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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 2 아버지의 집
요 14: 2 아버지의 집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과 위로를 주셨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을 가리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새로워진 물질 세계일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천국에서 우리는 새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 마 26: 29 -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그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준비하시러 가실 것이다.
1]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히 3: 2에는 "하나님의 온 집"이란 표현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쉽게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신다.
(1) 내 아버지의 집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즉 어떤 다른 세계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이 낱말은 그 말이 쓰이는 문맥에 따라서, 그것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인지, 예수 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오고 있는 그의 통치를 가리키는지, 혹은 그의 통치가 장래에 성취되는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어떤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는 다른 저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하늘나라"(개역:천국)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 이스라엘과 또 모든 민족들 위에 - '임금'이시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때부터 하던 신앙 고백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셔서(출 15: 18) 광야를 거치도록 이끄시고 가나안 땅 곧 여러 이방 민족의 나라(시 44: 1-5)들을 그들의 소유로 주심으로써 자신의 이 왕권을 근본적으로 드러내 보이셨다.
여기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강하시며(시 29편. 82편. 89: 6-7. 95: 3. 96: 4-5) 온 피조 세계의 주님(시 74: 12-17. 89: 8-12)이시라는 사실이다(출 15장. 시 95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적들에게서 지켜주시고(시 44: 4-8. 48편. 68: 24-35. 145편. 146편) 땅의 열매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시 72: 15. 132: 13-16. 145: 15-16)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법과 의가 이스라엘에 통하게 하심으로써(민 23: 21-24. 신 33: 2-5. 시 99: 1-4) 하나님의 왕권을 계속해서 또 늘 새롭게 드러내 보이신다.
하나님의 왕권이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곳이 또한 이스라엘이긴 하지만(출19: 3-6), 이 왕권은 온 누리를 위한 것이고 언젠가는 온 누리에 드러날 것이다(시 47편. 96-99편. 103: 19-22).
하나님의 왕권은 아주 현실적이고 지상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우선 이스라엘에서 다른 민족들을 본떠 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삿 8: 23. 삼하 8장)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과 그의 왕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과 세상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 통치의 대리인이자 실행 기관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삼하 7: 14-16. 대상 28: 5. 29: 23. 대하 9: 8. 13: 8. 시 2편. 72편. 89: 15-37. 110편. 132: 11-18).
세계 정치 상황 때문에 또 이스라엘 및 유다 임금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임금으로써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이 두 나라에서 점점 의심스럽게 되거나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뒤이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친 하나님의 심판, 즉 이스라엘 및 유다 두 나라의 멸망,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감, 유다가 세계적인 제국 바사와 헬라에 병합 됨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이 언젠가는 몸소 개입하셔서 자신이 자기 백성의 임금이자 모든 민족의 주이신 것을 다시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리라는 열망도 백성 가운데서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한 예언자들의 약속 말씀들도 분명해졌다.
이런 여러 가지 희망과 약속 말씀은 이스라엘의 여러 오랜 전통과 제도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들의 갱신과 완성을 내다보게 하는데, 이는 온 누리를 포함하고 변화시킬 갱신이요 완성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출애굽에 상응하는 새 '출애굽'을 기대하고(사 35: 1-10. 40: 1-11. 52: 11-12),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사 2: 1-5. 25: 6-8. 52: 7-10. 60장. 66: 5-24. 겔 40-44장. 미 4: 6-8 슥 2: 14-17), 무엇보다도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타나심으로써 다윗 왕권이 마지막 때에 새로워지고 완전해질 것을 기대했다(사 9: 2-711: 1-10. 렘 23: 1-6. 겔 34장. 37: 15-28. 암 9: 11-12. 미 5: 2. 슥 9: 9-12).
그렇지만 이런 희망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있었던 '모형들'을 바라보는데 벗어날 수도 있어서, 초기 유대교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하늘로부터 인류 전체를 위해 개입하셔서 이 세상 및 세대를 끝장내시고 아주 새로운 세상 및 세대를 이끌어 들이실 것을 기대했다.
이런 희망의 개념에서는 인자라는 인물이 표준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두 가지, 미래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이 - 이스라엘의 위대한 과거를 지향하고 민족적 정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메시야가 오실 것에 기대를 거는 희망과 묵시문학적인 희망이 - 나란히 존재했고 또한 이런저런 혼합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일이 닥쳤다고 선포하셨다면(막 1: 15), 이는 분명히 묵시 문학적인 뜻을 띠는 것이지, 민족적인 기대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이 오해의 여지가 적은데, 왜냐하면 '나라'라 하면 경계가 있는 영토나 국가 비슷한 기관이나 통치 형태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너무 정적으로 이해되고 너무 쉽게 저 세상 나라, 곧 하늘에 있는 실체로 생각하게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 하지 않고 한결같이 '하늘나라'라고 하지만, 그때 '하늘'이란 이런 흐름 가운데서 하나님이나 하나님 이름 대신 그저 경외하는 뜻으로 둘러서 표현하는 말일 따름이다.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심에 대해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의 특징은 그 다스리심이 아주 가까웠다는 데 있다. 묵시문학적인 기대에서 뜻하는 그런 다스리심이 곧 동터 오르리라는 사실이 예수님께는 확실했다(막 1: 15. 눅 10: 9, 11. 막 9: 1. 13: 30. 막 13: 32-37).
그렇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이렇게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더 이상 장래의 일로만 여겨 기다리시지 않고, 이미 벌써 - 예수님 자신의 말과 행위 가운데, 존재 가운데, 인격 가운데 - 시작되고 있다고 보신 사실이다(눅 11: 20. 마 11: 1-6. 13: 44-46).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바, 선사하시고 요구하시는 바를 철저히 진지하게 들음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느냐 하는 데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었다.
예수님 안에서 인자가 나타나셨다. 따라서 이 세상의 끝이 정확히 언제냐를 물을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은 예수님 안에서 -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데도 - 이미 끝에 이르렀다!
이 끝 - 또 새 세상의 시작 - 또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게 나타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이 시점을 열망하고 간구해도 괜찮지만(눅 11: 2. 17: 22. 21: 28), 그 시점을 계산하면서 내다본다면, 결정적인 것 곧 예수님 안에서 이미 현재가 된 바(눅 17: 20-21)와 또 '벌써, 그러나 아직은 아닌' 이 때를 위해 하도록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맡겨진 바(눅 19: 11-27. 행 1: 6-8)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잊어버리고 놓친다는 혐의를 받거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현재와 미래가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이른바 '대조의 비유'들에서 알 수 있다(막 4: 3-9, 26-32. 마 13: 33). 첫 세 공관복음서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선포에서 표준적인 역할을 한다.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가운데서 - 허락된 구원과 그 구원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관점과 결과를 이해하고 선포하는 문제를 주로 다루므로,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다른 중요한 개념들의 배후로 물러서게 된다(요 3: 3, 5. 18: 36. 행 1: 3, 6. 14: 22. 28: 23, 31. 롬 14: 17. 고전 4: 20. 6: 9-10. 15: 24-28, 50. 갈 5: 21. 엡 5: 5. 살전 2: 12. 딤후 4: 1, 18. 히 12: 28. 약 2: 5. 벧후 1: 11. 계 1: 9. 11: 15. 12: 10).
(2) 거할 곳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한다. 하반절의 "처소"(* )라는 말과 다르다. 거할 곳(monai; 모나이) "거쳐, 있을 곳"은 세상의 집을 떠나 하나님 집에서 안식처를 뜻한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 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이다.
2]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 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본다.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 26, 32에 포함되었다.
* 요 12: 26, 32 –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어찌하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강조함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나 조급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 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체를 가지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의 말씀이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메티즘(Hermetism)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따라서 노시스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가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 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 시 49: 15 -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 시 73: 24 -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볼트만(Bultmann)의 신환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3]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이 예비하러 가신 우리의 거처를 저자는 회복된 에덴으로 본다. 예비하러의(eJtoimavzw. 헤토이마시아)는 "준비하다"로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앞으로 제자들과 믿는 자의 안식처를 준비하러 가시는 것이다.
(1) 에덴(Eden) : 즐거움, 기쁨, 낙원
최초의 사림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살았던 장소이다.
* 창 2: 2, 15 –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 창 3: 23-24 –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이 유브라데 강 같은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강의 발원지로 묘사되어 있다.
* 창 2: 8-15 –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러나 그 위치를 지리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에덴이라는 이름은 본디 초원(스텝)이나 황야를 뜻하는 수메르 말 '에디누'와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이 '에디누'(초원이나 황야) 한가운데 있는 물 많은 오아시스일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히브리 낱말 '에덴'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란 뜻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에덴은 이상적인 땅의 대명사가 되었고 하나님의 포괄적인 돌보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의 옛 그리스어 번역본에서는 이 동산을 '파라데이소스'라고 불렀는데, 이 말에서 '낙원'을 뜻하는 서양 말들이 생겨났다.
이 이름이 언어학적으로는 스멜어의 에딘(Edinu)과 앗수르어의 에디누(dinu)와 관련되며 평원을 가리킨 뜻이다. 이 동산 가운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살게 하시며,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들을 나게 하셨는데,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창 2: 8-9).
에덴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장소로, 아름다움과 평화가 넘치던 전원적인 상태의 동산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실 축복을 말할 때 에덴을 언급하였다.
* 겔 36: 35 -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 욜 2: 3 -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에덴을 비유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였다.
* 사 51: 3 -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하나님의 동산, 여호와의 동산, 신약에서는 낙원이라고 표현했다.
* 겔 28: 13 -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 겔 31: 9 - 내가 그 가지를 많게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 사 51: 3 -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 눅 23: 4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고후 12: 4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계 2: 7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실과를 다 따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먹음으로 에덴에서 쫓겨나 고생과 수고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 창 2: 16-17 –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창 3: 6, 17-24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 이 세상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살게 된 세상으로 저자는 교도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으로 에덴동산이 회복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는 기간으로 본다.
(3) 예비하시는 거처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준비하는 거처로서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천년왕국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에덴의 회복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축복을 완성하는 곳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과 변화된 성도들이 재림하신 예수를 영접하여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치르고 살아가는 천국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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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