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방각 이론
인류가 수를 정식화하는 과정은 곧, 자연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서 자연을 대상으로 자기의 의도하는 바로 변화시켜 보려는 데 있는 것이다.
또한 자연의 모든 존재를 수의 공식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은, 만물의 근원을 알고 그 정체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드디어 모든 문명의 선지자들은 한가지의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형상들은 원과 선의 기하학으로 비례하며, 실존하는 만물의 모습들은 다양하지만, 그러나 그 존재의 본질에 깊게 접근하자면 결국 하나의 원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형을 다루는 수학분야를 기하학(geometry)이라고 한다. 영어의 'geo-'는 땅을 의미하고 'metry'는 '재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기하학은 땅을 측량하는 데서부터 출발한 학문이다. 측량을 하는 이유는 경제적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땅을 사고팔기 위해서는 면적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길이나 각을 먼저 알아야 한다.
또한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지을 때에는 물론 누가 얼마나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필요가 생기게 되고, 또 넓이를 정확히 측정하려면 길이나 각을 알아야 한다.
기하학은 각, 길이, 넓이, 부피 등 도형의 기본적인 요소와 이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알아내는 것이 1차적인 관심사다. 또 기하학의 역사는 바로 이른바 ‘원방’의 이원론적인 철학이 정립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류의 문명사의 출발은 기하학과 대수학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아무튼, 인류는 이미 고대시대에 이미 체계적인 측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측량가운데 삼각측량은 수학적으로 삼각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는 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하여 도형을 연구하는 수학분야를 말한다.
이와 관련 공식적으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탈레스가 처음 삼각법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그는 삼각형의 닮음의 성질을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다. 또 삼각형과 합동의 성질을 이용하여 산으로 가로 막혀 있는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구하기도 했고, 해안으로부터 바다에 떠 있는 배까지의 거리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문명사에서는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사실 그의 수학적인 업적은 당시의 이집트를 비롯한 동양의 문명 수준에 비하여 아주 변변치 못한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그가 응용한 삼각비의 계산법은 이미 수 천 년 전에 이집트인들이 구축한 엄청난 수준의 기하학적인 이론과 비교해보면 별 볼일 없었다.
또 그는 만물의 근원이 바로 물이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보다 수천 년 전에 동양에서는 세상을 현상계와 가상계로 분류하고, 현상계의 존재로 기화수토의 4가지인가 아니면 기화금토수의 5가지인가에 관하여 대논쟁을 하였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탈레스의 지혜는 기학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보자면, 당시의 동양에 비하여 매우 유치한 수준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송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지혜의 수준이 뒤떨어진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로 칭송되었는가?
그 까닭은 현상의 단순화를 통해 자연을 분석하고자 했고, 신화나 그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괴력 대신 자연 그 자체로부터 현상의 인과 관계를 탐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문명사에서 의미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사실 철학의 진정성이나 위대함이란, 그 수준이 놀라운 정도로 복잡하고 논리적이며 고차원적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현실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이치를 따지자면 수학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철학은 현실적이어야 하고 당연히 수학적이어야 한다.
그의 철학적인 관점과 입장이 현실을 수학적으로 보는 세계관이었다는 것이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관점으로 그의 철학은 오늘날 서양문명이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동양철학은 이미 매우 놀라운 수준의 고차원적이고 깊은 사색에 의하여 구축되어 있었다. 반면에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송되는 탈레스의 철학수준은 그에 비해 매우 유치한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은 세계문명사를 선도하고 있는데 비하여, 당시의 이집트철학을 비롯한 동양철학은 현실의 적용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고 주관성과 관념성이 강한 편이었다.
아무튼 고대사회에서 기하학은 우주변화의 기본단위로서의 원의 문제를 방의 비례관계로 파악한 기초가 바로 삼각함수로 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원과 방의 삼각비의 조화는 모든 문명사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었다.
이른바 사인(sinθ), 코사인(cosθ), 탄젠트(tanθ) 같은 삼각비를 이용하여 삼각형의 변의 길이, 각의 크기, 넓이 등을 구하는 삼각법은 천문학, 점성술, 토지 측량, 항해술과 같은 실생활에 널리 사용되어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되었다.
그런데 서양의 문명사에서 삼각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가장 오래 된 학자는 기원전 150년 전 고대 아시아 지역인 미노아의 니케아에서 활동했던 히파르코스이다.
그는 그리스의 천문학자로, 천체를 체계적으로 관측하고, 그 운동을 수학적으로 풀어 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태양과 달을 비롯한 행성들이 원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으므로 원의 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삼각법의 기초이다.
이를테면 그는 지구와 달의 거리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공의 표면과 같은 면, 즉 구면 위의 두 점 사이의 거리와 각의 크기를 잴 필요를 느껴서 삼각법을 연구하고 사인함수표를 제작하였다.
결국 기원전 140년경에 천문학에 삼각법을 응용하여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리를 구했다고 하여 ‘삼각법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모든 천문학적인 계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삼각비를 잘 이용하여야 했다.
이것은 사인표가 얼마나 정확한 가에 달려 있었고, 사인표의 작성은 바로 각의 삼등분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사인 함수가 처음으로 개념화된 것은 인도인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9세기경 인도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알콰리즈미는 사인표를 만든 최초의 아라비아 수학자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알하시브에 의하여 탄젠트표가 만들어졌다.
이후 15세기 독일의 수학자 레기오몬타누스가 ‘삼각법의 모든 것’이란 저서에서 처음으로 천문학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이미 고대문명의 대부분은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삼각법의 비례공식을 측량에 응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기존에는 측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자연의 모든 것을 측량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과 달의 거리를 측량한다든지 태양의 움직임을 통하여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삼각법의 비례공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인류문명의 지적수준이 단순한 경험에서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발전하는 것이다.
도형에 관한 기하학의 지식이 실용적인 기술에서 논리적인 학문 체계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른바 ‘원방의 우주관’이라고 하는 이원론의 철학적인 세계관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철학과 수학은 분리될 수 없었다. 우주만물의 존재와 운동 방식 밑바탕에 수학적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에 기하학이 있었다.
'신은 기하학적으로 사고한다.'고 말했던 플라톤이 만든 아카데미아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었다거나 유클리드가 ‘기하학에 왕도는 없다.’는 말을 남긴 것만 보아도 당시 기하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실감케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지나치게 기하학에 편중되어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가령 무리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를 도형의 길이로 이해한다거나, 방정식의 해조차 작도로 구하는 등 대수학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는 입체도형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구이고, 평면도형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원이라고 강조하였다. 과도하게 작도에 집착한 이유 역시 이런 기하학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으로 위와 같은 편중된 사고방식은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유클리드는 원론이란 책을 써서 당시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이 책은 개념 중심으로 사고하고 연역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논증해 나가는 방식의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점, 선, 면, 선분, 직선, 각, 직각 등등과 같은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정의, 공리체계의 도입, 증명을 통한 명제정립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수학적 특성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리스시대 완성된 기하학을 논증기하학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시대 완성된 기하학 체계는 이후 2000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이제 인류역사에서 모든 문명사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와 컴퍼스로 만들어 질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고방식의 철학적인 표현인 원방의 철학이 완성되기에 이르며 이후의 이원론 혹은 이분법의 철학적인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결국 모든 종교에서 신은 의욕이나 생각으로만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와 컴퍼스로 세상을 작도하듯이 창조한 것이라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신앙체계가 형성 된다.
물론 그 구체적인 완성의 시점에 관하여 동서양이 차이가 있는데, 오히려 동양이 서양보다 적어도 천년이상 앞서있었다.
다음 두 개의 그림 중에서 왼쪽의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희여와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7세기의 중국의 고창국의 묘지인 이른바 영원히 잠든 묘지라는 의미의 ‘아스타나’ 묘실천장에 부착되어 있던 것이다.
마치 남자 신인 복희는 왼손에 ㄱ자 모양의 자를 들고 있고, 여자 신인 여와는 오른손에 컴퍼스를 들고 있다. 둘 다 모두 하반신이 뱀의 모습이다. 둘이 균형을 이루며 서로 꼬고 있는 것은 세상의 조화와 만물 생성을 상징한다.
즉 자와 컴퍼스는 조물주가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 작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중국을 비롯하여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 황실의 전승되는 보물로 자와 컴퍼스의 형상으로 보아 서양의 것보다 1000년 이상 앞서서 자와 컴퍼스와 유사한 물건이 있었다.
물론 자와 컴퍼스가 이처럼 천지창조의 도구로 상징화된 것은 비단 동양사회에서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위 오른쪽 다음의 그림은 천지창조와 관련하여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블레이크(1757~1827)는 혼자서 왼손에 컴퍼스를 들고 우주를 작도하고 있는 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천지창조와 관련하여 이 두 그림이 전달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우주가 수학적으로 설계된 것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세상은 하나의 점에서 출발하고 이는 점점 커지면서 직선과 곡선으로 양분되며, 결국은 다시 하나의 커다란 원으로 통일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잘 정립한 사람이 헬레니즘문화의 철학적 대변자인 피타고라스이다. 그는 모든 수의 합은 원이라고 하였다. 원이라 함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태양도 원의 모양을 하고 있고, 달도 별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모두 원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주도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별과 달과 해 그리고 이 땅이 모두 원을 그리며 돌고 있기 때문에, 또 언젠가는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모든 물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영혼은 반드시 원을 그리며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도 언젠가 돌고 돌아서 다시 사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결국 생명존중 사상을 낳게 되고, 또 '우주가 곧 나'라는 물아일체 사상을 낳았다. 이것이 신이 만든 조화의 법칙이다. 피타고라스는 이 모든 조화가 이룩된 세계를 이른바 '코스모스'라고 규정했다.
고대 기하학의 대부인 유클리드는 원이란 평면상의 어떤 점에서 거리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하면서 세상의 모든 형체를 원 하나로 정립할 수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중국의 묵가도 원에는 중심이 있어, 거기서 원주 상의 어느 점까지든 그 거리가 동일하다고 하였다.
중심은 핵심과 같아서, 거기서 시작하여 원주 상의 어느 지점까지 움직이는 점은 모든 경우에 같은 거리를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은 모두 하나의 원으로 수렴된다는 인식은 점차 원의 형상을 우상숭배하게 되고, 결국은 왕이란 세상의 중심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이른바 황극사상을 낳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는 이른바 황극사상으로 물들게 된다.
지구를 포함한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칭하여 방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립한 것이다. 즉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원이고, 그 속에서 직선과 삼각형 사각형 다각형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원방의 우주관을 서양의 경우 숫자로서 정립한 사람이 바로 피타고라스이다.
그는 우주는 이른바 ‘조화수열’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점-선-면-체와 이들의 원과의 비례 비율로 모두 환원될 수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오늘날 피아노의 7음계를 정립한다.
또 이러한 관점은, 기원전 430년 경 아테네에서 유명한 소피스트인 안티폰에 의하여 더욱 발전된다. 그는 정다각형의 변수를 계속 늘려 가면 결국엔 원이 된다고 생각했다.
원이란 직선으로 혹은 사각형이나 삼각형의 합으로 모두 구성된다고 볼 수가 있다.
즉 이와 같은 그의 사고방식은 이른바 미분적분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원의 면적과 같은 다각형을 만드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의 이른바 ‘제곱화’ 실험은 매우 중요한 용어인 ‘무한분활성’을 착안한 것인데 미분적분의 원리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원에 내접하는 사각형을 만들어 점차 다각형과 면적이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면, 이 정사각형은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다. 결국 무한분할하게 되면 정사각형의 면적과 같은 원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관점은 수학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그는 곡선은 직선으로 비례관계로 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곡선은 직선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는 원의 세상을 사각형의 세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며, 곡선은 직선과 일치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미 그러한 주장은 현실적이지 못한 궤변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마치 실제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제론의 역설’ 과도 같은 궤변이라는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원의 둘레는 지름과 같이 직선과 같이 감지되고 확정되지 못하는 수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비례관계로 환원하여 본다.
이미 BC 1600년경 고대 이집트의 수학자인 아메스는 파피루스에 지름이 9인 원의 면적은 한 변의 길이가 8인 정사각형의 면적과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원과 방의 관계가 비례관계로 환원 된다고 본다.
한편 인류의 문명사에서 원방의 우주관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서양의 경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원과 방의 조화로운 비례관계로 보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미분과 적분의 수학을 낳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현실에서는 결코 원을 방으로 환원 될 수 없는 존재임을 15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곡선은 분명하게 직선으로 환원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수학적으로 과학의 검증을 통하여 정립 되는 데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15세기 독일의 신학자 니콜라우스는 아무리 변을 늘려도 원이 될 수는 없다는 사상으로 반박했다. 정다각형은 아무리 무한수열로 원에 가깝게 한다고 해도 결국은 원이 아니며 원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세상을 원 하나만으로 대변 할 수가 없다. 원과 방은 서로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병렬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사실을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방이란 기하학으로 말하자면 사각형이고, 이 사각형은 아무리 자기변신을 해도 원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세상은 원과 직선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원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극적인 세계관을 갖게 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국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세상은 간단하게 직선과 동그라미로 모두 표현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양극론의 세계관은 선지자들에게는 고대부터 인정되었으나, 민생들에게 광범위하고 신앙심으로 확립된 것은 바로 근대에 이르러서부터이다.
한편 고대인들은 우주를 신화적인 설명보다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천체들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우주 모델을 고안하였다.
우선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천문학을 살펴보자면, 지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지구를 중심으로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수메르 인들은 다음과 같이 고대 천문학에서 가장 발달, 하늘은 둥근 천장 모양이고 땅은 편평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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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로니아 > <수메르 > <(이집트> < 그리스>
이집트인들은 편평한 땅, 별들이 매달려 있는 하늘은 몇 개의 높은 봉우리로 받쳐 있다고 보았다. 또 그리스인들은 지구는 평지라고 생각하였고, 그 위에 하늘과 지하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인도인들의 우주관은 아래 그림처럼 엄청나게 큰 코브라 위에 거북이가 올라 타있고, 그 위에 세 마리의 코끼리가 인도를 중심으로 바다에 둘려 싸인 원반 모양의 대륙을 떠받치고 있으며, 다시 그 위를 네 마리의 코끼리가 올라 타 있으며 그 위의 주변에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 돌고 있다고 했다. 그 위엔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구약성서의 우주관은 육지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는 대지는 전체적으로는 평탄하지만 국부적으로는 산, 계곡, 강 등에 의한 변화가 있고, 육지의 주변은 바다로 둘러 싸여 있다.
그 지상 세계는 원형이며, 중앙엔 팔레스티나가 있고, 다시 그 중심부에 예루살렘이 있다고 유태인들은 믿었다.
< 인도> <구약성서> <중국>
고대 중국의 우주관은 우선 이른바 ‘개천설’이라고 하는데, 하늘은 둥그스름한 우산처럼 되어 있고, 그 아래에 평평한 땅이 있다는 것으로, 기원전 2~3세기 때 형성됨으로써, 주비산경에 소개되어 있다. 다음으로, 후한의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인 장형의 혼천설이 있는데, 이는 하늘은 달걀 껍데기와 같고, 땅은 가운데의 노른자위와 같다고 보았다.
원방각의 수학 - 주비산경
그런데 동양사회에서 아주 특이한 천문학이론서가 현존하고 있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수학 책은 주비산경(周髀算經) 이다.
이 책의 내용을 보게 되면 상고(商高)라는 학자가 우주와 천문의 수학적인 이치를 설명을 하는데 주나라의 왕인 주공(周公)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비산경의 산술과 기하학은 너무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데, 지구의 어느 부분이든지 황도와 위도 계산을 아주 정확하게 계산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천문학의 산술방법이 너무도 정교하여 지구의 자전과 공전현상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아주 신기하게도 이 주비산경에서 언급하는 천문학의 원리는 고대인도인의 우주모형의 특징과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른바 마야의 천문학과도 일치한다는 점이다.
초고대 시절에는 어느 지역 혹은 어느 문명이든 모두가 공유되고 있었던 관점이고 이론모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비산경은 단순한 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원방각의 수리학이 아니라 천문학이고 우주 책력이며 만물의 운동법칙을 수리물리학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주비산경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 주나라의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하족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실 그게 아닙니다.
왜 아니냐?하족을 비롯하여 황화문명의 누구라도 그러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황화문명의 철학적인 바탕에서는 주비산경의 수리학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계보가 없습니다.그래서 오늘날까지 중국수학사에서 주비산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합니다.그러나 환단문명사는 원방각의 철학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환단문명 의 철학적인 배경은 그자체가 원방각의 기하학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원방각이라고 하는 기하학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천부경이 경전으로 이어지고 부도지에서 성법체라고 하는 책력의 수리학이 전해지고.... 철학과 수리물리학과 종교가 철학과 융합된 원방각을 놀이형식으로 개발한 윷놀이가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역학으로는 환역이 있고 희역이 있고 황제 중경이 있고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이 있는 것이고이러한 수리학이론서가 주비산경을 낳게 된 것입니다.
분명하게 주비산경의 학문적인 계보가 환단문명에 있습니다.
아무튼 환단문명은 원방각의 철학사상에 기초하여 아룩된 것입니다.
원방각의 철학이 바로 천부경입니다.
천부경의 핵심은 바로 원방각이론입니다.
경전 그자체가 바로 원방각수리이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초고대문명부터 천부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입니다.
역으로 초고대문명의 흔적은 피라미드의 존재를 통하여 그 흔적을 인식할 수가 있는데 피라미드는 바로 천부경의 진리임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류는 초고대시절부터 천부경을 통하여 우주의 이치를 알게된 것인데...
물론 소수의 선각자들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천부경은 우주의 이치를 81자로 공식화한것인데
99단을 통하여 만물의 흐름을 수리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설명한 겁니다.
그런데 우주운행원리에서 가장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물론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일 겁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 존재에 관한 것일겁니다.
인간은 마음을 통하여 우주의 존재를 알고 그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비교하고 신과 경쟁하기도 하고...
무서움과 두려움 사랑과 분노를 느끼고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수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마음이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나타나고 어디로 가는지...
초고대시절부터 인간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어디로 가는지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이에 대한 답을 찾기위해서 피라미드기하학을 배우게된 것입니다.
천부경은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는겁니다.
천부경의 핵심은 바로 일묘연이라는 3자속에서 있습니다.
천부경의 수호자들을 통하여 3개의 경전으로 세분화 됩니다.
즉 천부경은 천의 영역인 성경과 지의 영역인 법경, 인의 영역인 인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81자의 성수로 공식화한 것인데 이것이 황부중경이라고 합니다.
법경은 91자의 법수로 정리한 것인데 이것이 항제중경이라고 합니다.
인경은 101자의 체수로 정리한 것인데 이를 3황내문경이라고도 합니다.
단군시대에는 황제중경을 부루태자가 하족들에게 전해주었던 것인데
후에 주천력과 8괘상중론으로 정립된 것인데
주비산경은 주천력과 8괘상중론을 정리한 것입니다.
즉 주천력과 8괘상중론은 바로 주비산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비산경을 통하여 우주만물의 다차원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비산경에 대하여 잘못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한것이라고 ....
서양보다 동양이 피타고라스 정리를 더 일찍 알게 되었다고....
500년 이상 앞섰다고요...?
주비산경을 피타고라스정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피타고라스정리 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철학적인 차원에서 평가하면 상황이 다릅니다.
피타고라스철학은 그자체가 궤변론입니다.
지독한 궤변은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불행의 근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류는 지금까지도 피타고라스철학의 궤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비산경은 피타고라스정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주비산경은 피타고라스식의 차원이동에 반대하고 진정한 차원이동이란 뭔지를 밝힌 겁니다.
우주가 어떻게 하여 생겨난것인지...
태양계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만물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우주가 생겨나는 경로를 원방각이론으로 설명한 거라고요
특이하다는 것은 원방의 이분법이 아니라 원방각이라고 하는 3분법의 기하학이론서가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원방각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우주와 자연의 변화하는 이치를 수로 환산하여 계산하기 시작하였던 바, 이를 수학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주비산경인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100년경에 작성된 것이라고 하는 주비산경은 내용은 짧으나 고대의 우주관과 천문과 역법에 대한 수학적 배경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 책의 상권 1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내용이 나온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상고(商高)에게 물었다.
“은밀히 듣자하니 대부께서 수(數)에 밝으시다고 하던데, 옛적에 복희씨가 어떻게 하늘의 움직임의 도수를 정했는지요? 하늘이란 되(升)로 재어볼 수도 없고 땅이란 자로 재어볼 수도 없는 데, 어찌 숫자로 환산했단 말인지요?”
이에 상고가 대답했다.
“수(數)의 법칙이란 원과 네모에서 나왔지요. 원은 네모에서, 네모는 구(矩)에서 나왔습니다.
또 구(矩)는 구구단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구(矩)로 나누어보면 밑변의 폭이 3이며, 높이가 4이고, 지름이 5입니다.
이윽고 그 바깥 길이로 네모로 만들고 한 조각을 한모라고 할 때, 다시 그 기반이 3, 4, 5를 이루고, 양 모가 각각 25인데, 이 숫자는 조각을 모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왕이 천하를 다스린 바탕이 이 숫자로부터 비롯했습니다.”
또 주공이 말하길 ‘숫자를 말함이 큽니다. 묻건 데 구(矩)를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묻자
이에 상고가 대답하기를,
“ 곧은 노끈으로 평탄한 길이를 재고, 비스듬한 길이로 높이를 재며, 뒤집어진 길이로는 깊이를 재며, 누운 길이로는 원근을 압니다. 둥그런 길이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거리를 합하여 네모를 만듭니다.
네모는 땅에 속하며, 동그라미는 하늘에 속하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서리가 집니다.
네모난 수는 전(典)이며, 네모에서 원이 나옵니다. 머리에 쓰는 갓으로 하늘을 본뜹니다.
하늘은 푸르고 흑색이며, 땅은 누렇고 붉습니다. 하늘을 숫자로 본뜬 것을 갓이라 하고, 푸르고 검은 것을 겉으로, 누르고 붉은 것을 안으로 하여 하늘과 땅의 위치를 묘사합니다.
이런 까닭에 땅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하고, 하늘을 아는 자를 성스럽다고 합니다.
지혜는 삼각형의 밑변에서 나오고, 삼각형의 밑변은 구(矩 )에서 나옵니다.
대저 구(矩는 수에 불과하지만, 만물을 재단하고 통제하니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
그러자 주공이 탄성하기를 ‘아름답도다!’
라 하였다.
그런데 사실 고대중국의 문명사에서 유교적인 철학자들은 음양이나 원방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원방각의 기하적인 우주모형을 가지고 수학과 과학적인 셈법으로 탐구한 전통은 매우 드물었다.
주로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으로만 원방의 세계관을 구축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관계되는 농사일과 하늘의 변화관계에 조차 점성술적인 방법이나 그야말로 주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숙명론적인 운명론으로 대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일시현상이나 월식현상을 나라의 장래운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든지, 사건과 사고와 관련하여 설명하는데 이용하는 것이다.
더나가서는 백성들의 각자의 자기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운명적인 것과의 관계식으로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할 뿐이기에, 그러한 현상을 통하여 농사일에 관련하여 과학적인 대비책으로 계산하지 못하였다.
우주가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에 대하여는 그들이 전혀 연구하거나 관심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위의 주비산경은 고대 중국에 있어서 이 방면의 유일한 예외로 가치가 있다.
주비산경을 통하여 우주를 원방각의 기하우주모형으로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대부분은 스스로 수치로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비산경의 개천우주모형의 8개 특징은 모두 고대인도의 우주모형의 특징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고대인도의 우주모형은 주비산경의 개천우주모형과 놀랄 정도로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점에서 거의 모든 곳이 일치한다.
고대인도의 우주모형에 대한 기록은 주로 푸라나스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의 성전이며 동시에 고대의 역사 서적이고,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구체적인 완성연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안의 우주모델에 대한 개념은 학자들이 베다시대 즉 기원전10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이를테면 주비산경은 태양광선이 사방으로 비치는 극한은 167,000리로 하였는데, 불경인 이른바 ‘입세아비담론’에서는 태양광의 경도는 7억2만1천2백 유순이며 주위는 21억6만3천6백 유순이라고 하였는데, 태양광이 비치는 반경이 유한한 고정수치를 지닌다는 점은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
이와 같이 인류의 각 문명사에서 참으로 신기하게도 숫자까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지구가 태양둘레를 돌고 있는 것인 진실인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이 진실인가는 별로 의미가 없다.
마치 오른손잡이를 진실로 보느냐 아니면 왼손잡이를 진실로 보느냐, 아니면, 시계방향을 오른쪽으로 하는 것이 과학이냐 왼쪽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과학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입장이 아니라 돌고 도는 과정에서 돌아가는 행로의 둘레가 얼마이고 그 각도는 어느 정도이고 그 돌고 도는 주기 시간은 얼마가 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지동설의 입장은 인류문명사에서 처음부터 견지하고 있었다.
다만 천동설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기만이고 거짓인가를 세상에 드러내 내보이며, 그 속내와 사고방식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폭로되었을 뿐이다.
이 말은 우주운행의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보지 않는 것이고 항상 객관성을 견지하였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처음부터 천동설과 같은 입장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들은 중세의 천주교에서는 이른바 천동설을 사활적으로 고집했다고 하는 것으로 배워왔다.
그래서 당시의 진리를 발견한 코페루니쿠스는 천주교의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으며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천주교성직자들은 우주의 객관적인 법칙을 알고자 원하였던 것이고, 코페루니쿠스의 연구를 물심으로 지원하였다.
가장 과학적인 관점은 누구를 중심으로 누구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관계식으로 정립하느냐가 핵심적인 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지동설과 천동설은 둘 다가 과학적인 관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지구의 갈 길을 가는 것이고, 태양은 태양의 갈 길을 가는 것이 정확한 답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제 과연 우리 선조들이 세계사에서 유래가 드물게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를 구축하고 세상을 선도해오면서 세계인들에게 내놓을 만한 독창적인 우주관은 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의 궁금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원방각의 시조 - 발귀리 선인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원방각의 기하학의 시조는 환웅시대의 발귀리 선인이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이맥이 예 고서들을 편집한 역사서인 태백일사가 있는데 그 소도경전본훈의 편에서 아래와같이
자세한 업급이 있습니다.
神市之世 有仙人 發貴理 與大皞 同門受學
而道旣通 遊觀乎 方渚 風山之間 頗得聲華
及觀 阿斯達 祭天 禮畢而仍 作頌 其文 曰
신시 시대(환웅의 배달국 시대)에 '발귀리'라는 선인이 있었다.
그는 대호(大皞)(일명 태호)와 함께 동문수학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도(道)를 깨우친 사람으로 방저(方渚)와 풍산(風山)을 오가며, 백성들에게 명성과 영화를 얻었다.
마침내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본 후에 (제천을)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一其極 是名良氣 無有而混 虛粗而妙 三一其體 一三其用 混妙一環
體用無岐 大虛有光 是神之像 大氣長存 是神之化 眞命所源 萬法是生
日月之子 天神之衷 以照以線 圓覺而能 大降于世 有萬其衆
故 圓者 一也 無極 方者 二也 反極 角者 三也 太極
대일의 극 (大一其極)을 양기(良氣)라 하는데, 무유혼돈이며(無有而混), 허조의 오묘함(虛粗而妙)이며
삼일의 체 (三一其體)와 일삼의 용(一三其用)이 오묘한 환(混妙一環)을 이룬다.
체용이 곁가지가 없으며(體用無岐) 콘공간으로 빛이 있으니 (大虛有光), 이것이 신의 모습이요(是神之像), 그 기(氣)가 오래도록 장존(大氣長存)하고 신의 조화이니(是神之化), 생명의 근원이며(眞命所源), 만법(萬法)이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다(萬法是生).
해와 달(日月之子)은 천신으로 가득하여 빛을 비춰주고 (以照以線).
원각능력(圓覺而能)으로 세상에 내려와 (大降于世) 만물이 생겨납니다. (有萬其衆).
고로 원(圓)은 하나 (一)이요, 무극(無極)이며, 방(方)은 둘( 二)이요, 반극(反極)이며, 각(角)은 삼( 三)이요, 태극(太極)이다.
夫 弘益人間者 天帝之所 以授桓雄也
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者 神市之所傳 檀君朝鮮也
桓易 出於雨師之官也 時 伏羲 爲雨師以 養六蓄也
於時 見 神龍之逐日 日十二變色 乃作桓易 桓 卽與羲 同 義也
易 卽 古龍 本字也
무릇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것은 천제 환인(桓仁)이 환웅(桓雄)에게 전수한 것이다.
일신이 내려와(一神降衷) 인간의 본성을 통하게 하고 큰 빛을 밝혀(性通光明) 인간 세상에 있으면서 인간을 교화하고(在世理化) 다스리는 통치의 이념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신시(神市, 환웅의 배달국)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전해졌다.
'환역(桓易, 환웅시대의 책력)'은 '우사(雨師)'라는 관직에서 나왔다.
당시에 '복희(伏羲)'는 우사의 관직에 있었으며, 여섯 종류의 가축을 기르고 있었다.
이때 복희는 태양의 빛에 따라 색깔을 변화시키는 신용(神龍, 도마뱀, 카멜레온)을 보았다.
(이 신용은) 태양을 좇아 하루에 12번 색을 변화시켰는데, 이것을 보고 "환역(桓易)"을 만들었다.
'환(桓)'은 즉 '희(羲)'와 같은 뜻이며, '역(易)'은 옛 용(龍) 자의 본래 글자이다.
紫府先生 發貴理之後生 而神明得道 15
飛昇嘗測定 日月之纏 次推考五行之數理著 爲七政運天圖 是爲 七星曆之始也 32
後蒼其蘇 又 復演其法 以明五行治水之法 是亦 神市黃部之中經來也 28
虞人姒禹 到會稽山 受敎于朝鮮 因紫虛仙人求見 蒼水使者 扶婁 26
受黃帝中經 乃神市黃部之中經也 禹取 而 用之 有功於治水 24
자부선생은 발귀리 후세 인데 신의 원리를 밝혀 득도하였다.
해와 달의 주기를 측정하고, 고찰하여 오행치수의 원리를 저술했는데 이를 '칠정운천도라 하고 '칠성'의 시작이다.
후에 창기소(蒼其蘇)가 다시 그 법(칠정운천도)을 다시 복원하여 '오행치수의 방법'을 밝혔다.
이것 역시 신시 황부중경에서 나온 것이다.
우(虞) 나라 사람 '사우(姒禹)'는 회계산에 와서 조선으로부터 오행치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紫虛仙人)에게 '창수사자 부루'를 뵙기를 청하여 '황부중경'을 받아 갔다. 이것이 신시 황부 중경이다.
우(禹:우왕)는 황부중경을 취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치수(治水)의 공을 세웠다.
桓易 體圓以用方 由無象以知實 是天之理也 18
羲易 體方而用圓 由有象以知變 是天之體也 18
今易 互體而互用 自圓而圓 自方而方 自角而角 是天之命也 24
然 天之源 自是 一大虛無空而已 豈有體乎 17
天 自是 本無體 而二十八宿 乃假爲體也 16
盖 天下之物 有號名 則 皆有數焉 13
有數 則 皆有力焉 7
旣言 有數者 則 有有限無限之殊13
又言 有力者 則 有有 形無形之別 13
故 天下之物 以其有言之 則 皆有之 以其無言之 則 皆無之 23
환역은 체 體)는 원(圓이고 쓰임은 방(方) (體圓以用方) 이다.
그러므로 상(象)이 없어도 그 실재를 인지가능한데 이것이 천리(天理)이다.
희역의 체는 방이고 쓰임은 원(圓)이다.
그러므로 상(象)이 있으므로 변화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천체(天體)이다.
역(易)이란 서로 체(體)이면서 용(用)이고, 스스로 원(圓)이면서 원(圓)이고, 방(方)이면서 방(方)이며,
각(角)이면서 각(角)이다. 이것이 천명(天命)이다.
하늘의 본질은 대일의 무공이니 어찌 형체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 자체가 본래 형체가 없으므로 28개의 별자리를 가상체라 하는 것이다.
모든 천하의 사물은 각기 불리는 이름(號名)이 있으니, 곧 수(數)가 있는 것이다.
수(數)가 있다는 것은 곧 힘(力)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수(數)가 있다는 것은 곧 유한과 무한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힘(力)이 있다는 것은 곧 유형과 무형의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고로 천하의 모든 사물은 그에 걸맞는 말(호칭)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지 그에 걸맞는 말(호칭)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환단문명의 경전 - 천부경
오늘날 전해지는 천부경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종류로서 그 내용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으나 글자 수에서는 모두 81자이다.
첫째, 태백일사본 (묘향산 석벽본)이라고 하며, 이는 바로 계연수 선생이 단군교에 의뢰한 것이다.
둘째, 농은유집 본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의 말기의 충신인 농은 민안부에 의하여 남겨진 유집이다. 민안부 선생은 고려말엽에 두문불출을 낳게 한 충절과 절개의 인물들 중의 한 분이다.
2000년 8월에 그의 후손 민홍규가 어느 잡지에 기고하면서 알려진 것이다.
태백일사본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
一積十鉅無匱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池一一終無終一
농은 유집본
一始無始一新三極無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
一積十鉅無匱從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氣合六生七八九
衷三四成環五七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池一一終無終一
한편 이맥의 태백일사 등에 의하면 천부경은 우리민족이 생긴 시기부터 구전되어 전해지다가 기원전 7197년부터 환웅시대에 신지 혁덕에게 녹도문자를 만들게 하고 기록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단군시기에 이르러 한글의 원형인 가림다 문자가 생기면서 다시 가림다 글자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해동공자로 추앙받았던 최치원 선생이 금강산을 찾았다가 우연히 이 가림다 글의 천부경이 새겨진 비석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한자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천부경은 위와 같이 81자의 한문으로 번역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환웅시대의 혁덕이 창제한 녹도의 글자가나 그 이후의 가림다 글자가 과연 무엇인지는 오늘날에도 아직 정확히 밝혀져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태백일사의 기록에 의하면 녹도글자는 사슴의 모양을 보고 창안했다는 것만 전해지고 있고, 또한 가림다의 글자에 대해서도 이 글자 모양이 한글과 비슷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는 것 외에 그 창제원리 등에 관한 것도 불명확하고 체계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최치원선생의 말년의 행적에 관하여 추적해보게 되면 혹시 천부경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으로 대했는가를 그나마 가강 가깝게 접근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분 역시 생애에 엄청난 분량의 저술을 하였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도 불구하고 천부경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형편이고 그 생애의 마지막을 누구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며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묘연하게 사라진다.
다만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분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에는 옛 부터 현묘지도가 있었는데 바로 풍류다’ 고 한 것이다.
그 분은 천부경의 이치를 깨우쳤지만, 세상에 드러낼 때가 아니라 하여 풍류로 전국을 유람하며 다녔다고 알려졌는데, 후일을 위해 태함산 석실에 천부경의 글을 새겼다고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의 제4권 신라본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언급되어 있다.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曰 風流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 신라본기 제4, 24 진흥왕 37년조)
위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최치원선생이 난랑비문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현묘의 도인 ‘풍류’라 하는 것이 있는데 이 가르침은 선사(仙史)는 물론 유·불·도 3교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최치원선생이 일러준 핵심 되는 개념이 바로 ‘풍류(風流)’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민족사의 도의 근원은 풍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도는 현묘한 도라는 것이다.
현묘하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어서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범적하기 힘든 경지의 도를 의미하기도 하며 신비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풍류도라는 것은 마치 큰 강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시원이 있는 것처럼 이 도는 인간의 모든 철학과 가르침의 시원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선교는 물론이고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이 모두 이 풍류의 도에서 나왔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현묘의 도로서의 풍류라는 가르침은 적어도 동양문명사에서 이룩한 모든 철학의 시원을 찾아서 올라가면 결국은 풍류의 도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유, 불, 선, 도교에서 풍류의 철학이 스며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그 진면목을 찾기에는 아직 역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과연 풍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실체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 것인가?
우선 풍류라고 하면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바람소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바람하면 오늘날의 어감은 고상한 철학적인 의미를 연상하기보다는 한량들의 유희나 놀이처럼 비생산적인 그 무엇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세상을 본다고 했다.
세상은 보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이 그 실체의 본질이 아닐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각기 다양하게 상대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풍류라고 하는 개념은 소리의 흐름이고 이는 물질의 진동에서 연유한다.
또 진동은 바로 에너지와 운동을 의미하므로 소리야말로 가상적인 존재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즉 만물의 이면에서 숨겨진 근원적인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소리는 음악의 원천이고 음악이란 조물주가 수학적인 계산에 의하여 아름다운 멜로디로 세상을 창조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인류문명사를 보자면 분명 소리를 만물의 시원으로 규정하고 음악을 통하여 학문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풍류라고 하는 개념은 소리와 음악을 통하여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문고와 피리와 같은 악기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유희놀이를 위한 소리악기에 불과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고 반면에 불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목탁처럼 마음의 정진과 고독한 수행을 위한 중요한 수단일 수도 있는 것이다.
최치원 선생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서도 전해오는 주목할 만한 설화와 전설들이 다양하게 있는데 특히 그 분의 천재적인 지혜에 탄복하는 설화가 중국에서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천부경과 관련된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중환이 저술한 인문지리서인 택리지에는 최고운 선생이 군산 옥구의 문창현에 있는 자천대의 돌함 속에 천부경을 새긴 비석을 감추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학자인 행촌 이암이 저술한 단군세기에도 의하면 원래 천부경은 비석에 새겨놓고서 백성에게 널리 알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미 천부경이 새겨진 비석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오직 최치원 선생만이 간신히 비석을 감추어 보관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당시에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간직한다는 것조차도 매우 비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치원 선생은 아주 몰래 감추어 두려고 하였지만 그 비밀이 어느새 소문을 타고 당시의 신라왕에게 알려져 수거해 오라는 왕명을 발동하여 찾아 나서게 된다.
이와 같이 물밑으로 숨겨진 사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가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서울의 중앙의 관리들이 왕명을 받아서 그곳까지 빈번하게 찾아가서 그 돌함 속에 감추어진 천부경의 비석을 찾고자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천부경과 관련하여 최치원선생의 철학과 정치사상의 진면목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그분을 이른바 ‘해동공자’라고 부르는데 이 별칭에 대하여 다시 음미해 볼만한 것이 있다.
솔직히 그분의 철학을 공자사상의 틀 내에서만 탐구한다면 과연 올바르게 평가할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많이 있다.
공자는 단지 유교학을 완성했을 뿐이고 당시에는 이미 불교와 도교와 같은 다양한 철학들이 공자의 철학과 쌍벽을 이루고 자기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치원선생의 학문세계는 유교학에 머물지 않았고 불교와 도교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상을 방대한 저술작업으로 정립하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들조차 그분의 철학을 유학의 틀내에서만 평가하고 있으며 그분의 정치적인 행적에 대하여 마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가 이풍진 세상을 한탄하며 유랑하다가 외롭게 사라진 것으로 마치 앵무새가 말하듯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천부경의 비석이 숨겨진 자천대는 서해안에 위치하며 지형은 넓고 평평하며 가히 즐길만하다고 하며 최치원선생이 거문고와 피리를 가지고 유희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저술된 ‘秋夜雨中’이라는 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차원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우선, 당시의 비관적인 정치상황이나 자신의 신분적인 한계에서 오는 절망감과 멀리 타향살이의 고독감과 애틋함을 표현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의 시 해석은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의 해석내용이며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이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힘들여 읊고 있건만
世路少知音 세상 어디에도 날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밖엔 밤비 내리고
燈前萬里心 등불아래 천만리 떠나간 내 마음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위와 같은 비관적인 해석과는 달리 자신의 학문수양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음미한 것으로 마치 부처님의 해탈과 달관의 심정을 노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은 진음이건만
世路少知音 세상 사람들 듣기 어렵 네
窓外三更雨 창밖엔 깊은 밤 굿은 비 내리지만
燈前萬里心 등불 앞 내 마음은 만리에 가있네
그분은 가을의 바람소리를 통하여 세상의 이치를 알았고
그래서 이를 객관화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이른바 ‘거문고’라는 악기를 다루는 것이었다.
가을바람이라는 자연의 현실을 통찰하면서 그 속에서 숨겨진 과학적인 진리를 발견하였던 것이고 이를 검증하기 위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위 시를 짓는 데서도 숫자계산도 정확하게 한 듯한데, 천부경의 글자 81의 숫자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듯이 위 시의 제목의 4수와 시의 20자의 숫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문고는 고독한 심정을 달래는 단순한 악기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경우와 같이 소리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아름다운 음률을 만들어 내 시끄러운 세상을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가득하도록 만들어 가는 마술과 같은 도구인 것이다.
지금도 옥구의 자천대가 있는 월영산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대를 이어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새만금개발과 미군기지의 주둔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전설로만 기억되고 있다.
최치원 선생이 거문고를 가지고 유희를 하고, 자연을 벗 삼아 떠돌이 생활을 하였던 것이, 마치, 오늘날 한량처럼 무기력한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