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대의 카톨릭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북유럽 등 유럽의 많은 영토가 카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렇더라도 트렌드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를 재정비 함으로 교회를 지켜냈다는 승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포교를 통해(예수회) 신대륙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르네상스 때의 교황은 세속의 권력욕에 사로잡혔으나, 1600년 대에 이르면 권력욕을 접고, 교회가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옛 로마의 상속자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각등의 예술작품에서 카톨릭 교회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표적인 산물이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다.(바로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베드로 성당의 광장(1666)에 들어서면 교회의 영광이 한눈에 느껴진다. 이제는 로마가 미술 분야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예술가들이 로마로 몰려왔다.
(다른 지역의 미술가들이 로마로 유학을 많이 왔다.)
1.역사 – 국가의 탄생(복습입니다.)
** 국가의 등장
중세에서 근대로 바뀌면서 통치체제의 변화가 온 결과가 국가의 탄생이다.
중세는 지배자는 봉건영주이고, 근대는 지배자가 국가의 수장인 왕이다.
영주 —기사와 관계를 ‘복종과 충성’으로 맺어져 있다.
영토에 대한 독점적 지배가 아니고, 사회적 유대관계를 만들어서 지배함
독점적 명령권을 가진 지배(군사력)가 아니다.(영주-기사는 군신관계로)
왕 — 봉건영주 중의 제 1인자라는 개념을 가졌다.
권력의 중앙집권화, 대규모 군대 유지, 세금 부과로 영주권을 제압
군대는 중무장한 봉건 기병(중세)에서 화학 무기(화승총, 대포 등ㅇ)로
무장한 직업 군인으로 바뀐다.
*이 시기는 종교개혁으로 기독교 세력 간의 갈등이 폭발한다.
===> 이런 이유로 군사적 갈등이 폭발한다.
두 가지 유형의 국가가 등장한다.
1) 군주-군사 국가 — 강압적이고, 중앙집중적인 국가(프랑스, 스페인)
2) 재정-군사 국가 — 자본에 집중한다.(네델란드, 영국)
==> 국가간의 경쟁이 많아지면서, 권력의 중앙집권이 필요하다고 깨닫는다.
국가(정부)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회에 압력을 가한다.
*이 시대를 요약하면 국가간에는 전쟁이, 국내에서는 권력 독점을 원하는
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사회집단 간의 다툼이 많아진다.
국가별로 보면
1) 국가 간의 군사력 경쟁
수많은 국가가 군사력 경쟁에 뛰어들면서 국가 조직과 단체들은 군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군사력 혁명을 일으킨다.
2) 전쟁에서 승, 패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막강했던 부르고뉴가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소멸되었다.
3) 스페인의 칼 5세는 이태리를 지배한다.(베니스는 제외)
로마를 침입하여 쑥대밭으로 만들고, 로마인의 삶의 철학을 바꾼다.
4) 영국은 100년 전쟁에서 패비하고, 칼레마저 잃어버리고는
영국으로 철수하여 쭈구리고 살았다.
*엘리자베스 1세 때 기지게를 하면서 유럽의 주도국으로 부상한다.
이런 이유로 군사력 강화를 위한 혁명적인 작업을 한다.
1) 군대조직을 용병에서 상비군 체제로 바꾼다.
2) 대포에 견디는 성채를 구축한다.(별 모양으로)
3) 군복을 통일(프랑스에서 처음), 보병 소총수는 화승총애 총검을 달고,
3열 종대로, 1, 2, 3열이 차례대로 발사한다.
4) 군대는 승리가 목적 — 상비군 수를 늘린다.
18세기의 프랑스는 65만까지
5) 기병이 사라지면서, 귀족은 더욱 더 왕에게 의존한다.
기병은 귀족을 지탱하는 힘이었으나. 상비군을 거느린 왕이 막강해졌다.
6) 군사력이 중요해지면서 군사력 유지를 위한 재정 정책을 편다.
새금 징수를 하는 전문 요원 양성, 군사 전문가도 양성-이들이 관료가 된다.
==> 결과적으로 재정-군사 국가로 나아간다.
*전문 관료 집단은 전통적인 엘리트 집단(귀족)과는 다르다.
귀족 계급도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적극 수용하면서(왕에 종속되어
굽신거리면서) 자신의 지위를 지켰다.
** 국가는 군사 유지에 필요한 세금을 많이 거둘수 있는 중상정첵을 편다.
30년 전쟁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전제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각국의 이해 관계가 교차하는 근대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17세기의 유럽인은 종교적 믿음에 푹 빠져서 종교전쟁에 쉽게 빨려들어갔다. 종교적 계파는 그들이 충성하는 제후나 왕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로마 카톨릭을 강요하면서 시작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이러한 정책은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하여 폰 팔츠 선제후를 그들의 황제로 선출했다. 이로서 유럽은 신-구교로 갈리어서 30년 간이나 잔혹한 전쟁을 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과 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과 남부 네덜란드 및 독일과 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과 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의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참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스웨덴이 전쟁에 참여하여 승승장구함으로 유럽의 강자에 편입하였다.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왕은 앙리 4세, 엘리자베스 1세, 스웨덴 제국 및 크리스티안 4세입니다.
스페인 제국이 쇠퇴를 거듭할 무렵, 유럽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해 스페인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성장 세력은 프랑스 왕국이었다.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 관여했고, 덴마크가 한때 강국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11월 2일 프라하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소식이 전해지자 이로써 3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스트필렌의 조약은 오늘의 유럽의 기초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