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6
9월17일[연중 제24주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sbPOdjp9rY?si=P12dnPa9WVPJosKh
(서울대교구 이형전 루카 신부님)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만 뜨면 용서하십시오!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평생에 걸쳐 매일 매순간 밥먹듯이 되풀이해야하는 매일의 과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우리 모두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덮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란 개념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잘못한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넘어섭니다.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을 포함한 하느님의 거룩한 구원 활동이 곧 용서입니다.
2007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몰고왔던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습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모든 것을 잃고 난후,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신애에게 업친데 덮친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처이던 아들이 유괴·살해된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 앞에 주저앉아 있던 신애는 오로지 신앙에 매달리며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러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해주러 간 것입니다.
면회실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태도에 또 한번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백번천번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란 말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은 세상 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제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신선같은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신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습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 받았데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또 다시 그를 용서하냐구요?”
곰곰히 따지고 보니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서에는 식별과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원인을 곰곰히 분석해보니 50:50 쌍방과실이라면, 용서하는 게 맞습니다. 50:50까지 아니어도, 상대방이 70, 내가 30 정도 된다 할지라도, 억울하겠지만 큰 마음 먹고 용서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1:100 같은 경우도 만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필요한 것이 용서 이전에 정당한 과정이요 절차입니다. 때로 징계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뒤따라야겠지요.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씻을수 없는 깊은 상처와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준 인간 말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사악한 존재들, 피해자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해맑은 얼굴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섣불리 용서했다가는 나중에 두고두고 홧병을 앓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인생이나 가족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죄자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일제군국주의자들, 친일파들, 자기 한목숨 건지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사익을 위해 선량한 백성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부 독재자들은 그냥 용서하면 안 됩니다. 합당한 처벌과 배상, 진정성 있는 사과가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물론 무조건적 용서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일흔 일곱 번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만 뜨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밥 먹듯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인간의 힘으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하느님께 맡겨드려야겠지요.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GrfH4g9ZoU
++++++++++++++++++
9.17.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순교는 일상에서의 끊임없는 부활 체험의 결과>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순교는 순종의 피로써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신앙 행위입니다. 따라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순교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을까요? 바로 더 확고한 ‘부활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희망 없는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당신 죽음을 말씀하실 때 반드시 부활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열매를 위해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의 확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겸 타자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는 땅에 버려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여 경기 중에도 잠깐씩 쓰레기를 줍습니다.
‘나’는 더 가지려 하고 더 평하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합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줍는 일은 그러한 소유욕-육욕-지배욕과 반대의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가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순교입니다. 이렇게 작은 순교를 하는 것은 그가 반드시 그렇게 해서 운이 온다는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너무나 큰 모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그런 모험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니라는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였다가 억만장자가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쓰고 강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된 계기는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한 일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유하게 자라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공허함은 마약으로 채우려 하였고 정신과 몸이 피폐해졌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기고 재활 센터에 들어가 한 달을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을 하지 않고도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는 것에 자기도 놀랍니다. 더 놀란 것은 마지막 날 그에게 “당신은 절대로 마약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인격적인 모욕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카돈은 집에 돌아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보겠다며 앞으로 가족을 돈 걱정시키지 않게 하겠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심이 집착이 되었고 그 집착이 그를 이전의 삶으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대한 집착이 결국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힘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집착을 하도록 살과 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자존감으로 이 세상에서 이미 부활, 곧 천국을 체험해야 하고 그 체험들이 쌓여 나중에는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당시 가장 낮은 계급인 백정 출신입니다. 그러던 그가 당대 위대한 가문의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게 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개다”라고 기뻐하였습니다. 작은 순교를 통해 천국의 부활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모진 고문을 이겨내게 하였고 순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에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하면서 의연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박해를 피해 도망치다가 신자들을 버릴 수 없어 되돌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사제로 부활하게 되었는데 자신도 신자들을 부활의 믿음을 심어줄 필요를 느겼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삼구(三仇)와 끝까지 싸우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는 두 분 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곧 부활로 이어짐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나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이것들이 쌓여 결국 기쁨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싶은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35: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대목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와 용서에 대해 강조한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예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로 가르치신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것은 집회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2-4) 이미 신약의 정신이 나타난다.
오늘 복음에서의 형제의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자.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1-22절) 이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의 역할이 조심스럽게 고려되고 있다. 베드로는 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맡은 책임이나, 그가 차지한 위치 때문에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이어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는 것보다는 순수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준다(35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한히 용서하시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비유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왕에게 큰 빚을 진 종이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은 관대하게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있다.(23-27절) 그 종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한 탈렌트는 금으로 따지면 42kg(11,200돈)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일만 달란트이다. 어떻든 그 딱한 종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을 탕감해 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주었다.”(27절)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며,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9,36; 14,14; 15,32; 20,34 참조) 즉 왕의 관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두 번째 행위는 우울하다. 그 종은 주인과 같은 자비를 가진 것이 아니라, 편협한 마음이다. 그 종은 왕에게서 물러 나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서 왕의 태도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 동료를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30절) 감옥에 처넣는다. 이 경우에는 그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거나 연기해주는 일이 앞의 경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 간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액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행위가 극적이다. 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일러바치고, 주인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무자비한 종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32-34절)고 한다. 이 태도는 가엾게 여기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은 정의의 규범을 초월하는 사랑의 법을 세워주었는데, 그 무자비한 종은 율법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 다시 나눔으로써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종은 무상으로 받은 선물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제 우리가 형제들 상호간에 어떻게 형제애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22절)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이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받고 또 서로 간에 용서를 나눌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제외하는 죄가 바로 이 죄이다. 그러므로 화해의 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에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일본과 한국을 이야기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부산에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가까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국가입니다. 일본의 해적들이 우리의 바다로 와서 약탈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전국을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약탈당하였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도공들이 끌려갔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많은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은 본국으로 철수 하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룩했던 제국주의 일본은 1910년에 대한제국을 합병하였습니다. 우리는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만주와 간도로 떠나야 했고,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으면서 패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관계입니다. 한쪽은 끊임없이 침략을 하였고, 한쪽은 그 침략을 막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배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음에도 일본과 한국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산주의에 맞서서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ㅖㅖㅔ국제관계는 개인과의 관계와 다르기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8월 24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발생하는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30년은 방출해야 하고, 100년이 넘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는 것은 비용의 문제라고 합니다.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오염수라면 자국에서 공업용수로 사용해도 될 것이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은 역시 비용의 문제라고 합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과 같은 바다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은 일본의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안전하다면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한국의 주교회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하였습니다. 바다는 어느 한 나라의 바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은 문제 해결의 본질은 아닙니다. 수산물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문제 해결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와 인간이 서로 공존하려는 자세입니다. 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바다에 오염수를 방출한다면 바다는 오염된 물을 우리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방관, 외면, 묵인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겨주셨던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공정과 정의를 외면한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회개와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의 전제는 치유 받고자 하는 간절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 없이 ‘나는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돌아온 아들과 자캐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워하겠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고, 잔치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공정과 정의에 따른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는 결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순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1) 순교는 목숨으로 하는 증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라는 믿음이,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믿음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하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사람들 앞에서’는 ‘박해자들 앞에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다.”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온 삶과 목숨으로 증언하다.”입니다. <‘말’로 하는 증언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과 ‘삶’이 일치되어 있을 때에만 ‘말로’ 하는 증언이 유효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말로만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거짓 증언’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과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순교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행하는 일, 그것이 순교입니다.
3) 순교는 봉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가난한 과부를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전부 다 봉헌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곧 ‘봉헌 정신’이고, ‘순교 정신’입니다. <그 과부는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했을 것이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가진 것을 다 봉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과 믿음이 ‘순교 정신’의 바탕입니다.>
4) 순교는 희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 21,6ㄹ-7) 순교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린 분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희망하는’ 생활입니다. 희망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고, 순교도 없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희망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에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버리면서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순교는 승리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죽음만 보고, 그것을 패배라고, 또 허망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켰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힘에 굴복해서 신앙을 버리고 육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패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패배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승리자로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이고, “자신을 버리고”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이고, “제 십자가를 지고”는 “신앙생활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감내하고”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날마다’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기억도, ‘앞으로’ 하겠다는 다짐도, 지금 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지금’ 하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해야 하고,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내가 가르친 대로 영원한 것만 추구하면서 허무한 것들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이고,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다.”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즉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나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이고,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웃을 용서하는 일이 주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전제로 선언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이처럼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여야 할 당위성을 주님께 우리 죄를 용서받으려는 데에서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자칫하면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선행으로 얻게 되는 보상이나 대가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오늘 복음의 비유는 오히려 우리가 용서받은 사실이 먼저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만 탈렌트를 임금에게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 탈렌트도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육천 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인데, 무려 그 만 배에 해당하는 빚을 졌다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임금이 그 큰돈을 왜 빌려주었는지, 종은 그 돈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지, 비유는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전하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놀라운 사실 하나를 간결하게 말할 뿐입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전에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또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일일이 캐묻지 않으시고 그냥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용서는 어떠한 전제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분의 자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용서를 받은 뒤에 보이는 태도입니다.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하여 줄지, 아니면 그 빚을 갚으라고 성을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둘지 말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용서받은 체험과 그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입은 사람의 행동에 따라, 베푸신 자비를 다시 거두어들이실 수도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
(대축일 - 경축 이동)
오늘 우리는 103위 순교 성인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의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들을 기리는 대축일을 지냅니다. 많은 분이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탄생’을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을 앞둔 순교자들이 보여 준 기개와 의연한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때를 오히려 영광과 축복의 시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김대건 신부님의 참수 장면에서, 망나니들이 칼춤을 추는 가운데 천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하늘 나라의 행복을 노래하던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연하여 보였습니다. ‘도대체 그런 용기와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진정한 ‘목숨’, 곧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현세의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전자의 목숨이 후자의 것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이 영원한 목숨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얻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평온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을 겪으면서도 평화를 누리고,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의인들처럼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제1독서)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에 대하여, 우리가 얻게 될 구원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하였듯이, 확신에 찬 신앙인은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신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제2독서)
====================
[춘천교구 신정호 모세 신부님]
대축일 - 경축 이동
<‘좋은 머리’ 보다는 ‘따뜻한 마음’>
103위 성인 중 김아기 아가타는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외교인에게 출가하여 미신을 숭상했습니다. 다행히 언니가 먼저 천주교 교우가 되어 그녀를 신앙으로 인도했지만, 김아기는 머리가 둔하였던 탓에 12가지 주요 기도문인 『십이단』 (十二端)을 외우지 못해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뜨거운 열성으로 열심히 교리를 배웠고, 그러던 중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김업이 막달레나, 한아기 바르바라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김아기는 문초를 당할 때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고,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에게 “차라리 죽을지언정 예수, 마리아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며 확고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던 김아기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결국 감옥으로 이송됐습니다.
이때 먼저 수감되어 있던 다른 천주교 교우들이 김아기를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오셨네!”라고 하면서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김아기는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중요한 교리를 배운 후 대세를 받아 아가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839년 5월 24일에 53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체포되었던 김업이 막달레나, 한아기 바르바라와 함께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녀의 삶을 묵상할 때면 우리 신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간혹 우리는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깊은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오직 예수, 마리아’만 알던 김아기 아가타가 성인이 된 것을 보면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전국 교회사 연구자들의 모임에 갔을 때, 한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머리보다는 따뜻한 마음과 부지런함” 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머리가 아닌 따뜻한 마음과 성실함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따뜻한 마음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성실함은 그 사랑과 믿음을 삶으로 사는 것이지요.
순교자들은 목숨으로 주님을 증거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깊은 신앙과 따뜻한 마음, 그리고 성실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에 묵상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모습은 그분들의 삶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이달에 우리의 시선을 순교자들의 죽음이 아닌 삶으로 옮겨, 그 거룩한 마음을 배우고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대전교구 이화상 요한보스코 신부님]
대축일 - 경축 이동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기에, 103위의 순교 성인들만을 기억하는 날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103위의 순교 성인들만 계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무수히 많은 순교 성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셨던 것처럼, 주님만을 따르고자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진 그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더욱이 순교 성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을 각오하면서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었기"(로마 8, 38-39 참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이 땅에 순교의 열정이, 순교의 꽃이 만발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어떠한 시련과 역경에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뿌리는 전혀 얕지 않고, 오히려 깊고 넓게 퍼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서 있는 것이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굳건하게 서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의 선조들이 주님의 말씀을 당당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희망을 안고 기쁘게 받아들였듯이,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있어서 주춧돌이 되며 지침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시련, 역경, 환난, 위험 등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 찬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영광의 상징이며,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사다리이며, 다른 누군가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순교 성인들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금 굳건하게 서 있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순교 성인들처럼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사랑에 인색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고 삶의 자리는 기쁨으로, 행복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한 주간 희망차게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은 용서를 받고 살았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없이 용서하라’,‘언제나’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결코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당신 오른편에 매달린 죄수에게“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침표를 찍어주신 것에 물음표를 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1독서의 말씀에 머물러 봅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 28,6-7).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우리가 관속에 들어갈 때 증오심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가서야 되겠습니까? 원한을 버려야 합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워하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 4.2%가 홧병(분노증후군)에 걸려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속상한 일이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만큼 나만 손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한 노동자가 이십만 년을 일하고 받을 수 있는 품삯)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는 항상 자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한 노동자가 백 일 동안 일하고 받을 수 있는 품삯)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자비로운 사랑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모두 합쳐도 ‘백 데나리온’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탕감받은 용서의 빚은 ‘만 탈렌트’나 됩니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맺힌 한을 푸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를 넘어 화해에 이르기 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성가신 파리가 왔다가 돌아가고 또 돌아오듯 자꾸 돌아오고 되살아 나는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그대를 성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구엔 반 투안 추기경).“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냥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요? 분명히 잘못되었고 또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특정한 윤리적 행위를 분석하고 그 행위가 객관적인 윤리 규범과 부합하는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관한 판단은 멈추고, 그 사람의 행위에 관한 판단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 또는 저런 행위는 죄가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사람 자체에 관한 판단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지 사람을 판단할 권한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함께해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세우면서 행위가 아닌 사람 자체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도 늘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끝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인에게도 언제가 공동체의 문을 열어 두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으며 지적합니다.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의 6,000일 일당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15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아야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만 배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빚을 임금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울까요? 하지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과장된 금액인 만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용서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본받지 않는 매정한 종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에 관한 판단 자체를 멈추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경축 이동)
<목숨>
루카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목숨>
숨만 남은
목숨을
이어가려고
얼이 깃든
목숨을
버릴 수 있나
숨보다 먼저
얼을 주신
님 앞서가시니
숨은 잃어도
얼은 살려
님 따르리라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용서하지 않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지난주 교정의 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이번 주는 용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웃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이지만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이번 주 가르침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웃을 용서하면 하느님도 나를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 인간의 용서를 굳이 하느님 용서와 연결하시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심리학에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용서와 상관없이 용서하라고,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제거하지 않고 암 덩어리를 가진 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앙심과 복수심이라는 암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또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를 찌르기에 앞서 자기를 찌를 것이고, 그를 한 번 찌르기 위해 어쩌면 자기를 수천 번, 수만 번 먼저 찌를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린 사랑 없이 또 하느님 없이도 이기적인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복을 위해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행복을 위해 그를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앞서 봤듯이 우리 용서를 하느님 용서와 연결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답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듯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 하지 않고
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치셨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의 날카로운 지적이 맞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용서도 배우고 용서할 힘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주인이 먼저 종을 용서하는 비유를 드십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보다 조금 빚진 다른 종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노하여 줬던 용서를 회수하고 벌을 내린다는 비유를 드십니다.
같은 용서의 문으로 하느님 용서가 우리에게 들어오고 우리의 용서가 나갑니다. 같은 용서의 됫박으로 하느님 용서를 우리가 받고 우리가 이웃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관된 가르침으로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복수하는 대로 복수 받고 용서하는 대로 용서 받는다는 말씀인데 이것은 오늘 독서 집회서도 하는 말입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려고 문을 열 때 그 용서가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한 용서의 문을 열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한 하느님 용서도 들어올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장한 순교자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9,23-26)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103위 순교성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분들입니다.
103위 순교성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린 사람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바보같은 삶'을 사셨을까?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그 '역설의 삶'을 사셨을까?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희망'인 바로 그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1-3)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5.37)
우리도 장한 순교자들이 됩시다!
제대로 믿고, 제대로 희망하고, 제대로 사랑하는 장한 순교자들, 내가 더 낮아지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장한 순교자들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dOt46I0P00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사람의 아들을
닮은
사람들이
여기 이곳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여기 이곳에서
목숨을 바치는
순교로
신앙의
빛을 밝힌
이들이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우선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은
생명의
참된 혁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쾌락주의와
이기주의를
내려놓습니다.
믿음 안에
생활이 있고
순교가
있습니다.
믿음의 소중한
첫걸음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의 실천적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노력이
바로
이 시대의
참된 순교입니다.
우리 시대를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의 중심과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목숨을 거는
정성이 삶을
바꿉니다.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이
정성어린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다 주는 것이
오늘의 참된
순교입니다.
순교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역할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여기 이곳은
순교의
무한한 실천의
장(場)이
펼쳐지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진리는 우리
신앙인들의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으로
가장 아름다운
진리로 세워집니다.
순교는
가장 강력한
실천의 힘이며
가장 강력한
신앙고백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순교를 선택한
이 땅의 순교자들은
간절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모든 것을 바치신
순교자들과 함께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