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5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몸의 덜 귀히 여기는 지체를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준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2장).
그런데 이 종은 어찌 된 건지 내가 가장 좋은 것만 차지하려 하고 제일 높은 곳에 있으려고만 했었습니다.
한 때는 최고 많이, 최고 많이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최고 많이, 그것도 최고로 좋은 것을 얻을 줄 믿었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역자를 불러 전도집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봤자 얻는 거라곤 쇠락의 법칙에 따라 썩어 없어질 만물 안에 있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나의 영안은 점점 어두워지고 정욕의 눈만 밝아질 뿐이었습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이 나를 살려서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공동체가 함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소서.
예수를 나의 소유물로 오해하지 않고 나의 주요 생명으로 바르게 알도록 나를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욜 1:13-20
제목 :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라.
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6 먹을 것이 우리 눈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애곡할 것을 명하신다.
애곡을 해야하는 이유는 메뚜기 재앙이 남유다 전역을 피폐하게 하였고 또한 메뚜기 재앙으로 비견되는 이방나라들(앗수르, 바벨론)의 가공할 만한 공격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늙은이들과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애곡을 명한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에게도 애곡을 명하는 것은 그들이 마시는 포도주를 만들 포도 수확이 그쳤기 때문이다.
약혼한 젊은 처녀도 애곡을 하여야 하고 농부들도 슬퍼하며 애곡할 것이다.
13-14절, 이제 요엘 선지자는 제사장들에게 애곡을 명한다.
너희 제사장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슬피 울 것이다.
제단 앞에서 섬기는 자들은 소리 높여 울어라.
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소제물과 전제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고난을 위하여 성회를 선포할 것이다.
금식일을 정하고 장로들과 이 땅의 온 백성을 모아라.
그들을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다.
15-20절,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 재앙을 통해서 여호와의 날이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그 전조현상으로 지금 현재 일어난 메뚜기 재앙에 대한 절규가 이어진다.
선지자는 진짜 대재앙인 여호와의 날을 예견하면서 그 날이 가까웠음을 통보한다.
그것은 다른 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이다.
그 전조현상으로 지금 현재 그들이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통을 절규한다.
우리의 눈앞에서 먹을 것이 다 사라졌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졌다.
우리가 씨앗을 심었지만 그 씨가 싹을 틔우지 못하고 흙덩이 아래서 썩어버렸다.
곡식이 말랐기 때문에 창고가 텅텅 비고 곳간이 다 무너졌다.
짐승들은 배고파서 울부짖고 소 떼는 헤매고 있다.
먹을 풀이 없으니 양 떼도 고통을 당한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애곡을 하지만 더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을 바라보는 선지자가 직접 그 현실의 고통에 대하여 절규를 한다.
여호와여, 불이 일어나 들의 풀을 다 태웠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라버렸습니다.
들짐승조차 시냇물이 마르고 들풀이 다 타서 먹을 것이 없어 주를 향하여 헐떡거립니다.
이 모든 고난의 현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극한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불과 3-4년 전에 중동지방과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을 휩쓸고 간 메뚜기 떼의 공격이 뉴스를 통하여 전 세계에 송출되었다.
안 그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생사의 기로에 있던 지역인데 메뚜기 떼의 공격에 그들은 하염없는 눈물과 한숨짓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먹지 못하니 엄마의 가슴에 젖이 돌 수 없고, 엄마의 젖가슴에서 젖이 나오지 않으니 갓난아기들은 엄마의 빈 젖꼭지만 물고 소리 높여 울기만 하는 장면은 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그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불과 끝난 지 불과 2년여밖에 되지 않은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코로나는 어떤가?
모든 나라와 온 세상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는 부유한 나라나 가난한 나라나 예외가 없었다.
좀 부유한 나라들은 백신을 만들어서 가난한 나라들에 무상원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코로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입을 마스크로 틀어막고 외부활동도 제약되었다.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병원인들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혹여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각 진료소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코로나에 확진 되었다 싶으면 그 사람은 인격도 말살되다시피 각종 역학조사에 임해야 했다.
조사에 임하는 피조사자는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도 못 들고 온갖 모멸과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나 역시 코로나에 확진 되어서 그런 모멸과 수치 당하는 일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나는 코로나가 시작되는 시점에 확진이 되어서 이런 역학조사가 더 심한 때였다.
이런 상황은 요엘 선지자 시대나 지금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먹는 것이 그 때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코로나가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요엘 당시처럼 아예 먹지 못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고통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비례하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요엘 선지자 당시에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할 시련을 주신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애곡하라는 명령을 주시는 것은 단순히 울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선지자는 14절에서 특별히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모든 백성들이 성전으로 모여 주께 부르짖으라고 권한다.
그들은 이미 율법 안에서 금식을 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금식은 회개를 위한 금식이 아니라 절기를 지키기 위한 금식이었다.
하여 그런 절기를 위한 금식이 아니라 진정한 금식 곧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절한 금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구약적인 차원에서의 금식과 성회를 통한 여호와께 부르짖음은 그들의 행위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진짜 금식과 성회는 그렇게 닥친 고난과 시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주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금식과 성회를 통하여 외관상 눈물을 흘리며 애곡하는 것이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이었다면, 신약시대는 그런 문제 해결을 위한 금식과 성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실물 예시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복을 받는 자들은 물질적인 복이나 장수의 복, 자녀들이 잘 되는 복을 받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후에는 그런 것이 결코 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코로나이든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어나는 메뚜기 재앙이든지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이 몰라서 주시는 고난이 결코 아니다.
누구보다 나와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에게 당시에 그것이 꼭 필요해서 주시는 고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 고난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물론 지난 수 년간 이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애를 쓰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신앙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를 해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에 대하여 깊이 고찰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지구를 심판했던 것은 하나님의 악질적인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지구를 전멸하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하여 새 창조를 하기 위함이셨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영이 죄로 인하여 죽게 될 때, 주님은 다시 우리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주신다.
그 일을 통하여 율법에 속한 나의 육신은 죽이고 은혜에 속한 나의 영은 새롭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새 창조의 역사이다.
(롬 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런 역사를 통하여 죄에 머물러 있던 자, 육신에 속하여 있던 자들을 생명으로 건져내신다.
죽을 것 같은 고난이 아니면 그들을 도저히 건져낼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가공할 만큼 어마어마한 대재앙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을 통하여 그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죄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생명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주의 은혜의 역사이다.
나는 지난 코로나로 인하여 당한 고통은 생각하기도 싫다.
하지만 그 일이 주님이 주신 일임을 인정하기에 복음 안에서 기꺼이 수용한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인하여 지금도 두 다리에 힘이 없고, 걷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나를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지금부터 2800여 년 전에 있었던 메뚜기 재앙을 통하여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단순히 지금부터 너무나 먼 시기에 있었던 하나의 일화로만 그치기에는 그것이 주는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그 고통은 지금 현재 나의 죄를 돌아보게 하며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하였던 우상숭배였음을 인정합니다.
이런 나는 먹을 것이 끊어지고 곳간과 창고가 비워지며 무너지는 그런 대재앙을 받아야 할 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큰 고난을 주셨고 그로 인하여 성령 안에서 복음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음이 그저 은혜일 뿐입니다.
하여 오늘도 정말 하기 싫은 묵상을 참고 견디며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작할 때는 고역처럼 느껴지고 그저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갈 때, 나의 저 깊은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울림이 있습니다.
그 은혜의 울림이 오늘 나를 다시 한 번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요엘 시대에 주셨던 메뚜기 재앙,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홍수 심판, 욥에게 주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심판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심판입니다.
이를 복음 안에서 잘 보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는 묵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