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1994년 이후 국내 전체 수출액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수출한국의 견인차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상품이다.
1947년 미국에서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반도체 산업은 새로운 문명인 디지털 혁명을 가속화 시켜왔다. 한국에서 반도체가 새로운 산업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등 선진국보다 30년 가까이 늦은 1970년 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그 1974년과 1975년, 그리고 1983년 사이에, 훗날 한국반도체를 세계적인 산업으로 일으켜 세우게 되는 3사람이 자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반도체가 미래의 산업과 인간의 생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고 거기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람은 서울대학 전기공학과 학생이던 황창규, 중앙일보 이사이던 이건희, 삼성그룹 창업주인자 회장인 이병철, 그렇게 3사람이었다. 그 무렵의 이 세 사람의 선택은 훗날 세계 최강의 한국 반도체 신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공동분모를 찾아 만개하기까지는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그들이 한국 반도체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반도체에 홀리다
황창규는 현재 삼성 반도체 총괄 사장이다. 그는 한국의 메모리반도체가 미국, 일본을 꺾고 10년 이상 부동의 세계 1위를 지키게 한 일등공신이자, 지금 한국에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황창규는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가 중·고등학생이던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치열한 시기였다.
그 무렵 이론보다 실험을 중시하는 실험 물리학이 미국에서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했다. 처음 우주경쟁에서 소련에 뒤진 미국이 그 원인을 찾다가 발견한 게 실험 물리학이라는 실용물리학이었다. 1968년 미국의 아폴로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기까지 학생들 사이에서는 우주개발의 주요 학문인 물리학이 인기를 끌었다.
평소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황창규는 고등학생이 됐을 때, 정통 물리보다는 각종 실험을 통해서 물리 이론을 재구성해보는 실용 물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법대나 의대에 갈 것을 희망했지만, 황창규는 물리학에 대한 흥미를 버리지 못하고 서울대학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실용물리학에 심취했던 그는 전기공학과 전자공학의 커리큘럼이 별로 차이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보다 전기가 조금 범위가 넓다는 것을 알고, 좀 더 폭넓은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전기공학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반도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취미를 살리는 차원에서 전기공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운명과도 같은 책을 만나게 된다.
인텔 창업자 중의 한 사람인 앤디 글로브가 쓴 ‘반도체의 물리와 기술(Physics and Technology of Semiconductor Device)’이라는 반도체 이론서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74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앤디 글로브의 저서는 반도체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원본을 구할 수 없어서 복사본을 구해다가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큰 영감을 받고, 홀린 듯이 반도체를 파고 들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디에 홀린 사람처럼’ 반도체에 푹 빠졌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 책을 수 백 번이나 읽었는데 책이 닳으면 또 사서 읽고 해서 같은 책을 세 권이나 샀을 정도였다.
황창규는 반도체를 파고들수록 재미를 느꼈다. 반도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전기회로를 이해해야 했고, 또 수학과 화학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반도체를 공부하려면 전기전자만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응용물리학과 화학 등을 두루 알아야 했다. 지적 호기심에 넘치던 대학생이었던 그는 반도체 안에는 수학, 화학, 물리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창규는 반도체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수학·화학·응용물리학 등 다른 과(科)에서 배우는 것까지 섭렵하면서 반도체야말로 고도화된 산업사회의 미래라는 것을 강하게 깨닫는다.
그 무렵 반도체를 처음 구경한 그는 한눈에 반도체에 반해버렸다.
“손톱만한 칩 속에 전자 물리 화학 등 이공계 학문의 모든 분야가 다 들어있더군요.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듯한 재미가 있었지요.”
1970년대 중반, 당시 사람들은 반도체가 앞으로 중요해질 거라는 말을 흔히 하곤 했지만, 정작 국내에서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반도체는 수학, 화학, 물리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매우 어려운 학문이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요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또한 반도체는 다차원의 공간지각 능력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공대생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분야였다.
평소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황창규는 반도체 설계에도 더 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는 반도체의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매력과 무한한 잠재력, 미래의 성공 가능성에 빠져들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창규는 당시 국내 유일의 반도체 기업인 ‘한국반도체’를 찾는다. 이 회사는 그 무렵 반도체를 운명적으로 선택한 또 한 사람인 이건희에 의해서 삼성에 인수된 직후였다.
이 회사는 워치칩, 그러니까 디지털시계에 들어가는 칩을 만들고 있었는데 황창규는 이 회사에 들려서 현장 답사를 하면서 반도체를 처음 구경하고, 웨이퍼도 구해오는 등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론상으로만 습득한 반도체 기술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1977년, 황창규에게 또 다른 계기가 찾아왔다.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공으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탄 윌리엄 쇼클리가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쇼클리는 마침 서울대 물리대에서 트랜지스터 발명에 얽힌 자신의 경험과 연구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이 특강을 듣고 황창규는 반도체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정했다. 반도체 엔지니어로서의 꿈을 굳힌 그는 반도체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때부터 그는 반도체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못했고 다른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도체는 그의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반도체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반도체 기술이 국내에 소개된 지 얼마 안 돼 지도교수조차 없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뜻이 맞는 대학원생끼리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황창규와 함께 한때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진대제(陳大濟)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다.
미국에서의 공부
1981년, 해군사관학교에서 3년 6개월 동안 교수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위로 전역한 황창규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유학길에 오른 것은 당시에는 한국의 반도체 기술이 일천했던 탓에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창규가 찾아간 곳은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1985년,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마이크로웨이브에 사용되는 반도체의 특성을 분석하고 설계하는 것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윌리엄 쇼클리가 명예교수로 있던 스탠퍼드 대학으로 가서 전기공학과 책임연구원이 되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나자 IBM이나 TI(텍사스 인스트루먼트)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반도체의 메카, 실리콘밸리의 스탠퍼드 대학에서 더 연구와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5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만약 그 5년 동안의 공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황창규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의 연구는 그의 반도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우선 그곳은 연구 환경이 아주 좋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인텔이나 HP에 컨설팅도 하면서 그들의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데다가 반도체 전문가들과의 교류도 많아서 좋았다.
그래서 그는 소위 ‘높은 연봉과 안정된 직장’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때 만약 IBM이나 TI를 선택했다면 월급은 조금 더 받았을지 모르지만 연구원으로 10년, 20년 계속 일하다 끝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창규가 스탠포드 대학의 책임 연구원을 지내면서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웠던 것은 자신을 반도체 분야로 접어들게 했던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월리엄 쇼클리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쇼클리는 76세의 고령으로 명예교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마침 쇼클리는 황창규의 바로 앞방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창규는 더 자연스럽게 그를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쇼클리는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천재일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 전반에 대해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문제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을 재빨리, 그러면서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분석해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황창규는 이따금 그의 방을 찾아가서 반도체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을 질문했고, 쇼클리는 대가다운 견식으로 황창규의 반도체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쇼클리는 과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천재’라는 수식어를 얻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황창규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어려운 문제를 접하면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쇼클리의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1947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수학과 과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쇼클리는 자신이 물리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교사들이 가르쳐주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독특한 해법으로 문제를 풀곤 했다.
1927년, 캘리포니아 공대(UCLA)에 들어간 쇼클리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 기술연구소에 들어가 윌리엄 휴스톤, 리차드 톨맨, 리누스 폴링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MIT에서 '소륨 염화물 결정체속의 전자파 함수의 계산'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 받았다.
1936년, 쇼클리는 AT&T의 벨연구소를 첫 일터로 선택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예일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반도체 연구에 관심이 컸던 그는 벨연구소(Bell Labs)의 안정적인 통화 서비스를 위한 기계장치 설계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전화국에서는 여성 교환원을 두고 통화 서비스를 했는데 인건비가 자꾸 오르자 자동식 교환기를 도입했다.
그러나 주요 부품인 진공관은 속도는 빨랐지만 전력 소모가 크고 필라멘트가 자주 끊어지기 일쑤였고 폭증하는 통화량을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진공관을 대체할 새로운 부품이 절실하던 때였다.
쇼클리는 연구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의 일생을 바꾸게 되는 한 마디를 상관으로부터 들었다.
“진공관 대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전혀 다른 개념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은 훗날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화두가 되었다. 쇼클리는 서로 비슷한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불활성 물질로 절연제와 도체의 역할을 함께 하는 반도체를 만드는 것에 인생을 걸기로 작정했다.
1947년 12월23일. 쇼클리는 공동연구자인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 존 바딘(John Bardeen)과 함께 벨연구소 중역진에게 새로운 장치를 선보였다. 그것은 게르마늄과 배터리, 삼각형 모양의 플라스틱 고정 장치, 금박지 조각, 그리고 서류정리용 클립을 펴서 만든 스프링이 뒤엉킨 작고 볼품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 산업의 모든 분야에 일대 혁명을 가져올 발명품인 트랜지스터 였다.
브래튼은 작업대에 임시로 만든 이 기구에 마이크와 헤드셋을 연결하고 두 개의 전극을 게르마늄 덩어리에 갖다 대면서 마이크에 대고 말을 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증폭되어 헤드셋에서 울려 퍼졌다. 중역들은 한 사람 씩 돌아가면서 헤드셋으로 전달된 소리를 들었다. 출력된 소리가 입력된 소리보다 100배는 컸다. 이 장치는 저항이 낮은 입력에서 높은 출력으로 전류를 흘려보내는 특성 때문에 ‘저항을 이동한다.’는 뜻의 ‘트랜스퍼 레지스턴스 (transfer resistance)’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트랜지스터(transistor)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품화 될 수 있는 정도의 트랜지스터는 아니었다. 그 후 쇼클리는 단독으로 연구에 몰입해서, 1951년, 드디어 반도체로서 상품성을 가지게 되는 접합형 트랜지스터를 완성했다.
접합형의 개발로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을 대신하는 진정한 기술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공관이 안고 있던 한계를 극복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그것은 진공관이 가지고 있던 크기와 열, 전력소모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쇼클리가 개발한 트랜지스터는 부피가 크고 비효율적이었던 진공관을 광범위하게 교체하여 초소형화 전자공학 시대를 열었다.
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는 작고 빠르고 저렴했기 때문에, 진공관이 안고 있었던 모든 문제점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트랜지스터는 전기 기기 개발을 수월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훨씬 작고 튼튼하며 전력 소모도 적은, 그리고 가격까지 저렴한 전기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진공관의 220분의 1 크기에 불과한 트랜지스터. 크기는 작지만 전자산업에서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트랜지스터는 곧바로 산업에 응용되기 시작했다.
1953년 레이테온사는 수십만 대의 트랜지스터 보청기를 팔았고, 1954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소니가 만든 트랜지스터라디오가 10만대 이상이나 팔려나가는 대히트를 쳤다. 또 1954년 한 해 동안 거의 100만 개의 트랜지스터가 AT&T, 제너럴일렉트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에 공급되었다.
트랜지스터는 1958년부터는 컴퓨터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IBM이 트랜지스터를 쓴 2세대 컴퓨터 ‘7000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이다. 그밖에도 트랜지스터는 종류를 기리지 않고 TV를 비롯한 모든 전자기기의 핵심부품이 되어서 엄청난 전자기기의 발전을 일궈냈다.
인류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준 반도체 산업은 1959년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사의 IC(집적회로)개발을 계기로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했다. 이제 반도체는 전자기기는 물론 통신장비, 산업용기기, 방위 산업, 항공우주 산업 등으로 반도체의 사용범위가 확대되면서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도체는 IC에 이어 1970년대 초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낳았다. 말하자면 트랜지스터가 나오면서 인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기에서 전자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트랜지스터를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위대한 역사를 일군 윌리엄 쇼클리는 공동 연구자인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 존 바딘(John Bardeen)과 함께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황창규는 그런 쇼클리와의 만남을 평생 몇 안 되는 소중한 기억 중의 하나로 간직하면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수많은 논문 발표함으로서 교수진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학생도 아닌 연구원이 많은 논문을 발표하자 담당 교수는 이 열성적인 동양 청년이 연구원 생활을 겸하면서 인텔에 자문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학교는 사흘 정도 나오고 이틀 정도는 회사 컨설팅을 맡아도 되겠소.”
그래서 그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업체인 인텔에 기업 컨설팅을 하면서 인텔의 기술력을 들여다보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황창규는 자신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또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황창규를 반도체의 세계로 안내한 또 한 명의 거장인 인텔의 앤디 그로브 회장이다.
황창규가 앤디 그로브를 만난 것은 인텔 자문역을 하던 1987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이상하리만큼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 식사도 자주 했으며, 훗날 가족동반으로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이라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를 운영하는 CEO로서 매우 엄격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1936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어린 시절 독일의 침공으로 홀로코스트를 겪었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소련군의 압제를 피해서 미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해서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979년 인텔의 CEO가 된 그로브는 지독한 열정으로 인텔을 키워 나간다. 그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간섭자요 조련사로 등장했다. 그는 출근시간을 8시로 정했고 전날 아무리 늦게 일했더라도 무조건 8시 출근을 지키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퇴근시간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스쿠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이 따라 다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매섭게 휘어잡은 카리스마로 인텔을 실리콘벨리에서 가장 강한 조직력을 갖춘 회사로 만들어 놓았다.
황창규는 그런 앤디 그로브와 친해지면서 반도체분만 아니라 기업 운용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앤디 그로브는 조직을 아주 매섭게 휘어잡았지만 늘 합리적이었고 스스로 실천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는 조직에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척 엄격했다. 그는 CEO가 된 후에도 직접 차를 몰았고 출장을 가서도 일반 호텔에 묵으며 스스로 체크인을 할 정도였다.
황창규는 앤디 그로브의 그런 솔선하는 리더십을 직접 보고 배웠다. 황창규는 앤디 그로브가 자신의 저서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말을 늘 음미하며 좋아했다.
“최고 경영자는 아무리 사소한 변화라도, 조직과 산업 등 주변 환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이런 변화가 감지되면 기업의 자유로운 의견 수렴을 통해 가능한 빨리, 그리고 간결하고 명확하게 결정을 내리고 조직의 힘을 새로운 목표에 집중 시켜야 한다.”
황창규는 이처럼 윌리엄 쇼클리, 앤디 그로브 같은 거장들을 만나 반도체 분야와 관련한 다양한 경험을 하는 행운을 안은 것을 생의 커다란 축복으로 여겼다.
그렇게 스탠퍼드와 인텔에 몸담고 있던 1988년, 황창규에게는 또 한 번의 인생의 전기가 마련되고 있었다.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
1988년 10월 어느 날, 스탠퍼드 대학에 있는 황창규의 연구실로 손님이 한 사람 찾아왔다. 그 사람은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기획실장인 김상욱이었다. 상대방의 명함을 받아든 황창규는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직감했다.
“박사님을 저희 삼성으로 모시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지금 저희는 반도체에 회사의 운명을 걸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우리 삼성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황창규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상욱은 천재급 해외 인재를 영입하라는 이건희 회장의 특명을 받고 온 사람이었다. 당시 삼성은 자체적 기술개발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인식 하에 기술인력 확보에 사운을 걸고 나선 때였다.
“아시다시피 국내에선 삼성전자가 가장 앞서 있다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아직도 2년 정도 뒤진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2년의 벽을 허물려고 합니다. 일본을 앞지르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박사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면 우리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김 실장은 두 시간 여에 걸쳐 황창규를 설득했다. 하지만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황창규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기업을 위해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직 제가 하고 있는 연구가 끝나지 않아서요. 확답을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제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 무렵 황창규는 미국 유수의 2, 3개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하겠다는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미국 반도체 학계에서 알려진 그의 명성 탓이었다.
‘조국에 돌아가서 일을 할까? 하지만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고민에 빠졌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였다.
그런 고민 중에 황창규는 우연히 일본 반도체업계를 돌아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본 반도체 기업 6개 회사가 그를 세미나에 초청한 것이다. 그는 열흘 동안 일본 반도체 업체에 컨설팅을 하고 오사카(大阪)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일본 반도체업계를 두루 둘러보았다.
일본의 반도체업체들을 둘러본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80년대 말은 NEC나 히타치같은 일본 반도체 메이커들은 세계 반도체산업의 중심이고 최전방이었다. 세계 최고의 전자소재학회인 IEDM 심포지엄도 일본어로 진행될 정도였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인텔이 세계 반도체업계에서 1등을 하기 전엔 일본의 NEC가 1등이었던 것이다. 그는 NEC나 히타치 같은 기업을 둘러보고 비로소 일본을 넘어서야 세계 최고가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도쿄 부근의 한 레스토랑에서 히타치 연구소 부소장과 저녁을 먹을 때였다.
히타치 연구소 부소장이 황창규에게 물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미국에서만 있어서 한국의 수준을 잘 모르겠는데요. 부소장님이 보시기에는 어떤데요?”
“삼성 반도체가 비록 제품을 만들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준미달입니다. 우리 일본의 기초기술이나 응용기술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삼성은 아마 20년이 지나도 도시바(東芝)나 NEC를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순간 황창규는 히타치 부소장의 입가에 자만의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물론 당시 한국의 반도체 기술은 일본보다 1∼2년 정도 뒤져 있었지만 그는 은근히 오기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언제까지나 저들의 조소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아!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황창규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귀국을 결심하고, 일본을 뛰어넘는 데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전 같은 완제품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일본을 따라잡기 힘들지만 반도체는 기술만 있으면 되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님의 일화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결심하는 이유는 하나로 통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앗 제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