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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는 대일청구자금 어디에 썼나? 한일청구권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상수도 확장(409만 달러).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다른 나라 정상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백화점을 지었다.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그중 대부분이 이권으로 증발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복지 등으로 분산됐고,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없다. 청구권 자금은 한국이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했으며 1등 한국이 100점이라면 2등은 20점이나 될 것이다. 박정희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눋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군사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는 백악관을 찾았지만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이들의 봉급을 담보로 하여 1억4천만 마르크(2억달러)를 빌렸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으로 소위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월남 특수를 일구어 냈고, 연속해서 중동특수를 만들어 냈다. 뜬금없이 기능학교를 만들어 서독 국제기능올림픽에 내보냈다. 박정희는 기능공의 친구가 됐다. 금-은-동 메달 모두를 한국이 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자료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빠듯한 살림에도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1970년대에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의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됐었다. 그런데 김대중 집권 만 3년이 지난 2001년도에 다른 세 마리의 용의 1인당 국민소득은 24,500달러를 훨씬 넘긴 데 반해 한국은 겨우 9,000달러도 안 됐다. 박정희를 욕하는 김대중의 업적인 것이다. 김대중 경제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 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2,000원을 주었고, 산에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낯 잠을 자다 오면 37,000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다. 공적자금을 풀어 금융기관을 국유화했고, 500여개의 기업들로부터 금융기관에 잡힌 담보물들을 2중 계약으로 팔아 뒷돈을 챙겼다. 여의도 넓이의 160배에 달하는 금싸라기 땅을 팔아치웠고, 서울의 대형건물 거의가 다 외국에 넘어갔다. 박정희가 감추어 놓았다는 돈은 단 한 푼도 없다. 그러나 김대중이 가진 돈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수조- 더러는 수십조원이라 한다. 박정희 친척 중에 공직을 차지한 사람도 없고, 부정에 말려든 사람은 없다. 그런데 김대중은 물론 김영삼까지도 식솔들이 공직을 차지했고, 자식들이 부정을 저질러 감옥에 갔다. 각종 게이트도 화려했다. 김대중은 지금 아방궁에 살고 있다. 이런 사람이 대일 청구권자금을 받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런 사람들은 영웅취급을 하는 반면 화장실 물을 아껴보려고 수조에 벽돌을 넣는 박정희, 허리띠를 28년씩이나 매고 다니는 박정희, 대한민국을 세계 지도에 12번째로 굵게 새겨놓은 박정희를 부관참시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는 경우는 나라를 적국에 빼앗겼을 때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출처 : "시스템 경영과 발상의 전환 ![]() |
첫댓글 모로보나 바로보나 나라와국민을 위한v분임에는 틀림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