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하루에 보통 열 시간 이상을 일합니다. 그러나 주말에는 BMW 지프를 몰고 그의 농장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인이 됩니다. 그의 집 안은 너무도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배치된
가구나 소품은 짧지 않은 여행을 통해 얻은 진기하고 품격 있는 수집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시간에 쫓겨 살지는 않지만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는 적지 않은
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타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데 가치를 둡니다. 멈추지
않는 정열을 갖고 일하며 그것의 대가를 가치 있게 쓰는 일에 또한 열정적인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보보스(Bourgeois & Bohemian)’라 부릅니다.”
인테리어와 패션 등에서 선풍적인 지지를 얻었던 ‘젠(zen)’스타일이 어느 틈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하지만 지지 않을세라 좀더 새로운 것, 좀더 특별한 것을 찾는 현대인들은 이
빈 자리를 금세 ‘다르고, 특별한 것’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벌써부터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나
인테리어 디자이너, 패션 리더들은 바닥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끼고 있을 터. 그것은
바로 ‘보보스’의 바람이다.
부르주아(Bourgeois)와 보헤미안(Bohemian)의 첫 글자를 딴 보보스는 글자 그대로
현실적이고 중산층의 도덕을 옹호하는 돈 많은 사람들과 전통을 비웃는 자유주의자들을 한데 섞어놓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정보화 시대,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절대 어울릴 수 없는 평행선 같았던 이들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발생한 문화적 현상인 셈. 새로운 기득권층인 이 엘리트들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로서, 한쪽 발은 창의성의 보헤미안 세상에 있고, 다른 쪽 발은 야망과 세속적 성공의
부르주아 속에 담겨져 있다. 가문과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혈연과 학연을 통해 권력의 작용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음모적인 집단이 아니다. 이들은 부자이면서 욕심쟁이가 아니고, 윗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도 비위를 맞추지는 않는다.
사회의 상층부에 도달했으면서 아랫사람들을 경멸하지 않고,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사회적
평등이라는 이상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도 과도한
소비는 피하려 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했다. ‘필요한 것’이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것으로서, 의식주와 그밖에 생필품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란 우리가 남들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보 엘리트는 이 구분에 입각하여 자신들과 과거의
경쟁적인 엘리트들을 구별했다.
욕실에 2만5천 달러를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디오 시스템 대형화면 TV에 1만5천
달러를 쓰는 것은 저속한 짓으로 여긴다. 최고급 등산화에 수백 달러를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장에 맞춰 신기 위해 최고급 가죽 구두를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 부엌처럼 실용적인 공간을
꾸미는 데는 비용의 한계가 없다. 중상류층 여자들은 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부엌에 들어가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했다.
보보들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광대한 부엌에는 점심 식사대, 간의 의자, 붙박이
TV, 책장, 컴퓨터까지 준비되어 있다. 보보 스타일의 부엌은 한쪽 주변에 복합 냉장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넓은 부엌에 튼튼한 집기들을 갖춘다는 것은 스스로 요리를 함으로써 일상적인
삶에 까다로운 현실을 공유한다는 의사 표시다.
그렇다면 보보스에게 어울리는 인테리어란 무엇일까? 1980년대의 성취 지향적인 여피들은 주위를
표면이 매끄러운 것들로 둘렀다. 반지르르한 검정색 가구, 광을 낸 래커 바닥, 그리고 대리석처럼
매끈한 벽. 하지만 엘리트는 자연적이고 불규칙적인 환경을 만들고 싶어한다. 지나친 모던 스타일은
겉보기엔 깔끔해 보이지만 늘 닦고 빛을 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클래식 스타일은 부르주아에
알맞게 중후한 멋을 풍기지만 무겁고 칙칙한 인상을 주기 때문. 따라서 합리적인 보보스는 적당히
클래식하면서 적당히 모던한 스타일을 꿈꿀 수밖에.
“보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무조건 비싸고, 무조건 좋은 것보다
자신에게 있어 꼭 필요한 게 뭔지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합리성을 원칙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가구 대신 모던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제대로 갖춘 가구를 선택하지요. 디자이너들도
아마 신이 나서 꾸밀 거예요. 일단 규정화된 틀이 없으니까.”
LG데코빌의 디자이너 범승규 씨 얘기다. 그는 또한 보보스에 어울리는 인테리어의 한 예를‘체리목에
화이트 컬러’에서 찾았다. “오래 보아도 싫증나지 않으면서 멋이 나는 체리목에, 모던함과 세련미의
대표적인 컬러라 할 수 있는 화이트로 포인트를 주는 거죠.”
한편 어느 패브릭 디자이너는 보보 인테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감’이라고 말한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바닥보다 이름 모를 풀로 엮은 작은 양탄자, 매끄러운 플라스틱 장난감이 아닌
울퉁불퉁한 나무 장난감, 화려한 도자기가 아니라 투박하고 질감 있는 도자기(분청과 같은), 매끈한
튤립이 아니라 거칠고 독특한 야생화….
그러므로 도심 속에서의 지친 삶보다는 여유롭고 한적한 전원주택-비록 전원풍의 집이라도-을 꿈꾼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단순하면서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공간.
넓은 평수로, 값비싼 가구로, 깨끗한 카펫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시대는 분명 지났다.
1. 붉은 끼가 도는 목재 가구에 아이보리빛 패브릭이 세련되면서 중후한
느낌이 난다. 보보스는 자신이 원하는 소품은 꼭 집안에 장식하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잊지 않는다.
2. 정열적으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보보스들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여유를
즐길 줄 안다. 시간에 쫓겨 살지 않는다. 이를 테면 집안에서 난을 기르는 일도 그 중 하나에
속하는 취향이라 할 수 있다.
3,4. 보보스들의 집은 단순하다. 하지만 많지 않은 가구와 소품은 오랜 여행을 통해 얻어 진기하고
품격 있는 수집품들이다. 적당히 모던하고 적당히 클래식한 것이 그들의 스타일이다.
글.이문영(프리랜스 라이터) / 사진.장준기(마루 스튜디오) / 장소협찬.
로빈힐(02-515-4617) / 참고서적. 보보스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데이비드 브룩스 저,
동방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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