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생검과 사검
폭설 가운데 해가 바뀌었다.
원소절(元宵節 : 일월 십오일).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며 잡귀를 쫓는 즐거운 명절이다.
평민들에게 있어 원소절 즈음처럼 한가한 시절은 없으리라.
네 사람만 모였다 하면 마작(麻雀)을 하기에 바쁘고, 공자대부(公子大夫)
들은 기루(妓樓)로 가서 노류장화(路柳墻花)들을 거느린 채 시회(詩會)를
하며 풍류를 즐긴다.
한단성 구석진 곳.
진씨도방(陳氏屠房)의 지붕 위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이 날은 원
소절인지라 도부들은 도살용 칼을 놓았고, 하인들도 고향에 돌아가서 쉬
는지라 진씨도방 안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의 외로운 그림자.
눈이 수북히 쌓인 진씨도방 한가운데에 그가 서 있었다.
두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서 있는 황갈색 옷차림의 인물.
그의 손에는 녹이 붉게 슬어 있는 철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철도의 끝은 축 내려져 있었으며, 그의 시선 또한 나직이 내려져 있었다.
'죽음! 모든 생명에게 한 번씩은 있는 것이지.'
그의 눈에서는 음습한 느낌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느낌이었다.
피에 찌든 누런 옷자락으로 몸을 휘어 감고 있는 육 척 키의 인물은 얼
굴에서 아직 치기가 사라지지 않은 홍안의 미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예리한 기운은 상대에게 섬칫한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게서 오 보 앞쯤에 말 한 마리가 슬픈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털 빛깔이며 골격으로 보아, 명마로 불릴 만한 말이다.
다만 말의 왼쪽 앞다리가 부러졌는지라, 말로서의 가치는 이미 상실된 것
이라 할 수 있었다.
"네게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가장 편안한 죽음을 주는 것이겠지."
소년의 눈빛은 더욱 암울해졌다.
그의 눈빛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노라면 한없이 깊은 바닷물에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된다.
그는 눈빛이 몹시 깊은 소년이었다.
천천히 그의 손이 허공으로 쳐들려졌다.
날이 거의 없으며, 형체가 뭉툭한 철도가 손에 이끌려 허공으로 쳐들려진
다.
"목숨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물체를 보아야 한다."
무영, 그는 바로 무영이었다.
부리부리하고 또랑또랑한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귀 끝까지 쭈욱 뻗어 나간
검미에 한 일자로 다물어진 굳강한 입매.
그는 몇 달 사이 한 치는 더 큰 듯, 꽤 건장해졌다.
"근육을 보아서도 아니 된다. 뼈를 보아야 한다. 뼈와 뼈 사이의 미세한
틈을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미세한 틈 사이로 도를 찔러 넣어야 한
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뭉툭한 도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검은 선이 유성의 궤적처럼 끌리는 직후, 철도의 뭉툭한 끝은 다리가 꺾
어진 말의 정수리 속으로 한 치 깊이 파고들었다.
말은 천천히 고꾸라졌다.
놀라운 것은 말의 입에서 울음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팽팽히 당겨진 상태에서 날카로운 보검에 의해 끊어지는 순
간을 찰나(刹那)라고 한다면, 말의 목숨은 찰나적으로 허공에 산화되어
버린 것이다.
"겨우 손에 익혔다."
석고처럼 단단히 굳었던 무영의 입매에 엷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평상시의 그는 늘 같은 표정을 지었으며, 누가 심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표정을 찡그리는 일조차 없었다.
지난번 오씨 성을 가진 도부의 첩이 무영의 준수한 외모에 호감을 가진
나머지 은근한 추파를 던진 바 있고, 그 일로 인해 오씨는 무영이 자신의
첩과 간통했다고 소리치며 무영의 옆구리를 칼로 쑤셔 박은 바 있다.
그 때 무영의 옷자락은 피에 흠뻑 젖었고 갈빗대 하나가 끊어지는 상처
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영은 오씨의 눈을 쓸어 보면서 짐짓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날 피곤하게 하지 마시오."
지독한 독종!
모든 사람은 무영을 그렇게 부르며 가까이 가기조차 꺼려하는 참이었다.
무영이 하는 일이라고는 폭포수에 가서 몸을 씻는 일과 하루 종일 도살
을 하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는 취미가 없으며, 달리 가는 데조차 없었다.
도(刀)에는 피가 단 한 방울 묻어 있었다.
무영은 손가락으로 도신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의 손길은 죽음에 익숙해진 손길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을 때, 오른쪽에서 매캐한 연초 내
음이 풍겨 왔다.
"이제야 도살의 일보(一步)에 이르렀군. 녠녠,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좋
아하긴 멀었어."
허리가 굽어진 꼽추노인.
그의 손에 곰방대를 들고 있는 바, 곰방대 끝에서 푸른 연기가 풀풀 피어
올랐다.
"흑노(黑老)!"
무영은 그를 보자,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흑노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노도부.
그는 지극히 작은 목도(木刀) 하나만 갖고 거대한 호랑이의 두개골을 쪼
개어 버리는 신의 도살술을 가진 사람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녠녠… 창굴(娼窟)의 계집들이 은자 세 냥만 주면 하루 종일 기분좋게
해 줄 텐데, 소와 말 때려잡는 일에 재미를 붙여 나갈 줄도 모르다니…
네놈의 꼬락서니가 볼 만하다."
흑노는 툴툴거리며 곰방대를 빨아 댔다.
그가 불을 오목하게 하자, 연기가 뭉쳐져 묘한 꽃송이를 만들어 냈다. 흑
노는 연기로 꽃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흑노께선 어쩐 일로 여기까지……?"
"하루 종일 구들장을 지고 있자니, 심심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흑노는 담배를 뻑뻑 빨아 대며 죽은 말 쪽으로 다가갔다.
죽은 말은 오래지 않아 인부에 의해 해체실로 날라질 것이며, 그 곳에서
토막토막 썰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 저녁 때쯤, 가난한 농부네 저녁
식탁을 장식하게 될지도.
"꽤 좋은 솜씨야."
흑노는 말머리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
"하나, 아직 멀었어."
"어떠한 의미에서?"
"말의 머리뼈에 구멍이 뚫렸다."
"아……!"
"그리고 뼈의 파편이 크게 만들어졌다. 녠녠, 따라와 봐라!"
흑노는 뒷짐을 진 채,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무영이 조용히 뒤따랐다.
흑노가 그를 이끌고 간 곳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황소가 있는 곳이었
다.
흑노는 황소 바로 앞에 서서 무영을 바라봤다.
"억센 뼈를 가진 녀석이지."
"그렇군요."
"머리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도끼로 세게 내리쳐도 잘 쪼개지지 않을 정
도이다."
"……."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혈(穴)이 있다. 훗훗, 혈을 노리면 뼈를 다치지 않
고도 죽일 수가 있다."
흑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품안에서 소도(小刀)를 하나 꺼냈다.
소도는 땀수건에 싸여져 있었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지지 않고 적송(赤松) 가지로 깎여진 묵도였다.
"이것으로 쭉 도살을 했지. 다시는 이것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한 바 있었
지."
흑노는 묵도를 천천히 쳐들었다. 그의 동작은 무영의 동작에 비해 큰 차
이가 있었다.
무영의 동작은 차갑고 어색한데 비해, 흑노의 동작은 유연하며 자연스러
웠다.
"죽음은 천한 게 아니다. 죽음은 고귀한 거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살생해선 아니 된다.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살육을 즐기기 위해 도
살을 한다면, 하급도살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해."
흑노는 느긋이 말하며 묵도를 슬쩍 내저었다.
나비를 잡을 듯 조용한 자세.
그가 손을 내저음에 따라서 묵도가 허공을 빠르게 갈랐다.
순간, 무영은 또렷이 볼 수 있었다.
흑노의 묵도가 거대한 덩치의 황소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으며, 이어 황
소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쓰러지는 것을.
'대, 대단한 운도술(運刀術)이다. 손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무영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는 육사부, 오사부에게 무예를 전수받은 입장이니… 발검출수(拔劍出
手)의 묘(妙)에 대해서는 상당히 해박한 견해를 갖고 있다 할 수 있었다.
한데, 흑노의 지금 솜씨는 그가 이해하고 있는 모든 경지를 초월한 초상
승의 경지인 것이다.
'일개 늙은 도부의 솜씨가 이 정도라니?'
무영이 내심 혀를 찰 때.
"머리뼈를 자세히 살펴봐라."
흑노는 근처 바위에 턱 걸터앉아 곰방대를 빨아 댔다.
"머리뼈를?"
무영은 긴장된 표정으로 죽은 황소 쪽으로 다가섰다.
황소의 머리에는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구멍이 있습니다."
"크기가 어느 정도냐?"
"새끼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후후… 아까 네가 만든 상처에 비한다면?"
"크기가 삼분지일 정도입니다."
"바로 봤다. 넌 뼈를 갈랐고, 난 혈을 끊었기 때문이다."
"뼈와 혈?"
"후후… 뼈를 가르지 않고 혈을 쪼개는 경지에 이른다면, 도부로서 완성
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흑노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일어났다. 그는 졸린 듯 기지개를 켜며 하늘
을 올려다봤다.
"잠을 좀 더 자야겠는데… 늙다 보니 느는 건 잠뿐이란 말이야."
그는 끌탕을 하면서 신형을 틀었다.
그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걸음을 내딛었고, 잔설 위로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
무영은 그가 도부들의 숙소로 접어들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의 낯빛은 어느 틈엔가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년 간 무공을 터득한 나의 솜씨가 일개 도부의 솜씨에 비해 형편없이
뒤지다니… 나는 뼈를 갈랐기에 상처 자리에 뼛조각이 남았고, 흑노는 뼈
를 가르지 않고 혈을 쪼갰기에 뼛조각이 퉁기지 않은 게다."
무영의 용모는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두 눈에서 한성(寒星)의 빛이 흐르는 무영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
다면, 당장 너른 가슴에 안기고 싶어 몸을 비비틀 것이다.
"흑노가 방금 내게 가르쳐 준 것이야말로 내가 깨우치지 못했던 무적신
도의 최후 심득인 봉황점두(鳳凰點頭)의 비결인지도."
무영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그는 삼 년 넘게 삼 사부에게서 일련의 연환도법을 배우고 있었다.
일컬어 십팔로(十八路) 무적신도(無敵神刀)!
무적신도는 도합 십팔 초이되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고래로부
터 전해 내려오는 초식이라기보다는 육파일방(六派一幇)의 초식 가운데
정화 부분만을 모아서 창조한 창안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무적신도를 모조리 깨우친다면, 열여덟 가지 도법을 익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무영은 무적신도의 마지막 초식만 깨우치지 못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조
리 깨우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흑노라는 늙은 도부로 인해 마
지막 부분을 문득 깨우치게 된 것이다.
만월(滿月).
원소절의 달은 풍만히 부푼 십오야월(十五夜月)이었다.
무영은 침상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었으며, 두 손바닥은 노승의 그것인
양 합습(合什 : 합장)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반개(半開)하고 있었고, 입술을 약간 벌린 채 숨을 토하고 들
이마시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미묘한 것은, 그의 코에서부터 흰 기류가 흘러 나왔다가는 사라지고 있다
는 것이었다.
공(空)!
운기행공(運氣行功)의 묘는 마음을 텅 비우는 데에 있다.
무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독히 살아왔는지라, 별달리 심마(心魔)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의 성격이 직선적이고 차갑다는 것도 운기행공에 몰입하는 데에는 상
당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귀원토납좌공(歸元吐納坐功).
무영이 시전하고 있는 내가운기술은 백도의 정종심법(正宗心法)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고 있는 상승내가기공(上乘內家奇功)이었다.
귀원토납좌공은 전진파(全眞派)의 장문심법(掌門心法)으로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내가심법인데, 도살장의 소년 도부 무영에 의해 재현되고 있는 것
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영은 운기행공을 하는 가운데,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 속으로 파고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등 뒤로 나타난 것이다.
'오사부!'
무영은 얼른 진기를 단전(丹田)으로 회수하였으며, 그의 호흡은 찰나적으
로 끊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기행공을 하는 가운데 외부 상황에 재빨리 대처를 하
지 못할 것이나, 무영이 익힌 귀원토납좌공은 운기행공을 하는 가운데에
도 주변 정세를 느낄 수 있는 신통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젠 호흡 소리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무영은 차가운 기운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멈추어 섰으며, 창을 통해 흘러드는 바람으로 인해 옷자락
이 펄럭거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젠 당하지 않소이다.'
무영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머금어졌다.
바로 그 순간, 뒤쪽에 나타난 사람은 천천히 무영의 앞쪽으로 걸음을 내
딛었다.
'오른발이다!'
무영은 상대가 우보를 내밀었다는 것을 느꼈고, 뒤이어 그의 좌보(左步)
가 내딛어지는 걸 알아차렸다. 뒤이어 다시 우보가 내딛어질 때.
'지금이닷!'
무영은 두 눈을 감은 채 손을 비스듬히 쳐 내었으며, 허공에는 열여덟 개
의 손바닥 그림자가 현란하게 파생되었다.
파팟-!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둔중한 신음 소리가 흘렀다.
"으음… 봉, 봉황점두(鳳凰點頭)! 네, 네가 봉황점두마저 깨우치다니……."
창 아래 흑의괴인이 서 있었다.
그는 호흡을 죽이고 발걸음 소리를 죽여 무영 쪽으로 다가섰는 바, 무영
은 그가 다가서는 위치와 각도를 정확히 알아차리고 선제공격을 가해 그
의 옷자락을 찢어 버린 것이다.
"후훗… 처음이군요. 제가 먼저 옷자락을 베기는."
무영은 그제야 눈을 뜨며 장읍(長揖)을 취했다.
"좁은 놈, 우연히 이겼다고 크게 기뻐하기는."
"아……?"
"네놈이 진짜 대단한 놈이었다면, 나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사이를 이용해
역벽화산(力劈華山)이나 탄지매화(彈指梅花)로 나의 숨통을 끊었어야 했
다. 물론 죽을 나도 아니지만."
"그, 그러나 어찌 살수를."
"녠녠… 네놈은 내가 증오스럽지 않느냐?"
"솔직히 증오스럽소. 그러나 나의 가문이 오사부께 빚을 졌다니, 빚을 다
갚기 전까지는……."
무영의 눈빛은 또다시 암울해졌다. 오사부의 말이 그의 암울한 과거를 건
드린 것이다.
무영은 자신의 출신을 알지 못한다.
그는 어렸을 때 육사부 손에 키워졌으며, 그에게서 기초적인 무공을 배운
이후 이 곳에 옮겨졌다. 이제까지 그의 일생은 완전히 남의 손에 의해 조
종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너의 가문은 천하(天下)에 엄청난 빚을 지었다. 특히 여섯 명에 대
해서는."
"여섯?"
"후후후… 우린 네 가문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널 기르는 게다."
"으음……."
"너도 잘 알다시피 우린 널 이용해 많은 일을 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해서
는 네가 상당한 재간꾼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네놈이 배반할 놈은 아닌
듯하기에, 모든 걸 믿고 널 기르는 거다."
오사부의 말은 늘 이런 투였다. 그는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노예를 다루기라도 하는 듯 무자비하고 거칠게 무영을
학대하는 것이다. 솔직히 무영의 강인한 기질은 전적으로 오사부로 인해
이루어졌다 할 수 있었다.
"쉽게 죽어선 안 돼. 넌 몸값이 비싼 인질이란 말야."
"쉽게 죽지 않습니다. 이젠 오사부도 절 죽이지 못합니다."
"크크… 하긴 네놈이 약간의 재주를 갖게 된 건 사실이지. 그러나 아직
멀었어."
"대체 내가 어느 경지에 올라야 내게 비밀을 말해 줄 겁니까?"
"지금의 너 같은 조무라기와 백 대 일로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가 될
때."
"……."
"맹세해라! 그러한 경지가 되면 빚을 갚겠다고."
"맹세하겠소."
"좋아. 이제 오늘 밤을 새며 네게 나의 마지막 재간을 가르쳐 주겠다. 그
것은 탈명구혼(奪命拘魂)이라는 절기다. 칠 초로 이루어진 지력(指力)이
지. 오늘 밤 내내 노력하면 암기를 할 수 있을 거다."
탈명구혼(奪命拘魂)은 나찰교(羅刹敎)의 독문절학.
나찰교는 이미 오래 전에 붕괴된 마도세력이다.
오사부는 무영에게 강호에서 절전된 초식을 상당히 많이 전수하고 있는
것인데, 무영은 강호사(江湖史)를 알지 못하기에 자신이 배우는 절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 후, 이 곳을 떠나라!"
"떠, 떠나라시면 어디로?"
"금릉(金陵)에 가라. 사사부(四師父)가 널 기다리고 있다. 후후, 넌 이 곳
에서 더 배울 게 없다. 사사부는 나보다 세 배 강한 인물이지. 그리고 다
섯 배 괴팍하지. 후후……!"
사사부라는 인물은 무영이 한 번도 본 바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영을 가르칠 여섯 사람 가운데 네 번째가 되는 인물일 것이다.
'금릉? 화려한 곳이라 들었는데, 거기 가야 하다니!'
무영의 눈빛은 고뇌(苦惱)에 사로잡힐 때마다 묘한 벽록색(碧綠色) 빛을
뿜어 냈다.
그 빛은 얼음의 빛처럼 차가웠으며, 묘안석(猫眼石) 빛깔처럼 영롱하기도
했다.
신비로우며 은은한 냉광(冷光), 그것은 훗날 무영에게 닥칠 혈로(血路)와
여난(女難)의 운세를 암시하는 듯했다.
'어린 늑대의 눈빛!'
흑의괴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영의 성취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달라지고 있었다.
흑의괴인은 겨울을 보내는 사이, 달라진 무영의 기도에 감탄하면서도 겉
으로는 차갑고 쌀쌀맞기만 했다.
"탈명구혼은 금나수법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지공(指功)이다. 그것을 익
히는 사람은 끓는 유황에 손가락을 담가도 피부에 화상을 입지 않게 되
며… 탈명구혼의 경지가 십 성(十成) 수준에 올라선다면 간장(干將), 막사
(莫邪), 어장(魚腸), 용천(龍天)과 같은 상고신병(上古神兵)을 적수공권(赤
手空拳)으로 잡아 낼 수가 있다."
흑의괴인은 그렇게 말하며 철적을 쳐들었다.
그가 늘 지니고 있는 철적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만 년 동안 심해(深海) 깊은 곳에서 연철되어 세상에서 가장 단단
한 금속으로 전해지고 있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마문적(魔紋
笛)이었다.
"이것은 만년한철로 만들어졌지. 후훗, 이것을 휘둘러 대면 금옥(金玉)을
힘들이지 않고 깨뜨릴 수 있다."
"……."
"쥐어라!"
"아……!"
"어서 쥐라니까!"
흑의괴인은 철적을 무영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철적을 목숨처럼 아꼈었다. 한데, 그걸 무영에게 주다니?
무영은 멋모르는 상태에서 철적을 건네 받았다.
철적의 무게는 일 척(一尺) 오 촌(五寸) 길이에 걸맞지 않게 묵직했다.
거의 십오 관 무게인 철적을 무영은 손바닥이 싸늘해짐을 느끼며 불끈
거머쥐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후후… 그걸로 나를 힘껏 쳐라!"
"치, 치라니요… 오사부님."
"멍청한 녀석! 날 쳐 보라니까."
"제, 제가 어찌 오사부님을……."
"네놈은 날 암살하는 걸 소원으로 생각하며 사는 놈이 아니냐?"
흑의괴인은 느물거리는 어조로 말하며 야릇한 눈빛을 던졌다.
'만년한철은 내가강기(內家 氣)를 부순다. 이걸로 오사부를 있는 힘껏 격
타하면 오사부의 몸이 으스러진다.'
무영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흑의괴인은 또다시 재촉을 했다.
"어서!"
"으음……."
무영은 신음 소리를 내며 철적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는 주저주저하다가 철적을 오사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순간, 흑의괴인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 나왔다.
"있는 힘을 다해서 치란 말이다!"
"으으……!"
"크크… 네놈을 굶주린 맹수로 길렀다 여겼는데, 이리도 심약하단 말이
냐? 때려죽일 놈!"
"좋습니다, 오사부."
무영은 욕설을 듣자 분기가 치솟는 듯, 다섯 손가락에 힘을 가해 철적을
움켜쥐었다.
그는 흑의괴인을 쏘아보다가 직도황룡(直屠黃龍) 초식으로 흑의괴인의 천
령개(天靈蓋)를 향해 철적을 내리쳤다.
파공성과 더불어 철적은 그림자도 흘리지 않고 흑의괴인의 머리를 향해
다가섰다.
그의 머리통이 박살나지 않은가 하는 찰나.
팟-!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체 이럴 수가?
흑의괴인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철적을 가볍게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무영은 안간힘을 다해 철적을 끌어내리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철적은 집게에 물리기라도 한 듯 빠져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영의 손아귀 호구혈(虎邱穴)이 저릿저릿거려 철적을 오랫동안
쥐고 있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게 바로 탈명구혼지(奪命拘魂指)다! 후후……!"
흑의괴인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인지 그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은 취록색(翠綠色)으로 물들어 있었
다.
만에 하나 그의 탈명구혼지가 십 성 수준에 이르렀더라면, 철적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패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 구결은 이러하다. 일기출단전(一氣出丹田)하여 임맥(任脈)으로 기세를
흘리어 보내고, 한 마리 용을 움켜쥐고 여의주(如意珠)를 빼앗듯 손가락
을 구부린다."
흑의괴인은 빠른 속도로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무영도 정신을 곤두세우고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천부적으로 암기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그의 특징이라면 암기력에 있다기보다 오성(悟性)에 있으며… 그
의 성취가 지금 이 정도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암기력이나 오성이 뛰어나
기 때문이 아니라 쉬지 않고 피나는 연마를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흑의괴인은 구결을 거듭 다섯 번 외웠으며, 무영은 그제야 구결을 암기할
수 있었다. 흑의괴인은 그가 구결을 암기한 걸 확인한 후에야 외우기를
멈췄다.
묘한 일이다. 그의 눈빛은 언제부터인가 지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무영
을 앞에 두고 이토록 편안한 눈빛을 던져 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한 듯, 어찌 여긴다면 꽤 피곤한 눈빛이라 할 수
있었다.
"무영, 너와 함께 지낸 지 얼마지?"
"삼 년 하고 사 개월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 녠녠, 널 처음 볼 때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
이었는데… 어느 새 청년 티가 나는구나."
"……."
"녠녠… 네놈을 좀더 괴롭히지 못하게 된 것이 유감이다. 오늘 밤, 마지
막으로 널 고문하겠다. 녠녠……!"
흑의괴인은 음악하게 말한 다음, 돌연 다섯 손가락을 퉁기어 냈다.
무영의 앞가슴 오대요혈(五大要穴)은 거의 순간적으로 제압되었으며, 무
영은 전신이 뻣뻣해 솜털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렇군. 오사부의 지력은 바로 탈명구혼!'
무영은 이제야 흑의괴인이 매일 자신에게 어떠한 지력을 써 왔는지 확실
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음껏 찌르시오. 이젠 이골이 났으니까!'
무영은 애써 마음을 느긋히 풀어 놓았다.
매를 맞는다는 것!
보통 사람은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는 일이다. 하지만 무영에게는 너무나
도 익숙해진 일이다.
흑의괴인은 숨을 몰아쉬다가 무영의 기문혈(期門穴)에 일 지를 가했다.
"기문!"
"으음……."
"풍부(風府), 충양(沖陽)!"
"크으……!"
무영은 고통에 단련이 되었으되, 오늘 밤 그가 느끼는 고통은 정말 참지
못할 고통이었다.
가슴 속으로 불에 달구어진 부젓가락이 파고드는 아픔이랄까?
몸이 사분오열 나누어지고, 용암 속에 빠져 산산이 타 버리는 듯.
"우우욱……!"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비명 소리를 내지 않는 무영이었으나, 오늘 밤의
고통만큼은 정녕 참기 힘든 고통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비명 소리를 토해
냈다.
이마 위로 지렁이 같은 핏줄이 불끈불끈 솟고, 전신은 일순 식은땀에 축
축이 물들었다.
우두둑- 우둑-!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정녕 날 죽이고자 하는가?'
무영은 너무나도 심한 고통 가운데, 스스로 의식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파파팟-!
흑의괴인의 탄지점혈(彈指點穴)은 점점 빠르게 시전되었다.
그도 내력의 소모가 심한 듯 언제부터인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히
소모전이었다.
두 사람 모두 탈진해하는 가운데, 한 시진 정도가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무영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정광(精光)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엄청난 고통에 사로잡히던 무영의 사지백해(四肢百骸)에 기이한 힘이 뻗
쳐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화산(火山)이 터져 오르는 듯, 광풍이 불어 바다에 해일(海溢)을 일으키는
듯, 무영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타고 힘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이, 이제 보았더니 내게 내공(內功)을?"
무영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흑의괴인은 더욱 빠르게 손가락을 퉁겨 냈
다.
"입을 떼지 마라. 기가 빠져 나간다. 네놈은 쉬지 않고 귀원진기(歸元眞
氣)를 운용해라!"
"어, 어이해 나를 위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으으……!"
무영은 폭갈에 놀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어이해 내게 진원진기(眞元眞氣)를 전수한단 말이오. 어이해 내게!'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무영을 때려죽이지 못해 발버둥쳤던 오사부가 무영의 일신 혈맥(血脈) 속
으로 자신의 진원진기를 고스란히 흘려 보내 주다니?
무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가운데 망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토납구결을 외우기 시작하였으며, 흑의괴인의 진기는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 나와 무영의 몸 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혈맥타통하여 진기를 전수하는 방법은 의발전인(衣鉢傳人)에게만 쓰는 진
기전수이다.
흑의괴인은 늘 무영을 증오한다고 하면서도, 무영을 위해 자신의 내공 가
운데 칠 할 이상을 흘려 보내 주고 있는 것이다.
주위가 뿌옇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벽이 된 것일까? 그러나 새벽은 아니었다.
'밤인데도 주위가 환히 보이다니.'
무영은 언제부터인가 눈을 뜨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앞쪽이 환히 보인다는 것이다. 분명 지금은 밤이었다. 다른
때라면 앞이 어둡게 보일 것이되, 지금은 묘하게도 사위가 새벽처럼 환하
게 보이는 것이다.
'오사부님의 내공 때문이다.'
무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몸뚱이는 용수철이 눌려졌다가 퉁
기어지듯이, 위로 퉁기어 올랐다. 그는 기겁을 하며 몸의 자세를 바로잡
았고, 겨우 내려설 수 있었다.
"어, 어이해……?"
그는 부르짖듯 말하며 오사부 쪽을 보려 했다.
"돌아보지 마라!"
구석진 곳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흑의괴인은 방 구석진 데 웅크리고 있었다.
"돌아보지 말라니요?"
"그냥 떠나거라."
"아……?"
"금릉(金陵) 회혼의림(廻魂醫林)에 가라!"
"……."
"만박(萬博)이라는 분이 있다. 그분이 너의 사사부(四師父)시다. 지금 떠
나라!"
흑의괴인은 거칠게 말했으되, 그의 목소리에 짙게 배어 있던 차가운 기운
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내게 진기를 전수하시고 탈진하셨다!'
무영은 문득 뭉클함을 느꼈다.
그가 돌아보지 말라는 충고를 잊고 뒤돌아보고자 하는데…….
"미련한 놈! 너를 총애하여 진기를 전수한 게 아니야."
"그, 그럼……?"
"네녀석에게 빚을 빨리 받아 내기 위함이야. 그래서 네놈을 일찍 대성(大
成)시키고자 하는 과정에 불과한 거야."
"대, 대체 무슨 빚이기에?"
"언제고 알게 될 것이다. 녠녠, 하여간 뒤돌아보지 말고 이 곳을 떠나거
라!"
오사부답게 무정한 말이다.
그는 늘 무정한 투로 무영을 대해 왔다.
무영의 소년 시절은 그의 무정한 교육 가운데 지나갔으며, 그의 고독과
냉기는 무영의 체질 속으로 짙게 배어들게 되었다.
무영은 언제부터인가 오사부의 기질을 닮게 된 것이다.
"좋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무영의 대답 또한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호기심을 누른다는 건 극한의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무영은 그러한 점에서 초인적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으며, 문을 조용히 열고 뜨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어깨 위로 만월(滿月)의 빛이 떨어져 내린다.
지금 보이는 보름달은 그가 일생 내내 보아 온 달 가운데 가장 화려했다.
그가 뜨락을 가로지르고자 할 때.
"무영!"
"예?"
"넌 백씨(白氏)다. 넌 백무영(白無影)이다. 네가 백씨 성이라는 걸 잊지
마라!"
"백무영!"
"잊지 마라."
"잊지 않겠습니다."
"좋아, 이젠 가도 좋다."
흑의괴인의 목소리는 점차 나직해졌다.
무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으며, 그의 고막 속으로 잔기침 소리가
흘러들었다.
흑의괴인은 내공이 허탈한 나머지 한기(寒氣)를 느끼는 것이고, 추레한
기침 소리를 토하는 것이다.
무영은 문득 그 기침 소리가 누구의 기침 소리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군. 바로 흑노(黑老)의 목소리!'
그는 떠나가며 오사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흑의괴인은 그에게 심득(心得)을 전해 준 늙은 도부, 흑노였던 것이다.
백무영(白無影)!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화려한 달빛 속으로 접어들었다.
그가 사라진 후, 대기 속으로 이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삼 년이면, 한 마리 천룡(天龍)이 강호의 하늘로 비상(飛翔)하리
라. 그리고 대곤륜(大崑崙)의 영광이 재현되리라. 쿨룩쿨룩……!"
기침 소리, 그리고 화려히 흘러내리는 달빛.
이 밤은 그렇게 마감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