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가 문제 많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내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들어온 소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안녕'하시다. 아니 안녕하시다 못해 회춘하셔서 수구의 전위노릇까지 팔팔하게 하고 계신다.
무엇이 잘못됐나? 여러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장사꾼의 수완에 맡겨버린 미국판 개교회주의의 원초적 문제점을 거론할 수도 있고, 박정희식 경제모델에 발맞춘 대교회의 성장드라이브를 언급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사회학자나 종교학자들에게 맡겨 놓자.
목사로서 한국교회의 밑바닥을 경험한 내가 우선적으로 지적하고픈 건 언어 문제다. 성경의 교훈과 배치되는 잘못된 언어를 바로 잡지 않고선 개혁은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선언적.추상적 언어를 바로 잡지 않고선 개혁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 4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중세적 하이어라키
-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데올로기
- 평생 걸음마 단계를 못 벗어나는 만년 초보신앙,
- 죽은 시인의 교회
1. 성직자와 평신도의 하이어라키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로 인해 각 교회 별로 나누어졌을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조차 성직자와 평신도의 두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 성직자 -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사자요, 주님의 종'님'.
평신도 - 죄악된 세상에서 일하다가 예배시간에만 교회에 나오는 평범한 신도들.
이런 구별 위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당연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
"목사의 기도는 '영빨'이 탁월해서 일반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고, 집사나 장로가 드리는 기도보다 훨씬 효력이 있고 하나님께서 잘 들어 주신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성직자요, 평신도는 다만 성직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도와주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곁에서 보조해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목사의 잘못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된다. 목사는 하나님이 직접 처리하신다."
"목사는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처럼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
"장로와 집사는 물론 평신도는 목사를 잘 섬기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일반인들이 들으면 기겁+질색할 이런 말도 안되는 사고들이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러한 생각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은 과연 성직자와 평신도를 교회 내의 두 계급으로 구분하는가?
'평신도'를 영어로 '레이맨'(layman, laity)이라고 한다. 이 말은 헬라어 '라오스'(laos)에서 온 말이다. '라오스'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cf. 벧전 2:9 등).
본디 이 '라오스'란 말은 헬라사회에서 도시국가의 시민들을 지칭하던 행정용어다. 그것이 나중에 통치자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단순한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전문화 됐다.
(cf.) 라오스(laos) - 관직을 갖지 못한 일반 시민 / 클레로스(cleros) - 행정관이나 고관
그러던 것이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대중들'을 가리키는 말로 전락하고 말았다.
(cf.) layman - 속인, 평신도, 풋나기, 문외한 / clergy - 목사, 성직자
이러한 언어 상의 이유 말고도 또 한 가지 역사적 이유가 있다.
AD. 3C경에 성례주의가 발달하면서, 이 성례를 집행할 특별한 계층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키프리안(Cyprian)이란 사람이 구약의 제사장제도를 본떠 '성례를 집행하는 제사장직'과 '이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평신도층'으로 엄격하게 구별했다.
이로부터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계층구조로 이어져 내려 오게 되고, 그 결과 로마 교황제도에까지 이르게 된 거다. 이에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만인사제주의'를 내세우며 투쟁하여 오늘의 개신교를 이룩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만인사제주의'는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고,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기묘한 계급적 이분법이 교회 안에서 활개치고 있다.
교회는 다시금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고, 평신도는 교회의 주변그룹으로 소외됐다.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창조해내신 '오직 하나 뿐인 하나남의 백성'을 우리는 다시 '성직자와 평신도'로 두 동강을 내고 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한다. 교회를 분리시키는 '성직자 / 평신도'라는 하이어라키는 페기시켜야 옳다. 성직자는 목사로, 평신도는 성도라는 말로 대체시켜야 한다.
엄밀히 따져 보자. 목사만 성직자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성스러운 일, 속된 일이 처음부터 따로 구별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다 성도요,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가 성직이다. 목사나 성도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제사장이다.
#. 벧전 2:9 - 오직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며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다만 그 기능상 목사는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부름받은 자라는 것이 다를 뿐.
#. 엡 4:12 - 목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스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게 도와 준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고, 성도는 교회 밖에서 이웃을 섬긴다.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것은 성도들의 일이다. 목사는 성도들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돕는 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히려 성도들이라는 쪽으로 인식이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살리는 길이다.
2. '교회 건물=성전' 이데올로기
'평신도/성직자'의 계급적 하이어라키를 극복하려면, 그 전에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게 있다. [교회 건물=성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이데올로기라고 하느냐? 강력한 암시효과가 있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데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교회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거기서 일하는 목사는 절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일주일에 겨우 한두번 교회 오는 신자들은 절로 평범한 신도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또한 생각해 보자. 교회 건물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면 건물 밖은 마귀가 들끓는 세상인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 스데반이 죽기 직전에 뭐라고 했는가?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건물에는 거하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성전을 신앙의 중심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참조. 행 7 장). 이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구약시대로 돌아가려 하는가?
구약의 성막, 성전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장소적 이분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백성의 역사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보여주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성막과 성전에서 보여지는 중심원리가 뭐냐? 바로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 - 이다(참조. 마 1:23).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광야시대에는 천막의 모습으로, 왕정시대에는 성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임마누엘의 절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아니냐.
그러나 임마누엘의 참된 완성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성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실현된 것이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이 두 구절에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알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에 주의하자. 사람 좋은 바울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렇게 말했을까?
바울의 시대나 지금이나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 몸이 곧 성전"이라는 사상은 '영/육의 이분법'이 판치는 우리 시대에 재발견되고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성경언어 가운데 하나다.
"교회 건물=성전"이라는 고루한 이데올로기는 "우리 몸=성전"이라는 성경적 언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교회 건물=성전'의 이데올로기는 매주일마다 신자들을 교회 건물로 끌어모으는 데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 건물 밖의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참된 영적 예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될 뿐더러 외려 장애가 된다.
성경은 교회 건물 안의 의식적 예배와 교회 건물 밖의 삶을 나누지 않는다. 바울은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테제 아래 이 둘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러한 균형성이 없는 곳에 어떻게 온전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를 위해서라도 "성전=우리 몸"으로의 언어의 전환은 필수적이다.
3. 만년초보신앙
한국교회의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문제, 곧 설교의 주제에 관한 것이다.
잘 알시겠지만, 한국교회의 불변의 설교 주제는 단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설교 뿐만이 아니다. 교회마다 빠짐없이 제자훈련을 시행한다. 그런데 제자양육의 목표가 뭐냐? 바로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이다. 훈련자들은 대개 "너 지금 당장 죽으면 천국 갈 자신 있니?"라는 물음으로 신앙을 측정한다.
만일 신앙이 그런 것이라면 구원받은 그날부터 혀 빼물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최권능 목사의 '예수 천당'(불신 지옥)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실정이 그러하다.
바르게 이해하자면, 예수 믿으면 구원얻는다는 건 신앙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았으니, 이제부터 천국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대단히 취약하다.
성경이 이에 대해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우리에게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권면한다(v.1). '도의 초보'가 뭐냐? - 회개, 믿음, 세례, 안수, 부활, 심판에 관한 교훈들이다(히 6:1,2).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교훈에 관한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국교회는 일년 열 두달, 아니 한 평생을 '예수 믿고 구원'에서만 머문다. 정말 답답한 노릇 아닌가?
운전할 때, 초보티는 일주일이면 족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교회는 만년 초보신앙의 티를 벗지 못하는가? 1년된 신자나 30년 된 신자나, 초신자나 장로나 평생 듣는 것이 십자가와 구원 뿐이다. 그러고서야 어떻게 신앙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신자라면 당연히 '크리스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을 게다. 그러나 교회는 이제까지 이에 대해 무어라 말해 왔는가? '성경 읽기 - 기도 - 전도 - 교회 봉사'...., 이것 말고 없다. 그런데 이런 것만 하면 크리스챤의 삶이 완성되는가?
우리 주변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가?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가정의 위기에 대해, 무한 경쟁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직장인들에 대해, 4대강이나 세종시 같은 여러 현안들에 대해, 햇볕과 먹구름을 오락가락하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바람직한 관계설정에 대해, 권언유착의 폐해와 같은 심각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교회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그리고 가치관의 파괴로 나타나는 혼란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바울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제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가? 크리스챤의 생활양식(life style)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는가?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러한 교회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 할 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현대교회를 '골목교회'라고 부른 학자가 있다(R.아돌프스). 교회가 골목 속에 묻혀 사는 모양을 두고 말한 것이기도 하려니와, 정작 그 의미는 현대교회가 문화의 중심부에서 소외되어 주변그룹으로 밀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골목교회는 현대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말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구원만을 되풀이하면서 존립하기에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골목교회가 잃어버린 언어들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교회가 이 일에 실패하면 교인들은 중요한 문제에서는 자기들에게 친숙한 세상의 기준을 적용하고자 할 것이고, 그러면 교회 안의 예배와 교회 밖의 생활의 간극은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설교언어가 변해야 한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는 신앙의 기초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초공사만 할 것인가? 기초가 닦였으면 그 위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건물을 쌓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초보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 곧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의 목회언어가 더욱 더 구체적, 현실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4. 죽은 시인의 교회
마지막으로,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리 교수가 감방에 있을 때, 그곳에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었단다. 그들은 남한측으로 전향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금방이라도 풀려날 수 있음에도 끝내 전향을 거부하고 30년을 넘게 감방살이를 감수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예시하면서 리 교수가 남한의 기독교인들에게 냉소적으로 던진 물음이 의미심장하다.
"이들 비전향 장기수들처럼, 감옥에서 30여년을 넘게 썩은 다음에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친구인 J목사는 리 교수의 물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확실히 리 교수의 도전은 충격적이다. 당장 나부터도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으니까. 그가 기독교를 이처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어느 누가 그처럼 무기력한 종교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장기수들보다 더 못하다'는 식으로 간단히 비교.평가하고 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 시각은 이렇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30년을 넘게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향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지닌 생생한 현실성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이미 오래 전에 종말론적인 급박함을 상실해 버린 기독교인의 '믿음'은 '애매모흐'한 소리글자로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열심히 믿어야 한다는 주관적인 노력에는 익숙하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현실성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감각하다. 그럴진대 자명한 것 아닌가? 어느 누가 이처럼 생명력 없고모호한 낱말을 붙들고 지조있게 30년을 버틸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책임을 어리석고 무지한 한국의 교인들에게만 전가.매도.비난할 수는 없다. 보다 큰 책임은 '믿음'이라는 언어를 사어화(死語化)시켜 버린 교회의 지도자들, 넓게 말하면 한국의 교회가 져야 한다.
까놓고 말해서 한국교회가 사어화시켜 버린 낱말이 어디 '믿음'이란 단어 하나 뿐인가? '하나님'이란 말은 어떤가? '구원' '축복' '사랑' '영생' '하나님 나라'는 또 어떤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말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면서도 미소지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감격적인 현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지난 날 그러한 열정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메마른 화석으로서의 구실 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뿐이냐? 주님의 입에서 살아 꿈틀대던 보석같은 수많은 말들이 작금의 한국 강단에서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낱말들의 조합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들리는 것은 소리, 소리, 소리들 뿐....
설교자는 사회적, 교회적으로 널리 공인된 거룩한 말들을 모아 설교노트를 채우고, 청중은 귀에 익숙한 소리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한국 교회의 최대 빈곤이다. 곧 언어가 빈곤하다는 것, 설교언어가 생명력을 잃고 소리의 조합으로만 인식된다는 것! 이를 일컬어 '죽은 시인의 교회'(Dead Poet's Church) 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죽은 언어가 판치는 한국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이가 있다면, 멀쩡한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를 들쑤시며 끄떡하면 서울 시청 앞을 점거하는 그런 목사들이 아니라, 죽은 언어를 되살리고 땅바닥에 바수어진 언어를 고유한 제 빛깔로 회복시키는 시인의 마음을 가진 겸허한 목사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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