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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창비/ 2017
‘12.12, 5.18 재판’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은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5.18은 특별법 제정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으로 영국의 『대헌장』, 미국의 『독립선언문』 등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에서 길이 빛날 ‘유네스코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간행의 말)
5.18에 대한 평가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자그마한 주춧돌을 놓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우리가 정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80년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가 5.18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책이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시작, 부마항쟁과 10.26사태부터 1980년 5월 27일, 그 후의 이야기, 5.18의 가치 등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어떠한 상황을 바탕으로 쓴 글인지, 어떤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 1부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1-3)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1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이 유신독재를 붕괴시켰다. 10월 16일 ‘유신정권 타도’를 기치로 부산지역 학생들과 마산지역 시민, 노동자들이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였다. 군부대의 투입으로 부마항쟁은 일단락되었다. 27일 새벽 2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0.26 이후 중요한 변수는 군부의 움직임이였다. 전두환은 12월초 합동수사본부 수사과장 이학봉 중령에게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쿠데타 준비가 완료되자 전두환은 9사단장 노태우를 만나 거사일을 12월 12일로 정했다. 12.12군사반란은 단 하룻밤사이에 빠르게 진행되었으므로 일반 국민들은 오랫동안 알지 못하였다. 1997년 대법원은 12.12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이라고 판정하고 정권찬탈을 위한 내란의 시작이라고 규정하였다. 신군부의 정권장악 과정은 본질적으로 군사작전이었다. 신군부는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시위는 초기부터 강경하게 진압해야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1980년 3월 4일부터 사흘간 대대적인 충정훈련을 실시했다. 4월 14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하면서 두 개의 핵심 국가정보기구를 장악했다.
신군부가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준비태세를 갖춰간 데 비해 민주화운동 진영의 움직임은 더뎠다. 1980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민주화는 이제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1980년 5월초까지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의 대중적 지평은 크게 확장됐다. 이 중에서도 운동의 전위는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었다. 5월 2일 서울대의 민주화 대총회가 열렸고 7일은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민주화 촉진선언문을 발표한다. 10일 고려대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시점으로 잡았다. 14일 오후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 첫 가두진출에 나섰다. 광주에서 학생들의 본격적인 첫 시내 진출이 이루어진 14일 오후 3시쯤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들도 시내로 나왔다.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가 광주에 내려왔다. 5월 15일 광주에서 오후 2시 30분 도청 앞 광장에서 학생들의 집회가 열렸는데 전남대 교수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서울지역 총학생회 대표들이 긴급회의 가지고 시위를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결정되었다.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방은 가두시위를 중지했다. 5월 16일 광주지역 학생운동 연합지도부는 이날의 시위를 이전과 달리 횃불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날이 바로 5.16쿠데타 기념일이었다.
5월 17일 드디어 D데이가 밝았다. 낮 12시경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소요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김대중과 김종필이 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날 오후 5시에 전남대와 조선대에 천막이 설치되었고 7공수여단은 자정이 막 지나 광주에 도착하였다. 7공수여단 31대대는 전북대 32대대는 충남대를 점거했다. 18일 9시경 학생들은 대열을 짜 군인들이 막고 있는 정문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더 모여들었고 군인들이 해산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곤봉을 구타하였다.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몰려갔다. 군부쿠데타와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지방으로 확산되길 바랬다. 오후부터 시위양상이 변하여 더 조직적이고 과감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그날 저녁 9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는 광주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언론은 철저히 광주 상황을 외면했다 18일은 일요일이라 신문도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18일 오후 4시 30분 최규하 대통령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관련해 대통령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18일 시위를 대학생들이 주도하였다면 19일 오전 상황은 연행된 사람들 중 일반 시민이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 그만큼 시민들의 분노가 커진 것이다. 공수부대는 군중들을 여러 무더기의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 금남로에서 이들을 밀어낸 다음, 오후 4시경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을 연결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좌우측 도로변으로 밀려가면서 더욱 치열하게 시위를 이어갔다. 기름통 폭발과 바리게이트의 파괴, 짧은 시간이였지만 가톨릭센터 건물의 군인들을 제압 등 19일 오후 금남로 전투에서 시위 군중이 거둔 부분적인 승리의 성과는 그들의 사기를 높였다. 3시경 시위대는 MBC방송국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엄청난 학살사태를 철저히 외면하는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응징이였다. 군인들은 부상자를 이송하는 택시기사를 구타하여 택시기사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래서 다음날 20일 차량시위로 이어지게 된다. 오후 4시 50분 최초의 발포 상황이 일어났다. 20일 오전 10시경 광주지역 기관장회의가 열렸다. 윤흥정은 31사단장과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유혈진압을 하지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다.
(4-7)
4 전면적인 민중항쟁
5월 20일 화요일 / 항쟁 3일째
광주 시내 중•고등학교에 대해 전면적인 임시 휴교 조치 계엄당국은 육군본부가 발행한 [폭동진압작전 교범] 을 무시한 채 맨 마지막 단계에서나 투입해야 하는 공수부대를 가장 먼저 출동 시켰다
오전 10시경 대인시장 주번에는 1천여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두번째 사망자 김안부 발견
오전 10시 20분부터 12시 50분까지 광주지역 기관장회의가 전교사에서 열렸다 기관장들의 건의 내용은 공수부대의 철수 혹은 공수부대 복장을 일반 군인 복장으로 교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2시부터 20분간 간담회가 열렸다
오전 10시 30분경, 금남로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잡아서 옷을 벗겨 때리고 기합을 주는 모습이 목격됐다 30명이 넘는 젋은 남녀가 속옷 차림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오전 11시 녹두서점에서는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11시 30분 11공수여단 61대대가 출동했다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공방전이 벌어졌고, 폭행과 연행이 이어졌다
20일 오전, 김수환 추기경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갔다 20일부터 광주에는 신문도 들어오지 않았다 학생들이 유인물을 제작하고 뿌리고 다녔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시민들은 변두리에서 다시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함 저녁 7시 쯤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금남로에서는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의 완강한 저지에 정면 공격이 불리하다고 여긴 시민들은 MBC 방송국으로 가서 7시 45분경 저녁 8시 뉴스에 광주 상황에 대해서 보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8시 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다 방화를 시도했으나 실패 박기현은 책을 사러 갔다가 공수 대원에게 붙잡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밤 9시 20분경 배용주의 버스에 경찰 4명이 깔려죽었다
밤 10시경 MBC 방송국이 방화되었다 이는 시민들의 MBC에 대한 3번째 공격이었다 밤 10시 30분경 최루탄 가스에 실신해 있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집단 폭행을 당한 청년 1명이 숨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20일 밤 광주역 전투에서는 최소 5명 이상의 시민이 이날 밤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공수 대원도 1명 사망했다 밤 10시 경 첫 공수 대원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밤 11시경 전교사령관은 공수부대의 시 외각 철수를 건의하였다
5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
5월 21일 수요일 / 항쟁 4일째
21일 새벽 2시 40분부터 아침 8시 50분 사이에 20사단 61연대에 이어 사단사령부와 62연대가 차례로 송정리역에 도착
21일 새벽 4시 무렵 광주역 맞은편 KBS 광주방송국이 화염에 휩싸였다 계엄군이 미처 치우지 못 한 시위대의 시신 2구를 발견한 시위대는 2명의 시신을 리어카에 옮겨 싣고 태극기로 덮은 다음 1천여명의 시위대와 함께 행진했다 21일 새벽 2시경부터 광주에서는 시외 전화가 완전히 끊겼다 고속 버스와 열차도 시내로 진입할 수 없었다 아침 8시 45분 20사단 지휘 차량 14대가 탈취되었다 시민대표와 도지사가 협상을 하고 오전 10시 45분경 장형태 도지사는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12시가 되서도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공수부대 장갑차에 깔려 군인이 사망을 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에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펴지고 명령에 따라 ‘집단 발포’가 시작 되었다 공수대원들은 조죽 사격을 하기 시작했고 시민을은 그 때 까지도 총을 소지 하지 않았다 총탄들은 건물 옥상에서 날아오고 있었고 공수대원들은 시민들을 향해 조준하여 저격했다 총이 필요하다고 느낀 시민들은 무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집단 발포로 사람들을 죽인 가해자들은 ‘발포명령’을 은폐하기 위해 ‘자위권’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오전 10시 49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계엄군의 ‘자위권 보유’ 을 재확인 했다. 이날 오전에는 ‘자위권 발동’을 건의했고 전두환은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 5월 23일 이후 폭도소탕 작전 의명 실시’ 등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후 4시 30분 또 다시 국방부장관실에서 회의가 열렸으며 이 회의에서 군의 자위권을 보유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광주 현지에 출동한 지휘관들은 ‘자위권 발동’ 지시를 ‘발표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 밖의 24일 송암동과 호남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서 계엄군 간의 ‘오인전투’에 의해 발생한 군인들의 많은 희생도 ‘지휘체계의 이원화’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 1백여대의 차량이 무기를 싣고 광주공원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화순에서 무기를 가지고 온 시위대는 광주 지원동 다리와 학동 석천다리 부근에서 무기를 배부했다 비슷한 시각 나주와 담양에서도 무기를 나누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교전으로 바뀌었고 계엄군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공수부대였고 이에 맞서는 시민군은 재래식 소총이었다 시위대의 무기 획득은 계속되었다 시민군이 광주를 지키겠다는 말을 하며 돌아다녔다. 기본적인 총기류 사용 교육을 마친 무지시위대는 특공대를 조직했다. 한참 바쁘게 움직이던 이들 사이로 기관총 LMG 총신이 나타났다. 1대가 아닌 2대 결국 LMG가 전남대 졍원 옥상에 설치된 것이다 그 시각 계엄군은 위협하기 위해 시내에서 철수해버렸다. 계엄군 들은 임산부에게도 조준 사격을 하였다. 21일 오후 4시경 육군참모차장은 전교사에 있는 기갑학교장에게 “전차 1개 대대, 32대를 즉각 출동시키라”고 전화로 지시했다. 21일 오후 광주를 봉쇄한 후 자위권을 발동하여 진압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5월 21일~ 24일
신군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시위가 서울로 확산되는 것을 봉쇠하는 것 이었다. 초기 진압작전 실패 후 전면적인 외각봉쇄 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21일 오후 4시부터 10개 대대의 지휘권을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사실을 은폐하고 발포행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봉쇄 사실을 미처 모르고 봉쇄덤를 통과하려다 많은 학살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로봉쇄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보유’ 천 명과 ‘계엄훈령 제 11호’ 지시가 있게 되자 시민들에게 대한 계엄군의 살상 행위가 공공연하고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24일경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시위 차량이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제 2부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항쟁 5일 날이 밝았다. 공수부대들은 부마항쟁 때처럼 시위대가 쉽게 해산되지 않자 당황했다. 18일, 19일에 공수부대 7단, 11단은 강한 진압을 했는데, 이 진압으로 인해 강력하고 공격적으로 변한 시민이 같은 사람이 아닌 적이나 간첩으로 보였다고 한다.
공수부대가 퇴각하자 경찰은 체포를 하지 않았고, 질서와 체계가 지켜졌다. 시민들은 무용담과 공수부대의 잔인성을 느꼈다.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회의하고 자발적으로 금남로를 청소하며 시민군에게 생필품(식량, 약품 등)을 제공했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과 병력을 정비했다.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시내의 치안을 유지했다. 김원갑, 김화성 등은 차량 임무 부여를 맡았고 각 차량의 운행 지역과 업무를 정확하게 나누었다. 엔진이 타거나 파손되고, 주유소마다 기름이 충분하지 않아 차량통제가 시급한 때였다. 무장시민군은 연락마다 광주공원(광장)으로 모였다. 경계병을 배치하고 바리케이드 등 계엄군의 시내 진입에 대비했다. 이들은 여러 조직을 만들었는데 경비반과 기동순찰대가 있다. 경비반은 도청을 관리하고 시신 관리, 무기 지급을 맡았고 기동순찰대는 총기를 소지하며 계엄군과 대치하는 지역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용 지프, 트럭, 장갑차, 가스차 등이 배정되며 무기 회수 홍보를 했다. 시민군들은 옷 갈아입기나 씻기 등이 되지 않았고, 계엄군들이 퇴각할 때 흘린 물건을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은 시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체적으로 수행하였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이재의, 안길정 등이 오전부터 도청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다. 도청 상황실 전화로 외각 지역 방어를 담당한 시민군들과의 연락체계를 확립했다. 도청 안에 있는 수류탄, 소총, 방독면 등을 모아 정리하고 무전기 5대로 교신 내용을 파악했다. 무전 감청을 통해 공수부대의 퇴각 상황을 파악해 계엄군들이 광주 도심권으로 당장 진입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도청 정문 기둥 위에 올라가서 사망자 명단과 현재 외각지대의 계엄군 동향 등을 상황실에 접수되는 대로 육성으로 시민들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조직은 준비되지 않았다.
도청에 여고생, 여대생이 상당수가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취사실과 상황실, 수습위원실, 방송실 등에서 취사와 행정지원 업무를 맡았다. 박영순은 24일부터 방송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홍보활동을 했다. 상황실, 수습대책위원회 회의실에 배치된 여학생들은 출입증을 제작하고 사망자 명단을 작성했다. 또, 모금관리와 스피커로 방송 등을 했다. 오전 10시 30분 경 군용 헬기가 ‘폭도들에게 알린다’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했다. 억울한 시민들은 화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1시엔 공수대원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아 조사 후 원래부대로 복귀시켰다. 11시 20분 경 헌혈차, 시위대 지프가 헌혈을 호소했고 시민들은 그 차를 타고 병원으로가 헌혈했다. 오후 도청에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정보원, 공작원이 끼어들 소지가 커졌다는 소리이다. 이재의, 안길정 등 전남대 학생들이 상황실 출입을 통제했다. 오후 3시 쯤 외신기자 노먼 소프가 통역사와 함께 상황실에서 취재했고 오후 4시 쯤 광주일고 재경 동창회에서 방문 수습안을 전달했다. 예비군들은 전일빌딩, 우체국, 전신전화국 등 공유재산인 공공건물을 자체 경비했다. 비록 MBC, KBS, 세무서, 파출소는 왜곡보도와 유혈 진압에 대한 항의 표시로 불태워졌지만 말이다. 이런 시민들은 분수대에서 서로 발언을 했는데, 발언자들 모두 ‘생존권 수호’라는 원칙에 동의하고 있었다.
같은 날 아침 8시 15분 도청 2층 부지사실에서 정시채 부지사, 문창수 기획관리실장, 김동한 내무국장, 김경수 비상기획관 등 전남도청 간부와 일부 직원들이 회의했다. 사태수습에 관한 이야기였다. 12시 30분 경 목사, 신부, 변호사, 관료, 기업인 등 15명의 지역 인사가 참여하고, 독립유공자 최한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5.18 수습대책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계엄 당국에 제시할 7개의 항목의 요구사항을 결정했지만 군부정권 퇴진, 민주 정부 수립에 대한 이야기는 내용에서 찾을 수 없었다. 계엄군의 과잉진압 인정, 구속 학생 및 민주인사 연행자 석방, 시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 조상, 발포 명령 책임자 처벌과 국가 책임자의 사과, 사망자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치를 것, 수습 후 시민, 학생들에게 보복하지 말 것,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기 자진 회수 반납 무장해제가 그 내용이었다. 오후 1시 30분 경 수습위원회 중 선발된 학생 대표 8명이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 계엄군측과 협상에 나섰다. 수습위원은 7개 항의 요구조건을 설명했지만 계엄군측은 막무가내였고, 선별 석방, 보상만 이야기했다. 나머지 사항이 이루어지지 않자, 수습위원은 무기 회수를 서두르자고 의견을 모았다. 시민측에서도 정부의 태도가 강경하자 협상결과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윤상원, 김영철, 박효선, 김태종, 정현애, 정유아, 이윤정 등은 시민수습위원회가 시민들의 의사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 때 민주화운동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동년, 김상윤 등은 예비검속으로 17일 밤 연행되었고,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단도 피신하거나 계엄군의 철통같은 봉쇄작전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광주에 진입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WCA와 YMCA 등 시민사회단체 임원들과 인권변호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 등 재야 민주인사 상당수가 광주에 있었다. 이들은 녹두서점에서 소식을 접했고 숫자가 불어났지만 윤상원과 김영철을 제외하고 흩어져 버렸다. 계엄군의 발포 때문이었다. 윤상원과 김영철은 들불야학 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오전 11시경 도청 뒤쪽에 있는 남동성당에서 재야 민주인사들이 도청 수습대책위원회와는 별도로 수습대책을 논의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 개편되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 회수를 결정했다. 도청과 광주공원에 무기접수처를 설치하고 총기 회수를 설득했다. 시민군 일부가 총기를 반납했지만 무장시민군 가운데 상당수는 무기 회수를 유보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곳곳에서 암매장된 채로 발견되었고 도청으로 옮겨졌다.
토머스 로스 미 국방성 대변인은 “한국군을 시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동희했다”고 밝혔다. 이날 미국정부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긴급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전두환을 견제하려 오는가보다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작전통제권을 해제하여 달라고 한 요청을 승인한 상태였다. 데이비드 밀러 공사는 광주 미국문화원장인데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관광호텔에 체류하면서 광주 현장 상황을 그라이스틴 대사에게 매일 보고했다.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군사적 해결이 예상된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미국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다라고 보고했다. 21일 보낸 두번째 보고서는 미국인을 구출하자고 했지만 피터슨 목사는 “외국인이라고 차별 당하지 않고 환영받았다”고 말했다.
23일 외곽지대에선 총성이 계속 들렸고 계엄군은 외곽을 포위한 채 봉쇄작전을 펼쳤다. 새벽 6시부터 7시까지 시내 곳곳을 청소했으며 제각기 자기의 동네와 도로를 깨끗이 쓸어냈다. 시장 주변에선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솥으로 밥을 지어 시민군에게 나눠 주었다. 도청 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 강당에는 수많은 시신이 뉘여져 있었고 입관하지 못한 시신도 많았다. 오전 10시 수습대책위원회는 수습위원들 몇 명이 사퇴를 하자 새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때부터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가 함께 논의해 확대수습위원회가 되었다.
확대수습위원회는 계엄사에 요구할 8개 조건을 다시 확정했다. 계엄군, 공수부대의 지나친 과잉진압을 인정할 것, 연행자를 석방할 것, 계엄군의 시가지 투입을 금지할 것, 시미 학생 처벌 및 보복 엄금할 것, 정부 책임하에 사망자, 부상자의 피해 보상할 것, 방송 재개 및 사실 보도를 촉구할 것, 자극적인 어휘 사용을 금지할 것, 시외 통로를 열 것. 이 그 내용이다. 무기 반납에 대해서 수습위원들은 요구사항을 보장하면 반납을 하겠다고 했지만 계엄군측에선 무조건을 얘기했다. 협상이 길어지자 명노근 교수가 남기로 했고 요구사항 중 6개 항에 대해선 어느정도 합의를 보았지만 석방하라는 조건에서 막혔다. 그래서 다음날 10시에 의논할 것을 하고 그날 합의를 끝냈다.
조비오 신부 등 계엄분소에 협상대표로 갔던 수습위원들 일부가 석방자 34명을 데리고 돌아오자 수습위원회에서는 무기 반납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날 서울에서는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롯데호텔이서 공화당, 유정회, 신민당 소속 의원 8명과 점심을 함께하며 광주에 대해 얘기했다.
수습대책위원회와 별도로 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하던 몇사람은 시민군을 조직화하고 있었다.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높은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투장비의 철저한 관리와 실탄 확보, 유류 낭비의 통제, 대전차 방어선 구축, 식량 확보, 조직체계 정비 등이 시급했다.
오전 일찍 녹두서점에서 김영철, 윤상원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수습대책위원회를 불신했다. 시민궐기대회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오후 3시에 1차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윤상원은 도청에 들어가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을 만나 시민궐기대회와 가두방송, 홍보전단 제작 등 홍보활도을 맡겠다고 협의한 후 도청을 나왔다.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궐기대회 개최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한편 김정희, 이현주, 윤만식,최인선과 임영희, 정현애, 홍성담 등은 국세청 앞뜰에서 여러 가지 구호를 담은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도청 담장과 상무관, 경찰서 차고 등에 걸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도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몰렸고, 3시까지 15만명에 이를 만큼 시민들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22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협상보고대회와 달리 23일 궐기대회는 격식을 갖추어 진행되었다. 발언자들ㄹ은 현 사태에 대해 의견을 말하거나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했다. 궐기대회는 박효선이 연단에 올라 수습대책위원회의 전달사항과,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내일 열린다는 것은 안내하고, 모두 함께 민주주의 만세!를 삼창하고 나서 끝났다. 시민들이 흩어질 때 쯤, 헬리콥터가 시내 전역에 계엄사의 전단을 뿌렸다.
그날 오후 6시경 YWCA 강당에는 청년, 극단 단원, 송백회 회원, 들불야학 학생과 강학 등 40여 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식량, 유류, 전기, 수도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과 시신관리, 지도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24일 아침 9시 명노근 교수는 전날 약속한 대로 김기석 소장과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교사 부사령관실로 찾아갔다. 갑자기 대화 도중 언성이 높아지더니 서로 총을 겨눴고 합의하자는 말도 못한채 명노근 교수는 상무대 정문을 나섰다. 24일이 되어도 학생수습위원회에서는 무기 회수에 관해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무기를 회수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계엄사에 반납하는 것은 반대하는 게 시민들의 의견이었다. 도청 수습위원회가 무기회수를 본격화했고 시민군들은 거부했다. 25일까지 회수된 총기는 90퍼센트 정도가 회수됬고, 나머지는 도청을 사수하겠다는 항쟁파와 그에 동조하는 시민군들에게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11공수여단 선두가 무장시위대 10여명을 발견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진월동 원제마을 앞 원제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어린이들에게조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중학교 1학년 방광범이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전재수는 넘어져 고무신을 주워 들려는 순간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친구들과 놀고 있던 5학년 김문수도 총에 맞아 부상당했다. 오후 1시 55분에는 11공수여단이 광주비행장으로 이동 중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 교도대와 오인전투가 있었다. 오인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송암동 주민을 학살하기까지도 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는 김창길 위원장의 사회로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계엄 당국에 제시할 네가지 요구사항이 채택되었다. 첫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피해 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이 결의사항은 오후 3시경 학생수습위원회 명의로 계엄 당국에 제시할 것을 결의하고 김종배 부위원장이 발표했다.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된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서 수습위원회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도청 수습위원회는 궐기대회가 사태의 수습을 더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판단해 궐기대회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궐기대회를 통해 저항의 공동체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자 궐기대회를 무산시키려는 계엄군측의 방해공작도 나타났다. 제 2차 궐기대회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성황을 이뤘다. 그날 궐기대회 평가회의에서는 네가지 행동지침이 설정되었다. 첫째, 재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하여 항쟁과정에 적극 참여시킨다. 둘째, 시민들이 궐기대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한다. 홍보에 필요한 방송시설을 확보하고 유인물, 플래카드, 리본 등을 제작한다. 셋째,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주의적 노선을 투쟁노선으로 바꿔나간다. 이를 위해서는 도청 내의 일부 투쟁지도부와 연대한다. 넷째, 투사회보, 차량 방송과 궐기대회를 통해 투쟁이 동참할 청년, 학생들을 모아 도청에 파견한 다음 시민군으로 재편성한다.
밤 8시 30분에 도청 지하 무기고에서 군 폭약전문가가 뇌관을 제거했다. 9시엔 도청 상황실에서 또다시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무기 반납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편 더욱 견고한 항쟁지도부를 준비하던 청년들은 투쟁노선을 새롭게 정하기 위해 논쟁을 벌였다.
5월 23일 서울 일부지역에 ‘전두환 살육작전’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최초 광주 소식이었다. 외신기자들도 전세계에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
25일 아침 8시 도청 내 독침사건으로 정보반 반장 장계범과 정향규가 전남대병원으로 실려 갔다. 계엄당국에서 프락치를 침투시켜 교란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장계범이 첩자였다고 수습대책위원회에서 공식 발표했고 도청 내부 분위기가 더 흉흉해졌다.
해방기간 나흘째로 접어든 25일, 시내는 질서를 회복해가고 있다. 상점이 문을 열고 피가 모자라면 피가 넘쳐 흐를 때 까지 시민들이 몰려와 헌혈을 했다. 사소한 범죄라도 발생하면 도청에서 대기 중이던 기동순찰대가 즉각 출동해 관련자를 데려와서 도청 조사부로 넘겼다. 시민들이 보여준 높은 도덕적 자율성은 피로 찾은 자유와 해방을 지키려는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후 3시경 광주사직공원 아래에 있는 성하맨션 주민들로부터 도청으로 ‘마스크를 만들어놨으니 가져가라’는 전화가 왔다. 그 외에도 장갑 50개, 빵 50개, 주먹밥 한 보따리가 있었다. 항쟁이 끝난 후 계엄 당국의 수사기관은 그동안 시민들이 김밥, 빵, 음료수 등을 시민군에게 자발적으로 제고했음에도 이를 ‘폭도들이 강제로 탈취’했다고 조작했다. 그리고 시민들을 연행하여 조사하고 일부는 고문까지 당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의 들불야학 교실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하던 팀이 YWCA로 옮겨왔다. 새 지도부를 준비하던 청년들은 평소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광주의 재야인사들에게 연락하여 25일 오전 10시 YWCA에서 현 사태에 대한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일부는 도청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채택 결의한 7개 항을 근거로 시민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먼저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년측에서는 반대했고, 수습대책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시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적인 재야 민주인사들이라고 하지만 무기 반납을 중지하고 투쟁 조직을 만들자는 정상용, 윤상원의 제안에 동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YWCA에서 회의가 끝난 후 재야인사 일부는 오후 2시 도청 뒤 남동성당에서 다시 모였다. 남동성당에 모인 재야인사들은 도청 수습대책위원회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어떻게 이에 대처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오후 5시경 남동성당에서 몽니 재야인사들이 도청으로 들어가 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했다. 재야인사들의 도청 수습대책위 참여는 조용하게 진행됐지만 큰 변화를 불러왔다.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것과 ‘피해보상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오후 3시 제 3차 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 도중 외각에서 온 주민들은 대학생들이 변두리 지역에 각 동별로 한두명씩이라도 파견되어 자신들의 민원을 처리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궐기대회가 끝난 후 도청에 투입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YWCA로 모였다. 신분이 확인되는 대학생들만 모집해 시민들의 신뢰를 획득하자는 취지였다. 무장시민군들이 대부분 노동자와 서비스 업종의 종업원, 고등학생, 재수생 등이었는데, 대학생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신뢰가 커서 빠른 시간 안에 조직을 정비할 수가 있었다.
오후 7시경 윤상원의 안내로 정상용, 이양현, 김영철, 정해직, 윤강옥, 박효선 등이 도청에 들어갔다. 이들은 새롭게 집행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했고 당장 무기반납을 중단하고 협상력을 강화시키자는 방침에 합의했다.
밤 10시 최후까지 싸우려는 항쟁지도부가 결성되었다. 이는 훨씬 조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고 명칭도 ‘학생수습위원회’가 아니라 ‘민주투쟁위원회’로 하였다.
항쟁지도부는 투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밤샘 회의를 진행했다. 외각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예비군 조직을 동원하자는 제안, 합동장례식을 ‘시민장’에서 ‘도민장’으로 격상에 ‘5월 28일’에 치를 것을 협상안으로 확정지었다. 시민 합동장례식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꾸 늦어졌다. 계엄당국의 검시때문이었다. 도청 지하 무기고에 있는 폭약을 이용하여 협상력을 높이자는 계획도 검토되었고, 새 지도부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하는 방안들도 검토했다.
항쟁지도부가 전열을 가다듬던 그날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 즉 광주소탕 작전도 확정되었다. 계엄 당국은 상무충정작건이 항쟁파가 도청에서 투항파를 몰아내고 항쟁지도부를 장악한 이후 수립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항쟁파 지도부가 들어선 시각은 밤 10시였다. 이 시각 도청에서 항쟁파는 아직 윤곽도 드러나지도 않았고, 전교사에서 매일 열리던 시민 대표와 계엄당국의 협상도 24일 아침 계엄군측이 강경기류로 돌변하면서 중단된 상태였다. 그래서 상무충정작전은 계엄 당국의 자체 계획에 따라 집행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은 곧장 김재명 작전참모부장과 같이 광주에 내려가서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작전지도지침을 전달했다. 한편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오후 4시 20분경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가 광주소탕 작전계획을 보고했다. 대통령을 앞세워 광주소탕 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한 모양새 갖추기였다.
오후 6시 최규하 대통령은 4개 부처 장관, 계엄사령관 등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헬기를 타고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함께 방문하였다.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밤 10시엔 항쟁지도부가 ‘민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26일 새벽 4시 무렵 계엄군이 광주 외곽 봉쇄지역 세군데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밀려들어온다는 급보가 무전기를 타고 들어왔다. 계엄군 진입 소식으로 도청 시민군에게는 비상령이 떨어졌다. 도청에서 밤새워 회의를 하던 수습위원들도 즉각 긴급사태를 논의했다. 수백명의 대열이 계엄군의 전차 앞에 멈추었고, 수습위원들은 그곳을 지키고 있던 계엄군 장교에게 군대를 원래의 위치로 물리라고 하며 책임자를 불러달라고 하자 잠시 후 검은 세단을 타고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이 나타났다. 수습위원들이 먼저 군대를 후퇴시키라고 하자 원래 위치로 후퇴시켰다.
아침 7시부터 4시간 30분 동안 계엄분소 회의실에서 협상을 진행하였다. 시민 대표 측에서는 수습위원회 대변인 김성용 신부가 주로 이야기했지만 계엄군측은 다시 무기 반납을 말하였다. 그제야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이 오늘 중에 도청소탕 작전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신군부 수뇌부는 이미 5월 27일 새벽 0시 1분 이후 ‘상무충정작전’, 즉 유헐소탕작전을 설정한 상태였고, 26일 아침 이 방침에 따라 전교사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렸다.
새벽에 계엄군의 시내 진입 소식이 알려지자 항쟁지도부는 당초 오후로 예정된 궐기대회를 앞당겨 오전에 열기로 했다. 이때 7개 항으로 된 ‘80만 민주시민의 결의’를 채택했다. 이 성명서는 ‘수습’에만 초점이 맞춰진 이전 것들과 달리 항쟁의 대의명분을 ‘민주화’로 분명히 했다. 궐기대회를 마친 후 스쿨버스를 앞세우고 수많은 시민들이 가두행진에 나섰다,
오후 2시 도청 내무국장실엣는 항쟁 지도부와 광주시장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광주시장에 9개 사항을 요구했다. 투쟁위원회는 유족 대표 8명과 함께 부지사실에서 정시채 부지사와 사회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절차를 논의했다. 5월 28일 장례를 치를 때 까지 계엄군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아니었다.
도청에서 여성들의 취사활동이 있었는데, 하루종일 밥을 지어 나누어 주었다. 22일과 23일은 지역방위대들이 경계하고 있던 학동, 백운동, 산수동, 화정동에도 주먹밥을 만들어 보냈다. 항쟁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두방송에 참여했다. 방송 차량으로 가두방송을 하면서 투사회보를 싣고 다니면서 뿌리기도 했다. 도청에서도 방송을 해 박영순은 27일 새벽 도청 상황실에서 마이크를 잡고 계엄군의 침입 사실을 방송했다.
오후 2시 항쟁지도부는 기동타격대를 조직했다. 외각지역을 순찰하면서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시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각 조당 군용 지프차 한 대와 무전기를 한 대씩 지급하였는데, 무기는 성능이 좋은 것들로 골랐고, 수류탄도 지급하였다. 항쟁기간 중 시민들은 계엄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막상 포로가 된 군인에 대해서는 한명도 고문을 하거나 살상하지 않고 모두 부대로 돌려보냈다.
오후 3시 제 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과 달리 시민행동강령을 채택하여 발표했고 ‘80만 민주시민의 결의’가 다시 낭독되었다. 궐기대회가 끝날 무렵, 항쟁지도부가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라고 발표했다.
오후 5시경 외신 기자회견이 윤상원 대변인 주관으로 도청 본관 2층 대변인실에서 열렸다. 대변인 윤상원은 새로 구성된 ‘민주투쟁위원회’의 입장과 계엄분소와의 협상결과, 피해상황 등을 간략히 브리핑했다.
오후 6시 도청 부지사실에서 수습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싸울 사람만 남고 항복할 사람은 나가라’고 윤석루가 권총을 들고 얘기하자 일부사람들이 도청을 빠져나갔다.
제 3부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항쟁의 완성
5월 27일 밤, 광주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26일 궐기대회에서 계엄군 진입 계획이 공개적으로 알려졌지만 도청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진격이 목전에 닥친 줄 알면서도 총을 껴안고 의자 위에 쓰러지거나 책상에 엎드린 채 여기저기서 잠이 들었다. 다들 긴장감이 극도로 심한데다 며칠씩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보니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항쟁 지도부는 YMCA 강당으로 시민군들을 모아 밥을 지어준 후,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나 여학생들에게 귀가를 강력하게 권유했다.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연설이 끝나고 예비역 대위 송진광이 앞에 나와 총기교육을 해 주었다. 실탄 장전, 조준, 격발 등 꼭 필요한 총기사용 요령을 간단히 가르쳤다.
새벽 2시경 도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계엄군 진입이 시작된 것이다. 시민군들은 조별로 배치된 위치를 찾아갔으며 여성들을 피신시켰다. 상황실장 박남선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시민군을 지휘했다. 실탄이 부족하므로 ‘계엄군 쪽에서 발포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먼저 사격하지 말 것, 사격은 상황실장의 통제에 따를 것, 되도록 근접할 때까지 기다릴 것’ 등을 지시하였다.
마지막 방송으로 새벽 3시 50분쯤 도청 옥상의 고성능 스피커에서는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벽 4시 직전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선발대가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하였다. 후문과 좌, 우측 담벼락 등 세 방향에서 동시에 기습 침투하되, 정문은 시민군 방어가 견고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맨 나중에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4시 10분경 시민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정문 쪽만 제외하고 도청을 공수부대가 완전히 에워싸면서 공격 개시 준비가 완료되었다. 공수부대는 수십 명의 시민군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담을 넘어 진입하였다. 후문 쪽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도청 본관에서는 2중대가 재빨리 옥상으로 먼저 올라가 옥상을 점령한 다음 위층부터 아래로 훑어 내려왔다. 또 한 사람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죽이라며 죽은 사람은 확인 사살하라고 지시하였다. 도청 지하 무기고, 도청 민원실에서는 모두 도청 현장에서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시민군은 도청 건물 내부뿐 아니라 바깥 쪽, 특히 도청 앞 광장 분수대 주위와 상무관 입구, 도청 정면의 담벼락 초소, 그리고 전일빌딩, YMCA등에도 소규모로 배치돼 있었다.
계엄군에게 1차 목표였던 전일빌딩에는 소수의 인원만 있고 별다른 저항이 없었기에 사격 없이 곧바로 시민군을 생포하였다. 이어서 YMCA와 관광호텔도 시민군들이 거의 없어서 계엄군이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YWCA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1공수여단의 YWCA 진압작전은 새벽 5시 15분에 시작돼 약 1시간 동안 지속된 뒤 6시 20분에 종료됐다. 광주공원은 7공수여단 33대대 8,9지역대가 새벽 5시 6분에 점령하였다.
27일, 새벽 5시 KBS 방송으로 계엄분소장의 담화 발표를 하고 전화가 개통하였다. 하지만 계엄군은 계속해서 가택 수색을 하고 불확실하고 의심이 되는 사람은 연행을 해 갔다.
남겨진 이야기
27일 항쟁이 끝나자 도청에 있던 시신들은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미니버스 총격이 있었던 지원동, 주남마을 앞 도로, 광주교도소 근처, 효천역 부근 등에서 죽은 희생자들의 시신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일부는 시민군들이 수습하여 상무관으로 옮겨졌지만 계엄군 점령지역에서는 방치된 채 길옆에서 썩어가거나 어딘가에 가매장, 혹은 암매장되었다. 계엄사나 중앙정부는 물론 광주시도 도청 이외의 지역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광주시청 사회과 직원 조성갑은 자신의 담당업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시신 수습에 나섰다. 5월 27일부터 6월 하순까지 약 1달 동안 41구의 시신을 직접 수습했다.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시신 수습이 끝나자 검시조서가 작성되었다. 보안사 주도로 사체검안위원회가 열렸다. 그런데 사인은 시기마다 매번 바뀌었다. 진압봉에 맞아 사망한 경우도 탈취차량에 의한 교통사고로,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일 가능성이 큰 사망자도 난동자 소행으로 바꾸었다.
도청이 계엄군에게 함락되었다 해도 항쟁이 끝난 게 아닌 것이다. 계엄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체포된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되었다. 상무대 영창으로 가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받고 인간적 모멸감을 느꼈다. 석방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또 합동수사단은 연행자 전체를 하나의 그림 속에 아우르는 엉터리 수사체계도를 그려서 수괴를 김대중으로 한 후, 광주지역 재야 수괴 홍남순, 대학생 수괴 정동년, 폭도 수괴 김종배, 극렬가담 불량배 박남선과 윤석루 등으로 체계도를 작성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이 ‘그림’에 끼워 맞췄다. 수사방향의 각본을 미리 만들어놓은 채 수사팀들이 고문을 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검거된 사람은 2522명으로, 이 중 훈방이 1906명이며, 616명이 군법에 회부되어 212명은 불기소되고, 404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군사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피고인들에게는 최소한의 권리인 변호사 선임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과정의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198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특별사면 조치가 내려져 정동년 등 12명이 형 집행정지로 석방됨으로써 광주항쟁 관련자는 풀려났다.
항쟁 이후, 미완의 과제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항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은 희생자 유가족, 구속자 가족들, 부상자들이 조직을 결성하여 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광주 항쟁의 진상규명을 위해 유인물을 살포하고 투신자살, 분신자살을 하는 등 5.18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점점 달아올랐다. 그런 일로 인해 1984년 5월 망월묘역 경찰의 봉쇄가 사라졌고 5.18희생자들의 추모를 위한 참배객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민주화를 위한 민중의 역사는 ‘6월민주항쟁’으로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냈다.
6월 항쟁은 5.18진상규명 문제를 국회에서 제기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후로 5.18 청문회도 도입되고 5.18 진상이 알려진다. 하지만 5.18의 진상을 안 국민들의 분노가 나오자 위기에 처한 노태우 정권이 5.18의 핵심 사항을 국회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이에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에서 고소를 하지만 조사도 진행하지 않고 무혐의로 판결된다.
그러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을 때 주춤하던 5.18진상규명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되었다. 많은 노력으로 마침내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2.12쿠데타, 5.18학살책임자가 모조리 기소된다. 이로써 17년에 거친 오랜 투쟁 끝에 한국 사회에 깊은 갈등과 논쟁의 원천이 된 5.18 민중항쟁에 대한 법적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5.18 재판은 인류사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정의가 승리한다는 점을 확인 시켜준 재판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특별사면으로 석방이 되긴 하였지만 1980년,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이라고 처벌하였던 것을 1997년, 광주시민의 저항을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인정받았다.
1994년 5.18 민주화운동 자료실 설치
1997년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간행
2010년 유네스코 등재.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발발과 진압, 이후의 진상규명과 보상 등의 과정과 관련해 정부, 국회, 시민, 단체 그리고 미국 정부 등에서 생산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기록물.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줌.
민주화 과정에서 실시된 진상규명 및 피해자 보상사례도 여러 나라에 좋은 선례가 됨.
○광주 문제 해결, ‘5대 원칙’ 모두 관철됨.
○5.18은 인류사의 진전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세계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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