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남대문통 거리 풍경
보신각 네거리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보신각과 남대문로 시작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가로의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닌 석재로 포장된 것이 이채롭다
동일은행 신축되기 전의 보신각
사진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 여럿 보인다. 우선 보신각이 오늘날의 보신각과는 규모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보신각 앞에 보이는 ‘고등빙수상점’ 플래카드다. ‘빙수’가 새로운 기호상품으로 등장하였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플래카드가 새로운 광고방법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대문로 쪽으로는 가로수도 보인다. 가로수의 키가 크지 않아서 식재한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가로변에 가로수를 식재하는 것 역시 근대의 새로운 풍경이다.
동일은행이 신축되고 난 후의 보신각
동일은행이 신축되기 전의 보신각이다. 보신각은 노무현 정권시 2층 누각으로 재건축하여 소박했던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가로의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닌 석재로 포장된 것이 이채롭다. 보신각이 45도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에 따라 안전과 시야 확보를 위해서 가각(가로 모퉁이 자르기)를 정리하면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보신각 옆으로 남대문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던 육의전 장랑이 있던 곳에는 동일은행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동일은행을 지나서 근대적 상업기능을 수용하면서 변화해가는 가로변 한옥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의 오른편에는 현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과 멀리 신세계백화점 구관인 미쓰코시백화점과 남산 자락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보신각이 45도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에 따라 안전과 시야확보를 위해서 가각(가로 모퉁이 자르기)를 정리하면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보신각 옆으로 남대문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던 육의전 장랑이 있던 곳에는 동일은행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동일은행을 지나서 근대적 상업기능을 수용하면서 변화해가는 가로변 한옥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의 오른편에는 현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보인다
한성은행
후에 조흥은행의 전신이되는 남대문통 1정목의 한성은행 사옥의 모습이다. 한성은행 오른편에 전래의 가로변 멀리 동일은행이 보이고 한옥상가도 보인다. 가로변에는 가로수와 전봇대가 새로운 도시경관 요소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가로변 한옥상가 앞에 인력거 2대가 대기하고 있는데, 이는 이 건물에 음식점이 있어 음식점 이용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거리인 남대문로 1정목
남대문통의 은행 거리- 남대문2정목 제일은행지점 앞
광통관
남대문1정목거리 (광통관, 대동생명, 한성은행)
식민지 조선의 제1 도시인 경성이 서구식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거리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남대문통 1정목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곳은 이곳뿐으로 이 부분의 건너편이나 을지로에 가까운 1정목 부분에는 이와 같은 류의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양식건축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광통관, 대동보험, 한성은행이며 멀리 돔이 보이는 건물은 동일은행이다. 이들 건물의 성격이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 동안 남대문로는 상업의 중심가로였지만 특히 은행이 밀집한 금융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황금정(을지로) 입구
황금정 입구 로타리 일본생명 앞
남대문로와 황금정이 만나는 곳으로 남대문 1정목에서 남대문2정목을 바라본 사진이다. 일본생명과 그 옆으로 경성전기회사가 보인다.
황금정(을지로1가) 1정목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1920년대 사진엽서이다. 광복후에는 내무부 건물로도 사용되었던 건물로 지금은 외환은행이 있다
동양척식회사 건너편의 건물은 신극을 공연하던 국립극장이었던 원각사로 1960년대 소실되었다
남대문 2정목
롯데백화점 건너편에서 광통관 쪽으로 찍은 모습. 이길의 끝은 현 안국동이다.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청이외에는 2-3층의 조적조건축이 주를 이루는 가로풍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식산은행을 지나 전경의 끝이 조선은행앞 광장으로 주변에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이 위치해 있다.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건축되기 전 모습이다.
경성 조선상공회의소
경성상공회의소는 1919년 4월 19일 기공하여 같은 해 6월 22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가지고 1920년 7월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건평 211평 3합으로 지하는 숙직실 주방 창고, 1층은 현관 사무실 회의실 도서실 응접실, 2층은 공회당 변소, 3층은 휴게실, 4층은 탑옥이다. 설계자는 조선은행 기사(技師)인 중재여자화(中材與資華)이다.
위치는 중구 소공동에 있다. 경성상업회의소는 1915년 7월 15일 제령(制令) 제4호의 공포에 의하여 조선인 경성상업회의소와 일본인 상업회의소를 합하여 경성 상공업의 개선 발달을 도모하였다. 이 기관은 상공업계의 통제기관으로 서울은 물론 한국의 산업, 상공인의 발전 등을 주도하였다. 경성주식현물거래소 해방 후에도 여의도로 옮겨가기 전까지 증권거래소로 사용되었다.
남대문로 2정목의 조선식산은행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청이외에는 2-3층의 조적조 건축이 주를 이루는 가로풍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경의 끝이 조선은행앞 광장으로 주변에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이 위치해 있다.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건축되기 전 모습이다
남대문로 2정목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식산은행전경이 보이는 남대문로 2정목의 가로풍경이다.
남대문로 2정목의 조선식산은행 전경
조선식산은행전경이 보이는 남대문로 2정목의 가로풍경이다. 엽서의 오른편에서 차도와 가로수 그리고 인도의 관계가 선명하게 보이고, 인도 쪽에서 보이는 측면은 삼화은행과 경성전기주식회사다.
조선총독부 도서관
조선총독부는 1923년 소공동 소재 남별궁(南別宮별궁)터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건립했다. 사진에 보이는 총독부도서관 정문인 광선문(光宣門)은 원구단 정문이었다고 한다. 원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원구단 건설 2년 뒤인 1899년에는 그 북쪽에 황궁우를 짓고 천신지기인 위패와 함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또 1901년 원구단 동쪽에 석고단을 쌓고 그 정문을 광선문이라 했다고 한다.
이 석고단은 고종 황제 탄신 40주년을 맞이하여 그 성덕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원구단을 위시하여 황궁우 및 석고단의 설계 및 시공은 당시 내무부 기사 심의석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식산은행(지금의 산업은행) 옆에 위치하고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중학교 시절 시험공부하려 다녔던 기억이 난다
조지아백화점(미도파)
조지아백화점(정자옥, 丁子屋)은 본정(현 충무로)에서 소림양복점(小林洋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소림씨 일가(小林門中)가 1939년에 현 남대문로에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하고 있으며 남대문로의 롯데백화점(옛 미도파백화점)으로 리노베이션되었지만 건물의 구조나 외형으로 예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치요다생명보험
가옥, 창고 기타의 건조물 및 상점 가구 기계등의 동산. 부동산에 대한 화재보험, 일반의 해상보험 및 운송보험의 사업을 영업.남대문로 2정목에 위치
명치관(시공관)
건축가 다마타(玉田橘治)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규모는 당시 황금좌와 비슷한 수용관객 1178명에 지하1층 지상 4층으로 지어졌다. 명치좌는 기존의 극장과 달리 역사주의 양식건축으로 디자인되었다. 명동 안 네거리에 위치하면서, 곡면으로 처리한 모서리는 명치정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타원형 장식과 저층의 매표소 그리고 타원형의 현관 홀 등은 바로크건축의 화려한 면모가 드러나는 듯하다. 남촌의 영화관을 대표하는 황금좌의 경우 지붕에 일본식 기와지붕을 씌운 제관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명동에 있는 일제시대때 명치좌이고 해방후에는 국립극장으로 쓰였던 곳이죠.남산에 새 국립극장 새워지기 전에 이곳에서 문화행사가 개최되었던 곳입니다. 남산으로 국립극장이 새로 새워져서 옮겨지자 어느 은행의 명동지점 등을 거치면서 살아남아 있다가 새로운 문화고연장으로 재탄생하였다.
장곡천 거리
경성부청과 경성우편국을 연결하는 소공로의 옛 거리 풍경 조선은행과 건너편에 중앙우체국과 남산이 보인다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종로방향 남대문통
조선은행앞 광장 주변이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으로 그 위용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 종로 방향의 남대문통 주변은 1~2층의 저층건물이 주를 이룸에 따라 전봇대와 전차 운행을 위해 기에 늘어있는 전선이 오히려 지배적인 경관요소가 되고 있다.
본정통 입구(충무로입구)
조선은행앞 광장과 미쓰코시백화점
일본인 상권의 중심인 남촌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 조선은행 앞 광장이고, 그 중에서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이 관공서로서 정보와 금융의 핵심이었다면 미쓰코시 백화점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금융과 정보통신망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징인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미쓰코시백화점이 입지한 조선은행 앞 광장은 경성 제일의 상업금융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도시공간의 성격은 해방이후에도 지속된다. 왼편의 경성우편국과 정면의 미쓰코시 백화점 사이에 오늘날에는 2호터널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이 길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저축은행
우측 조선저축은행은 구(舊)경성부청터인 본정 1정목(현 충무로1가) 대지에서 1933년 9월 27일 기공하여 1935년 12월 2일에 석조건축물로 지어졌디.
퇴계로 입구
미나카이백화점(삼중정백화점, 三中井)
1922년에는 오복점(吳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중강승치랑(中江勝治郞)이라는 일본상인이 충무로 1가 45번지에 삼중정백화점(三中井百貨店)을 설립하여, 1932년에는 현대식의 대형점포를 신축하였다. 그 자본금이 300만원이었으니 정자옥보다 경영규모가 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주목할만한 사실은 삼중정백화점은 부산 · 대구 · 평양 · 원산 · 목포 · 함흥 · 군산 · 대전 · 진주 · 흥남 · 광주 · 청진 등 전국 주요도시에 지점을 설립하였다. 말하자면 백화점 경영을 전국적인 규모로 연쇄점을 운영하는 새로운 경영방식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 건물의 위치는 퇴계로 입구에 지난 시절 화재로 유명한 대연각호텔 (빅토리아호텔?) 자리로 보입니다 대연각 호텔이 들어서기 전에는 바로 그 백화점 건물에 6.25 전쟁이후 원호청이 있었던 곳이고 건물 뒤쪽이 충무로 입구 앞으로는 퇴계로 이다.
모던보이, 남대문로를 거닐다
근대 소비문화를 태동시킨 거리의 변천사… 일제시대 상점가와 백화점의 휘황한 불빛들
1920~30년대 조선 땅에서 근대 소비문화를 처음 태동시킨 곳은 경성(서울) 남산 기슭 진고개의 일본계 백화점과 상점가였다. 남대문로와 엇갈리면서 경성우편국 건물 양옆으로 뻗어들어간 두 갈래 길은 도쿄의 번화가 긴자를 뺨친다는 혼마치(충무로), 메이지마치(명동)의 불야성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붉은 벽돌 위로 흰 화강석 띠가 물결치는 우편국 건물은 곧 대문짝만한 간판, 카페와 식당, 끝없는 각종 특산점포의 행렬이 시작되는 기점이었던 셈이다.
대형 금융기관과 유통의 중심지
그 길목 너머로 모던 조선의 ‘껍질’이 있었다. 야시시한 화장을 한 단발머리, 홀쭉치마의 모던걸, 나팔바지 입은 모던보이들이 카페나 재즈바에서 흥얼거리며 칼피스, 고히(커피)를 마셨다. 맥고모자 쓴 신사와 양장 차림 귀부인들이 기모노, 지카다비를 착용한 일인들과 뒤섞여 정신없이 쇼핑하는 모습들을 이슥한 저녁까지 볼 수 있었다.
경성 부민들에게 우편국의 붉은 벽돌 이미지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공중정원처럼 남촌의 환상을 조건반사처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나 다름없었다. 우아하면서도 농염한 여인 같은 우편국 벽돌 건물의 이미지 뒤로 날로 현란해지는 남촌 상점가의 영화가 숨어 있었다. 1929년 풍속잡지 <별건곤> 9월호에 실린 정수일의 <진고개>라는 글은 경성우편국을 거쳐간 진고개 요지경을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조선은행 앞에서부터 경성우편국을 옆에 끼고 이 진고개를 들여다보고 갈 때에는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은 어느 곳을 물론하고 활기가 있고 풍성풍성하며 진열창에는 모두 값진 물건과 찬란한 물품이 사람의 눈을 현혹하며 발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업다. …백화가 란만한 듯한 장식이며 서늘한 맛이 떠도는 갖은 장치가 천만촉의 휘황 전등불과 아울러 불야성을 이룬 것을 볼 때에는 실로 별천지에 들어선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일제기 근대 소비상업 문화의 요람인 우편국 정면의 남대문통 거리는 원래 조선의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한양 남쪽 교외로 나가는 국도였다. 그러나 일제 침탈 이후 태평로가 대로 역할을 하면서 이 길은 대중문화와 금융소비 경제의 요람으로 탈바꿈한다.
남대문로 가로는 이미 1910년대부터 가장 근대적인 경관을 띠면서 발전했다. 번화가 혼마치의 네온사인 광고탑 건너 남대문로 맞은편에 조선은행과 조선상업은행의 돔 건물이 나란히 섰고, 탑 바로 위로 경성우편국이, 그 대각선 방향을 가로질러 회현동 가는 쪽으로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뒤쪽으로 조선저축은행(오늘날 제일은행)과 명요릿집 청목당이 도열했다.
광장의 큰 분수대 사이로 뚫린 복선 레일 위에는 두 량짜리 미국제 대형 전차가 달렸다. 휘황찬란한 남대문로 광장의 화룡점정은 일본 건축가들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두 쌍의 중앙 분수대였으니 오늘날 신세계 앞 분수대의 전신이 된다.
남대문로1가인 광교 쪽부터 한국은행 쪽까지 동일은행, 천일은행, 식산은행(오늘날 롯데백화점),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십팔은행, 삼화은행, 조선주식취인소 등의 대형 금융기관이 죽 늘어서 금융과 유통 양면에서 남대문로는 조선 최고의 지위를 구가했다.
<날개>의 주인공이 날자고 절규했던 곳
일본인들은 조선은행(朝鮮銀行) 앞 남대문로 광장을 줄여 선은(鮮銀) 앞 광장, 일본말로 ‘센긴마에고조’라고 불렀다. 1910년대 이후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 경성부청이, 30년대 이후에는 이전한 부청 자리에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이 삼각형의 꼭짓점을 구성하게 된다. 때문에 경성우편국과 조선은행은 남대문로와 남촌의 흥청거리는 영화를 말없이 지켜보는 증인이 되었다.
아름다운 우편국 정면 현관의 벽시계를 보면서 숱한 사람들이 혼마치나 메이지마치 카페, 백화점 등지에서 연인 혹은 가족들과의 약속 시간을 확인했다. 자기 근거지 아닌 도심 공간을 떠돌면서 숱한 사건과 일상을 만들어내는 근대 도시문화가 이 남대문로 공간을 통해 처음 싹터 전파됐다.
계몽적 근대가 아니라 욕망의 소비로 이뤄지는 진정한 모던 도시문화를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피워올렸다. ‘지저부친 머리에 뾰족구두 신고 요염한 화장을’ 하고 원숭이 궁둥짝 같은 홍안을 한 모던걸들이 파라솔, 양장모자를 쓰고 돌아다녔고, 나팔통바지 통넥타이를 한 모던보이들이 어울렸다. 혼마치의 찻집, 빙수집, 우동집, 카페, 댄스홀의 샛노란 전등 아래서 그들은 칼피스, 아이스고히, 독주를 마시며 희희낙락거렸다.
소비문화에 대한 조선인의 선망이 극에 달하자, 무작정 경성우편국과 미쓰코시 백화점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몽유병자 같은 풍습, 일본말로 ‘혼부라’라고 불린 산책 풍습이 등장했다. 혼부라의 무리들은 부나비처럼 경성우편국 옆 길을 통해 혼마치 상점가로 빨려들어갔다. 방학을 앞두고 떼거지로 몰려와 화장품과 선물류 등을 물 쓰듯 사는 여학생들의 구매 행렬 또한 남대문로 상점가와 백화점에서 성행했다.
소설가 이상(1907~36)은 죽기 수년 전 쓴 자신의 수필집에서 혼마치, 남대문통의 백화점, 점포를 누비면서 다가온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속성을 이런 인상기로 궤뚫었다. ‘…유니폼 소녀들 허리에 번적번쩍하는 깨끗한 밴드, 물방울 낙수지는 유니품에 벌거벗은 팔목 피부는 포장지보다 정한 포장지고 그리고 유니폼은 피부보다 정한 피부이다.
백화점 새 물건 포장-밴드를 끄나불처럼 꾀어들고 바쁘게 걸어오는 상자 속에는 물건보다도 휠씬 호기심이 더 들었으리라.’ 그는 꾸며진 낙원인 백화점에서 사람의 피부조차도 상품으로 재활용되는 근대의 지옥과 불안을 보았다. 저 유명한 소설 <날개>에서 자화상 격인 주인공이 미쓰코시 옥상에서 흐느적거리는 도시의 일상을 보며 날자고 절규했던 데는 그런 통찰이 있었던 것이다.
해방 뒤 1963년 옛 영화 회복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 발발 이후 남대문로 또한 내선일체 등의 현수막이 걸리면서 일본 군부의 전쟁 선전장으로 바뀌어갔다. 일본의 패전과 해방, 한국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남대문로가 유통과 상업의 전당으로서 옛 영화를 회복하기 시작한 건 1963년이다.
삼성 재벌이 옛 미쓰코시 백화점 건물을 인수하면서부터다. 박완서씨는 자전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한국전쟁 당시도 미군 피엑스 등이 있던 남대문로 일대가 ‘눈이 돌고 정신이 어질어질할 만큼 번화하고 화려했다’면서 ‘이국적 활기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천박의 근원지였다’고 썼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1987년 6월항쟁 당시 남대문로 광장은 386에게 자랑스런 거리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출처] : 노형석 기자 /한겨레신문
1930년대 찍은 서울 남대문통 조선은행 앞 광장.
왼쪽에 조선은행,조선상업은행이 있고, 전차가 다니는 남대문로 큰길 오른쪽에 화려한 외관의 경성우편국이 있다. 넓은 광장에 차량은 보이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를 탄 행인들의 모습만 눈에 뛴다.(김정동 목원대교수 제공)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
1950년대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앞 로터리
지금의 신세계 앞 분수대와 달리 잔디 분수대 시설물이 세 부분으로 갈라져 있고, 중앙으로는 전찻길이 통과하고 있다. 일본 근대 건축가들이 선호했던 도심 조경 방식이다(김한용 사진집 <희망의 연대기>눈빛,2006)
조선은행앞 광장 (구상업은행)
미스꼬시 백화점에서 내려다 본 남대문로2정목. 근대적인 풍경의 서울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 주변이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으로 그 위용을 한껏 과시하는데 반해 종로방향의 남대문통 주변은 1~2층의 저층건물이 주를 이룸에 따라 전봇대와 전차운행을 위해 기에 늘어있는 전선이 오히려 지배적인 경관요소가 되고 있다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사진. 왼쪽으로 청목당건물이 보인다.
1912년에 완공된 조선은행은 프랑스 성관풍 르네상스 절충주의 건축물로 일본의 1세대 근대건축가인 다쯔노 킹코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거리는 보차분리가 정착되기 전에 전차와 보행자는 물론 수레 등이 서로 혼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 방향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1912년에 완공된 조선은행은 프랑스 성관풍 르네상스 절충주의 건축물로 일본의 1세대 근대건축가인 다쯔노 킹코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거리는 보차분리가 정착되기 전에 전차와 보행자는 물론 수레 등이 서로 혼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대문3정목 거리
멀리 명동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은행이 건축되기전의 사진으로 그 싯점이 상당히 빠른 사진이다
남대문 4정목 근처의 오른쪽 사진이다. 저 멀리 경성은행(현 한국은행)과 바로 옆에 명동성당의 뽀쪽한 지붕이 보인다. 전차길도 여전하고, 윗 사진보다 많이 개발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