 덮어 보라."고 응수했고, 수달은 정말로 금화로 땅을 덮어 나갔다.
이에 놀란 태자는 결국 그 사연을 알게 되었으며, 신비의 주인공 부처님을 만나
감화되어 그 땅을 희사했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23번의 하안거를 보냈다.
나가세나 비구
기원전 2세기경 인도 북서부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브라만으로 태어난 그는 <베다>에 정통했지만,
모하나에서 온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감명을 받아 출가했다.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에 두루 정통하였으며
소승에서 대승으로의 과도기적인 대승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리스 왕 밀린다와 불교 교리에 대해 토론한 내용이 담긴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설명과 풍부한 배유가 돋보이는 경전으로,
동서양의 가치관과 종교관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남악 회양南岳懷讓 대사
677 ~ 744 당나라 때의 선승.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겸손해 무엇이든
남에게 양보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회양懷讓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15세에 출가하였고 육조 혜능스님을 만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는 8년 동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진을 하고 나서야 "설사 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 할 수 있었다.
육조 혜능선사 밑에서 크게 깨친 그는 남악에 들어가 30년 동안 선풍을 떨친다.
남천 보원南泉普願
748 ~ 834 당나라 선승. 육조 혜능의 법손으로 마조를 만나 선의 경지에 들었다.
제자 소주가 "어떻게 하면 도를 붙잡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남전은 "잡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잡을 수 없다."고 답한다.
이에 조주가 "손에 넣을 수 없다면 그것이 '도'임을 어찌 압니까?"라고 다시 묻자.
"도는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라면 망상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자각이 없는 것이다. 안다든가 알지 못한다든가 하는 분별을 없애면 거기서 도가 나타난다.
그것은 맑게 갠 하늘 같아 분별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 말에 조주는 크게 깨달았다. 신라 철감澈鑑 국사가 그에게서 나왔다.
대매 법상大梅法常 선사
752 ~ 839 당나라의 선승. 어려서 출가했고, 불망지不忘智를 얻어 읽고
보는 모든 것을 암송하는 무서운 기억력을 가지게 된다.
경론을 연구하다 선禪에 뜻을 세우고 스승을 찾아 마조 도일에게 간다.
참선정진을 하던 중 마조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묻자
마조선사가 "마음이 곧 부처!" 라고 한 이 한마디에 홀연 대오하였다.
그 뒤 대매산으로 들어가 연잎으로 옷을 삼고 솔잎을 먹으며 은거 생활을 했다.
세수 88세 때 대중을 향해 법문하기를,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라.
이 한 물건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여러분이 잘 보호해 지키라. 나는 이제 간다."
그 말을 마치고 그는 세상을 떴다.
마조 도일 馬祖道一선사
709 ~ 788 당나라의 선승. 용모가 기이하여 소걸음으로 걸었고 호랑이 눈빛을 가졌으며,
혀를 빼물면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법륜 문신 두 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환념의 허구성을 비판했고 탈속의 기상을 강조했다.
"즉심즉불卽心卽佛. 평상심이 도다."라는 가풍을 주창했는데,
중국 선의 실질적인 개조자로서 일상에서 선을 실천하는 선종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문하에서 백장, 대매, 염관 등<전등록>에 오른 인물만도 139명이 배출되어
임제종 및 위앙종의 시초가 되었다. 조동종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하가섭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8세에 바라문이 되었으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하고자 하지만 후손의 단절을
염려한 부모의 권유로 마지못해 결혼하고 12년을 아내와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한다.
늘 낡고 더러운 가사를 걸치고 항상 적은 것에도 만족하며 몸과 마음을
수행하였다 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린다.
부처님 입멸 후 칠엽굴에서 500명의 비구를 모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였다.
라마크리슈나
1836 ~ 1886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영혼으로 손꼽히는 스승이자, 신비주의적 종교가.
가난한 부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정식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신에 관해서 책으로 배우기보다 자기가 살고 예배하는 방식을 통해 실감할 수 있기를 원했다.
7세부터 신에 심취해 황홀 경이나 무아 상태에 빠져들곤 했으며,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각 계통의 스승들로부터 배우고 체험한 뒤에,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같은 진실성을 가지며 모든 길은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비베카난다 등 그의 제자들은 인도와 세계 각지에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해 종교를 계승.
마하바라
기원전 599 ~ 527 자이나교를 일으킨 24명의 티르탕카라(완전히 깨달은 스승) 중 마지막 인물.
크샤트리아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죽은 뒤 출가하여 12년간 공양받을 그릇조차 없이
나체로 다니며 화장터나 묘지 밑에서 생활하는 등 철저한 무소유의
금욕주의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 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금욕과 아힘사, 즉 모든 생명체에 대한
비폭력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72세에 스스로 음식을 끊어 생을 마친다.
목주 진존숙睦州眞尊宿
780 ~ 877 황벽 선사의 제자로, 임제와 동문이며 젊은 운문의 발을 문지방에 치이게 하여
깨달음을 체득게 한 선승. 황벽을 친견하고 나서 안목이 열린 뒤,
목주의 용흥사에서 잠시 머물다 종적을 숨긴다.
완전히 세상과 등진 채 다 쓰러져 가는 폐가에 은둔하며 모친을 모셨고,
평생 짚신을 삼아 이를 길 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았다.
찾아오는 학인에게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란
질문을 하여 그들의 견해를 날카롭게 시험하곤 했다.
비바 하리 다스
히말라야 산중 마을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집을 떠나서 밀림 속에서 고행자들과 생활했다.
진정한 스승은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깨달은 그는 1953년부터 침묵의 수행을 시작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말 대신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글을 써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것이 차츰 알려져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으로 유명해졌다.
자연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동화, 단편소설, 수필 등을 써서 격찬을 받았다.
백거이白居易
772 ~ 846 두보, 이백,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이라 불리며 한시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시인이다.
가난한 학자의 집에서 태어나 29세에 진시에 합격하였고,
71세에 오늘날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형부상서에 올랐다.
젊은 시절 고급 관료를 대상으로 사회 비판적인 시가를 읊다 반감을 사 좌천되기도 하지만,
쉬우면서도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풍자적이고 사실적인 시를 지어 당대에도 많은 민중들에게 애송되었다.
장편서사시 <비파행>, <장한가>는 지금까지도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720 ~ 814 당나라 때 선승으로 마조 도일 문하에서 도를 깨치고,
<백장청규>를 제청해 수도 생활의 규칙을 문서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선원의 직책에서부터 식사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선종 종단의 규율은 백장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백장선사가 90세가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자 주위 사람들이 그의 농기구를 감추었더니 그가 한 말이다.
걸출한 제자들 중 황벽 희운과 위산 영우는 뒷날 임제종과 위앙종의 시발점이 되었다.
보리 달마菩提 達磨 대사 (중국 선종 초대 조사)
? ~528 중국 남북조시대 때 인도에서 건너와 9년의 면벽수행 끝에
좌선을 통해 수행하는 새로운 불교, 곧 중국 선종을 창시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가 청정하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선법을 혜가에게 전수했다.
북위 말의 구족 불교와 수행 체험을 도외시하는 행태의 불교를 비판했으며,
부처와 중생이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믿고 선의 실천 수행에 전력했다.
보조 지눌普照知訥 국사
-1158 ~ 1210 한국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3대 고승 중 한 명.
당시 불교계가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서로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 일삼자,
그는 선과 교 모두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주장하며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해 조계종을 개창하고, 불교 통합을 시도하였다.
불자의 수행법으로 돈오접수와 정혜쌍수를 제시했고, 자신이 바로 부처임을 깨달을 것과,
깨달았더라도 선정과 지혜로써 쉬지 말고 계속 닦아야 함을 강조했다.
부대사傅大士
497 ~ 569 중국 양나라 말의 승려. 쌍림 대사, 동양 거사라고도 불린다.
24세 때 불교에 귀의한 뒤, 송산에 숨어 살며 수행하였다.
양 무제가 <금강경> 강의를 청하자 법좌에 오르더니 책상을 한 번 '탕'
치고는 그냥 내려온 일화로 유명하다.
거침없는 수행으로 출가자와 제가자들로부터 존경받았으며
양 무제를 귀의시켜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분양 선소汾陽 善昭
947 ~ 1024 출가해 71인의 선지식을 찾아다녔으나 크게 얻은 바가 없다가
수산의 성념省念선사가 설법할 때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의 발자취 끊어진다."란 말을 듣고 크게 깨쳤다.
그 후 산서성 분양 태평사 태자원에서 30년 동안 가르침을 편다.
지위가 높은 관리가 큰 절로 모시려고 사자를 세 번이나 보냈으나 가기를 거절하다가,
사자가 선사와 같이 가지 않으면 벌을 받으니 같이 가 달라고 청하자
"그대가 먼저 가면 나는 나중에 가겠다."말하고는
식사 마련하라 행장 챙기라 하더니 "나는 간다."하며 젓가락을 멈추고 입적했다.
불천 운허 佛泉 耘虛
1892 ~ 1980 젊은 시절 신혼의 단꿈을 뿌리치고 홀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이고,
학교를 설립 운영해 교사로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30세 되던 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 왜경에 쫓겨 금강산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경송慶松스님, 월초月初 스님을 만나 출가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인 중생 구제의 길로 들어서면서 <능엄경>, <무량수경>,
<범망경> 등을 번역하였으며, 최초로 <불교 사전>을 펴냈고, 1964년 역경원장의
책임을 맡아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한글화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렸다. (춘원 이광수의 형.)
빔비사라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초에 인도 마가다국을 통치한 왕.
당시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정 군사 제도도 갖추어
고대 인도의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터전을 만들었다.
부처님이 활약한 시대의 왕으로 불교를 따르고 불법을 보호했지만,
말년에 왕자 아자타사트루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옥사했다.
사리불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되었다.
친구인 대목건련과 진실한 가르침을 얻으면 서로 알려 주기로 약속하고
출가하여 육사외도인 산자야 교단에 입문한다.
산자야의 제자가 된 지 7일 만에 그 가르침을 통달하고 상수제자가 되나 생사를 떠나는
해탈의 경지를 얻지 못하다가 부처님에게 최초로 귀의한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인
앗사지를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구절 얻어듣고 즉시 깨닫는다.
친구 목건련에게 알리고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교화 활동을 하다가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든다.
삼조 승찬三祖僧璨 조사(중국 선종 제 3대 조사)
? ~ 606 심한 풍질風疾(문둥병)에 시달리다가 중국 선종 제2대 조사인 혜가조사를 찾아가 불법을 구한다.
혜가조사와의 문답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 후 문둥병이 나아서 2년 동안 스승을 시봉하였다.
혜가조사에게 의발을 전해 받아 중국 선종의 제3대 조사가 된다.
평생 은거하며 불법을 전하다가 법회하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의 요체를 게송으로 풀이한 <신심명>을 남겼다.
서산 휴정西山 休靜 대사
1520 ~ 1604 조선시대의 고승.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고향 평안도의 안주 목사를 따라 한양에 올라와 공부했다.
이후 뜻이 맞는 동급생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여 선가의 법을 깨닫고 승려가 된다.
21세에 영관靈觀 대사에게 인가를 얻어 마을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정오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닫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 5천 명을 모집하여 관군을 도와 공을 세웠으나,
늙음을 이유로 산으로 되돌아간다.
따르는 제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이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했다.
석두 보택石頭 寶澤
1882 ~ 1954 한국 불교 중흥의 토대를 마련한 선지식이다.
석왕사 백하白荷 스님에게 법명을 받아 출가한 뒤 3년 만에
명천 쌍계사 주지로 발탁되지만, 사임하고 선원으로 들어간다.
25세 겨울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산齊山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던 중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다른 복을 짓는다 해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참선하라."고 할 만큼 참선정진을 강조했다.
<준제경准提經>에 나오는 '좋은 향'을 구하려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갔으나,
결국 그 향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향'임을 깨닫고 돌아온다.
수보리
주로 <금강경>에 등장하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
분노를 잘 조절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쳐 곧장 출가한다.
그가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것은 우주의 평등한 진리,
공空한 이치를 깊이 체득했기 때문이다.
<증일아함>은 그를 가리켜 "행이 본래 청정하여 항상 공적을 즐기고 공의 뜻을 분별해
공적의 덕업에 뜻을 둔다. 그래서 은둔자 중 제일이다"라고 전한다.
은둔한다고 해서 산속에 홀로 숨어 지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생활할지라도 내면의 고요를 응시하며 대립과 다툼이 끊긴 생활을 했음을 뜻한다.
사물의 본성을 꿰뚫는 그의 식견은 대승불교에 와서 부각되었다.
석굴암의 그의 모습은 은둔자로서의 개성을 강조하려는 듯 잔뜩 울크리고 있다.
<선가귀감禪家龜監>
서산 대사가 지은 불교 수행 지침서로, 당시 불교개혁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다.
불교 경전에서 핵심만을 추려 길잡이로 제시한 점이 특징.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도 중요하게 여겨
화두 수행법을 비롯해 주력과 예배, 염불의 의미도 함께 설명했다.
<깨달음의 거울>이란 제목으로 법정 스님이 번역 출간했다.
스코트 니어링
1883 ~ 1983 탁월한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교육자이자 생태주의자.
펜실베이니아 대학, 톨레도 대학 등에서 왕성한 저술과 강연을 펼쳤으나
아동노동 착취 반대운동, 반전운동을 하다가 해직되었다.
힘들었던 시절 삶의 동반자가 된 헬렌과 운명적으로 만나고,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독립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최소한의 소유와
소비만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실천해 보였다.
100세가 되던 해 음식을 끊음으로써 육신과 이 삶에 작별을 고했다.
저서로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삶의 지속> 등이 있다.
<신심명信心銘>
선종 제3대 조사인 승찬 대사가 지은 게송.
선의 요체를 대중들에게 쉽게 풀이하여 이해 시키려는 목적에서 쓰였다.
편견과 집착, 미워함과 사랑함 같은 모든 이분법적인 분별과 집착을 벗어나야 불도를
깨칠 수 있음을 가르치며, 부처님의 중도 사상을 간명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146구 584자의 짧은 글이지만 팔만대장경과 1,700공안의 요지가 모두 함축되어있어,
중국에 불법이 전래된 이후 나타난 경문 가운데 최고의 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난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가장 오래 부처님을 모셨고.
가장 많이 설법을 들었다 하여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린다.
한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기여했으며,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시자가 되어 늘 곁을 지켰다.
또한 부처님을 설득, 여성의 출가를 허락받는 업적도 남겼다.
하루는 아난다가 탁발을 다녀오던 길에 우물에 들러 한 처녀에게 물을 청했는데,
처녀는 자기 신분으로는 공양을 올리기 죄스럽다며 엎드렸다.
당시 제도로는 당연했으나 아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상하귀천이 없다고 말했고,
이에 처녀는 물공양을 올린 후 불법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如是我聞.' 로 시작하는데,
이 '나'는 바로 아난다를 칭한다.
아니롯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지혜의 눈인 심안心眼을
얻었다 하여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 수행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출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설법을 듣는 중에 그만 졸고 만다.
이에 부처님이 간곡히 타이르자 크게 뉘우치며 다시는 잠을 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계속 정진하던 중 심한 눈병을 앓고 결국 두 눈을 잃는다.
그러나 천안이 열려 심원한 통찰력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아소카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으며 세계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불린다.
원래는 방탕하고 포악한 성격으로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일삼았지만,
전쟁에 따른 살육의 참삼은 그를 깊이 고뇌하고 참회하게 만들었고,
그 뒤 불교를 신봉하게 된 그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그만두고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비폭력 사회윤리를 정치의 이상으로 삼고 실현하려 하였다.
또한 깨달은 법을 선포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석벽과 석주에 새겨 적절한 곳에 세워 두었다.
아잔 차 대 선사
1918 ~ 1992 수많은 동서양인들에게 삶의 진리를 가르친 태국의 대선사.
스무 살에 출가했고 팔리어 경전에 능통하였으나, 5년 뒤 아버지가 중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생의 번뇌를 끝내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음을
알고는 탁발에 의지해 방랑의 길에 나선다.
스승 아잔 문을 만나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남을 보는 일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임을 깨닫게 되고,
7년간 숲 속 수행의 전통에 따라서 수행한 뒤 고향 마을의 초대를 받아 마을 인근의 파풍 숲에 정착한다.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가르침에 이끌려 외국인 구도자들이 하나둘 찾아오면서
왓 파풍이라는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알베르 카뮈
1913 ~ 1960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인.
1차 대전 중 아버지를 잃고 장애인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그는 어렵게 진학해
알제 대학교 철학과에서 평생의 스승이 된 장 그르니에를 만나 철학에 눈뜨게 된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인권 운동을 벌였고 평화주의와 사형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1957년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시지프스 신화>, <이방인>, <페스트>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주었다.
약산 유엄藥山惟儼
751 ~ 834 불경 연구에 조예가 깊었으며 고행 수도 생활을 했지만,
이런 것들이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느끼고 석두 희천石頭希遷을 찾아간다.
석두를 시봉하던 중 마조 도일로 인해 크게 깨치고는 3년간 모시다가
다시 석두에게 돌아와 그 법을 이어받는다.
형상에만 집착하여 단지 말 있는 가르침만 알고, 말 없는 가르침은 모르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루는 "법당이 무너진다. 법당이 무너진다."고 외치자 사람들이 놀라 분주히 움직였다.
이에 유엄이 손사래를 치더니 "내 뜻을 모르는구나." 하며 세상을 떴다.
에이헤이 도겐永平道元
1200 ~ 1253 교토 출신의 승려로 당대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활동했다.
일본 조동종의 개조. 황실 귀족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 산에 서
불경을 공부했으나 영적 갈망을 채우기에는 불충분하다 느끼고 중국으로 떠난다.
4년간의 정진을 통해 선승 천동 여정天童如淨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일본으로 돌아와 여러 사찰을 다니며 좌선을 전파했다.
불교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정법안장>으로 유명하다.
염관 제안鹽官齊安
? ~ 842 마조 도일의 139명 중 한 사람. 당대의 이름을 떨친 선지식이다.
운종雲淙 선사에게 출가한 뒤, 나중에 마조의 문화로 들어가 그의 법을 이었다.
마조의 임종 후에 해창원으로 가서 선법을 펼쳤는데,
도를 배우려는 무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주 법계의 중심이 사람임을 강조했으며,
선미에 빠져들 때 꼭 차로 대중을 교화했다고 전한다.
원효元曉 대사
617 ~ 686 신라의 승려.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것이었음을 알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지 않고 타고난 총명함으로 경전을 섭렵해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는 사상가가 되었다.
호화롭게 생활하던 대부분의 승려들과는 달리 촌락의 시장 거리의
골목을 다니면서 그들의 언어로 대화했다.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이는 단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라."는
무애가를 노래하며 가르침에 힘썼다. (설총의 아버지)
유마힐維摩詰
저잣거리에 살면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았던 인도의 전설적인 재가불자.
바이살리에 살았다고 전해지며 <유마힐 소설경>에서 주인공 거사로 등장하지만
실존 여부는 명확치 않다.
그는 "중생이 앓으니 보살도 앓는다."며 중생과 동심일체를 이루었고,
가족들의 소재를 묻자 지혜가 아버지고 방편이 어머니라 답해 대승보살 최상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대승 불교의 깊은 교리인 불이不二(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에 달한 보살로 평가받는다.
육우陸羽
733 ~ 804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서호 물가에 버려져 있는 육우를
지적智積 선사가 발견해 사찰에서 기르게 된다.
어려서부터 차 달이는 법을 배웠고, 불경 공부보다 유학에 더 관심을 보이며 글공부에 매진하던 중
절 생활에 회의를 느껴 12살에 절에서 나와 극단에 들어간다.
경능 태수 이제물의 도움으로 유교 공부로의 길이 열리고,
시인이자 차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비구승 교연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교연의 적극적인 권유에 다라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차를 연구하고 물을 감별하는 등
차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28세에 <다경>의 초고를 완성한다.
그 뒤 20년간의 지속적인 연구와 수정, 보충 작업을 통해 48세가 되던 해 정식으로
<다경>을 세상에 내놓는다. 다성茶聖이라 일컬어진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 대사(중국 선종 제 6대 조사)
638 ~ 713 기독교의 종교개혁가 루터에 비견되는 불교 혁명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꾼으로 살다가 우연히 <금강경>의 한 구절인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대목을 듣고 출가해 달마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선맥을 이었다.
제자가 43인을 헤아렸고 중국 선종은 혜능 문하의 시대부터 융성하게 된다.
인도 불교와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고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는 심외무불心外無佛을 강조했다.
부처 되는 일은 본성을 깨달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해방 사상을 열었다.
의상義湘 대사
625 ~ 702 신라시대의 고승. 19세에 출가하여 중국 유학을 위해 원효와 요동에 갔으나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풀려난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 지엄智儼을 만나고,
제자가 되어 8년간 화엄경을 공부한 뒤 신라로 돌아온다.
팔공산 미리사,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상왕산 보원사, 계룡산 갑사 등을
창건해 화엄 사상을 가르쳤으며 3천 명이 넘는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이조 혜가二祖 慧可 대사
487 ~ 593 중국 선종 제2대 조사.
달마를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하며 선뜻 한쪽 팔을 절단해 그 신심을 보인 일화로 유명하다.
어느 날 혜가는 달마에게 묻는다.
"소승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소승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 불안한 마음을 이리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편안하게 해 주리라."
"그 불안한 마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생각을 다 놓아 버리라. 이미 불안한 마음은 없어졌다."
이 말에 혜가는 크게 깨쳤다. 후일 선법을 포교하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처형당한다.
임제 의현臨濟 義玄
? ~ 867 당나라 말기 선승. 황벽 문하에서 도를 깨쳤으며 임제종의 종주가 되었다.
남성적이고 행동적이며 거친 선법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황벽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백장 선사가 물려준 선판禪板을 임제에게 깨달음 인가의 징표로 주었으나,
임제는 고향으로 돌아가 제일 먼저 스승이 물려준 인가의 신표들부터 불살라 버린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여야 한다고 설한 그는 틀에 갇히면 자유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이런 것을 타파해야 견성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제를 영원한 자유인으로 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자운 성우慈雲 盛祐
1911 ~ 1992 청정계율을 근간으로 수행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율사.
성철性撤 스님과 사형 사제처럼 허물없이 지내던 도반으로,
보조 국사의 가사와 장삼을 모델로 삼아 현재 조계종 스님들이 입는 옷을 만들어 냈으며,
스님뿐 아니라 재가자들이 지켜야 할 각종 계율을 모두 정리하여
조계종의 선풍을 확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정혜결사
한국 불교의 흐름을 이끌어 가던 선각자 지눌이 정혜(선정과 지혜)를
통해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수행할 것을 권하는 운동이다.
몽고의 침입과 무신의 난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럽던 시기,
불교 종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치열해지고 불교 수행자들이 권력과 결탁해 이익을
취하고 개인적인 명예를 구하려 하는 등 불교가 점점 세속화되면서 몰락해가자,
지눌은 정통적인 정혜의 수행을 강조하고 타락한 불교계와 그릇된 수행 풍토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결사 공동체인 정혜사를 세우고 불교 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조당집祖堂集>
동아시아 최고의 불교 선종사 책으로 당나라 말 설봉雪峰 문하의 선승 정과 균 두스님이
자주 거론되는 선사들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편찬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과거칠불로부터 당 오대五代까지의 대표적인 조사들의 건기를
집대성한 이 책에는 253명의 선사들의 행적과 어록, 게송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구어체 문장을 쓰고, 연대순이 아닌 법을이은 대수에 따라 소개하는 점이 특징이다.
초기 선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조주 종심趙州 從諶 선사
778 ~ 897 당나라 선승. 특히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의 수행 과제가 되었는데,
<벽암록>에 전하는 100개의 화두 중 12개가 조주의 것이다.
'개에겐 불성이 없다." 조주구자趙州拘子는 1,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선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푸라기 하나조차 불성을 갖고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강력한 도전이자 자유이다.
열일곱에 깨달아 40년 동안 스승 남전 곁에 머물며 정진을 거듭했고,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른 뒤 순렛길에 올라 당대의 선사들을 만나 가며 배움을 거듭했다.
이때 그는 "내가 100세 노인을 만나서도 가르쳐 줄 게 있으면 가르칠 것이요,
7세 소년을 만나서도 그가 내게 가르쳐 줄 게 있으면 배울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검소하고 시주를 권하는 일이 없어 고불古佛이란 칭송을 들었다.
죽림정사竹林精舍
중인도 마가다국에 있었던 최초의 절. 처음 불교가 일어났던 시기의 승려들은 나무 밑이나
숲 속, 석굴, 골짜기, 묘지 등에 거주하며 무소유의 생활을 방편삼아 선정과 진리 탐구에만
몰두하였으나 인도의 기후적 특성상 3개월간의 우기 동안에는 안거 제도를 택했다.
처음에는 사찰이 없었으나 차츰 승려들은 부처님을 모시고 한곳에 모여 정진하기를 열망하게 되었고,
왕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음식물을 제공하고 숲을 기증해 머물 곳을 마련해주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이 불교 교단에 기증한 죽림원은 그 최초의 숲으로
그곳에 60채의 오두막을 지어 불교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가 생겨났다.
청매 인오靑梅 印悟 선사
1548 ~ 1623 서산 대사의 제자로, 선사이자 승병장이며
불교 역사가 가장 암울했던 조선 시대에 큰 발자취를 남긴 스님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3년 동안 의승장으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으며 그 뒤 크게 발심해
전남 부안 아차봉 마천대 기슭에 월명암을 짓고 목숨을 건 수행에 들어
염 지 각念, 知, 覺이라는 깨달음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불교뿐만 아니라 노장과 묵자에 대해서도 정통했으며, 한국 불교 선객들 사이에서는
고고하게 은둔 수행을 한 가장 모범적인 선사로 알려져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經文>
처음 승려가 된 사미가 배우는 지침서로 <계초심학인문>. <발심수행장>,
<자경문>을 합쳐 후세에 한 권으로 만든 것이다.
고려의 보조 국사 지눌이 지은 <계초심학인문>은 불교에 뜻을 둔 사람들이
경계로 삼을 수 있도록 수행 규법의 핵심을 뽑아 구성한 것이다.
<발심수행장>은 운문으로 된 706자의 짧은 문장으로, 욕심을 버리고 수행을 완성하라는 내용이다.
현대에도 불교를 알고자 하는 이의 필독서이다.
<자경분>은 수행할 때 스스로 경계해야 할 사항을 서술한 책으로 고려의 야운野雲 대사가 썼다.
수도자가 배워야 하는 이유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적고 있다.
학명 계종鶴鳴啓宗
1867 ~ 1929 20세 되던 해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집을 나선다.
각지를 방랑하던 어느날, 전북 순창에 있는 구암사에 이르러 설법을 듣고 출가했다.
지리산 영원사와 벽송사 , 조계산 선암사와 송광사 등에서
이름난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기를 10여년, 경, 율, 론에 널리 통달한다.
1902년 가을 홀연히 문하의 학인들을 해산시킨 다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여 크게 깨닫고 나서
"전생에는 누가 나였으며前生誰是我,, 내세에는 내가 그 누가 될 것인고來世我爲誰.
현재에 내가 누구인지 알면現在是知我 미혹에 빠진 나를 돌이켜 참 나를 찾으리라還迷我外我."고 노래했다.
근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승려도 일을 해야 한다는 선농일치를 주장했다.
불교 혁신을 주도했으며, 그의 생활불교 주창은 운불교 창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협존자脇尊者
인도 소승불교의 한 종파인 유부종의 학승으로, 나이 70에 출가해서 하루라도 빨리 깨달음을 얻으려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을 정도로 자지도 않고 열심히 수행을 쌓았다는 데서 협존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출가하여 3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통달하고 삼명육통(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력)을 다했다.
500여 비구를 모아 제4결집인 <대비바사론>의 편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저서 안에 그의 설법이 포함되어 있다.
혜초慧超
704 ~ 787 통일신라의 고승이다.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중 인도 승려 금강지를 만나 밀교를 배웠으며,
금강지의 권유로 20세에 구법 여행을 떠난다.
약 4년 동안 인도를 순례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8년간 여행한 뒤
중국 고차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온 혜초는 그 여정을 기록하여 <왕오천축국전>을 남긴다.
그 후 다시 스승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이라는 밀교 경전을
연구하며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치다가 780년 우타이 산의 건원보리사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황벽 희운黃檗 希運
? ~ 856 마조 도일과 백장 회해를 잇는 당나라 선승으로 임제 의현의 스승.
때로는 몽둥이를 들어 일격을 가하는 등 형식에 거리낌 없이 고유한 깨침의 방법을 보였다.
"모든 부처와 일체중생은 한마음일 뿐 다른 어떤 진리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르지 않다."고 설파했다.
황벽립자黃檗笠子는 그가 삿갓을 쓴 일화에서 유래한 화두인데, 어느날 황벽이 남전 보원에게
하직을 고하자 남전이 "그렇게 큰 몸집에 겨우 야자椰子만 한 삿갓을 썼구나." 했다.
이에 황벽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라고 응수한다.
남전이 이 말을 듣고 "왕 노사王老師여." 했고 황벽은 삿갓을 쓰고 떠났다.
황산곡黃山谷
1045 ~ 1105 중국 송나라 때 이름을 날리던 시인이자 화가이며 서예가이다.
소동파 문하에서 배웠으며 자유분방한 초서체로 유명하다.
깨달음을 향한 치열하고도 간절한 마음에 당시 선학으로 유명한 회당晦堂 선사를
찾아가 법을 물었으나 선사는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 . 내가 그대에게 숨김이 없습니다."
어느 봄날 길가에 핀 목서화(계수나무꽃) 향기가 진동하자 희당이 묻는다.
"목서향이 들립니까?" "듣나이다." "이렇듯 아무것도 감추인 것이 없지요." 이 말에 황산곡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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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인드라망 원문보기 글쓴이: 受戒信(129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