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전도가 끝나고 토요일 귀가하여 주일을 보냈다.
성도들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여 죄송하다 그런데 또 하루쉬고 떠나야 한다.
성도들을 생각하면 안스럽다.
이렇게 사역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어디 또 있는지 모르겠다.
2013. 12월 3 화요일
주일 수 하루쉬고 전도 여행을 떠난다. 본래 목요일 부터 경주 동천로 교회 집회다.
하루전에 출발하려 하였으나 전주 처 이모를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전주 요양병원 어머니도 찾아 뵙고 싶다.
어찌 할까 망설이는데 전주 기린로 이강영 형제님의 부친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왔다. 주님의 은혜는 늘 우리들의 삶속에 역사하여 우리의 갈길을 열어 주곤 한다. 전주로 향했다 이모를 만나보니 작년에 만났을때와 너무도 차이가 많다. 그때 찾아뵙고 전도하여 또렷이 복음을 시인하였는데 이제는 정신이 많이 흐려졌다. 답답한 생각이 났다. 주님나라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나 답답한 생각도 병행한다. 금년 86세 이모든 정신 지체아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와 동갑인 아들이 있었으나 울산에서 직장에 다니다가 사고로 먼제 세상을 떠났다. 또 딸이 있었는데 병으로 얼마전에 세상을 떠났다. 참 슬픈 일들이 그의 생애에 겹친 슬픈 노인이다. 붙잡는 이모를 뒤로하고 시간에 쫒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입관식은 오후 4시..
이강영 형제는 전주 영생고등학교 1년 후배로서 기독학생회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다. 내가 구원 받고 그에게 전도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 때 그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학교를 쉬어야 할 처지에 있다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이강영 형제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버지는 어느날 전도하고 나의 집례로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국에 가면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의 수고로 물질 헌신으로 구원받아 만나서 당신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니 기억이 없어도 우리는 그 날을 의지하고 열심이 전도하여야 하리라. 울산으로 갈 일이 결정되어 있으니 시간에 쫒겨 어머니는 뵙지 못하고 전주를 떠났다.
함양에 도착하여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함양은 경상남도 서쪽에 자리잡은 작은 읍으로서 볕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골의 작은 모텔에 투숙하니 비교적 깨끗한 곳이었다. 아내도 그냥 맘에 든다고 하였다. 피곤을 못이기어 더 진출하지 못하고 이곳에 여장을 풀어야 했다. 본래 진주정도라도 가려 하였으나 중도에 멈출 수 밖에 없는 체력이다. 야간 운행도 부담이 되고..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나가보니 시가지가 조용하다.
12월 4일 수요일
아침에 콩나물 국밥집을 찾아 식사를 마치고 시가지를 돌아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 도시도 수만명이 단체로 지옥을 향하고 있으난 그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불쌍하지 아니하랴
함양을 출발하여 거창을 지나 합천을 바라보고 자동차를 달렸다. 거창은 우리 교회사에도 흔적이 있는 곳이다. 사후동에서 선교를 하셨던 맥가피 선교사가 거창고등학교 건축 감리차 오셔서 거창교회를 시작한 곳이다. 지금도 그 장팔리 교회를 안영수 형제님이 지키고 계신다.
약 한시간을 달리니 합천에 이른다. 어느 길에서 만난 맛집에서 칼국수 한그릇씩 먹고..맛집은 강가에 있어서 풍경이 좋았다 주의 복음 전한다고 이런 풍류도 허락하신것을 감사드리면서 차를 몰고 합천을 스쳐 지나간다. 합천은 우리나라 유명한 팔만 대장경을 관리하고 있느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으로 부터 이 나라을 지키려하여 불교의 힘을 빌려고 만들었다는 팔만 대장경이다. 문화재적 가치는 있겠지만 그 불교천지 고려가 조선의 숭유배불정치를 겪지 않고 그대로 내려왔으면 우리 나라도 태국같은 불교국가가 되어 전국민이 시들어 죽는 불쌍한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함천을 스쳐 창령을 바라보고 달리니 6~70년대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던 부곡하와이 앞을 지나 울산을 바라보고 달렸다. 울산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려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울산 형제들의 영접을 받으며 바로 사우나에서 몸을 풀었다. 울산은 필자가 개척 초기 부터 함께 하였던 곳이다. 초기에 전 울산 기독교로부터 강한 핍박을 견디면서 전도하던 추억의 동네다.
지금은 울산 중부교회와 동울산 교회와 울산 서부교회가 있다. 그리고 울산 중부교회를 통해서 다수의 교회와 다수의 일군들이 일어나 주님을 섬기고 있는 어미같은 교회다. 집회가 아니어도 가끔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는 교회이기도 하다.
수요일 성도들이 대다수 나와서 말씀을 듣는 풍경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였다. 소통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다.
12월 5일 목요일
마침 울산 초기에 울산 초기에 구원 받고 주님을 섬기던 이상오 형제의 아내된 김선옥 자매가 귀국하여 잠시 머물고 있었다. 교제도 하고 관광도 시켜드리고자 하여 동행을 청하였다 그는 기꺼이 따라나서서 지름길 30분이면 가는 경주를 해변길로 돌아서 가기로하였다. 울산에서 정자로 넘어가서 해변을 따라 포항까지 꾸불 꾸불한 길로 달린다. 해변에 경치가 좋아 모두를 좋아한다. 지난주 부터 연속 집회중이라서 몸은 힘들어도 오랫만에 만난 자매와 교제한다는 것이 즐거웠다. 섬김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희생이 따라야 하는것 닽은 하루였다.바닷가에서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포항을 거쳐 안강으로 향한다. 원자력 발전소 옆을 지나 한참을 달리리 포항이 나온다. 포철 정문앞을 지날때 자매는 고향이 여기서 가까와도 포철을 보지 못했다고 즐거워하였다.
안강에 처형을 만나 복음을 전하였다. 처형은 안강에 시집와서 오늘까지 농사일에 찌들어 산다. 참 안스럽고 안타깝다. 도마도 농사를 짓는데 농사 기술은 뛰어난데 돈은 크게 벌지 못하는 처형부부가 안타까와 수십년 전부터 드나들면서 전도하나 쉽지가 안다. 들어가 또 전도하니 지난번 전도한 내용을 다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전도를 해야 할 것이다
오후에 경주에 도착하니 자매들이 예배당에 나와서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경주는 임종원 형제님이 개척하시고 떠난 교회다. 필자가 울산에서 섬길때 고 1 학생으로 친구를 찾아 예배당을 찾았던 진준권 학생이 형제가 되어 이제 결혼하여 고등학교 학생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울산으로 출퇴근 하면서 경주 교회를 돕고 있다. 대견한 일이다. 차를 타고 출퇴근 하기도 하고 오토바이로 출퇴근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00리 길을 오토바이 출퇴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교회를 섬기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가. 참 사랑스런 형제다. 이번기간은 집회를 위해서 손해를 보고 휴가를 하였다고 한다. 세상 사람은 웃을 일이다.
저녁에 약 10명 안팎의 구도자가 참여하였다.
6일 금요일
구도자들은 여전히 참석하고 있었다. 낮에 피곤을 감안하여 상담은 보류하는것 같았다. 형제사랑의 모습에 감사하였다. 경주에는 고 임종원 형제님 처제 두분이 계셔서 교회에 큰 동역을 하고 있었다. 두분은 쌍둥이 이다. 동생의 자녀 3형제가 주님안에 잘 커서 교회에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희생적인 봉사를 통해서 교회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예배당도 3층 건물을 인수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1층은 형제가 세들어 실내장식을 하고 있었고 다른 분이 세들어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열악한 교회라서 세를 안고 인수 한것으로 알고 있다. 천년 고도 경주는 불교가 찌들어서 전도가 여간 쉽지 않은 곳이다. 이번 전도여행중 함양부터 합천을 거쳐 창녕을 지나 밀양을 통과하여 울산 포항 안강 경주를 오는 동안 길가에 자주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암자요 절이었다. 경상도는 다른 지역 보다 유난히 불교가 성한 곳이다. 힘들게 집회를 하고 피곤을 못이겨 일찍 자리에 누웠다.
7일 토요일
오면서 계속 여행에 운전을 하여서 인지 거제도 전도집회 후유증인지 어렵게 전도를하고 있다.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죽염을 목에 흘러 내리게하고 자곤 하여서 인지 목은 아프지 않은데 힘이 없다. 왼쪽 눈이 충혈되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아내는 안과에 가거나 병원에 가자고 하나 끝까지 견디다 오후가 되어 더 몸이 안좋아서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둘이서 살그머니 문을 나서는데 길거리 차를 정차하고 있는 쌍둥이 동생 자매를 만났다. 어디가느냐 묻는데 거짓말 할 수 없어 사실대로 병원에 가는 중이라 하였다. 사실 이 자매를 만나지 못했으면 병원도 못 갈뻔 하였다. 토요일 오후라 대부분 병원이 문을 닫았다. 아들을 불러 차를 태우고 자그마한 병원에 갔다. 주사를 맞고 닝게르를 맞고 약을 받아왔다. 아내도 닝게르는 안맞고 약과 주사만 맞았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렸다. 나같은 자가 어찌 이렇게 성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또 바울을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 바울은 걸어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나는 차를 타고 다녀도 힘든데...
문명의 이기는 놀라웠다. 닝게르에 힘을 컸다. 아니 형제사랑의 힘이 컸을 것이다. 바울은 형제사랑은 받았지만 닝게르가 있었을리가 없었으니 얼마나 고생이 컸겠는가. 저녁에 힘이 상당히 회복되어 전도와 상담을 할 수 있었다. 약 4명정도가 복음을 시인한 것으로 들었다.
8일 주일
주일날 두시간 복음적인 말씀을 전하고 한두사람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오후에 전도를 위해서 구도자들과 축구를 하면서 친선을 다지는 일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오늘도 예배와 말씀후에 축구를 하러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경주를 나서야 했다
피곤한 몸을 다시 추스리며 겨울에 축구를 하러 떠나는 형제들을 보면서 이것이 믿음의 용사들의 삶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영천으로 돌아와 따뜻한 영접을 받으니 저녁시간이었다.
영천은 울산에서 구원 받은 정완균 형제가 지키고 있었다. 그가 처음 복음 들으러 온날이 생각난가. 곱슬머리가 장발을 하고 오니 머리가 큰 공같아서 놀랐다 딱 붙은 청바지에 앞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들먹 거리는 모습으로 질문을 하는데 도무지 믿을 것 같지 않았다. 당시 어떤 청년 구도자가 복음을 시인하고 친구를 데려온것인데 그는 지금 주님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친구만 남아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참으로 묘하다 그는 또 나의 전북 임실 외갓집 동네 사람이었다. 형제는 신실하여 영천에서 온갖 고난을 뭄묵히 견디면서 오늘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워도 주님을 의지하고 불평한마듣지 못하는것이 대견하다. 오히려 자기의 고난 보다 교회가 부흥되지 못함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훌륭한 형제다. 그의 아내도 울산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멋장이 아가씨 구도자로 왔었다. 구원을 받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구원후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오늘까지 두 사람 모두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고 있다.
밤이 깊도록 교제하고 잠이 들었다.
9일 월요일
아침에 사랑스런 식사를 대접받고 조치원으로 차를 몰았다. 조치원에 둘째 딸이 살고있다. 청주중부교회 다니고 있다. 아들하나 딸둘 삼남매를 낳아서 잘 키우고 있다 조치원에 교회가 없어 청주중부교회까지 다니고 있다 주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서울과 중부지역 혹 강원도 집회를 다녀오다가 힘들면 쉬고 오곤 한다. 옛날 주막집에서 쉬고 가는 나그네처럼 쉬는 곳을 주셨다. 감사할 일이다.
10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아내는 쉬게 두고 혼자서 차를 몰아 대천으로 향했다. 대천에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여천에 황창오라고 하는 형제가 있는데 그의 형에 인생의 고달픔을 느끼고 교회 나가기를 원하여 연결 시키는 것이다. 주님 은혜로 두시간 운전하여 대천데 도착하니 12시다. 1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돈묵 형제님이 친절하게 영접하여 주셨다. 그는 모터 수리업을 하시면서 교회를 돌아보는 형제님이시다. 대천에는 전임 사역자가 없어서 모두를 어렵게 섬기고 있었다. 식당에서 함께모여 식사하고 예배당으로 가서 1시간 30분쯤 말씀교제하였다. 그는 아들과 함께 교회 출석하기로 하고 나는 일어났다. 김돈묵 형제가 여비를 챙겨준다. 공금인지 개인적 봉사인지 모르나 풍성하게 챙겨 주어 감사하였다. 여비가 넉넉지 않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두시간 운전하여 조치원에 오니 밤이다. 내일을 위하여 일찍 잠을 청하였다.
11일 수요일
차를 조치원에 세워두고 가방만 들고 기차로 서울을 향하였다. 인천에 있는 큰 처남 집에 가기 위함이다. 인천에 큰처남은 인천 서부 끝에 살고 있었다. 기차로 용산역에 내려 전철로 서울역에 올라가 전철로 공항선을 타고 검암역에 내리니 6시가 넘었다.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처남집에 들어가니 7시다. 오늘 처남집에서 돌아가신 장모님 추도식이 있다. 처남들과 처제가 다 모여 집회를 가졌다. 주님 은혜로 내가 집례하여 추도식을 가진지가 오래다. 내가 다니던 장로교회 출신들이라서 관계가 좋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처갓집에서 나를 신뢰하여 줌으로 요즙은 분위기좋다. 마음놓고 복음을 전해도 다 즐거워하고 청종하여 들으니 주님께 감사하다.
인천에서 일산으로 나가는 이경래 형제에게 미리 연락해 두었더니 그가 데리러 와서 그의 집으로 옮겨 여장을 풀었다. 그는 인천 남부쪽에 살고 있는데 금융사업과 자동차 판매업을 겸하고 있었다. 복음을 위한 열정이 대단한 아끼는 후배다. 늦게까지 즐거운 교제를 하고 쉬다.
12일 목요일
수원까지 차로 태워다 주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자기 일도 바쁘고 힘든데 그는 나를 위해 지금 희생의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떠날때 노자돈도 쥐어주었다 참으로 기특하고 감사하다. 다시 기차를 타고 조치원에 도착하니 2시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즉시 차를 몰고 여주를 향한다. 물론 밥도 못먹었다 딸이 챙겨 준다하는데 저녁부터 집회니 그냥 간다고 고집하였다. 창밖에는 약간의 눈이 흩날리지만 그런대로 길이 괜찮았다. 오창 휴게소에서 라면으로 식사를 마치고 음성을 지나가는데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눈속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점점 날씨가 험악하여 가고 눈도 더온다. 경기도 땅에 들어서니 엄청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들이 멈추어 나가지 못하였다 그냥 길 가운데 서있다 느낌으로 100미터 가는데 3~4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흐르고 차는 움직이지 않고 전화로 여주에 소식을 전했다. 여주도 엄청나게 눈이 오고 있었다. 다시 여주에서 전화가 왔다. 조준안 형제님이 저녁집회를 보류하여야 할것 같다고 하였다. 큰소리로 외쳤다. 절대 그런 일은 없으니 철저히 준비하고 구도자 나오는대로 나와서 집회 참여하게하라 하였다. 일죽 톨게이트에서 부터 고속 도로가 폐쇄되어 국도로 쫒겨났다. 고속도로비도 면제되었다. 국도로 국도로 오는데 눈은 쏟아지고 막막하였다. 나는 눈길 운전을 해본적이 없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야 말로 천신 만고끝에 여주에 도착하니 7시 10분경이었다. 밥도 마다하고 그냥 침대에 누웠다. 왼쪽 눈이 충혈되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결에 들으니 8시 5분이라는 말을 누군가가 하고 있었다. 깜짝놀라 일어나니 약 30여분을 잤다. 그대로 강단으로 나가서 15분 경부터 말씀에 들어갔다. 물론 밥은 못먹었다. 구도자는 6명이 왔다고 하였다. 말씀이 끝나고 몸이 기진맥진 하여야 하는데 오리려 조금 회복된듯 하엿다. 역시 성도는 복음으로 사는가. 이웃교회 이천에서 엄동국 형제님 부자가 눈속을 뚫고 참석하여 동역을 하셨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한 아가서 말씀이 생각 났다. 형제님은 끝날까지 계속 참여하여 동역하여 주셨다. 형제사랑이란 것은 이런 것이리라.
13일 금요일
구도자 상담을 위해서 목요일 부터 주일까지 빽빽히 일정을 준비 하였지만 눈으로 인하여 소용이 없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 할 찌라도 그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고 잠언에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어쨌든 눈 탓에 오전 오후 휴식을 하면서 집회를 준비 할 수 있었다 다행이 눈은 오지 않아 길이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산간 쪽은 어려워서 못나온 성도들이 많았다. 어떤 성도는 첫날 못나오고 다믐날 나오기 위해서 스노우 타이러로 당장에 바꾸고 둘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의 긍휼을 기다릴만 하다고 생각 되었다.
둘째날은 8~1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중에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구원 받기를 너무나 사모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이번 집회를 기다렸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조준안 형제님이 기초교제를 충분히 하고 복음을 풀지 않은 몇 구도자들이 계속 참여하여 복음을 시인 하였다. 이번에 약 4명정도가 시인 하였다고하였다.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약 10 km 이상 떨어진 곳에 사는 형제집에 가서 상담하였다. 형제는 자그마한 생산업을 하고 계신데 놀랍게도 그 일을 하는 목적을 한영혼이라도 건지고자 하는 열정때문이라고 하였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 두분이 교제하였는데 한분은 교회 출석하는 분이고 한분은 남편 눈치보느라 교회에 나오지 않은 주일학교 경력을 가지 분이셨다. 나오는 아주머니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시인하였다. 그가 시인한후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갑자기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떻습니까 하니 그가 자기도 믿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주일학교 로 부터 약 15년을 교회 출석 한적이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 질문할때 지옥이 안믿어진다고 하였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가 주일 학교때 좋아하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하며 좋아하였다. 왜 주일학교를 하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토요일 저녁에도 계속 나오던 구도자들이 나와서 복음을 들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15일 주일
낮시간에 두시간 성도를 위한 말씀을 전하였다. 로마서 5장을 통해서 신앙의 기본기 라는 제목으로 교제하였다. 나오던 구도자들의 밝은 얼굴을 뒤로하고 짐을 챙겨 여주를 떠난다. 아내가 짐을 챙겨주니 여간 편한게 아니다. 전에 혼자서 다닐때는 늘 챙기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왔던가. 아내의 헌신을 정말 감사한다. 여주를 떠나 내려오다가 아내와 이야기 하면서 최근에 주님의 크신 은혜로 예배당을 선물 받은 안성교회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다. 안성에 도착하니 성도들이 예배당 이사를 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지난 1월에 천평대지위에 아이들이 놀수 있는 마당있고 상담실 있는 예배당을 주시라고 교회기도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방법으로 14억에 입찰에 들어갔지만 약 20억에 해당되는 예배당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셨다. 앞서서 섬기고 있는 박두선 형제님은 직장에 다니며 세상의 물정에 밝은 사람이 아닌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560평 땅에 3층 건물이 있고 지하실이 따로 있는 식당 건물인데 상상 할 수도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셨다. 8억정도에 낙찰이 되었는데 곧 일부가 개발지 도로로 들어가서 보상이 나오면 빚을 갚고도 남는 다고 하였다. 그러면 예배당은 공짜로 떨어지게 된것이다. 아내와 함께 돌아보고 나서니 시계는 8시를 향하고 있었다. 도저히 내려갈 힘이 나지 않아 어딘가 들어가려하여 경기도 어떤 형제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정이 전혀 여의치 못하여 안타까와 하였다. 또 다른 지역의 성도 집에 전화하니 혼쾌히 영접하여 찾아 들어 쉬었다. 형제님 부부는 평상시 가이오와 같이 전도자들을 섬기는 훌륭한 부부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부부였다.
16일 월요일
아침에 힘을 챙겨 다시 출발하여 당진 쪽으로 향하여 공주 켵을 지나 전주에 당도하였다. 전주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간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뵈었다. 지난번 현관에서 넘어지셔서 걷지 못하고 수술후 고생하시고 계신다.
평생에 고생만 하시고 호강도 시켜 드리지 못하였는데 좀더 건강하게 우리곁에 계셔야 하는데 금년에 86세시다. 이제 보조기를 의지하여 걱디도 하시고 의자에 앉으셨다고 일어나기도 하셨다 고향 전주에는 오형제중에 네째와 막내가 살고 있다. 저들이 가까이수 수고 하며 자식노릇하고 있다. 전도한다고 객지로 돌아다니며 자식노릇도 제대로 못한 죄인이 되어 늘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뒤로하고 여수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여수를 들어서니 7시경이었다. 큰 딸 부부가 가까이 살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을 챙겨놓고 기다린다. 딸 사위의 재잘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는 즐거움을 아는가. 전도에서 돌아와 지친 몸으로 식사 할때먀다 격는 즐거움이다.
이 번 전도 여행에서 전도와 함께 배운것이 많다. 주님은 실제적으로 내 곁에 계셔서 나의 길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들이었다 전도자의 길이 평탄하지 못하여도 거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언제든지 함께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거듭나라 회원 여러분의 기도를 잊을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감사합니다.
2013년 12월19일 회상하면서 쓰다.
첫댓글 네, 줄곧 성도들을 찾아, 또는 구도자를 찾아 길은 누비시는
형제님의 행로에 주님의 강렬한 빛이 항상 비추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 맞아요. 여천교회 성도님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주님께서 복주시리라 믿어집니다.
사도행전을 이어쓰고 계시는 형제님의 행로에 주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하셔서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있도록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시길 원하며 성전도 튼튼하게 해 주셔서 잘 감당하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길 간구드립니다.
형제님의 전도사역에 기도하겠습니다.
전도 여정도 그렇고,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 생생하게 전하는 것 또한 듣고 읽는 이들은 은혜이면서 송구스럽습니다...
가셨던 곳곳의 발자욱들, 스친 영혼 한 분 한 분 주님이 기억하시고 위로해 주시길...
이 모든 소식들에 방관자가 되지 않길 기도합니다.
전도 이야기가 계속 올려지길 기대합니다 수원에 다녀오신 이야기도요
...주님의 긍휼은 기다릴 만 하시다고 ...참으로 형제님의 열정은...사도행전에서도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들처럼
전국을 다니시면서 마음껏 전도하시고 바울처럼 육신의 고통을 뒤로하고 링게르까지 맞아가시며 행하시고 계심에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