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혹은 '동거'라는 기회를 통해 남자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심도 있는 연구를 할 기회가 없었던 내게 이 친구는 남자라는 동물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는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사귀던 남자친구의 심리가 영 알쏭달쏭 하다거나 남자들은 어떤 형태로 성욕을 느끼고 어떤 길을 통해 해소하는가, 왜 남자들은 Macho가 되고 싶어하는가, 남성이 대체적으로 여성보다 더 이기적인 이유 등이 궁금할 때면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을 신청했고 그는 그야말로 성심 성의껏, 살신성인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경우를 분석자료로 들어가면서 질문에 답하곤 하였다.
이것은 반대로도 적용되어 나 역시 그의 커피 한 잔에 넘어가 여성 심리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해준 적이 꽤 여러 번이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통화는 동창들의 근황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인도의 사이비 교주이야기를 거쳐 어느덧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접어들었다.
나는 '언젠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그 아름다움의 비밀을 밝혀내는 책을 한 권 쓰는 게 희망이다'라 말했고 그 때를 위하여 내가 작성해 놓은 비장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문학, 예술, 경제, 정치, 사회, 학술, 연예계 등 각 분야를 총망라한 나의 리스트를 들은 그는 그러나 조심스런 목소리로 내 미적 감각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논평하였다. 왜 하나같이 늙어빠져 이젠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평가할 때가 지난' 여자들만 골라놓았냐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정말 나의 명단에 올라있는 여자들은 대부분이 40대, 가장 젊은 모 탤런트가 33살, 50대 이상의 여성들도 여러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령의(?) 나이를 인식했다고 해서 그들이 대한민국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이라는 나의 생각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성과 우아한 미모에다 세월이 가져다 준 따스함까지 갖춘 탤런트 K씨는 진정 아름답지 아니한가? 좀 요염하다 싶은 눈빛 속에 빛나는 명석함을 감춘 연극배우 Y씨는 여성미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나는 할 말이 많은 것을 억누르며 그럼 너는 우리 나라에서 어떤 여성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예상대로 그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20대 초반의 싱싱한 여배우들, 섹시함을 무기로 활동하는 여가수 들의 이름을 들었다. 원래 영계를 밝히는 성격이면 모르되 옛날부터 지적이고 똑똑한 여자들을 쫓아다니다 채이곤 하던 그의 과거를 아는 나로서는 좀 실망스러웠다.
그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이 아줌마가 아직 남자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셨군" 하며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어리고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는 현실에 대해 국제전화라는 사실도 잊고 장시간 열변을 토하였다. 설명을 듣다보니 며칠 전 내가 겪은 사건이 떠올랐다. 학교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남학생이 내게 "지금은 좋겠지만 나중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빨리 시집가라"는 충고(?)를 했다. 나는 반 장난으로 (즉, 반 진심으로^^) "전 원래 연하의 팬들이 더 많은 걸요. 지금은 싱글 생활을 즐기고 나중에 마흔쯤 되어 삼십대 중반 남자랑 결혼하면 되죠"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한꺼번에 나의 무식을 성토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말인 즉, 25세 남자가 30세 여자에 반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도 35세 남자가 40세 여자에 반하는 건 정말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어리고 섹시한 여자에 대한 향수가 커진다고. 뭐 이런 도둑놈들이 다 있나? 그래 좋다. 남자들이 워낙에 섹시한 데 죽고 못사는 건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이가 든 여자는 섹시할 수 없다는 건가? 그리고 섹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아름다움의 범주에도 들지 못한다는 건가?
나는 흥분하여 솔직한 죄밖에 없는 내 친구에게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정신연령이 낮다, 성숙한 여자들과는 도저히 상대를 할 수 없으므로 어린 여자들을 찾는 거 아니냐'며 퍼부어 대었다. 그리고는 친구가 좋아하는 배우인 엠마뉘엘 베아르나 쥘리에트 비노쉬도 삼십대 후반이지만 아름답고 섹시하지 않느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다고 수긍하며 그렇지만 어린 여자들은 독특한 덜 익은 듯한 맛(!)이 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 싱싱한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걸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 차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덜 익은 듯한 풋내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는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한 인간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를 결정짓는 데는 이러한 표피적인 매력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람마다 이해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그 개인적인 해석에 타인이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난 아무 것도 몰라요' 하는 백치미적 표정을 짓거나 그저 통통 튈 뿐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여자, 혹은 어린 남자를 '아름답다'는 수식어로 표현하지는 않는 게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단어의 해석이 아닐까?
그리고 물론 섹시함의 유무가 아름다움을 결정 짓지 않음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며, 정 섹시함을 원한다면 나이든 여성이야말로 경험과 원숙미로 인해 진정 섹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계를 찾는 남자들은 알아야 한다. 얼마 전 최고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한 잡지에서 선정한 '독일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 15명'에는 20대 초반의 여성은 아무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뿐더러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가장 섹시한 여배우로 군림하고 있는 이리스 베르벤과 얼마 전 영화 <마를렌 디트리히>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지성파 여배우 카트야 플린트를 포함한 40대가 그 주를 이루고 있다.
손자 손녀를 본지 오래된 카트린 드뇌브나 소피아 로렌은 아직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미인, 영원한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칭송 받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15명'을 뽑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이십대의 어리고 풋내 나는 여배우들, 애교와 청순 가련미(많은 경우 백치미로 연결될 수 있다)가 무기인 탤런트들이 주를 이루지 않을지?
이 '젊은 것이 아름답다'는 고정 관념 때문에 우리 나라의 문화가 미성숙을 벗어나지 못하고 10대 취향에만 알맞는 수준 낮은 프로그램이 TV를, 인생의 깊이를 노래하기에 역부족인 10대 가수들이 우리의 대중음악계를 정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메릴 스트립이나 미쉘 파이퍼, 샤론 스톤이 원숙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을 연기할 때 우리 나라의 동년배 여배우들은 주인공의 이모나 엄마를 연기한다.
이젠 정말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기준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름다움은 나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므로, 그리고 외모를 비롯한 표피적 미로써만 완성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 랄프 파인즈의 여자 친구는 그보다 스무 살 가량 많은 55세의 연극배우이다.
물론 몇몇 호사가들은 그들의 나이 차를 두고 랄프 파인즈가 늙은 여자 취미가 있다느니 외디푸스 콤플렉스니 하며 말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 기사에서 본, 가슴이 깊게 파인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랄프 파인즈의 손을 잡고 활짝 웃는 그녀는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예의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야기를 꺼내는 기자에게 그녀는 자신이 출연중인 연극의 대사를 인용해 답한다. "그가 나이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이가 많을 뿐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