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감자꽃이 시들면서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
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
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
싸리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
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모락모락 쪄내고 있었다
단맛의, 차진 알갱이들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 임동윤 -
식물의 성장과 변화를 보면 그 흐름이 정확하다.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물론 봄꽃이 있고 가을꽃이 있는 것처럼 어느 종인가에 따라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계절은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간은 정확하다. 우리네 삶도 자연처럼 정확하면 얼마나 좋을까.
임동윤의 시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은 이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 특히 여름날 농작물의 성장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물론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농작물의 성장과 변화가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어머니’와 ‘나’의 그리움이다. 시 속 화자가 제시한 순서대로 농작물의 변화를 따라가 보자.
‘감자꽃이 시들면서 /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니 6월말에서 7월이다. 바야흐로 여름이고 땡볕을 받은 감자는 땅 속 덩이뿌리 하지감자가 잘 익어갈 것이다. 그때 쯤 장독대 옆에 핀 봉숭아꽃으로 손톱에 물을 들일 것이요 봉숭아 꼬투리가 익어 스스로 터지며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것이다. 그러면 ‘옥수수는 /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린다. 드디어 옥수수가 익어간다.
이때쯤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는데 잠자리가 목마를 탄다고? 맞다. 잠자리도 생명체이니 교미를 하여 번식을 한다. 뜨거운 햇살에 싸리나무로 된 울타리는 더 말라 여위어질 것이고 해바라기 씨도 영글었으니 고개를 숙여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을 것이며 고구마의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질 것이다. 감자꽃 - 봉숭아꽃 - 옥수수 수염 - 해바라기 - 고구마에 이르기까지 여름날에 영글어 가는 농작물은 시간의 흐름은 물론 점점 깊어가는 여름날 한 때를 그려놓는다.
그런데 이제 곧 가을인데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시 속에 아버지가 언제, 왜 나갔는지가 나오지 않으니 그냥 ‘아버지의 부재’만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지만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하면서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는 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그만큼 깊어만 간다.
이럴 때에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단맛의, 차진 알갱이들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가마솥 가득 모락모락 쪄내’는 일이다. 도치법으로 된 이 구절은 ‘그 여름이 저물도록’과 ‘익을 때까지’ 옥수수를 쪄내는 어머니의 모습이 강조된다. 아들인 ‘나’가 먹을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불쑥 대문 안으로 들어설 아버지가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두는 것이리라. ‘단맛의, 차진 알갱이들이 노랗게 익을 때’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농작물은 영글어 간다. 그러나 그렇게 영글수록, 익어갈수록 화자네 집의 빈자리 -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 깊게 만든다. 감자꽃, 봉숭아꽃, 옥수수 수염, 목마를 타는 잠자리, 해바라기, 고구마로 이어지며 점점 깊어지는 그 그리움은 옥수수를 쪄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절정을 이룬다.
식물의 성장과 변화 - 자연의 시간은 정확하다. 그러나 화자의 집에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화자의 집에는 시간이 멈추어버렸으리라. 어찌 읽으면 농가의 여름날 풍경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여름날 농작물의 변화 이면에는 점점 깊어가는 그리움 - 바로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허전한 마음이 담겨 있다. 제목까지 ‘저녁’이다. 시를 읽으면 잘 그려놓은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지만 다 읽고 나면 내 마음까지 허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