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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진이 빠졌다고할까...누군가에게 잠시 혼을 빼앗겼다는 소름끼침 !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영화를 찾는 내 손(눈)은 잔인한 회전문에 끼어있었다.
일종의 습관. 애끛은 독해라는 무기의 그늘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그림자보다 휠씬 좁았다.
누군가 지상에 떨어뜨린 줄 하나를 허우적허우적 당기며 올라갈 때의 몸을 다시 발견할 때의 소외와 분리.
20여년전 영화 신병의 자리에서 엎드진 자세 포복으로 엉금엉금 얼마나 기어왔을까?
무거워지기는 커녕 점점 더 작품들은 가벼워졌다. 나는 여전히 무뇌하다.
8월에 여름휴가는 없다. 팥빙수를 매주 먹고 싶어진다. 힘을 잃었고 별로 쓸 말이 없다.
1. 웰컴 투 동막골(2005) : 박광현
= 부락환타지는 나비와 채식으로 쭈욱 지켜져야한다.
교육 점심 시간에 학생들에게 30분씩 상영해주는 영화인데,
정작 나는 아직 이 작품을 보지 않아서 교사의 자세가 미진하다 책임감이 있어 쉬는 마음으로 만났다.
장진의 극적 쾌감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에서 온다.
초기작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를 뜯어본다면
관객의 실소는 기대했던 인물과 행위들이 현실에서 어긋난 상으로 드러날 때 빚어진다.
도둑, 간첩, 킬러가 그들답지 못할 때, 제 몫에서 빗나간 선분을 그으면 장진의 쾌락이 등장한다.
다섯번째 작품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부터 점차로 그간 장르가 유지했던 기법에서 조금씩 이탈해서
추리 유령극, 가족 드라마, 조폭 보편극, 정치 환타지극 사이로 좌충우돌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다.
잘 알려지다시피 "웰컴 투 동막골"은 장진의 히트 연극을 광고계 출신의 박광현 감독이 연출했다.
박광현 감독은 20초간의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구매자들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을까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강혜정의 얼굴 위로 꽃이 보이고 이윽고 외화면의 비행기 소리와 추락하는 비행기가 보이고
외국인 조종사 배우가 하늘거리는 나비를 느린 화면으로 볼 수 있고 그 나비가 바로 프로펠러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질 때
영화는 스스로 환타지의 안락 속에서 유영하다가 급속히 지상으로 내려앉을 이미지의 수사를 구사할 것임을 예고한다.
이야기는 부락 환타지, 사투리의 유토피아, 전쟁 대치의 빈틈을 헤집고 나간다.
이북 인민군, 이남 국군, 미군 비행기 조종사와 산동네 마을 사람들의 등장만으로 영화는 쉽게 예견가능하다.
서사는 일측촉발의 대결, 풀려버린 신체의 화해, 공동의 사냥, 외부의 침입, 희생과 구원으로 맛갈스럽게 구사되지만,
각 인물들은 충만한 생명력보다는 그저 맞춤 자리에 서버린 마네킹의 자극적인 몸짓마냥 일회성으로 소비된다.
광녀 강혜정은 13년전에 만들어진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싶다"의 심혜진을 심약하게 재탕하고,
이북, 서울, 강원도 사투리의 언어 번역과 역사가 사라진 영토성의 쾌락은 빙긋한 웃음에 만족하길 권한다.
노무현 시대의 "동막골-마을"은 5년이 지난 지금 "작은 연못"으로 축소됨은 역사의 거슬림의 흔적일 때 서러워진다.
관객에게 하나의 넘지 못할 선이 도두라졌다면 미군의 부락 환타지 폭탄 투하가 아니라,
(심지어는 폭탄비 자체가 아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불꽃놀이로 은유될 정도로 따뜻하지만)
군인들이 사냥한 멧돼지를 구워 먹을 때 부락민들은 감자와 옥수수만을 먹어야한다는 데 그어져있을 것이다.
채식//육식 이분법으로 스스로를 환타지 속으로 고립시킬 때 영화는 2시간 넘는 숙면 광고로 낮아진다.
"웰컴 투 동막골"은 노무현 시대에 가능한 통일부 주관 화합의 CF 찬가로서 노릇 필요하지만,
여전히 광녀-화합의 선혈이 진정 '마이 아파'로 넘어서기에는 충분치 못한 부락 환타지에 머문다.
2. 이끼(2010) : 강우석
= 여인이 한을 품으면 서리 대신 이끼가 쌓이나보군.
90년대 이후 충무로의 거의 유일한 믿음직한 흥행 제조기로 16번째 작품을 배출한
강우석 감독에게는 미안하지만, "투캅스(1993)" 이후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극장에서 만났다.
항시 TV로서만 만났던 그에게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한국 영화 속 전무했던 캐릭터의 힘을 보여주었던
형사 강철중의 버릇없음으로 승부에서 자유로웠던 "공공의 적(2002)" 이다.
학교 성장 로맨틱 드라마와 투박한 집단 정치극, 코믹 가족 복원극, 은폐되어왔던 어두운 주체들의 귀환 형사, 군인극
사이를 박중훈과 안성기, 설경구와 같이 어슬렁거렸을 때 그는 내게 항시 TV의 방화물에 불과했다.
즉, 그의 외피와 속내를 굳이 뜯어보고싶은 욕망이 일지 않았다.
모 신문에서 2000년대 10대 만화로 추천된 "이끼"가 그의 17번째 작품으로 선택되었고,
그 중심에 "살인의 추억"에서 거꾸로 돌려진 사회적 뺀질이 박해일이 서게 됨은 일말의 기대를 갖게했다.
게다가 이건 엄연한 유행의 변두리 농촌 스릴러이고 "실미도", "한반도"에 이은 강우석의 정치극일 수 있지 않은가말이다.
원작과 영화가 굳이 비교되어질 필요가 없음은 수차례 전술한 바와 같으니
수많은 블로거들처럼 조목조목 변별점들에 대해 집착하기보다
간단히 내려진 강우석의 영화 문법의 미성숙함을 재삼 거론하는 쪽으로 직진한다.
우선, 기대했던 박해일부터 인터넷상에서는 열연이라 칭송되는 유해진, 의외의 유선까지
7명의 사내와 1명의 여인은 모두 하나같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세워진 꼭두각시가 되버렸다.
심지어는 거의 단역으로 나오는 교도소 죄수들조차도 대사에 힘이 실려있지 않다.
감독의 연기 연출지도가 부재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하나같이 제 몫 이상을 기대했던 그들은 맹탕이었다.
박해일//유준상, 유준상//정재영, 박해일//정재영 이외의 어떤 대결 구도가 힘이 실리지 않았고,
song님이 지적하시듯 극 내 유일한 스릴러적 공간인 땅굴조차 작업했을 스탭들의 땀이 무색할 정도로 무의미하다.
갑자기 로베르 브레송이 되고싶었을리는 없는데, 구원과 복수 이분법에 원작보다 더욱 집착함에도
그 선이 어디인지 스스로도 모호한 "실미도","한반도"에서 반복했던 정치적 술수를 무료하게 반복한다.
정재영의 마지막 대사가 "구찮아서"인지 "쪽팔려서"인지 지금 헤깔리는 건 같은 이유에서이다.
원작의 정치성도 기실 대단하지 않았고, 결말의 도처한 무책임함도 불편하였으며
8명 각 캐릭터에 실려진 과도한 역사 흡입도 자연스럽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이들이 능히 스크롤 바를 내렸음은 그것이 무료의 웹툰이었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만화책이 아닌 웹툰 자체의 하강 기대감이 제대로 묻어난 기 때문이다.
강우석은 이 매력의 영화와의 간극을 스릴러로 채우려는 노력과 내공이 여실히 부족하다.
어디에서도 "이끼"는 이끼처럼 조용히 묻어가듯 극 내부에서 습기를 머금고 자라나지 못했다.
구차스럽지만, 결코 구원되지 못할 이기의 역사를 극 내부로부터 선언된 윤리로 물리치지 않고
기어이 미덥지 않은 희귀한 공권력의 중간 계투 요원으로 뒷받침하는 서사는 그간
강우석이 그리도 남발했던 국가 권력의 비장하고 황당하며 자체발광의 찬가가 아니었던가.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교통 경찰로서 살인마와 맞서서 증거를 조작해도 좋고,
"실미도"의 훈련병들은 자격과 이름을 부여받기 위해 자살 버스를 타야하고,
"한반도"의 국무총리는 대통령과 대결해도 당당히 연설하고 자진 사퇴할 수 있었듯이,
"이끼"의 정재영이야말로 예기치못한 몰락에 부르르 떨지 않고 제 2의 권총을 준비할 수 있다.
위 작품에 이어 다시 한번 채식이 등장한다, 이제 아예 생식이다.
여기에 섹스에의 금욕조차 부과될 쯤이면 스스로에 대한 구원은 중세 수도사의 방식이 된다.
이것이 도시가 아닌 농촌 스릴러가 되어야하는 공간적 사유로는 마땅할지 몰라도
속좁은 이분성으로 강우석의 유일한 탁견인 농촌을 건너지 못하고
땅값 상승한 마을 재개발로 선회함은 어떻게 선을 넘어야할지 애매한 자의 선택에 머문다.
다시 서울로 근무지를 옮길 수 있는 검사 유준상과
이제 아무 일도 없는(도대체 왜 가야하는지 알 수 없는 허술함이 돋보이는) 박해일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극중 유일한 이끼인 유선에게 조종될 때
영화는 song님이 지적하듯 강우석이 준비한 엄청난 반전 '이끼'가 '서리'로 반전일수 있지만,
동시에 그간 강우석의 이름으로 부여된 남성 동성 사회의 건강함과 야합된 복구, 묻혀져도 좋을 주체의 발견에
대해서 삼류 공포물 혹은 서스펜스라는 뻔한 장치로 뒤통수를 치는 의외의 노림수이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조차 남성 바로 세우기에 몰두한 불쌍한 여성들이
이제 드디어 강우석 작품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면 너무 섣부른 변화의 예단일까?
극 중 유선은 분명히 "이것은 나의 싸움이다"라고 진술했음에 주목하자.
"이끼"는 흉물스러운 공권력-남성에 대한 당당했던 찬양가의 바다를 건너와
유토피아 개척자로서 여성의 이름을 아래로 호명하는 강우석의 뜻밖의 한 걸음이다.
3. 충녀 蟲女91972) : 김기영
= 일단 돈부터 챙기고, 안전장치 완비하고 !
모든 작가와 마찬가지로 김기영의 작품 하나만을 뚝 떼서 거론하는 것은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 하나를 들고 햇빛을 가리며 시원하다고 환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상자료원이 영리하게 "女, 女, 女"라고 회고전 제목을 붙인 것은 동의하고
그가 평생 구사한 문어체 발성의 대사처럼 한국 근대화 이후의 남성 상실과 여성 주도의
전도된 성역할극의 은밀한 정치적 맥락의 희열은 언제나 반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영은 단 하나의 작품으로 행복해하기에는 안타까운 거목이다.
"하녀(1960)", "화녀(1971)", 충녀(1972)" 은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무려 10년이란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김기영의 근대성에 대한 통찰은 변화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의 불찰으로 보이는 이와 같은 사적 측면에 대해
오히려 후기작인 "화녀 82", "육식동물"에서 더 과도하게 남성을 유아기로 퇴행시킴으로서
70년대 급진 페미니스트조차 말리고싶어할 남성 추락과 불신을 서슴없이 끌어안는다.
본편의 집념과는 별도도 김기영의 이와 같은 남성 불임의 저변에 무엇인지 살펴보는 면이 더 흥미롭다.
60년대 조국 근대화에 내몰린 남성들 내부의 봉건적 가부장제를 지탱해야하는 내적 모순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젠더 역전으로, 전근대적인 식모-첩이라는 가정 내 역할의 반란으로 인식했던
김기영 자신의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시대에 대한 사유가 장착되어 있음과 동시에
근원적 불임이라는 장치로 결코 미화될 수 없는 한국의 모더니티에 대한 진단이 숨겨져있다.
임상수의 "하녀"가 김기영의 원작보다 시대를 돌보기에 더욱 여념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연대가 불가능한 분신투쟁에 머물수 밖에 없는 극단 선언의 활활 타오름에 있기보다는
굳이 현실 속에 부재한 하녀-첩이라는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되살려
김기영의 남성 근대화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임상수 자신의 전작을 관통하는 몸통 자체이며
누군가 다르게 남아 저항하는 몫을 여자에게 부여함에 있을 때 한걸음 더 빛난다.
하지만, 임상수에게는 김기영의 진지한 유머가 없다.
미노스님을 비롯 영화를 같이 관람한 회원들이 모두 동의하듯이
"충녀"의 가장 강력한 임팩트는 딸의 곡성을 들으면서 돈을 헤아리는 어머니의 두 손에 있다.
기껏해야 불상의 성적 불구성을 자신 안으로 치장하려는 듯 품안으로 밀어넣는 주인공 남성과 대비해
극히 부차적인 조연에 불과한 주인공 윤여정의 어머니는 극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일면 교복을 입은 여고생 딸의 친부에 대한 인정 투쟁이자 아버지의 법에 대한 사탕발림의 관통으로
결핍된 팔루스를 쟁취하려는 두 여성 혹은 세 여성의 쟁패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영화를
천민 자본주의의 저열함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음에서 임상수의 "하녀"의 이정재의 독재성보다
더욱 코믹한 소외와 분리의 전략으로 김기영은 관객을 유도 배치한다.
앞 두 편에 이어 세번째 등장하는 채식은 무력한 주인공 장남의 꿀 먹기로 등장한다.
명백히 남성 정액에의 혹은 여성 수유에의 은유인 꿀에 대한 편식과 집착으로 상징되는
편식에의 고집은 다른 윤여정-남궁원/첩-불구남이 여러번 보여주는 육식과 대비되는데,
흔한 할리우드의 섹스 스릴러 속 아버지, 아들 - 여성의 삼각 드라마틀과는 차별화되면서도
독단적인 채식과 남성 동성사회인 군 입대에서 여전히 남성 독재에 집착하는 유아를 재발견하게된다.
정작, 영화 속 유아는 실험용 생쥐를 먹거나 사라지고 냉장고 속 인형 이미지로 폐기됨도 동일한 맥락이다.
사막님이 지적하신 남성-여성의 성 역할 변형에 불과한 가부장 권력 유지와 가족주의의 고착임은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 한발 더 나아가자면 60년 "하녀"에서도 슬쩍 선보였듯이
철저한 가족 몰락에의 행복한(?) 염원이 현재의 임상수가 진단한 극언보다 확실히 고색창연한 면이 있다.
처녀성의 섹슈얼리티한 무기화와 본처와 둘째 엄마라는 서열화, 아버지의 인정-법 획득,
지극히 불구스러운 영화 내 아버지와 아들, 오빠들의 존재들에서
김기영은 결국 7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붕괴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위 사진 장면에서처럼 실험용 생쥐에 다름 아닌 우리는 언젠가 부어지는 물에 의해 익사해야할 처지이다.
"충녀"가 단 한번의 삽입 장면도 벌레를 등장시키지 않음은 극 내부에 아무도 숫컷살해 벌레가 아님을 반증하는
단순한 여성 주체의 선언과 남성 상실의 기쁨에 머물지 않은 한국 근대 자살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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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녀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돈 세는 장면에서 당시 관객들도 웃었을지 궁금하군요..분명 의도적인 장면이 확실하긴 합니다만..
돈이랑 어울리는 게 계단 장면이지요.
자투리 시간의 주인공으로 동막골은 누가 선정한건가요. 다양하게 틀어주세요
다음주부터 '돌려차기'로 바꾸려구요...식사 후에 보기에는 좀 민망한 장면들이 있어서...
아...; 전 '가족주의의 고착'까지 생각한 건 아니구요, 그냥 김기영 감독이 왜 여성을 통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려고 했는지가 궁금했어요. 아직도 고민중이예요;; 그때 다음날 나름 몇 시간 동안 머리 굴려가면서 생각해봤는데 결국 글을 못 썼네요;; 쩝;
영화글은 영화 보고나서 2-3일 안에 대충이라도 써놓아야합니다. 김기영은 박통 휘하에서 남성을 불신한 것이 아닐가 싶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마디로, 긍정적인 남성 에너지 자체를 부인하고 싶었던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