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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이야기 스크랩 西山大師 解脫詩 (서산대사 해탈시), 휴정[ 休靜 ]에 대해서
재휘애비 추천 1 조회 54 14.12.28 19:4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西山大師 解脫詩

(서산대사 해탈시)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없어짐이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것
죽고 살고 오고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아파트 엘레베이터 공지사항에 붙어있는 글을보고서....

 

근심 걱정 없는사람 누군고

출세하기 싫은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사람 누군고

흉 허물없는 사람 누구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말고

못 배웠다 주눅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거 많다 유세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 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마소

세상에 영원한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세상

있고 없음을 편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고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같은 거라오 뭘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 바람이라오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요

푹풍이 아무리세도 지난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다 바람이라오

 

버릴것은 버려야지

내것이 아닌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리요

줄게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노

 

내것도 아닌데

삶도 내것이라 하지마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오겠소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없은 욕심일 뿐

삶에 억눌여 허리 한번 못피고

인생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그리 잘났다고 남의것 탐내시오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않소

낮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게있게소 살다보면

기쁜일도 슬픈일도 다 있는것

잠시 대역 연기 하는것일 뿐

슬픈 표정 짓는다하여 뭐 달라 지는게 있소

기쁜 표정 짓는다하여 모든게 기쁜것많은 아니오

 

내인생 네인생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않소 그렇게 사는 겁니다

 

 

휴정[ ]

서산대사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고, 사명대사의 스승으로도 알려져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불()·도()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본관 완산(). 속성 최(). 자 현응(). 호 청허()·서산(西). 속명 여신(). 안주()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입산, 숭인()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과 《화엄경()》 《법화경()》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에게 구족계()를 받고
영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에 급제, 대선()·중덕()을 거쳐 교종판사()·선종판사()를 겸임했으며, 보우()를 이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의 무고로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이 되어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에서 여생을 보냈다. 

휴정 본문 이미지 1 상주 전투진주 대첩이순신명량김시민곽재우한산도이순신정인홍이일신립유성룡유정(사명대사)정문부휴정(선사대사)이정암행주권율영규조헌김천일고경명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

좌선견성()을 중시하고 교()를 선()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에 교종()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 ·불() ·도()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 금강산 유점사()에 부도()가 서고, 해남() 표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 《선교결()》 《운수단()》 《삼가귀감()》 《심법요()》 《설선의()》 등이 있다.

 

 

스님의 법명은 휴정()이고, 법호는 청허()이며 서산(西)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자()는 현응()이다. 시조()는 완산() 최씨()이고 어머니의 시조는 한남() 김씨()이다. 태종()때에 이르러 친가와 외가의 현고조()들이 각각 용호방()에 올라 창화()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부모들은 모두 창화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서산대사 본문 이미지 1

그뒤 현윤()으로 있던 외할아버지 김우()가 연산군()에게 죄를 지어 안릉()에 귀양가서 살게 되자 스님의 부모들도 이에 연루되어 집안식구 모두 관리[]가 된다. 8년이 지난 뒤 외할아버지에 대한 지가 다시 논의되어 특별히 조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복직()이 허용됐으나 그러나 마침내 관서(西)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은 세창()이다. 나이 30에, 어떤 사람의 천거로 기자묘()의 조그만 관직[]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관리가 와서 떠나자고 하며 부임 날짜를 말해주자 세창은 웃으면서 한마디로 이를 거절한다.

“정든 산, 희뿌연 달과 한 병의 막걸리, 아내의 즐거운 마음이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오.”

그리고는 허리띠를 풀고 남녘으로 머리 향한 채 누워 큰 소리로 휘파람을 몇 번 불자 관리는 이내 물러갔다. 세창은 무릇 고을에서 의문 나는 것을 갖고 와서 물으면 티워주고() 다투는 자들이 찾아오면 그치도록 했으므로 고을 관리[]로 일한 13년 동안 그 지역 주민들에게 ‘덕로’()라는 별호로 불리었다.

조선 중종 14년(14, 1519) 기묘() 여름, 어머니 김씨는 며칠간 계속 몸이 불편하더니 하루는 창가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이때 어느결에 나타났는지 한 노파가 찾아와 예를 올리고,

“놀라지 마십시오, 장부()를 잉태하겠기에 제가 와서 축하드리는 것입니다.”라 하고는 또 예를 베푼 뒤 홀연 사라졌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상도 해라. 우리 부부는 동갑()으로 나이 오십에 가까운데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
”김씨 부인은 민망히 여기는 한편 의아해 했다.

이듬해(, 1520) 3월, 김 부인은 과연 기골이 훤칠한 사내 아이를 낳았다. 노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늙은 조개에서 진주()가 나오니 하늘의 뜻이로다”라 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아기가 세 살 되던 해 4월 초파일, 세창은 낮술에 취하여 마루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때 괴상하게 생긴 한 노인이 나타나 “아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라 말하고는 두 손으로 아기를 받쳐 들고 주문()을 몇 번 외운다. 그 소리는 고대 인도어[]같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주문 외우기를 끝낸 뒤 아기를 내려 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이 아기의 이름을 운학()이라 하고 소중히 기르시기 바랍니다.”

세창이 ‘운학’이란 이름의 뜻을 물었다.

“이 아기의 평생 행지()가 마치 정처없는 구름, 고고()한 학()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홀연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노부부는 아기를 부를 때 ‘아기 스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운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색다른 장난을 했다. 모래를 모아 탑을 쌓고 혹은 기와를 가져다가 절을 세우기도 하는 등 늘 이러한 놀이를 일삼았다. 그런데 아이에게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홀연 먼저 돌아가시더니 이듬해 아버지마저 뒤이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백 년의 살림살이[]가 하루아침에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안주목사(使)로 와 있던 이사증()이 슬픔에 잠긴 고아의 소문을 듣고 소년을 자기 처소로 부른다. 때는 마침 겨울이었다. 목사는 멀리 눈덮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면서 소년에게 말한다.

“운()을 부를 테니 시()한 수 지어보겠니”
“제가 어찌 감히…”하고 겸양하는 소년에게 목사는 비낄 사()자 운을 불렀다.

소년은 운을 듣자 즉석에서,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비끼니()”라고 응대했다. 연이어 꽃 화()자를 부르자 소년은 또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온누리를 덮은 눈이 꽃처럼 곱구나()”라고 읊었다.

목사는 소년의 비상한 재주에 탄복하면서 “너는 나의 아들이로다”라며 양아들로 삼았다. 이때 소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목사는 얼마 뒤 내직()으로 들게 되자 소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취학()시킨다. 그래서 소년은 12살에 성균관 선비들의 명단 끝부분에 이름이 올랐다. 하루는 한 노학사()가 소년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너의 고향은 이 곳에서 멀지 않다. 네 선친()은 나와 친한 사이였으니 내 너를 멀리할 수 없구나.” 그리고는 소년을 이끌고 흥인문(:동대문)밖으로 나가 묵은 버드나무가 서 있는 사천()의 언덕을 가리키며 “여기가 바로 네 선친의 옛 집터이다”라 했다.

노학사는 몇 간의 서당()을 건립, 자제() 5~6명을 모아 모두에게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서로 의형제를 맺고 여기서 공부하되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하고는 스승을 초빙하여 3년 동안 배우도록 했다. 소년 운학()은 15세 되던 해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제의 쓴 잔을 마시자 커다란 자극을 받고 더욱 발분한다. 마침 호남지방으로 내려가 있는 스승 박상()을 찾아가기 위해 몇몇 동학()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스승은 예기치 못한 우환[:]을 만나 이미 서울로 돌아간 뒤였다. 소년들은 울적하고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이들 가운데 한 소년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천리 길 멀다 않고 스승을 찾아나섰다가 일은 비록 어긋났지만 이런 명승지에 와KT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느니 삼남()의 산천이라도 유람하는 것이 좋겠다.”

소년들은 두류산(:) 화엄동()연곡동()칠불암()의신동()청학동()의 크고 작은 절들을 찾아 다니며 6개월여를 마냥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조그만 암자에서 한 노숙((宿:도덕 높은 스님, 을 이름)을 만났다. 운학을 본 숭인 노숙은 첫눈에 그가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다.

“그대의 용모를 보아하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마음을 돌려 심공급제()하면 영원히 세상의 명리()를 끊고 고통을 떠나 즐거움의 소득()은 다만 하나의 헛된 이름뿐이니 참으로 슬프지 않으냐”며 여쭙는다. “어떤 것을 심공급제()라 합니까” 숭인 노숙은 그 순간 눈을 꿈뻑[]하며 “알겠느냐”한다. “모르겠습니다.”이에 노숙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야”라 하고는 《전등록()》《선문염송(염)》화엄경()》《원각경()》《능엄경()》《법화경()》《유마경()》《반야경()》 등 수십 권의 책을 꺼내 보여 주면서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면 점차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해준다.

운학이 지금까지 배워온 것은 공맹()의 가르침을 종지()로 하는 유학의 경서()들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운학 소년은 처음 접하는 불교의 심원()한 세계에 마음이 이끌려 공부를 시작했다. 뒷 날 숭인 노숙은 운학을 부용영관() 대사에게 소개한다.

영관은 이때 벽송지엄()의 법을 이어받아 지리산에서 크게 선풍()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운학을 한 번 보매 큰 그릇[]이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 들인다. 운학의 행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운학은 3년여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부지런히 경전의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는 한편 참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 영관은 운학 행자의 막힘을 소통시켜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시의적절한 가르침을 내렸다.

함께 떠났던 벗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고 운학만 홀로 선방()에 머물며 뭇 경전들을 섭렵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이름과 형상]]에 속박되어 대자유를 누리는 해탈의 경지[]는 요원하기만 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운학 행자의 마음은 침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자 이면에 숨겨진 오묘한 가르침을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시 한 수를 읊는다.

홀연 들려온 소쩍새 소리에 창밖을 보니 봄 빛 물든 온 산이 모두 고향이고녀
滿

며칠 뒤 그는 또 다시 이렇게 읊는다.

물 길어 오는 길에 문득 머리 돌리니 수많은 청산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운학은 이튿날 아침, 은도()로 손수 머리를 깎고 서원()한다.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로 평생을 살지언정 문자나 외우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일선() 대사를 수계사(), 석희() 법사와 육공장로(), 각원상좌()를 증계사(), 영관()대사를 전법사(), 숭인장로()를 양육사()로 하여 스님이 되는 의식(:)을 올려UT다. 이때 휴정()이라는 법명을 받으니 행자 생활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스님이 된 휴정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 스님 회상에 참예, 인가를 받고 두류산9:)으로 들어가 삼철굴()에서 세 철[]을 나고 대승암()에서 두 철을 보냈다. 그리고 의신()원통()원적()은신()등 여러 암자에서 몇 년을 보내며 더욱 정진했다.

하루는 용성(:전북 남원)에 사는 벗을 만나러 가는 도중 별마을[]을 지나다가 한낮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아 연거푸 두 수의 시를 읊는다.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마쳤네



휴정은 이어서 또 이렇게 읊는다.

홀연 제 집을 발견하니
온갖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천언만어의 경전들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그리고는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명종 1년 (,1546)가을, 갑자기 제방을 유력()하고 싶은 생각이 일자 간편한 행장으로 길을 떠난다.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 풍악산(:가을의 금강산 이름) 미륵봉에 들어가 구연동()에서 한 철[], 향로봉에서 한 철, 성불암()영은암()영대암()등 여러 암자에서 각각 한 철을 나고 함일각()에서 한 해를 머물렀다. 이때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연산군 때 폐지했던 선교양종()을 다시 일으키고 승려들을 등용하는 승과()제도를 부활시켜 명종 6년(,1551) 11월 19일 첫 시험을 실시한다. 휴정은 주위 사람들의 권청()에 못이겨 응시, 합격자 4백 6명 가운데 수석으로 급제하여 대선()이 된다. 서른네 살 되던 명종 8년(1553) 1월 19일 나라에서 내린 도첩()을 받고 주지명(:)에 오른다. 그는 이해 여름을 금강산 돈도암()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 고향을 다녀온다.

36세 되던 명정 10면, 전법()이 되고 석 달 뒤에 교종판사()가 되며 다시 석 달 뒤 그해 가을에는 선종판사()가 된다. 이로써 승직()의 최고 지위인 선교양종판사()가 된 휴정은 이듬해 보우()의 후임으로 봉은사()주지에 취임한다. 그는 여기서 1년 남짓 머물다가 어느날 주지나 판사 등의 명리()가 출가의 본뜻이 아니라 여겨 눈병을 핑계로 모든 승직()을 버리고 38세 되던 해 다시 지팡이 하나와 바리대 하나, 단벌의 옷만을 챙겨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천석간()에서 반년을 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내은적암()에서 3년을 지낸 뒤 황령암()능인암()칠불암()등의 암자에서 3년을 머문다. 그리고 나서 관동지역의 태백산오대산풍악산을 거쳐 멀리 관서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묘향산 보현사()로 가서 관음전(殿)과 내원()영운()백운()심경(금선()법왕()의 여러 대()와 아득히 너른 천지의 수많은 산천을 두루 편력하는 휴정의 몸은 마치 기러기털[]처럼, 풍운()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휴정은 이렇게 명산대찰을 편력하는 동안 여러 편의 시를 읊었는데 금강산에서 지은 삼몽사()와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가 유명하다.

주인은 손에게 꿈을 얘기하고
손은 주인에게 꿈을 말하네
지금 꿈을 얘기하는 두 사람
그 모도 꿈 속의 사람일레



이렇게 삼몽사를 읊조린 휴정은 향로봉으로 올라가 세상의 온갖 명리()의 허망함을 절감하며 시 한 수를 짓는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라
맑고 그윽한 달빛 베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은 묘음()을 연주하네



향로봉 사는 뒷날 역모()의 혐의를 사게 된다. 휴정은 일체의 승직()을 버리고 서울을 떠난 뒤 자신의 빛을 갈무리하여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나 도()를 물으러 찾는 이는 날로 늘어났다. 이 무렵 이른바 ‘기축()의 옥()’이라 불리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정여립()의 역모 기도가 조정에 알려져 그 일당은 모조리 잡히고 정여립은 자살했으나 역모에 가담한 무리 중에 승려 출신이 많은데다 역모의 본거지가 계룡산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절이라는 점이 불교계를 난처하게 했다.

이때 포도청에 검거돼 문초를 당하던 무업()이라는 이가 휴정의 ‘향로봉시’를 들어 마치 모반()에 가담한 것처럼 진술하고 그의 제자인 사명당() 유정()도 끌어들여 관련이 있는 듯이 무고했다. 역모의 혐의를 받은 휴정은 묘향산에서, 유정은 강릉에서 각각 붇잡혀 옥에 갇히게 된다. 휴정은 비록 역모의 누명을 쓰고 잡히긴 했으나 그의 태도는 의연했으며 말은 분명하고 조리 있었다. 선조는 휴정의 억울함을 간파, 즉시 석방하게 한 뒤 그의 시집()을 열람하고는 뛰어난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며 자기가 손수 그린 묵죽() 한 폭에 시 한수 []를 지어 하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는 땅에서 난 것 아니네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바람이 흔들어도 소리 아니 들리네



휴정은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린다.

소상강 변의 우아한 대나무가
임금님 붓 끝에서 나와
산승의 향불 사르는 곳에서
잎마다 가을 바람에 서걱거리네



선조는 또 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내린다.

동해변 금강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인걸이 나왔던가
태산 북두처럼 높은 이름
오늘의 여래이어라



휴정은 임금의 시에 대해 답시를 짓는다.

세상 일 잊고 존재의 실상을 조견하나니
허령한 진면목 어찌 윤회()에 들랴
금강산의 돌들은
모두 크고 작은 여래이어라



선조는 후한 상을 내리며 위로한 뒤 산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은 지 불과 3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4월 14일 상륙한 왜군()은 삽시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맹렬한 기세로 북상()했다. 사세가 위급해지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북으로 향해 마침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홀연 휴정이 생각나 좌우에 그의 소재를 묻고 시급히 찾아오도록 명한다[]. 이때 휴정은 묘향산에서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의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했다. 선조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나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경은 부디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해주오….”

휴정은 울면서 다짐한다.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불보살()의 도움을 빌도록 하고, 그밖의 모든 승려들은 신이 통솔하여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휴정의 충성에 감동한 선조는 즉석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이란 직책을 내렸다. 어전을 물러나온 그는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모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조선 건국 이래 조정으로부터 줄곧 억압 받아온 승려들이었으나 불교의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나라과 백성을 위기로부터 건지려는 의승병()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사명당 유정()은 강원도 관동()지역에서 일어났고 처영()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휴정은 직접 문도를 1천5백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원병()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선조 26년(1593) 10월, 의승병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의 복구작업을 폈다. 의승병들의 전공()을 시기한 유신()들의 비난 소리가 높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병을 보낸 명나라 조정과 명군진중 및 적진에까지 휴정의 이름은 떨쳤다.

명나라군의 총지휘자인 경략() 송응창()과 제독()이여송()을 비롯, 삼협총병()이하 여러 장수들은 다투어 글월을 보내 휴정의 전공()을 치하했다. 어떤 이(이여송)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니 태양을 꿰뚫는 그 충성에 우러러 존경할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여송은 또 송시()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보냈다.

공리에 관심 없이
불도만 닦더니
나라일 위급하매
산을 내려왔네



선조 27년, 휴정은 사직할 뜻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의 나이 팔십, 이제 근력이 쇠하였아오니 군사()를 제자 유정 및 처영에게 맡기고, 도총섭의 인장()을 반납하고 신이 본래 머물던 묘향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이에 임금은 그의 뜻을 아름다이 여기고 늙음을 민망히 여겨 떠나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호()를 내렸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휴정은 또다시 유유자적한 본래의 한도인()이 되었다. 선조 37년(, 1604) 1월 23일, 휴정은 원적암()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날 따라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휴정은 눈발 속에 견여(輿)를 타고 가까운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절한 뒤 방장실(:주지실)로 돌아와KT다. 목욕재계하고 가사장삼을 수한 뒤 부처님전에 향을 사른 다음 그는 법상9)에 올라 마지막 설법을 했다. 설법을 마친 그는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영정()에 시 한 수를 쓴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고녀


그리고는 유정과 처영에게 보내는 글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85세, 수행 나이[] 67세였다. 기이한 향내가 방 안에 가득하여 사라지지 않더니 삼칠일(21일) 뒤에 비로소 그쳤다. 제자 원준()인영()등이 다비한 뒤 영골()한 쪽과 사리 2과를 습득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봉안했다.

또 정골() 한 조각은 제자 유정()자휴() 등이 봉산(:)으로 받들고 가 그에서 사리 몇 과를 수습하여유점사 북편언덕에 봉안했다. 제자들은 1천여 명에 달했고 그중 당대에 이름을 떨친 스님만도 70여 명이었으며 특히 두각을 나타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한 대종사급(:) 인물들도 4~5명이었으니 가풍()의 융성함을 알겠다.

저서로는 《선가귀감()》《선교석()》《운수단()》《삼가일지()》 각 1권, 《청허당집》8권, 《회심곡()》1편이 세상에 유통되고 Dlt다. 문인 언기()의경()쌍흘()등의 우러사() 이정귀()에게 비석글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에 비석을 세웠다.(1630).

인조 9년(4, 1631년) 봄, 문인 태능()원철()해안()등이 계곡(谿)장유9)에게 비석글 짓기를 구걸하여 해남 두륜산()의 대둔사()에 비석을 세웠다. 그 이듬해(, 1632) 가을 《금자보장록()》 1권을 전남 해남의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시켰다.

대둔사에는 의승대장 황금가사() 한 벌, 홍금()가사 한 벌, 백금() 장삼 한 벌, 벽옥의 바리대[] 3좌(), 가죽신[] 2켤레, 검은 거문고[]와 염주 두가지, 옥사자() 모양의 연적() 1좌, 중덕대선()의승과 합격증서[] 1장, 낙산사 주지 임명장 1장, 유점사 주지 임명장 1장 등의 휴정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제자 영잠()대사가 휴정의 삼년상[]을 마친 뒤 메고와 보관한 것으로 휴정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휴정은 임종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적한 뒤 의발()을 두륜산 대둔산에 보내어 보관케 하라고 당부했었다. 뒷날 나라에서는 임진란에 공이 큰 의승장()들의 충의()를 길이 기념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때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사명당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의 표충사()다. 여기에는 휴정사명영규의 위패가 안치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 대둔사에 있던 휴정의 법손()들은 크게 개탄했다. 휴정이 입적한 뒤 1백85년 되던 해 정조 12년( , 1788) 대둔사 스님 계홍()과 천묵()은 글을 올려 임금께 탄원했다.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대둔사에 대사의 충의()를 길이 기릴 수 있게 사당을 세워달라는 요지였다. 이에 임금은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할 것을 명하고 ‘표충()’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는 한편 사명()과 뇌묵()을 좌우에 배향()토록 했다. 이듬해(, 1789) 4월 위령제()를 봉행함에 조정에서는 예조정랑() 정기환()을 보내 제향()에 참석하게 했다. 홍문관 수찬() 송익효()가 지은 제문()은 휴정의 충의()를 이렇게 추모했다.

그 옛날 임진년
왜구들 침략할 제
불교계의 충의는
휴정이 으뜸이라
머리 깎고 가사 걸친 몸으로
인륜을 다했고녀
지혜의 칼 빼어들고 서편으로 달려가니
의로운 이들 그를 따랐네
명군()과 함께
난리를 평정하고
어가()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돌아오니
공훈()더욱 빛났어라
당시 임금 공로 기려
하사한 글 찬란커늘
어찌하여 표충사()는
유정()을 우선했나
머물던 옛 절[]
웅대한 새 사당()지어
법풍을 세우고 공로를 권장하니
뭇 사람 청에 따른 임금의 윤허일세
편액과 제물() 내리신
임금님의 각별한 배려에
외진 남녘 사람들 어깨 으쓱하니
비록 승려지만 존경스러워라.

승지() 정약용()이 쓴 상용제문()에서도 그의 충의는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선정()과 지혜() 모두 탁월하고
충성과 의리 다같이 융성하여라
큰스님 나라 위한 의거()
두 제자[]가 가풍이었네
수많은 왜적() 사로잡으니[]
임금은 그 공적() 적게 했네
솥과 제기()에 기록 새겨지고
제물() 풍성하도다
봄빛 완연하매
사모의 정 더욱 간절하여라
영가()들의 천도()를 위해
임금님의 은전()이 내려졌네.

삼가 홍제존자사명당선사()와 우세존자뇌묵당선사()를 좌우에 모시고 배향()한다. 홍문관 제학() 서유린()이 <표충기적비()>의 명문()을 지었다. 정조 18년(, 1794),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西)의 명문()을 지을 때 서공(:)이 곁에서 도와준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알려진 것이다.

다섯 집의 복호결()과 보솔() 30명으로 하여금 제향[]을 지내도록 했다. 고종 8년(10, 1871)그동안의 재정적 지원을 끊고 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을 봉행토록 했다. 제문()은 구계각안()이 지엇다. 대둔사에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연화경()》 1권과 황금 병풍 1좌가 있다. 《연화경》은 안평대군 이용()이 손수 쓴 것이고 병풍은 일본의 관백()이 바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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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2.30 16:20

    첫댓글 쓰시느라 무지 힘들었을거 같습니다...차분히 다 읽기가 좀 부담스러워 쭉쭉 넘기면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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