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8주차] 아홉살 인생
매일 아홉살 꼬맹이들과 힘겨루기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리던 23살에는 13살 아이들과 아웅다웅 지내며 '겨우 10살 차이네. 뭐가 이리 예뻐' 라며 귀여워하기 바빴다. 그러다 지금 내 나이의 3분의 1도 안 되는 아홉살 쪼꼬미들에게는 도통 져주지 않는다. 교육학 지식이 늘어나고 새롭게 쏟아지는 무수한 연수들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지만, 아는게 늘어날수록 마음의 공간은 그 자리가 비좁아 아픈 손가락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이래서 ~이렇구나. 그러면 ~ 이렇게 해야지"라며 머릿속으로 밀어넣고 품어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2년 전 교회에서 겪은 일들로 흉진 마음이 아직 다 낫지 않아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과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에 몸을 사렸다. 행여 내게 다가와 조금의 위로나 온기라도 요구할라치면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 동굴로 쏙 - 숨어버리려던 나를 아시고는, 마음의 흉터가 굳은 살이 되도록 나를 담그시는 그분의 손길이 느껴진다.
올해 유독 마음이 아프고 사랑이 고프며, 몇 년째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아이가 있다. 이 글에 다 담아내기 어려운,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자책과 눈치, 화, 슬픔, 외로움이 응집된 마음으로 세상을 살피며 어디에 마음을 두면 안전할까 - 오돌오돌 떨고 있다. 3월부터 그 아이와 나의 밀당이 시작되었다. 관심 받기 위해 애쓰며 수업중 수차례 앞으로 나와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요청, 잘 모르겠으니 자신에게 알려달라는 질문, 어깨가 아파요, 배가 아파요, 발 뒷꿈치가 아파요, 머리가 아파요 등을 시전했다. 자신을 좀 봐달라는 요청, 자신만을 신경써달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이전까지 애썼던 친절과 노력은 몽땅 잊어버린채 거친 언행으로 마음을 어렵게 했던 2년 전 그때의 일들이 내 안에서 해소가 덜 되어, '관심받기 위해, 애정을 채우기 위해 집착하는 행위들은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해'라며 스스로를 무장(?)하던 즈음이었다. 자신을 어루만져달라고 오는 아이에게 "나는 과외 선생님이 아니니 너만 봐줄 수 없다"는 말로 달래보기도 하고, "여긴 선생님의 공간이야"라며 경계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외로움이 사무칠 땐 자신을 품어줄 어른을 찾아 헤매다, 화가 날 땐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아이들을 때리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둘 다 잘 되지 않거나 저지당할 땐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본인에게 필요한 애정을 채워왔던 아이에게 나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온 학교가 주목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이, 뭔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지나가던 아이를 주먹으로 때려 학부모 민원 전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와 뒷목을 잡게 만드는 아이,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을 예뻐하는 눈길에 부아가 치밀어 대화를 끊고 시선을 돌리려다 그라데이션 분노로 선생님이 없을 때 앙갚음을 하는 아이, 수업시간에 나온 가족이야기에는 괜시리 배가 아파 20분째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 모두 한 아이다.
다양한 행동으로 속을 끓이는 아이에게 많은 선생님들이 월, 화, 수, 목, 금 달라붙어 좋은 프로그램과 보충지도, 집단상담, 치료로 아이의 아픔을 덜어가고 애정을 채워주던 1학기. 방학기간에도 매주 전화통화를 하며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음에 만족하던 아이의 흐뭇한 웃음. 아이가 마음을 내려놓을 곳을 탐색할 때 교사도 숨구멍을 찾아야지. 나의 숨구멍은 역시나 지금 내 영혼과 공명하는 책, 자신을 알아가고 발견하도록 돕는 모임, 기독교상담 강의들과 더불어 몰입한다는 핑계로 잠깐 학교를 잊을 수 있는 연구, 스터디 등 등.. 쓰고 나니 지루해보이나 내 영혼이 즐거웠으니 그걸로 되었다. 도통 이해되지 않던(사실 이해도, 용납도 하고 싶지 않았던) 상처투성이 아이들의 마음이 보편적인 글로 적혀 있어, 마치 제 3자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감정의 동요 없이 잠잠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오죽 아팠을까. 그렇지만 하나님 전 안 보고 싶어요. 힘들어요. 그치만 제가 임용고시 준비하며 너무 힘들어서 "이 땅의 교육을 위해 몸을 바칠게요" 서원기도를 했네요, 에잇. 그래도 다 큰 어른이 아니라 아이라서 훨씬 낫네요. 그치만 전 누가 저에게 집착하고 지나치게 의존하는게 버겁고 싫어요. 부담스러워요. 모성애나 책임감이 부족해서인가요, 아니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요?'라고 하나님께 주저리주저리 따지는 1차 수다. '하나님, 근데 이 아홉살 짜리 인생에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요, 살고 죽는게 다 하나님께 달려 있는데 이 비극적인 일들은 왜 일어난 거죠. 악과 선의 기준이 뭔가요' 2차 수다. '예수님도 감정을 가지시고 우리와 같이 인생을 살아가셨다는데, 그래도 예수님은 예수님이시잖아요. 힝' 3차 수다.
하나님과 1차, 2차, 3차, ... 수다를 이어가며 손가락 하나가 너무 아파 하나님과 씨름했던 시간들, 그 씨름은 안간힘을 쓰며 낑낑대다 내 힘이 다 빠졌을 때에야 끝이 났다. 기독교사로서 뭔가 특별한 걸 해주어야 할 것 같고 나에게 맡겨주셨으니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 맡기신 일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주님께 서원드린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될까 졸였던 마음도 풀어졌다. '내가 맡은 올해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앞으로도 아이의 삶에서 이 지난한 쓴뿌리가 계속 아이의 발목을 잡고 돌부리처럼 앞길을 막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시간, 이 공간 안에서 나는 나로 살아가고 이 아이가 이 아이의 삶을 살아가도록 그저 곁에 있어주면 된다' 로 귀결되었다.
그렇게 2학기가 시작되었다. 뭔가를 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무감,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지극히 당연한 깨달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이 아이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헤아리려 해보자. 다 알아줄 수 없고 야단도 치고 화도 내겠지만 그래도 너의 곁에 있음을 전달하고 싶었던 마음이 통했는지 1학기 때보다 더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눈빛으로 관심을 갈구한다. 정혜신 박사가 <당신이 옳다>에서 언급한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가 눈앞에서 보이는 시간들이다. 학교의 수많은 선생님들이 모두 마음을 모아주신 덕분에 아이의 비어 있던 사랑의 탱크가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 다른 아이들을 때리려다가 멈추고, 수학 문제를 끝까지 앉아서 풀고, 멀쩡한 머리를 공연히 쥐어뜯으며 보건실에 가지 않는다.
이 시간들을 지나며 내 마음의 흉도 옅어졌다. (사부님의 표현으로) 지랄 총량의 법칙이 왜 하필 이제야 발동한 건지, 왜 하필 그게 절정에서 발현할 시기에 맞닥뜨린건지 의아할만큼 가슴 속에 케케 묵은 깊은 상처를 봉인해둔 사람들을 조금은 더 오래 바라봐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할게요, 그치만 제 주변에는 못 오게 해주세요. 엮이고 싶지 않아요. 저 멀리서 바라보고 기도할게요 - 아유"라며 치사한 기도라도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섬세함과 공감이라는 선물이 나를 힘들게만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닌, 진짜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영혼을 일깨우는 귀한 모임들에 초대해주실 때 기꺼이 응한다. 결국 선물은 포장지를 뜯지 않고 꽁꽁 숨겨두면 먼지만 쌓일테니, 이 선물을 뜯어 적재적소에 쓰이기를 기도하는 용기가 생겼다.
아홉살 꼬맹이가 가져다 준 선물이다. 이 아이를 만난 덕분에 나도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인해 만들어둔 틀을 깨고, 나를 지키기 위해 쳐둔 바운더리가 넓어진 듯 하다. 나도 이 아이에게 선물이 되어주기를. 세상에 난 지 한 자릿 수인 이 어린 인생이 자라나며 수많은 상처와 좌절 속에 스스로를 탓하고 한없이 눈물만 나는 날도 올텐데, 아홉살 무렵에 만난 사람들과 주고 받은 지금의 기억이 힘든 날 소환할 수 있는 따스한 시간들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꼬맹이들이 예쁜 선생님과 함께 해서 행복할 것 같아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속에 씨름하는 여러 감정을 담아낸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