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7 주일 설교말씀 / 한용희 목사
말씀 : 요한복음 20:19-23
제목 : 꿈이 있으십니까?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높아지시길 소원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임재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파송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히 하나님이 높아지시길 소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여러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시지푸스의 형벌'이라는 내용을 혹시 아십니까?
그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힘겹게 밀어올리는 그 바위를 정상 근처에 다다르게 했을 때,
속절 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또 그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사실은 이 시지푸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그런 형벌을 받았는데,
이 형벌 속에는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그 바위가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굴러 떨어지지만,
계속해서 영원히 그 일을 계속해야 되는 것이 바로 '시지푸스의 형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겠지만, 이 형벌이라는 단어를 왜 쓰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내일에 대한 소망과 꿈이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열심히 바위를 굴려 올려도 자꾸 굴러내려가서 다시 굴려 올려야 하고, 다시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시지푸스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고, 소망을 가질 수가 없고, 꿈을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수용소'라고 얘기하는 '아우스비치'에서 살아남았던 '빅터 플랭클'이라는 박사가 있습니다.
이 박사가 아우스비치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길에 떨어져 있는 유리 조각을 주워서 아침마다 피가 나도록 면도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아침마다 면도를 하면서 그는 그 자리에서 삶에 대한 소망과 내일에 대한 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그는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발견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거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숨을 쉬고 있지만 꿈을 잃었기에 그들은 절망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죽어있는 상태라는 걸 그 사람이 발견하였던 거예요.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꿈과 소망을 다 상실하자 그냥 하루하루 그 자리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숨은 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존재로 살아갔던 거지요.
우리의 일상은 어떨까요?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는 소망과 꿈을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금수저 흙수저 이런 얘기 들어보셨지요.. 그 얘기가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라고 생각하고 지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꿈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아니 그 꿈조차도 사치라고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묻습니다.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여러분, 교회를 다니지만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가 질문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시대는 더 좋아질까요? 교회는 더 좋아질까요?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얘기하고 싶어도, 우리 자신이 어찌 보면 그 얘기를 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우리 다시 돌아가 보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 이 제자들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냐면,
'안식 후 첫날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다 닫고 있었다'고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름날 에어컨이 없는 방에 문을 다 닫고 계실 수 있을까요? 어렵지요.
중동은 더운 나라예요. 그런데 문을 다 닫고 있었다는 건, 그들이 굉장히 깊은 절망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지만,
그 마음속에 깊은 절망이 문을 다 닫고 그 골방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묻습니다. 그 제자들의 상황이 예전에는 더 좋았습니까? 예수님하고 다닐 때는 그들의 상황이 훨씬 더 좋았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했지만, 길에서 노숙을 해야 됐을 수도 있고요.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힘들었을 거예요. 고생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괜찮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셨으니까...
그러나 지금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던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이 그들의 절망이 그들의 꿈을 상실하게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하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까, 그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에 우리가 잊었던 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게 아니라 시선을 회복할 때 그것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을 때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꿈을 꿀 수 있었던 건,
그분께 시선이 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나 상황과 환경이 달라져서가 문제가 아니라 시선을 놓치게 되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지금 낙망에 빠져 있다면, 여러분, 그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입니다.
제가 목회자잖아요. 목회자들 만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 목회자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 목회자들을 만나니까 기쁘고 즐거워해야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런데, 너무 마음이 무너지는 얘기만 하는 거예요.
어떤 얘기냐면, 친구 목사가 대전에 개척을 해서 시작을 했는데, 아내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서 누워있는 거예요.
애들은 셋씩이나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기도 열심히 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는데 결국엔 아내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망연자실한 거죠.
저를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이제 더이상 목회를 못 할 것 같다'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다른 친구들도 상황이 거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제가 그 얘기를 특히 듣는데 너무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하나님, 우리가 다른 일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목회자로 살려고 하는 건데, 하나님 교회 섬길려고 하는 건데,
왜 우리한테 이렇게 하나님 절망하게 하십니까? 왜 이렇게 아프게 하십니까?' 제 마음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그때 하나님께서 저한테 강력하게 주셨던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얘야, 너는 왜 꿈을 꾸지 않냐?"
"네? 제가 꿈꾸지 않는다고요. 하나님 저 꿈꾸고 있어요. 저, 지금 목회자로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된다는 수많은 생각 가운데 내가 꿈꾸고 있습니다"라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네가 진짜 꿈꿔야 될 것은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바로 나 하나님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목회적인 계획을 꿈이라고 생각했고, 목회적인 어떤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꿈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때 놓쳤던 게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시각을 제가 놓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꿈꾸지 못했고, 그러니까 절망했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더라고요.
그러면서 처음 제가 목회자가 될 때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목회자가 되려고 할 때요, 누구도 저한테 좋은 길이고 아름다운 길이다라고 얘기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얘기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저를 그냥 짓눌렀습니다.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우리 교회가 있는데, 교회에서 이제 어린이집들을 운영하지 않습니까?
그 어린이집을 운영할 때, 목회자도 필요하고, 어린이집에 아이들 등하교시킬 운전하시는 분도 필요하면,
너는 누구를 뽑을 것 같냐라고 선배 목회자가 저에게 물으셨어요.
저는 '당연히 운전하시는 분은 급하니까 뽑고, 담임 목사님이 계시니까 목회자는 나중에 뽑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저한테 뭐라고 그러시냐면, 목회자를 뽑아서 운전까지 시키면 된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는데요. '야, 내가 가야 되는 길이 그 길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제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했고,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이 머물렀고, 성령님께 시선이 머무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씀을 전할 수 있고 교회를 섬길 수 있다면 괜찮다'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목회자로 사는데요.
너무 상황과 환경에 집중해 있고, 어려운 현실, 꿈을 잃은 교회, 우리의 연약함들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꿈꿀 수 없더라고요.
여러분, 저는 묻습니다. 여러분, 꿈이 있으십니까?
혹시 '빅터 플랭크' 박사가 얘기했던 것처럼, 숨은 쉬고 있는데 꿈을 잃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진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회복해야 될 것은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 향한 시선을 다시 회복할 때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걸 놓치면, 우리는 상황과 환경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어요. 현실이 이런 데 어떡하라는 거냐는 거죠.
제가 묻습니다.
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렸던 시기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전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를 향한 꿈이 있었어요.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향한 꿈이 있었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정말로 일생의 비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었고 그 결과가 우리입니다.
여러분, 그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 꿈을 회복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거예요.
처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셨을 때, 그 뜨거운 가슴이 왜 식어버릴 수밖에 없느냐, 우리가 꿈을 잃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수님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현실과 상황에 집중해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러분,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순간이 찾아오면, 비로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들의 시선과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여러분, 그 말씀이 그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 그게 무엇이냐 이제 해야 할 일들이 발견되는 거죠.
예수님이 발견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는 꿈이 있기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진 여러분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여러분, 'missionary'라고 하는 영어 표현이 '선교사'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missionary'라는 단어는 다른 게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일 뿐이에요.
라틴어 '미시오'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우리 주안교회가 추구하는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가 바로 선교적 교회 - 보냄 받은 교회입니다..
* 선교적 교회, 보냄 받은 공동체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보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보냄 받아 떠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그 죄에 빠져 절망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건져주시러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에게 시선이 돌아가고,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면 무엇이 들어오느냐,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왔듯이 우리가 이제 구원받은 자로 구원할 사람들을 찾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파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눈을 열어주시고, 꿈을 꾸게 하시고, 결국에는 보내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너는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는 거예요.
모세를 그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영광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내 백성을 구하러 가라" 하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사명이에요. 이것이 회복될 때, 우리는 무엇을 회복하냐?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이 본질을 회복하지 못하면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고,
목적을 상실하면 방황하는 것이고, 방황하면 안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찾아오는 현상이 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보내기 위해서 부르신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주안교회에서 기도하시고 수고하시고 헌신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 계양 주안교회를 보내셨지요.
제가 많은 얘기들을 듣는 게 뭐냐면, 우리 연세많은 권사님들 참 저를 아껴주시거든요.
그분들이 뭐라 그러냐면, '목사님 제가 10년만 젊었어도 목사님한테 가서 열심히 도울 텐데..'
어떤 분은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제가 못할 것 같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고, 그런 여러 얘기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냐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에 사명, 파송에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뭐가 우리와 다릅니까?
그 사람들은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학문 없는 범인(凡人)-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재능도 없고, 돈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부르심, 그리고 보내심에 응답하니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치유가 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치유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모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보내심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소멸되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오늘 사랑하는 주안교회의 성도님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심에 응답할 때, 성령이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내심에 응답할 때, 우리 주안교회 뿐만 아니라 계양 주안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걸 사모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잊었던 꿈을 회복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부으시는 건 뭐와 같으냐 하면, 그 창세기에 땅이 공허하고 흑암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해서 생명의 기운이 불어넣어지듯이 성령께서 임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죠. 그러나 계양 주안교회를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오신 분들에게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사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희 계양 주안교회에는 예배에 온 힘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임하실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가 속해 있는 계양 지역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정말로 진실로 기도해 주시고요, 정말 물 한 그릇 떠다 주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고, 그 섬김과 헌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안교회와 계양 주안교회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에 응답할 것이고, 그 보내심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주안교회와 계양 주안교회가 다시금 성령충만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내시면서 여러분이 계양 주안교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예배에 참여해 주시는 게 최고의 동역입니다.
여러분 속에서 저는 우리 주안교회와 계양 주안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잃었던 꿈을 회복할 줄 믿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주의 자녀들,
우리 주안교회와 계양 주안교회의 귀한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하나님의 신이 지면을 운행하듯, 그 생명의 기운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이 시간 계양 주안교회와 주안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꿈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이 음성이 들려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