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주의(Maoism)
마오주의, 모택동 사상이라고도 한다.
마오주의는 1920년대 혁명투쟁 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정강산 투쟁,
강서 소비에트 임시정부, 대장정,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마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그 기반자체가 다르다.
계급이론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농민을 소부르주아계급으로 뒀고
이들은 절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고(아니면 아예 반동적으로 우리에 반대하거나)
그렇기에 혁명의 주체는 오직 도시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계급만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 이론 자체에 반대한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인원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것도 있지만
마오쩌둥자체가 아나키즘, 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혁명의 주체를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그의 초기 협작사 운동을 하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즉 마오쩌둥은 혁명
이론 부터가 농민중심적인 비(非)마르크스주의적 계급관이였다는 소리이다.
신문화운동 시기에 호조라는 개념은 아나키스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채원배는 크로포트킨의 호조론을 전통적 중용과 대동론을 매개로 수용하면서
호조론을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보다 높이 평가했다.
그는 ‘호조’란 개념이 이석증의 번역과 소개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채원배의 호조론에 대한 가장 자세한 언급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촉발된 두 강연,
즉 〈유럽전쟁과 철학〉(1918년 10월)과 〈암흑과 광명의 소장消長〉(같은 해 11월)에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암흑의 강권론이 소멸하고, 광명의 호조론이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으며,
이에 “모든 사람들이 신앙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톨스토이나 니체의 사상보다 크로포트킨의 호조론이 우월하며 진화론의 공리라고 평가했다.
진독수와 이대조(李大釗), 주작인(周作人), 모택동(毛澤東) 등 거의 모든 진보적인
인사의 글속에서도 『호조론』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상호부조의 정신은 중국 초기 공산주의자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쳐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인 인민주의적인 정신과 윤리 중심적인 경향에 기여했다.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교류와 연대, 적자생존에서 상호부조 - 조세현
그 외에도 마오쩌둥자체가 당시 중화 아나키즘의 일종의 성지였던
상하이시에서 활동한 바가 있으며 실제로 초기 마오주의는 아나키즘적
성격 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성격이 많이 나온다.
인민 공사, 농촌 인민의 자발적인 투쟁, 코뮌민주주의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때문에 문화대혁명 전까지만 보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아나키즘의 변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강제적 진압으로 끝을 맺으며 이러한 성격은 사라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분되는 마오주의의 특징에는 다음 네 가지가 있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농민-노동자의 계급동맹을 중심으로 민족자본가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농촌을 혁명근거지화하여
장기간의 유격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인간의 인식은 생산활동·계급투쟁·과학실험 등의 실천 과정에서 형성되며
이론은 실천을 통하여 그 정확성이 검증되고 확대된다며 실천을 중시하였다.
3. 모든 사물의 발전 과정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을 확대시켜,
모순을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으로 구별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비적대적 모순으로 규정하고
그 해결방법으로 비판·설득·사상개조·교육 등을 제시하였다.
4. 자본주의 사회가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된 후에도
계급·계급적 모순·계급투쟁, 사회주의 노선과 자본주의 노선 간의 투쟁,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성 등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모순은 오직
혁명을 계속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마오주의는 반 엘리트주의라는 성격에 맞게 제3세계나 특히 중남미에서
괴력을 발휘해, 쿠바 혁명이나 베트남 독립, 그리고 네팔의 왕정 폐지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마오주의의 본국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주의가 금지되있는 상태이며
문화대혁명 당시 극좌파 인민들의 국가 해체, 관료주의 철폐, 코뮌 민주주의의 실현,
군대 해체와 인민의 자발적인 무장, 인민 공사의 실현,
권위주의의 철폐라는 주장을 당내 중도로서 존재했던 마오쩌둥이 권력유지를 위해
강제로 진압하면서 마오주의 자체가 세가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