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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17차시 합평작(6월 12일 용)
1. 향내나무 / 이연희
영천 횡계 서당에 갔다. 노거수 향나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서당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가 복원되면서 서원이 서당으로 개칭 되었다. 북쪽에 서당이 자리 잡고 그 정남향에 모고헌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모고헌이 원래 서당 역할을 했는데 학생 수가 많아져 횡계 서당을 별도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모고헌 앞에 서니 짓궂은 학동들의 장난기 뒤섞인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모고헌은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인 지수 정규양이 이사 오면서 지었다. 정규양은 그의 형인 훈수 정만양과 함께 부친이 작고한 뒤 횡계리로 낙향했다.
시경에 ‘훈지'라는 말이 있다. ‘맏형은 흙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동생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분다.'는 뜻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우애가 남달랐던 형제는 훈지에서 한자씩 따서 호를 훈수와 지수라 했다. "훈지형제"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두 형제는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학문과 우애로 여생을 보내며 영의정, 형조참의 등 명현과 석학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지수의 제자들이 지은 모고헌은 ‘옛날을 사모하는 사람이 모이는 집’ 곧 스승을 그리워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인 모고헌은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단속을 잘해선지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정자의 멋을 제대로 즐기려면 속속들이 봐야 하는데 문이 잠겨있어 아쉬웠다. 앞모습을 보려면 가파른 벼랑을 내려가 개천을 건너야 하겠다. 일행과 떨어져 자세히 살펴보기가 쉬운 일이 아닐듯했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미련 때문에 뒤꿈치를 들고 틈 사이로 멀리서나마 보려고 애썼다. 남 클 때 뭘 하고 이리 작은지 용을 써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는데 향나무가 말을 걸어왔다. 향기 나는 손으로 내 발목을 잡는 노거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이 둥그레지고 삼백오십 년 수령과 비어 있는 속을 보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뻥 뚫린 속을 들여다봤더니 빈 둥지 속에 이름 모를 잡초가 여린 싹을 쏙 내밀고 있다. 덧손질하지 않아 옛 멋을 풍기는 모고헌과 잘 어울리는 향나무다. 1982년에 영천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향나무는 모고헌과 더불어 우애 깊었던 훈지 형제를 닮았다.
대체 이 나무가 어떤 마력이 있어 나를 잡아당기는지 모르겠다. 신령한 기운에 이끌리듯 다가서 꼼꼼하게 살피며 말을 걸어봤다.
“너 왜 내 발길을 자꾸 잡니?”
묻는 말에 향나무가 반가운 듯 화답하였다.
"내 속을 좀 들여다보라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줬으면 해서 그러지."
가슴 한쪽이 싸하게 아파왔다. 텅 빈 나무속에 어린애같이 맑아진 엄마의 영이 느껴져서다. 삼백오십 살 향나무와 구순의 엄마가 닮은 모습이었다. 둘 다 가슴속이 텅 비어 있었다. 향나무 속에서 공허한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무섭고 까탈스러운 남편과 까칠한 시어머니 등쌀에 천둥벌거숭이 같은 전실 딸까지 건사했다. 게다가 빈곤한 살림살이였다. 엄마 속은 썩을 대로 썩어 뭉그러져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 삼 형제를 잘 키우고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막내까지 서울대 입학했을 때 일간지의 한 면을 장식하기도 하였고 그 덕분에 청와대에 초청받아 갔었다. 엄마는 지금도 청와대에서 키 큰 대통령과 식사했던 얘기를 한다.
자식들이 성가하고 여러모로 여유가 생겼다. 한 숨 돌린 엄마지만 결코 편안함에 머무르지 않았다.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십 년 세월을 병원에서 봉사했다. 당신 몸이 아파 그만둘 때 병원장의 감사패까지 받았다.
전에는 엄마의 희생이 그다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쑥불쑥 미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내 나이가 지긋해지니 비로소 엄마의 삶과 고뇌가 눈에 보였다. 세월에 장사 있으랴, 약해진 엄마의 몸속을 병마가 파고들었다. 텅 빈 향나무 속에 여린 싹처럼 점점 어린애가 되어가는 가여운 엄마가 내 가슴에 살갑게 다가왔다. 당신 배 아파 낳은 딸이 없으니 이젠 나한테 어리광 부리며 의지한다. 아기같이 매달리는 엄마가 안타깝고 애잔하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제목의 판화가 있다. 유명한 미술가 겸 판화가인 조르주 루오의 작품이다. 가족과 타인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온 엄마가 바로 향나무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곱고 착한 사람만 있을까? 나에게 상처 주는 미운 이웃에게도 독이 아닌 향을 묻혀 주는 향나무의 선함을 본받고 싶다. 루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야겠다. 노거수 옆에 서니 내 몸에 향내가 담뿍 밴듯하다. 만감에 젖어 횡계 서원 향나무를 엄마 안 듯 품고 있었다. (2023년 3,15일/ 11.5매)
2. 카프리 섬 가는 길 / 이호규
1) 지난봄, 오랫동안 벼루고 벼류었던 서유럽을 13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로마로 들어가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런던에서 나오는 패기지 여행이었다. 그중에 폼페이와 소렌토 투어 후 카프리섬을 다녀오는 옵션이 있었다. 세계여행 경험이 많은 지인에게 그 많은 세계 여행지 중에서 다시 한번 더 가신다면 어디를 선택할 것인지 물었을 때 주저 없이 ‘카프리섬’을 말씀하셨기에 처음부터 기대가 높았던 여행지였다. 수많은 여행지 중에도 특별히 관심이 높은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여행 중에도 ‘카프리섬’이 그런 곳이었다.
2) 첫째 날은 로마 시내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둘째 날, 폼페이와 소렌토를 거쳐서 카프리섬에 배를 타고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일기예보에는 흐리고 비가 온다고 했다. 어제는 페리호가 파도 때문에 운항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오늘은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다.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한순간 화산재에 묻혀 사라졌던 비운의 도시 ‘폼페이’에 도착했다. 그늘 한 점 없는 고대 유적지 투어에 흐린 날씨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영화에서 보았던 검투사들이 생존을 다투었던 그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3) 폼페이에서 소렌토 가는 길은 낡은 열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해안선을 달렸다.
아름다운 코발트 빛 지중해 바다 색깔이 아닌 회색빛 바다를 보며 소렌토에 도착했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칸초네가 유명한 소렌토에서 비를 맞으며 좁은 골목을 누볐다. 비 오는 거리의 어느 유명한 카페에는 노천까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우리도 그 언저리에 서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잠시 감흥에 젖어 보았다. 짧은 시간의 낭만을 맛보고 카프리섬으로 가기 위해 페리호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4) 어제 출항하지 못한 탓인지 페리호에는 손님이 많았다. 출발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높은 파도에 배가 심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배 멀미 증상으로 여러 사람이 곤혹스러워했다. 배가 출렁일 때마다 젊은 단체여행객들은 환호를 지르며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선실이 답답하여 밖으로 나와 멀어져 가는 소렌토 언덕의 하얀 집들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해보았다. 울렁이던 멀미 증상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물안개 속으로 소렌토는 점차 멀어져갔다.
5) 이름만 들었던 환상의 섬 ‘카프리섬’에 도착했다. 지중해풍의 하얀 집들이 해안선을 따라 나지막하게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카프리섬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현(縣)에 딸린 작은 섬이다. 지중해 나폴리만(灣) 입구, 소렌토 반도 앞바다에 있다. 서쪽은 높이 600미터를 넘는 고지를 이루고 섬 전체는 용암으로 뒤덮여 있다. 온난한 기후와 풍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유명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지가 남아 있다.
6) 카프리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가랑비가 내리는데도 모두 인증-샷 촬영에 열중이었다. 희뿌연 하늘이지만 해안선 배경으로 늘어선 하얀색의 지중해풍 별장지대는 탄성을 지어내기에 충분했다. 젖은 옷도 말릴 겸 전망 좋은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를 시켜놓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여행의 묘미를 즐겼다. 광주에서 오신 광신이씨 가족 아홉 분도 같은 카페에 들려서 커피를 마치며 가족의 정을 나누고 계셨다.
7) 잠시 휴식 후 섬 아래쪽으로 투어를 이어 갔다. 좁은 골목 사이로 명품 샵들이 나열해 있고 호화로운 호텔들이 동네 어귀에 여러 군데 있었다. 한적한 위치에 있는 로마 황제들의 별장터로 이동했다. 가는 길목에 있는 상가들의 조경이 얼마나 예쁜지 가는 곳마다 촬영 포인트였다. 모두 나이를 불문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찍기에 열중이었다. 이제는 해외여행이 아니라 해외 촬영 간다고 해야 할 정도로 전문가 인양 사진 찍기에 몰두했다.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
8) 카프리섬에서 둘러본 곳 중에는 로마 황제 별장 지역의 풍광이 최고였다. 가파른 용암 절벽 밑으로 코발트색 바다 빛에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색깔에 잠시 넋을 잊고 바라보게 하였다. 때마침 하늘에도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을 잠시 허락하였다. 외진 항구에서 올라오는 지그재그 좁은 길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절대 권력을 가졌던 로마 황제들이 별장터로 삼은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코스 전체가 인증-샷 촬영에 최적의 조건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9) 당일 코스인 폼베이와 소렌토 투어에 추가된 옵션이라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카프리섬에서 유명한 “푸른 동굴”은 볼 수가 없었다. 용암 해안에 있는 작은 동굴로 보트를 타고 들어가면 물이 너무 맑고 아름다워 보트가 물 위에 떠 있는게 아니라 하늘 위에 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고 하였다. 다시 오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진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세계 3대 미항(美港)이라는 나폴리 항구로 이동했다. 똑같은 여행 일정도 우리 인간사처럼 주변 여건이 제대로 따라주어야만 진정한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3. 해파랑 길에서 만난 바위 /윤미선
포항 봄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온갖 봄꽃도 만개하여 봄소식을 전하였다. 머리가 산발이 될 정도로 거센 바람이 휘날렸다. 바람이 흔들어대는 심술에 미동도 않는 바다는 낯간지러운 웃음만 흘린다. 봄빛 치맛자락처럼 살랑거리는 햇살에 홀딱 마음을 던져버린 여심은 눈이 간지럽다.
하선대 해파랑 길을 걸었다. 데크길 시작지점에 힌디기라는 곳이 있었다. 포항 영덕은 특유의 음운 특색이 있다. ‘니더’로 발음하는 끝말이다. 이곳은 흥하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전해지며 ‘흥덕(興德)이’라 불리던 이름이 ‘힌디기’로 바꿔진 것이다. 덕을 품은 들판을 바라보며 한없이 넓어지는 마음으로 데크길을 올랐다. 바다를 향한 바위는 병풍처럼 당당한 품새로 온갖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바위는 파도소리에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 바다 곁을 지킨다.
바위의 나이는 누구도 모른다. 처음에 선 그 자리 그 형상에 세월을 덧입었다. 화산열에 의한 백토(벤토나이트)성분이 드러나 하얀 빛깔의 바위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화산폭발에 대한 기록은 천년전의기록들이다. 바위의 나이는 천년이상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이전 바다가 올 때 같이 와 서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뜨거운 화산재를 견디고, 밀어닥치는 파도에 아랫도리가 패이고, 퍼붓는 비바람에 봉긋했던 가슴을 내어주며 오랜 풍상을 온 몸에 하나하나 흔적을 남기며 나이를 먹었다.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패이고 깎이며 조용히 서 있는 바위를 보니 내 모습이 비춰 보인다. 나이 오십을 넘어가는 여자의 몸매란 가히 가관이다. 불룩하게 나온 아랫배를 경계로 허리는 드럼통이고 위 뱃살은 늘어져 어디가 배이고 허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축 늘어진 젖가슴은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반비례해 빈껍데기로 내려앉았다. 바위의 두리뭉실한 풍채는 나잇살 붙은 나의 몸매 그대로이고 군데군데 패인 모습들은 여자의 젖가슴을 그대로 닮은 듯 빈 모습으로 내려앉았다. 바위의 표면이 파도에 씻기고 바람에 날리며 허옇게 변해 버린 모습은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흩날린다.
지구가 형성되면서 생명이 잉태되었고, 모태에서 솟구쳐 나와 바다를 가두었다. 바다 그 깊은 곳에 품은 생명을 바위는 미동도 없이 지키고 있다. 인간의 근본이 어머니에서 시작되어 이어지고 모태에서 나온 바다의 생명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머니의 깊은 물이 바다를 이루었다. 생명을 품은 바다를 지키는 바위는 어떠한 비바람에도 견디고 몸을 깎이는 아픔에도 미동도 않는다. 어머니도 제 살을 내어주는 사투를 온몸으로 받아 삼키며 한 없는 품으로 자식을 지킨다.
아름다운 여인을 넘어 억척스런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늙어가는 여자의 일생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바위가 온갖 풍상에도 당당히 맞서 바다의 생명을 지켜내고 나무와 풀을 지켜내듯 어머니는 자식을 온전히 길러내기 위해 고단한 시간을 온몸으로 이겨냈다. 한 가정에서 여자의 몫이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중하기 그지없다. 가족의 먹거리를 챙기는 것부터, 아이들의 손끝 하나까지 지키고, 예고 없이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온 마음을 다 하였다. 벼락을 맞고 비바람에 쓸리면서 오랜 세월을 온몸으로 쓸어 담았다. 어느 날 돌아보는 나의 모습은 바위처럼 깎이고 비어진 허깨비처럼 허옇게 늙어가고 있다.
도시와 시골의 그 어디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가풍과 집안의 모습에서 힘들었다. 더구나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아이들에게 여유있게 넉넉한 교육조차도 힘들었다. 한 달에 오백만원을 벌수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이직한 직장에서는 단돈 만원도 받지 못하는 달이 더 많았다. 15개월의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망망대해 길도 없는 바다에서 까만 밤을 견디는 바위처럼 한없이 막막했다. 항로 없는 일상에 방황할 때 나의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아이들이었다. 감기가 들어 입술이 터지면서도 보채지 않는 딸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아픈 가슴을 옭아매었다. 힘든 세월의 시간은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엄마의 직장생활로 혼자 자라야 했던 아픈 아이들을 어린이집 선생님께 맡기고 출근길을 나설 때 마음은 찢어졌었다.
어느 여름휴가철에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로 피서를 갔었다. 작은 텐트하나 치고 바위에 붙은 따개비 모아서 보글보글 끓여 아이들이랑 나누어 먹었다. 아이들에게도 잠시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쉴 수 있는 바다가 되어주고 기댈 수 있는 바위가 되어주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쁜 시간도 위로가 되었고. 아이들의 눈물 속에 지친 시간의 힘겨움을 털고 다시 용기를 내었다.
찰랑거리는 물빛아래 그때 아이들이 웃고 울던 시간들이 묻혀있다. 아이들의 아픔을 내 가슴에 담고 내려앉는 가슴은 뻥 뚫린 바위구멍처럼 아픈 흔적을 남겼다. 축 처진 젖가슴은 세월에 속살을 내어준 바위의 구멍처럼 내 아이들을 먹여 살린 생명이 되었다. 뻥 뚫린 바위의 구멍 안에 물새 들이 둥지를 틀고, 빈 둥지에 돌을 던지며 여행객들이 소원을 담는다. 엄마가 내어주는 젖가슴을 먹고 자란 자식들이 다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듯 바위는 새로운 생명을 품어준다. 바위 아래 늘어진 뱃살처럼 파도에 쓸려버린 구멍은 아이들을 품었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늙어가는 여인의 몸체와 같았다. 나이 들어가는 여자에게 출렁거리는 뱃살은 아이들에게 전부를 내어준 엄마라는 훈장이다. 바다를 품은 바위의 형상을 보면서 처연한 세월의 아픔을 품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억척스런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나온 세월보다 앞으로 더 짧다. 온갖 풍상에도 변함없는 바위처럼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엄마 일것이다. 이제는 어떤 풍상도 의연히 맞설수 있다. 남은 것은 더 허옇게 늙어가는모습만이 있을뿐이다.
4. 방 임대 유감 /금우동
임대차로 맺어지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는 경험상 매우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임차 건물의 관리 및 제세공과금의 부담과 생활 일상의 소소한 문제로부터 임차금의 납입 등에 이르기까지 신경 쓸 일이 의외로 많다. 상황에 따라 문제들은 상호 배려와 진성성을 다하는 관계의 관리 여부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고 문제가 되기도 한다.
‘반려견을 키울 수 있어요?’ 요즘 이런 문의가 부쩍 많아졌다. 난감한 일이다. 세상이 이웃과는 소통하기 어려워지고 나 홀로 생활 속에서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려견으로 생길 수 있는 자질구레한 걱정과 생활의 작은 불편을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인이 ‘재가 가족 요양보호사’인 관계로 배우자의 심리안정을 위하여 더욱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집에서도 반려견을 몇 차례 키워본 경험이 있다. 오래 정들었다가 죽게 되어 힘들었던 경험, 개의 건강 관리 및 일상 관리의 부담 등으로 이제는 더 이상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현재의 두산동은 수성못에서 사계절 잦은 축제가 열리기도 하지만, 들안길 맛 축제가 열리는 유흥음식점이 많아서인지 유난히 빌라가 많다. 빌라세대의 편리함, 주변 단독 세대 주의 폭발적인 증가 등으로 인하여 단독주택의 임대는 상대적으로 빌라에 비해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 집은 단독주택 2층에 2세대만 임대 가능 구조인데 이번에 우측 동편 임차인이 서울로 집을 사서 4월 3일 이사를 했다. 의성에 사셨던 후덕한 어르신 내외분이어서 한 편으로는 든든했었다.
대개 임차인이 한 번 임대차 계약을 맺으면 평균 7~8년 동안은 지속되었다. 이번엔 5년만에 이사를 하게 되어 비교적 짧은 임대차에 속한다. 지금까지 임대 경험으로 볼 때, 임대 과정이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만큼 한 번 임대 후에는 비교적 오래 가는 편이었다.
두산동은 일본 식민시대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소재지였다. 근현대사에는 신천을 중심으로 대구 정치 1번지의 유서 깊은 곳이다. 수성 못을 품고 있으며 주변 신천의 상류 고산골이 주변에 있고, 인근 진밭골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용지봉 등 나지막한 인근 야산 산책로가 잘 발달 되어있는 쾌적한 곳이다. 용학 도서관, 수성 아트센터 등 문화 시설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이 외에도 청도 등으로 나들이하기 좋은 팔조령, 헐티재 등의 코스는 드라이브 코스로서 일품이다. 수성구는 대구의 강남이라 일컬어질 만큼 교육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주변에 42층 트럼프 월드, 57층 SK리더스뷰 등 수많은 초고층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대구 수성구의 중심이다. 수성 관광호텔, 두산오거리, 범어 로타리, 동대구역을 잇는 박정희 도로는 대구의 어느 도로보다 가로 정비가 잘 되었다.
주변 상황이나 여건상으로는 그래도 대구에서는 주거환경 조건이 괜찮은 편에 속하므로 그나마 임대 여건은 용이한 편이다.
2층 방을 임대하기 위하여 아래 내용을 인터넷에도 올리고 집 대문 앞 담벽에도 써 붙였다 물론 주변 공인중개사무소에도 몇 군데 중개 부탁을 했다.
방 2칸 주ㆍ거ㆍ욕 임대
2층 남향 202호 13평.
베란다 약간, 도시가스.
보:1,000, 월:30.
수성구 들안로 2길 52-31(두산동 150-9)
TBC 수성못역과 들안길 남도명가 중간
010-2929-6447
이번에도 임대차 계약이 성사되는 기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임대가 되어야 그나마 숨통이 트일텐데....
5. 아들바라기 남편/장금희
오십 년 전 신랑은 서른 살. 나는 스물 다섯살에 결혼을 했다. 그 당시로는 다소 늦은 나이라 신랑은 아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일년이 훨씬 지나도록 감감 무 소식이었다
어느 날 새벽 일찍 일어난 신랑이 난데없이 꿈 얘기를 들어 보라고 성화였다. 고향의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던 중 광채가 눈부신 큰 잉어 한 마리를 낚아 올린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는 태몽인 것 같다며 싱글벙글 들떠 있었다. 그 뒤 신기하게도 나에게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외출했던 그이가 부산의 어느 유명한 한의사가 처방해준 한약이라며 한 보따리 내어 놓았다. 그 약은 임신 초기에 먹으면 100% 아들이 된다는 소문난 귀한 약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에다 이치에도 맞지 않은 것 같아 찜찜했지만 평소 신중하고 성실한 성품인 신랑을 믿고 성의가 고마워서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번쩍 번쩍 빛나던 잉어 태몽을 한번씩 떠올리며 열 달 동안 우리는 마냥 행복했고 내 배도 점점 부풀어 올랐다.
드디어 출산일이 다가오자 친정 엄마께서 김해에 있던 우리 집에 내려오셨다. 출산 때를 맞추어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우리집으로 와서 애기를 받아주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산통을 몇시간을 겪었고 태어난 아기는 4키로그램의 건강한 공주였다
태몽도 좋았고 두루뭉실한 배부른 모습도 영락 없는 아들이라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는데 이상했다, 퇴근한 사위에게 “하 서방 고추가 아니고 공주라네” 두어 번 말했지만 곧이 듣지도 않은 채 “헤.헤.장모님도 이제 보니 농담도 잘 하십니다” 하고는 기분 좋게 읍내로 가서 장을 잔뜩 봐왔다. 이틀동안 난산을 겪은 산모를 돌보는 것 보다 아들이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사위 얼굴 보기가 더 난감하다고 하셨다. 애기 아빠가 그 이튿날에는 아기 포대기를 벗기고 아랫도리를 직접 확인하고서야 “아니 이럴 수가! 이상하네”하면서 얼굴이 난색이 되어 방을 나갔다. 옆에서 보던 엄마도 나도 실망스럽고 안타까워서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자기의 핏줄이다 보니 이내 섭섭한 마음을 접었는지 며칠 뒤 작명책을 꺼내 놓더니 밤 늦도록 끙끙대며 예쁜 이름을 짖느라 온 정성을 들였다. 드디어 서른 두 살의 아빠는 첫딸 ‘하 주리’ 딸 바보가 되었다.
일년 뒤 연년생으로 또 딸을 낳게 되었다. 이번엔 별 반응이 없이 담담했다. 미련을 버린 건지 첫째에게 푹 빠져서 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달이 가고 두 달이 되어도 아기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말없는 항변인 것 같아 속이 상했지만 참았다. 하는 수 없이 주영이라고 내가 이름을 지어 출생 신고를 했다.
그 시절에는 국가에서 권장하는 산아 제한 정책으로 가구 당 자녀 둘 이상은 직장에서 주는 학자금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 못 면한다” "삼천리 금수 강산이 초만원 된다" 라는 표어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시댁의 어른들과 주위 사람들은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은근히 부담을 주시곤 했다. 우리도 어쨌거나 셋째를 낳으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임신이 되질 않았다. 몇 년 동안 기다리다 보니 책에서나 보던 상상 임신까지도 경험하게 되었고 심신이 지쳐갔다. 하던 의상실을 다 접고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챙긴 결과 7년 터울로 드디어 늦둥이 셋째 딸을 또 안게 되었다. 제왕 절개로 어렵게 출산을 하고 퇴원해서 누워 있는데 쿵.쿵.쿵, 벽을 치는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알고 보니 애 아빠가 1학년 2학년 위의 두 딸이 학교에서 받아온 각종 상장을 찾아내어 애들 방 네 벽에 쫙 다 걸어 놓고 있었다. 아들 없는 대신에 상장이라도 걸어놓고 봐야 한다고했다. 그 모습을 부엌에서 지켜 보신 엄마는 사위 보기 민망해서 도저히 못 있겠다 하시며 서둘러 가시고 말았다. 딸 낳은게 무슨 죄라고! 가슴이 쓰리고 남편이 미웠다. 그때까지도 그이는 아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걸까.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종족 보존의 본능 때문이었을까. 참으로 안타깝고 측은하기도 했다. 아기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면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딸들과 합동 작전으로 이름을 지었다. 어느 날 애들 학교 보내고 누워서 아기 젖 먹이다가 난데없이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감정들을 짐승처럼 소리로 토해내고 눈물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울어도 울어도 끝이 나질 않았다. 내 몸의 끼인 때와 세포 속의 먼지까지 눈물로 다 씻어 내고 말았다. 몸은 새털같이 가벼워 졌고 의식과 정신은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처음으로 느껴 본 감정이었다. 그 이후로는 누가 뭐라해도 아들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조금도 남아있지 않고 마음이 맑고 평온해졌다. 가슴깊은 곳에 슬픔이나 상처가 있는 사람이면 눈물을 흘리며 실컷 한번 울어본다면 치유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어느날 아기가 옹아리를 하기 시작하자 언니들이 귀엽다고 들여다보며 난리였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지나치던 아빠가 그날 처음으로 옆 눈으로 아기 얼굴을 보더니 슬며시 아기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부터 입이 벌어지고 얼굴엔 웃음 꽃이 활짝 피더니 막내에게 퐁당 빠지고 말았다. 애들이 울 적에도 아빠를 먼저 찾았고 항상 인기있는 자상한 딸들의 아빠였다.
우리는 딸 셋을 던져 놓고 키우듯이 했건만 바르게 건강하게 잘 커 주었고 셋이 다 전문직 여성으로 잘 살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제일 보기 흐뭇한 것은 세 자매가 우애가 남달라 둘째가 사는 호주에 서로 왕래하면서 정답게 지내는 것이 보기 좋다. 그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한 말이 ‘우리의 업적 중에 제일 잘된 것은 딸 셋을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두번이나 내게 말했다. 몇 년 전 먼저 하늘 나라로 떠난 남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뿌리깊게 박혀 있던 남아 선호 사상으로 여성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던 시대는 이제 저물었다. “인생사 세 옹 지마” 라는 옛말이 오늘따라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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