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보(至寶) 3대장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지보(至寶)"로
불린 세 사람이 있습니다: 무용가 최승희,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그리고 화가 이인성.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인성이라는
화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38세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잊혀진 천재 화가, 이인성에 대해
이야기 나누려고 합니다.
왼쪽부터: 무용가 최승희,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화가 이인성
"회화는 사진적이 아니며
화가의 미의식을 재현한 별세계이다"
- 이인성(李仁星, 1912~1950)
이인성,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화채색, 228.5*146cm.
화가 이인성의 <해당화>는 1944년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만해 한용운을 기리기 위해 이인성이
만해의 시 <해당화>에서 모티브를 따와 그린
작품이에요.
꽃에 취해 있는 그림 속의 두 소녀와 달리
앞쪽에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인(아마도 소녀들의 엄마)에 감정을
이입해 시와 그림을 보시면 감상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듯합니다.
왼쪽: 1930년대 중반,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1934년 작품 <가을 어느 날>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이인성 /
오른쪽: 1932년, 일본 유학 시절의 이인성
이인성
(李仁星, 1912~1950)
살아서는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
"양화계의 거벽(巨擘, 서양화계의 거장)"이라는
극찬을 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이제는 "비운의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 뒤에 항상 따라붙게 된 화가 이인성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당화>는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작품들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데요.
화가로서 이인성이 가진 뛰어난 문학적 감각과
능력이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져요.
슬픈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저 여인 옆에 놓인
우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림을 볼 때마다 끝없이 상상하고 매번 새롭게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보게 됩니다.
이인성을 지칭하는 별명이 하나 더 있는데요:
'조선의 고갱.'
그가 "조선의 고갱"이라고 불리게 된 건
바로 이 작품 때문일 텐데요.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강렬한 원색의 대비와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을린 피부색의 여인의 모습 때문에,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을 본 누구든 타히티의 여인들을
그린 폴 고갱의 그림들이 머리에 떠오를 거예요.
왼쪽: 폴 고갱, <Joyfulness I (Joyeusetes)>, 1892. © Musee d'Orsay, Paris /
오른쪽: 폴 고갱, <Où vas-tu ? (Where are you going?)>, 1893. © Staatsgalerie Stuttgart, Stuttgart, Germany.
<가을 어느 날>은 그의 나이 23세 때인 1934년
제13회 선전 <조선미술전람회 (이하 '선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인성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언급되곤 하는 '향토성'이
짙게 배인 그의 1930년대 대표작 중 하나인데요.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때의 시각적 충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왼쪽: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작품 일부 확대, 1934년 /
가운데: 폴 고갱의 <모성애 I (Maternité I)>, 1899년 /
오른쪽: 폴 고갱의 <모성애 II (Maternité II)>, 1899년 /
화가 이인성의 이 <가을 어느 날>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려요:
하나는, 우리나라에도, 그것도 (일제강점기) 근대에,
이런 화풍을 가진 화가가 있었다니ㄷㄷ 놀람>.<
이런 반응이고요.
다른 하나는, 저게 어떻게 조선의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나! 뙤약볕이 내리쬐는 누런
들판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저 반라의 여인은
뭐며, 검붉게 그을린 저 피부색은 또 뭐며.
일제 주도의 관전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해
그저 조선인을 미개하고 원시적으로 그림으로써
일제의 의도에 맞춰 그들에게 아첨한 것 아닌가!
라는 시각이 그것인데요.
왼쪽: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The Terrace>, 1948-1949년 /
오른쪽: 조르주 브라크의 <검은 비둘기 Le Pigeon Noir>, 1956년
뒤에 이인성의 생애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릴
테지만, 아무 빽(?!)도 없고, 당시 조선의 화단에서
이렇다 할 연줄도 학연도 없었던 이인성이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은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는 길뿐이었어요.
따라서 어쩌면, 이인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말처럼, 상을 타기에 좋은, 심사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이인성이 그린 것일 수도 있어요.
당시 일제는 조선을 일본의 변방으로 설정하고
조선의 원시성/(발달한 도시문명과 반대되는
의미의) 향토색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그러니까
일본은 선진적이고 도회적으로, 조선은 완전
깡시골로 그 이미지를 고정시켰으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인성의 이 작품을 폄하하기엔,
1930년대 오로지 독학으로 이인성이 마스터한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진적이고 앞서간 기법들을
이 그림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왼쪽: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작품 속 해바라기, 1934년 /
오른쪽: 앙드레 드랭(Andre Derain)의 <Mountains at Collioure>, 1905년
일례로, '앙티-세른 (anti-cerne)'이란 기법이
있는데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속 해바라기를
보시면 줄기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하얗게
남겨둔 게 보일 거예요. '앙티-세른'은 그림을
그릴 때 서로 다른 2가지 이상의 색면이 닿는
부분을, 검정색 선 같은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캔버스 그대로 남겨두는 방식인데, 폴 세잔을
필두로 주로 인상파와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법이에요.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야수파의 창설자로 불리는
앙드레 드랭의 오른쪽 그림 속에 보이는 '앙티-세른'
기법과 비교해 봐도 당시 23세밖에 안 된 이인성이
얼마나 이 기법을 기막히게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왼쪽부터: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들>, 1951 / 김환기,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 1961 / 박항섭, <가을>, 1956
그리고, 이인성이 일제의 입맛에 맞춰
조선 여인을 원시적으로 미개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에도 저는 전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데요.
우리나라의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조선의 여인들을 반라로
그린 작품들은 널리고 널렸거든요.
왼쪽부터: 박수근의 <길가에서>, 1954 / 이영일의 <시골소녀>, 1928 / 운보 김기창의 <가을>, 1934 / 박수근의 <모자>, 1961
이인성, <경주 산곡에서>, 1935, 캔버스에 유채, 130.5*195.6cm. © 삼성리움미술관.
"나에게는 적토(赤土)를 밟는 것이
청순(淸純)한 안정을 준다.
참으로 고마운 적토의 향기다."
- 이인성 (1912년 - 1950년)
<가을 어느 날>로 화단에 충격파를 안겨준 지
1년 후인 1935년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1등(창덕궁상)을 수상한 이인성의
또 다른 대표작 <경주 산곡에서>도 예의 적토를
바탕으로 한 짙은 향토색과 강렬한 색채의 대비,
그리고 원시성을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에 우리 화단에서도 이런 색채의
실험이 가능했다는 것이 그저 놀랍습니다.
붉은색과 주황색의 땅위로 선명한 푸른 하늘.
이런 컬러의 혼합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이인성, <아리랑고개>, 1934, 종이에 수채, 57.5*77.8cm
왼쪽부터: 이인성의 <해당화>, 1944 /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1934 / 이인성의 <경주 산곡에서>, 1935
대구 삼덕동 화실에서의 이인성
이인성(李仁星 1912~1950)
이인성 <그늘 (陰)>, 1929, 종이에 수채, 소재불명
이인성이 천재임을 알려준 1932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기사 (출처: 영남일보)
"조선의 천재(天才)", "조선의 지보(至寶)"라는
찬사 속에 이인성의 화가 인생은 승승장구!
일본으로 건너간 이인성은 무서운 속도로,
그 짧은 몇 년 안에 당대 유행하던 서양의
미술사조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어요.
왼쪽: 1930년대 중반 오오야마상회 안에 있던 아틀리에에서 1934년 작품 <가을어느날>과 <뒷뜰의 일우>를 배경으로 팔레트를 들고 소파에 앉아있는 이인성 화백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등의 화풍에
이인성 자신이 추구하던 '향토적
서정주의'를 결합한 작품들을 연달아
내놓습니다.
아래의 <세모가경>과 <풍경> 같은
이인성이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그린
그림들과 이인성이 일본 유학을 하는 동안
그림들을 비교하면서 그림들을 감상하시면
그 변화가 더 또렷하게 느껴지실 거예요.
이인성, <세모가경>, 1931, 종이에 수채, 소재불명
이인성, <풍경>, 1931, 종이에 수채, 20*25.5cm
아래 그림 <풍경>은 분명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긴 한데,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화가들의 인상주의 그림들과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르지요?!! 서구의 사조를 1930년대
우리식으로 토착화시킨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이인성, <풍경>, 1931, 종이에 수채, 56.5*77.5cm
1932년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조선을 대표하는 중진화가가 된 이인성ㄷㄷ
1932년 일본 유학 시절 이인성이 그린 수채화
<카이유>를 보실래요?! 이인성이 본격 스타덤에
오를 수 있게 해준 작품인데요.
이인성, <카이유>, 1932, 종이에 수채, 78*57.5cm
이인성의 대표적인 스타일 중 하나인
밝고 선명한/강렬한 색채의 대비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카이유'는 카라꽃의 일본어 발음이라고 하는데,
이인성은 '카이유'가 한자어 '쾌유(快癒)'와
발음이 비슷해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해요.
일본인들이 보기엔 그냥 카라꽃을 그린 밝고 화려한
정물화였겠지만, 이인성의 입장에서 이 그림은
식민치하의 시대적 아픔을 딛고 조선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자 한 마음을 담은 그림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
대구 남산에 위치한 자신의 아뜰리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이인성, 1930년대
이제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비운의 천재 화가"가
되고 말았지만, 그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에서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은 으레 "너 커서 이인성 될래?"
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라고 해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데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화단에서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명성을 지켜줄
학연으로 맺어진 후배/제자들이 학계에 없었고,
일제강점기 시절 관전을 통해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어서, 이인성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야 했죠.
이인성, <정원 Garden>, 1930, 캔버스에 유채, 91*90.7cm
그런 이인성의 작품들과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은 대한민국의
미술사를 위해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인성의 심미적인 탐구가 절정에 도달한
1950년, 그는 만취 상태에서 경찰과 시비가
붙으면서 총기 오발사고로 급작스럽게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일찍 떠나지 않았다면,
1950년대에 절정을 보여준 박수근이나
이중섭처럼, 1960년대에 절정을 보여준
김환기처럼 이인성 또한 어떤 대작들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을지...생각할수록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워요.
이인성, <여름 실내에서>, 1934, 캔버스에 수채, 71*89.5cm
때로는 폴 세잔의 그림을 보는 것 같고
때로는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을,
때로는 고갱과 반 고흐의 그림을,
또 때로는 마티스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색다른 즐거움과 함께, 서양의 화가들의
화풍을 어떤 식으로 그가 한국적으로
재창조했는지~ 이인성의 주요작품들 중
일부를 감상해 보세요 :)
이인성, <실내>, 1935, 캔버스에 수채, 91*117cm
수채화와 유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대담하고 자유로운 붓스트로크를 뿜뿜
시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수채화도
유화 같음ㄷㄷ), 과감한 색채의 사용에 있어
제약을 거의 못 느끼는 듯한 컬러 감각까지,
이 정도면 이건 타고난 것이라고 해야겠죠?!
이인성, <창변>,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6*59cm
이인성, <온일 (溫日)>,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2*90cm,
이인성, <추정>
이인성, <초여름의 빛>, 1933, 캔버스에 유채, 소재불명.
이인성, <연못>, 1933년 추정, 캔버스에 유화채색, 33.4*24cm
이인성, <정물 (석고상이 있는 정물)>, 1934, 종이에 수채, 57*77.5cm
이인성, <노란 옷 입은 여인 (모자 쓴 여인)>, 1934, 종이에 수채, 74.5*59.5cm,
이인성, <여인좌상>, 1930년대, 종이에 수채, 77.5*57cm
이인성, <정물>, 1936년 이전, 캔버스에 유채, 72.5*100cm
이인성, <주전자가 있는 정물>, 목판에 유화채색, 36*45cm
이인성, <장미>
왼쪽: 이인성, <해바라기>,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1*50.5cm. ⓒ 국립현대미술관 /
오른쪽: 이인성, <아네모네>, 192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38*29cm
왼쪽: 이인성의 <해바라기>, 1940년대 / 오른쪽: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1888
이인성, <다알리아>,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72*99cm.
이인성, <풍경>, 45*53cm
이인성, <해수욕장>, 25*57cm
이인성, <아리랑고개>, 1934, 종이에 수채, 57.5*77.8cm
이인성, <대구 앞산>, 1935
이인성, <빨래터>, 1930년대 중반, 캔버스에 유채, 15.8*22.7cm
이인성, <어느 나루터>
이인성, <월미도 풍경>, 1933, 나무에 유채, 24*33.3cm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 삼성리움미술관
이인성, <경주 산곡에서>, 1935, 캔버스에 유채, 130.5*195.6cm. © 삼성리움미술관.
이인성, <한정>, 1936
붉은 적토 위의 두 소년을 그린 점에선
<경주 산곡에서>와 비슷하지만,
느낌이 많이 다르죠?
굉장히 서정적이며 상징적입니다.
이인성, <경주 풍경>
이인성, <어느 여름날 계곡에서>, 1938, 60*50cm
이인성, <복숭아>, 1939, 캔버스에 유화채색, 90*116cm
이인성, <사과나무>, 1941, 캔버스에 유채, 38*45cm
이인성, <사과나무>, 1942, 캔버스에 유화채색, 91*116.5cm
이인성, <산사>, 1940년대 초, 나무판에 유화채색
이인성, <산사>, 1940년대 초, 종이에 수채
이인성, <이화의 오후>, 1940년대, 종이에 수채, 47*66.5cm
이인성, <바위가 있는 해안 풍경>, 1940년대
이인성, <강변>,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38*45cm
이인성, <어촌 (덕적도 풍경)>,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32*41cm
이인성, <다리>,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1.3*80.3cm
이인성, <성당이 있는 풍경>,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화채색
이인성, <과일>, 1947, 종이에 수채
이인성, <여학생>, 1447, 캔버스에 유채, 65.4*45cm
이인성은 풍경화도 많이 그렸지만
인물과 풍경이 조화를 이룬 그림,
인물화도 많이 그렸어요.
대개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인물화가 많은데, 특이한 점이
아이들을 그릴 때만큼은
대부분 눈동자를 제대로 표현함 :)
이인성, <빨간 리본의 소녀>
이인성, <아기>, 1940년대, 종이에 수채, 18*12cm.
이인성, <소녀>, 1940년대, 나무판에 유채, 27*22cm
이인성, <어린이>, 1940년대 후반, 나무에 유채, 22.5*15.5cm
이인성, <소녀>,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94*59cm
이인성, <소녀 (빨간 옷을 입은 소녀)>,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44.7*26.5cm.
이인성, <빨간 코트의 소녀 (책 읽는 소녀)>,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40.9*31.5cm
이인성, <단발머리 소녀>, 1949, 나무판에 유채
반면, 자화상에서
이인성은 눈이 아예 없거나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는 왜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을
그린 것일까요.
이인성, <파란 배경의 자화상>, 1940년대, 나무판에 유채, 33*24cm
이 시기 이인성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죠.
그런 고통과 슬픔이 눈을 감아버린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이인성, <여인의 초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25.2*21cm
1930년대 중반 일본 유학 시절 그린
인물화와 비교해서 보시면
밝음과 어두움 톤의 차이가 극명하게
눈에 보일 거예요.
왼쪽: 이인성의 <노란 옷 입은 여인 (모자 쓴 여인)>, 1934 /
오른쪽: 이인성의 <여인의 초상>, 1940년대
이인성, <애향>, 1943, 유화, 45.5*37.5cm
이인성,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146cm.
아내와 아들을 잃고 극한의 슬픔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해당화>이기도 해요.
이인성, <자화상 (붉은 배경의 자화상)> 1940년대, 나무에 유채, 18*10.5cm
이인성, <자화상 (모자를 쓴 자화상)>, 1950, 나무판에 유채, 26.5*21.8cm. ©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 <자화상>, 1950
이인성, <첨성대>, 1934, 종이에 담채
이인성, <무제>, 1940년대, 수묵담채, 26*33cm
이인성, <피리 부는 소년>
이인성, <미인춘몽>, 1940년대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이인성, <유하여인>, 1940년대 후반, 금지에 수묵담채
이인성, <계산동성당>, 1930년대, 종이에 수채화, 35.5*45cm.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주요 화가들의
1930년대 작품들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서양화 화풍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인성은 그런 영향에서
자유로운 그만의 '한국적 서양화'를 20대에
그것도 독학으로! 완성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계산동성당>이거든요.
인상주의의 영향이 느껴지는 수채화임에도
색감에서부터 파스텔과 수묵의 느낌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눈에 띄지요.
왼쪽: 이인성, <성탑>, 1937년 이후, 37.5*29.5cm / 오른쪽: 실제 대구 계산동 성당 모습
이인성, <겨울 풍경>, 1940
토지사랑 http://cafe.daum.net/tozisarang/
토지투자동호회밴드
(카페회원님들은 같이이용하시면됩니다)
추천부탁드립니다 .
|
출처: 토지사랑모임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