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중외 음악문화 교류 丝绸之路与中外音乐文化交流
출처: '신장예술' 저자: 周菁葆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실크로드 낙타 방울 유유히 중원에 사는 사람들은 실크로드와 거리가 멀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실크로드는 수년 동안 우리 삶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찍이 '후한서·오행지'에 '영제는 호복, 호장, 호상, 호좌, 호반, 호공후, 호적, 호무를 좋아하여 교토의 귀척들이 모두 경쟁하였습니다.
"한 영제 때 서역 문화가 우리 중원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호상은 중국인의 식사 및 습작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이전에는 낮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책상에서 책을 읽고, 호상이 있고, 다리를 걸고 높은 테이블에 앉고, 낮은 테이블에서 긴 테이블로 변신하여 식탁을 둘러싼 식사 도구를 위한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바닥에 앉는' 식사 방식이 사라지거나 쪼그리고 앉거나 서서 그릇을 들고 먹는 습관이 점차 사람들이 의자에 앉거나 테이블 위에 그릇을 놓고 먹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는' 식사 풍습이 되었습니다.
서역의 호복이 중원 고대 복식에 미치는 영향은 고대 두루마기와 저고리의 모양이 변하여 쫄쫄이 바지로 변하고 가죽 장화를 신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등 문화가 농경 문화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호식의 대표적인 것은 호떡이며 호떡이 중원에 들어가는 시기는 동한보다 늦지 않아야 합니다.
동한 시대에는 많은 종류의 '전'이 있었는데, 호떡은 현대 샤오빙과 비슷했으며 그 위에 참깨(아마)를 뿌렸습니다.
한 영제는 이런 종류의 과자를 가장 좋아했는데, 서진 사마표의 '속한서·오행지'에는 '영제는 호떡을 좋아하며, 경사는 모두 호떡을 먹습니다.
십육국 시대에 후조의 황제 스지룽에 의해 호떡이 '마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당나라 때 호떡 제조 기술이 더욱 전파되었는데, 백거이의 '호떡과 양만리'라는 시는 "호마떡은 교토를 모방하여 바삭바삭하고 기름진 향이 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양꼬치'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별미이기도 하며 서양식 바베큐 기술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또 다른 유형입니다.
녹주 실크로드 길을 통해 내륙으로 유입된 과일과 채소, 포도, 호두, 당근, 후추, 잠두, 물보리, 오이, 석류 등은 사람들의 일상 식단에 더 많은 선택을 추가했습니다.
서역 특산 와인은 역사적 발전을 거쳐 중국의 전통 와인 문화에 통합되었습니다.
대상은 주로 중국에서 철기, 금기, 은기, 거울 및 기타 고급 제품을 운송합니다.
중국으로 배송되는 것은 희귀 동물과 조류, 식물, 가죽 제품, 약재, 향신료, 보석류입니다.
중국과 서양의 왕래는 더욱 원활해졌고, 당시의 문화교류도 눈부시게 이루어졌습니다.
실크로드의 서역 상대가 녹주 실크로드를 통해 내륙으로 전래한 과일과 채소, 포도, 호두, 당근, 후추, 잠두, 파채, 오이, 석류 등은 사람들의 일상 식단에 더 많은 선택을 추가했습니다.
서역 특산 와인은 역사적 발전을 거쳐 중국의 전통 와인 문화에 통합되었습니다.
대상은 주로 중국에서 철기, 금기, 은기, 거울 및 기타 고급 제품을 운송합니다.
중국으로 배송되는 것은 희귀 동물과 조류, 식물, 가죽 제품, 약재, 향신료, 보석류입니다.
중국과 서양의 왕래는 더욱 원활해졌고, 당시의 문화교류도 눈부시게 이루어졌습니다.
명나라 이전에 중국에 도입된 대부분의 작물은 서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일부는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 또는 인도에서 유래했으며 대부분은 육상의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되었습니다.
참깨(참깨), 참외(오이), 마늘(마늘), 호두(호두), 고수(고수), 후추, 목화, 수박 등이 있습니다.당시 도입된 작물은 옥수수, 고구마, 감자, 카사바, 땅콩, 해바라기, 고추, 토마토, 파인애플 및 캐슈넛을 포함하여 거의 30종에 달했습니다.
바다 실크로드에서 들여온 '후추'는 중국인들이 고기를 구울 때 더 많은 선택을 하게 했고, '고추(고추)'는 또한 중국 전통 요리의 분열을 일으켜 후난 요리, 쓰촨 요리 등 매운 맛을 내는 새로운 요리가 탄생했습니다.
그 중 호수는 야채일 뿐만 아니라 좋은 조미료이기도 합니다.
당시 문화교류도 눈부신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서양의 진귀한 짐승, 보석, 향신료, 유리그릇, 금은화가 잇달아 전해지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옷차림, 음식 등 생활방식, 음악, 무용 등 문화오락활동이 끊임없이 중원에 유입되고 있으며 불교가 더욱 성행하고 있는 동시에 종교 마니교 경교 및 신흥 이슬람교가 중국 본토에 잇따라 유입되어 당나라의 양경 장안과 낙양 및 실크로드의 일부 대도시인 량저우와 같이 다양한 정도로 국제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래 문화를 흡수하는 동시에 당나라의 강력한 정치 세력의 도움으로 중원 문명도 서양에 유입되어 서구 국가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나라 서역악무의 수입은 위진남북조부터 수당까지 '칠부악', '구부악', '십부악' 등을 만들어냈으며, 그 중 칠부악무는 서역에서 왔습니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원진(元稹)은 '법곡'에서 여자는 호부에게 호복을 배우고, 술수는 호음무다락하며, '화봉'은 낮고 목이 메고, '춘앵전'은 소소합니다.
실크로드 악무는 한당악무, 나아가 중국음악무용사에도 긍정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 실크로드 이름의 유래인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 학자 리히호펜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습니다.리히호펜은 프로이센의 지리학과 지질학자입니다.
유라시아 오지를 7차례 여행하며 답사했고, 1860년에는 독일 경제대표단과 함께 중국을 포함한 극동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귀국 후 리히호펜은 5권의 대작 '중국친정여행기'를 완성하여 1877~1912년에 잇달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리히호펜은 중앙아시아의 지리를 동서문명의 교류와 연결시켜 중국과 하노이, 중국과 인도 사이의 실크 교역을 매개로 한 이 서역의 교통로를 실크로드라고 부릅니다.
이제 '실크로드'라고 하면 주로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세 가지 교통로를 말합니다.초원 실크로드, 오아시스 실크로드, 해상 실크로드입니다.
고대 실크 루트 맵
(1) 초원 실크로드라는 좁고 긴 초원 지대는 동쪽에서 몽골 고원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남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북부를 거쳐 흑해 북안의 남러시아 초원으로 들어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직행합니다.이 천연 초원 통로는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남동쪽으로 중국의 중원 지역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현재 학계에서 말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주선으로 하는 동서 방향의 고대 통로를 말합니다.
(2) 오아시스 실크로드 실크로드라는 이름도 이 간선에서 따온 것입니다.이 노선은 중국 창안을 출발해 허시 회랑을 거쳐 신장(新新疆)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어지는 코스.중국의 역사 문헌에는 '서역'이라는 지리적 개념이 있습니다.소위 '서역'은 중원에 비해 당나라 중국 서부의 영토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입니다.당나라는 한나라의 서쪽 국경보다 흑해안까지 더 멀었습니다.따라서 중국 역사의 서역은 오늘날 신장과 중앙아시아의 일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3) 해상 실크로드라 함은 취안저우항을 출발하여 광저우, 하이난,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를 거쳐 해상을 따라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명나라 초 정화칠이 서양으로 내려간 전무후무한 행사를 성대한 행사로 치렀습니다.시 주석이 제시한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
2. 실크로드 개척 역사책에 실크로드 시작은 장건이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한무제가 서역을 파견한 직접적인 목적은 흉노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흉노는 오랫동안 중원 왕조의 주요 변고였습니다.한 무제는 하서회랑 일대에 살던 대월씨가 흉노에서 쫓겨났고 흉노가 대월씨의 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월씨 사람들은 늘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나라 무제는 대월씨를 사절로 보내어 대월씨와 한나라가 연합하여 흉노에 맞서도록 설득하기로 했습니다.전한 무제 건원 3년(전 138), 장건은 안내자와 수행원 등 100여 명을 데리고 장안을 출발하여 대월씨로 출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대월씨가 흉노에서 쫓겨났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들이 어디로 옮겨갔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출사 도중 흉노가 다스리는 지역을 지나야 하는 위험도 가득했습니다.장건 일행은 농서를 지나다 흉노에 구금되어 11년 동안 흉노에 머물렀습니다.
그 후 그는 수행원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탈출하여 양파령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했고 수십 일 간의 긴 여행 끝에 지금의 중앙아시아 페르가나에 있는 다완에 도착했습니다.
대완왕은 중국이 매우 부유하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사절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장건 일행을 극진히 대접한 뒤 안내자를 보내 장건 등과 함께 대월씨(大月氏)로 가기도 했습니다.
캉쥐는 당시 중앙아시아 북부의 강대국이었고 중국과 서양의 교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돈황 벽화에 나오는 장건의 출사 서역도 장건은 기원전 129년 대월씨(大月氏)에 도착하여 그들과 연합하여 흉노를 협공하려 하였는데, 이때 대월씨는 이미 새로운 왕을 세워 대하를 병합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월씨왕은 장건의 한연맹과 흉노를 함께 파멸시키자는 제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건은 일 년 남짓 머무르다가 보람 없이 돌아왔습니다.한 무제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장건은 남산(알금산)을 거쳐 강중(칭하이)을 거쳐 귀국했다가 중도에 흉노에 억류됐습니다.1년 후, 흉노의 내란이 일어나자, 장건은 기회를 틈타 탈출하여 원삭 3년(전 126)에 장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장건은 서사 13년 동안 아버지와 단둘이 수행하며 돌아왔습니다.장건의 '구멍 뚫기'는 동서 교통의 주요 간선인 '실크로드'의 본격적인 개방을 의미합니다. 후한 원수 4년(전 119), 즉 장건이 첫 출사를 마치고 귀국한 지 7년 만에 무제는 다시 장건을 서역에 파견했습니다.
이번에 서역으로 가는 직접적인 목적은 오손에게 연락하여 흉노에 대항하는 것입니다.그는 300명 이상의 방 대사단을 이끌고 수만 명의 소와 양, 수천만의 금화와 비단 등을 거느리고 수십 일 간의 여정을 거쳐 오손도성의 적곡에 도착했습니다.
장건이 귀국할 때 오손 국왕은 수십 명의 사신을 장안으로 보냈습니다.오손 사신은 한나라의 영토가 넓고 경치가 번화한 것을 보고 귀국 후 왕에게 보고하여 오손은 한나라와 친해지려고 했습니다.
그 후 한사는 오손남경을 거쳐 대완, 대월씨 등으로 갔습니다.장건은 오손에 있을 때 부사를 대완, 강거, 대월씨, 대하씨, 안식, 신독 및 그 인접 국가에 보내 비단 등 귀중품을 가져갔습니다.
장건은 서역에서 귀국한 후 서역에 관한 많은 견문을 가지고 돌아와 중국인들이 처음으로 서역국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사기·대완열전》에 장건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중국 사서가 서역 각국에 대해 상세하고 포괄적이며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장건은 시찰보고서에서 서역 각국의 지리적 환경과 물산, 인구, 풍습, 군사 등의 상황을 소개하고, 당시의 국제관계, 특히 여러 나라와 한나라의 관계를 소개하고, 한무제에게 서역을 경영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둔황 벽화에 있는 '실크로드'는 서한이 공식적으로 개통한 이후 본토와 서역, 중국과 아시아, 일부 유럽 국가 간의 정치, 경제 및 문화 연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시일이 지나기도 하고 끊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실크로드는 지속, 발전, 완비되어 오늘날까지 동서양의 물질문화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실크로드학의 확립 중국 고대 전적에는 서역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으며 서역 문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주요 자원입니다.19세기에 시작된 실크로드 연구는 객관적으로 서양 탐험가의 서역 고고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 스타인(Sir Anrel Stein, 1862-1943) 영국의 탐험가, 고고학자, 작가.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4년 영국으로 귀화했습니다.
스타인은 드레스덴과 부다페스트에서 공부한 뒤 비엔나로 건너와 비지흐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인도·이란을 연구하겠다는 의지로 토빙겐대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를 다녔습니다.
1888년 라호르(현재 파키스탄 내) 동방학교의 교장으로 추천돼 인도로 건너왔습니다.
1899년 캘커타 마닐라 대학교의 총장을 맡았고 인도 서부를 여행했습니다.
1898년 그는 인도 정부에 중앙아시아 탐험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제1차 중앙아시아 탐험 1905년 인도 정부의 허가를 받아 5월 카슈미르의 수도 스리나가르를 출발해 파미르 고원을 거쳐 타림 분지의 가장 서쪽 카슈가르까지 내려온 스타인.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카슈가르에서 서역 남도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다 10월 허톈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쿤룬산으로 들어가 조사를 한 뒤 다시 허톈으로 돌아갔습니다.
12월 중순 화전을 출발해 북동쪽으로 96km 떨어진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단단우릭(고대의 서미국)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스타인은 단단우릭 사원 터에서 중원에서 화전왕과 결혼한 공주를 그린 그림판을 발굴했는데, 아마도 현장이 기록한 화전 양잠이 중원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발굴된 또 다른 화판에는 현장에 기록된 용녀의 전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밖에 단단우릭에서는 브라흐미 문자로 쓰인 와다어 문서가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후일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일부 차용 증서와 빚을 갚으라는 문서이며,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한문 문서에 따르면 서기 781-790년 토번이 타림 분지를 통치할 때의 유물이라고 합니다.
단단우릭 유적에서 동국공주 전사 목판화가 출토된 1901년 1월 초, 스타인은 단단우릭을 떠나 허톈으로 돌아와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크레아로 오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니야 고적을 듣고 즉시 갔습니다.니야 유적에는 원주민 집의 기둥들이 모래 속에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이곳에서 스타인은 佉 목간문서를 다수 발굴했습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조사하여 니야 유적에서 모두 728점의 소노문서를 발견하였는데, 이 문서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니야 유적은 서기 3세기 후반에 폐기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한문 사료에 따르면 니야 유적은 고대의 절묘함이며 당시 절묘함은 산산의 관할하에 있지 않았습니다.
니야 유적지에서는 그리스 양식의 인장도 출토되고 있습니다.5월 슈가르로 돌아온 스타인은 러시아령 페르가나의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최초의 중앙아시아 탐험 보고서를 '고대의 화전'으로 써서 1907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출판했습니다. 제2차 중앙아시아 탐험가 스탄인은 인도로 돌아와 1904년 인도 유적조사국에 가입해 재탐험을 준비합니다.
1906년 4월, 스타인은 다시 카슈미르를 출발하여 6월 8일 카슈가르에 도착했습니다.이곳에서 그들은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6월 23일 카슈가르를 출발하여 7월 말에 허톈에 도착했습니다.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쿤룬산에 들어가 탐사했습니다.
스타인 일행은 12월 중순 누란에서 발굴을 벌여 수많은 한문과 비노문서를 입수해 누란 유적을 추가로 밝혀냈습니다.기록에 따르면 누란의 폐기는 서기 3세기에서 4세기 사이입니다.
스타인 일행은 이곳에서 조강으로 돌아와 1907년 1월 말 밀라노 유적지에 도착했습니다.밀라노는 산산의 초기 왕도시였으며 스타인은 이곳에서 많은 티베트어 문서를 발견했는데, 이는 8세기 이후 타림 분지에 들어온 토번의 유물이며, 이 외에도 3세기 佉노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누란의 고성에 있는 세 칸짜리 집을 밀라노에서 발굴한 가장 큰 수확은 작은 사원의 잔존 벽화인데, 그 중 세 번째 사원에서 발굴한 날개 달린 천사가 가장 아름답고 그리스풍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밀라노 벽화 출토 밀라노 발굴을 마친 스타인 일행은 2월 하순 둔황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3월에 둔황에 도착했는데, 그가 둔황에 가보니 한 동굴에서 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5월 21일 다시 둔황으로 돌아와 문서를 발견한 왕도사를 만나 밀고를 열도록 설득했습니다.3제곱미터의 좁은 오두막집이었지만, 두루마리도 3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습니다.이 둔황 문서들은 스타인을 경탄하게 했습니다.
둔황 막고굴의 외경 그는 그중 일부를 런던으로 운반한 후 다시 간쑤성 각지로 여행을 갔습니다.
10월에 하미로 가서 투루판에서 톈산 남쪽 길을 건너 사르체로 돌아와 쿤룬산을 조사하고, 파미르를 건너 인도 열성으로 가서 1908년 11월에 스리나가르로 돌아옵니다.
스타인은 두 번째 탐험을 서역으로 써서 1921년에 출판했습니다. 제3차 중앙아시아 탐험 스타인은 1913년 6월 제3차 중앙아시아 탐험을 시작했는데, 그는 카슈가르에서 타림 분지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유적지를 조사하고 1914년 1월 밀라노에서 둔황으로 갔습니다.
이후 우루무치를 출발해 남하해 8월 투루판으로 건너가 하라와 탁을 조사한 뒤 버쯔크리크 유적지로 내려가 벽화를 채집했습니다.
1915년 1월 아스타나의 고창시대 묘지를 발굴한 결과 시신을 감싼 견직물 등 부장품이 다수 발견돼 고창 지역 동서문화 교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타인은 카슈가르로 가서 수집한 유물을 스리나가르로 옮기고, 자신은 다시 파미르를 건너 암강을 따라 사마르칸트에 도착하고, 이란의 시스탄까지 갔습니다.그곳을 조사한 후 스타인은 1916년 카슈미르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세 번째 탐험을 '아시아의 오지'로 써서 1928년에 출판했습니다.그 후, 원고를 수정하여 1933년에 '서역고고고기'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습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엇(1878-1945).1878년 5월 28일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스타니슬라프 학교를 졸업한 뒤 동양어학원과 정치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프랑스 탐험가 베르히와 중국에서 문헌 수집 1900년 2월 15일, 베르히와 그는 프랑스 극동 아카데미의 도서와 기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 의화단의 봉기를 만나 수집한 문헌을 주중 프랑스대사관 통역관 숙소에서 불에 태워버렸습니다.1901년 1월, 버시바우 대사는 사이공으로 돌아와 프랑스 극동대학에서 중국어 교수로 일했습니다.
2월에 다시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문헌 및 기타 참고 자료를 수집하고 6월에 하노이로 돌아갔습니다.이번에는 청동기, 도자기, 회화, 한문고서 외에도 티베트어, 몽골어 문헌도 다수 수집됐습니다.
이번에 수집한 유물 대부분은 1904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졌고, 이 중 회화 부분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이 문헌들 중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는 없는 '고금도서집성'과 '도장'(도교의 경전집)이 있습니다.
1902년 2월부터 11월까지 버시화는 세 번째로 중국에 가서 24,000권 이상의 문헌을 수집했습니다.1903년에 그는 또 순화(顺化)에서 많은 월문 문헌을 베꼈습니다.
중앙아시아 탐험 1905년 8월, 프랑스 금석미문학사원과 프랑스 중앙아시아탐험위원회는 하노이에서 귀국할 예정인 버시바우에게 중앙아시아 고고학 탐험을 의뢰했습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인도차이나에서 러시아로 출발할 예정. 러시아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일행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버시바우 대사는 1906년 6월 15일 지리학자 바얀과 박물관학자이자 사진술에 능통한 누에트 등과 함께 파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 오덴버그를 거쳐 타슈켄트에 도착해 두 달간 머물렀습니다.버시바우 대사와 일행은 그곳에서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았지만 당시 러시아 관리들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학자들을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버시가 러시아어를 잘해서 번잡한 교섭을 마친 덕분에 그동안 튀르크어를 공부했습니다.그들은 차를 타고 타슈켄트에서 페르가나의 동쪽 끝 안디잔까지 간 다음 파미르를 넘어 오쉬까지 가서 짐을 꾸리고 말을 타고 표고 4,000미터의 타르데 언덕을 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말을 타고 산을 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버시바우 일행은 8월말에 카스에 도착하여 러시아 영사의 집에서 손님을 받았습니다.
카슈끄지에서 쿠차까지가 버시 일행의 원래 계획이었으나, 크롬베델이 독일 탐험대를 이끌고 그곳에서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했고, 러시아의 베레조프스키도 그곳에서 조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버시와 일행은 조사를 위해 카스 근처로 이동했습니다. 돈황문서의 조사 이번 탐험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돈황 천불동의 석굴암 비보를 얻은 것이며, 그 발단은 디화(迪化)였습니다.디화 때 보희와 사귀던 많은 사람 중 한 명이 청나라 황제(덕종 광서제)의 사촌 동생이었는데, 보희와 일행은 그를 란 후작이라고 불렀습니다.
버시가 디화를 떠나려 하자, 란 후작은 그에게 사주 천불동에 관한 초본 한 권을 주었습니다.돈황 천불동 석굴에서 진귀한 유물을 발견한 도사의 이야기를 들은 버시화는 권본을 펼쳐보니 과연 8세기 전 돈황문서라는 책으로 사주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돈황석굴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11세기 중엽 이전 고문헌이 발견됐습니다.버시와 일행보다 몇 달 빠릅니다.스타인은 한 중국 도사의 도움으로 문서와 그림을 가져갔습니다.
천불동에는 둔황현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500여 개의 동굴이 있으며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수많은 벽화와 조각들이 있습니다.
1908년 2월 말 버시바우(伯希和)는 둔황(敦煌)에 도착했습니다.고문서가 쌓여 있는 석굴은 가로세로 2.5m, 세로 2.5m 크기로 수많은 문서를 포섭해 갔지만 1만5000권이 남아 있습니다.천불동에서 3월 3일부터 한 달간 석굴에서 문헌을 조사한 결과 약 5000권을 골라 왕도사와 매수 교섭을 벌였습니다.
결국 은화 500냥으로 이 문서들을 구입했습니다.버시바우(伯希)와 이 문서들을 모두 싸서 24개의 상자에 넣었습니다.그는 조심스럽게 비밀 수송을 했고, 그중 한 상자만 베이징으로 가져와서 학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돈황석굴 속 고문서 조사는 버시와 3월 26일 하노이의 프랑스 극동아카데미 세나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나중에 Burshi와 1909년, Burshi는 '간쑤에서 발견된 중세의 문고'라는 28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학회지에 발표했습니다.보히와 일행은 5월 수확이 많은 둔황을 떠나 량저우, 시안을 거쳐 정저우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돈황문서』 중 일부를 중국 학자들에게 공개하고 12월 12일 하노이로 돌아갔습니다.이듬해인 1909년 5월 베이징에 가서 4개월간 머물다가 10월 24일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유익 천사 벽화
돈황 장경동의 목간은 청나라 정부가 발견해 1910년 석굴 속에 남아 있던 고문헌들을 모두 베이징으로 옮겼습니다.왕도사는 사형당했다고 합니다
.AAA는 서역에서 많은 한문 문헌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수수께끼, 회골문, 티베트어 등의 문서를 가져갔습니다.
1910년 1월 파리 국립도서관이 이 유물들을 받았을 때,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모리스푸는 1부는 약 3000권 분량의 선으로 된 고사본, 2부는 약 3만 권의 중국어 서적을 보고했습니다.
이 밖에 바얀과 누엣이 가져온 사진, 수집한 800종의 식물 표본, 200종의 조류(박제), 많은 포유류(박제), 곤충류, 두개골과 인체측정표 등이 있습니다.
버시바우 대사는 1909년 10월 프랑스 금석미문학사원의 회원으로 선출됐습니다.
1911년 아카데미는 그를 위해 '중앙아시아 언어, 역사 및 고고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해 프랑스의 실크로드 연구를 개척했습니다.
3. 크롬베델(Albert Grunwedel, 1856-1935) 독일의 고고학자, 미술사가.1902년 그는 제13회 국제동양학회에서 중앙아시아 극동의 역사 고고학 언어 민속 연구를 위한 국제학회 설립을 제안했습니다.그의 첫 사업으로 독일에서 중앙아시아로 탐험대를 파견한 크롬베델이 직접 인원을 선발해 이끌면서 독일 투루판 탐험대라는 정식 명칭이 붙었습니다.
독일의 탐험가 글렌베델은 영국의 스타인이 타림분지 남부에서 발굴조사한 결과에 자극받아 그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타림분지 북부의 톈산 남쪽 기슭 지역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크롬베델은 독일 네 차례의 중앙아시아 탐험의 선구자로 이번 탐험대를 대장으로 불교학자 빅토르 프톨레마이오스, 박물관 기사 바르도스.그들은 1902년 11월부터 1903년 5월까지 투루판 분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많은 고문서와 미술품을 발굴했습니다.
이런 성과로 독일은 르꼬끄를 두 번째 탐험에 파견하고 크롬베델에 이어 다시 중앙아시아로 갑니다.두 사람은 현지에서 만나 세 번째 탐험대로 재편성했습니다.
1905년 12월부터 쿠처, 옌치, 투루판, 하미 지역을 조사했습니다.이 조사는 쿠커 근처의 키질 천불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결과를 얻었습니다.
크롬베델은 이번 조사를 총괄 지휘했으며 벽화를 직접 모사하고 자신의 저서를 컬러 모사로 장식했으며 상세한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탐험대의 조사와 유적 확인은 기본적으로 크롬베델이 판단합니다.
세 번째 탐험은 1907년 4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한 지역에서 장기간 집중된 조사는 독일의 학풍을 반영합니다.
크롬베델은 독일로 돌아온 직후인 1912년 '그리스, 튀르크슈타인의 고대 불교 사당', 1920년 '고대 쿠차'를 발표했습니다.1923년 고향 바이누(서독 남부의 한 주)의 나이굴리스로 은퇴해 중앙아시아 불교 도상학을 집대성한 저서를 집필하다 1935년 현지에서 사망했습니다.
4. 르 쾨(Albert Von Le Coq, 1860~1930) 독일의 동양 학자는 186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그의 가정은 조부 때부터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신장을 탐험하던 중 할아버지가 취급하던 물건을 발견했고, 20세기에는 가업 때문에 런던 리버풀 등에서 지냈습니다.1900년 월급이 없는 베를린 민속박물관의 직원으로 동양 언어 연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아랍 페르시아 튀르크 등의 언어와 고고학을 병행했습니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크롬베델은 최초의 '독일 투루판 탐험대'를 이끌고 중앙아시아에서 많은 발굴품을 가져왔고,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로 쓰여진 마니교 문헌 때문에 르콕은 제2차 중앙아시아 탐험에 참여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독일 탐험가 르케코는 1904년 11월부터 1905년 10월까지 투루판, 하미 지방의 고대 유적지를 발굴 조사했고 12월에는 카슈에서 크롬베델이 이끄는 독일 제3차 탐험대와 통합해 다시 동쪽으로 쿠처, 옌치, 투루판, 하미까지 조사했습니다.
르꼬끄는 1905년 12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이어진 탐험에서 1906년 6월 크롬베델과 헤어져 카라코람 산을 한발 먼저 넘어 인도를 거쳐 베를린으로 돌아갔습니다
쿠처커쯔르 천불동 8굴 중 열반튀르콕은 1913년 1월부터 1914년 2월 말까지 독일의 제4차 중앙아시아 탐험대의 지휘자가 되어 주로 쿠처무토라 천불동을 조사했습니다.
이번 발굴품은 제1차 세계대전 전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무사히 독일로 옮겨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그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영국의 스타인이 타림 분지의 남쪽 가장자리를 조사 중심지로 삼은 데 비해 르꼬끄가 세 번이나 참가한 독일 탐험대는 타림 분지의 북쪽 가장자리.그는 덜 파괴된 톈산 동부의 고대 유적지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1930년 4월 민속박물관 동방부 부장으로 별세할 때까지.그가 베를린으로 가져간 벽화의 절반 가까이가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이 밖에 러시아의 프르제발스키, 코즐로프, 바르톨리드, 오덴부르크, 일본의 지로, 히야쓰요, 오타니 탐험대, 스웨덴의 스벤헤딘, 미국의 라트모어 그리고 독일의 리히호펜 등이 있습니다.
그들의 탐험과 연구는 객관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실크로드 붐을 주도했습니다.유네스코는 1990년 각국의 학자들을 조직하여 실크로드 10년 시찰을 실시하여 국제 실크로드학 연구를 추진했습니다.
역사학, 지리학, 고고학, 종교학, 언어학, 인류학, 문헌학, 미술학 및 기타 분야에서 심도 있는 연구가 수행된 반면 음악학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습니다.
4.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외국의 음악교류 실크로드 음악교류는 과거 중국 음악계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으며 연구는 문헌 연구에 중점을 두었고 고대인들은 실크로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선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서역 지역의 음악 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비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실크로드 음악을 연구하고 해외 자료를 이해하지 못하면 국내 음악 문화 교류의 실제 상황을 깊이 연구할 수 없습니다.
중원 하남 용문석굴의 음악 그래픽으로 시작해보자면, 용문석굴에는 현재 21개의 음악동굴이 있다고 합니다.또 악기를 조각한 경당이 하나, 불좌가 두 개 있습니다.
원래 롯데와 기악인은 233명, 현존하는 기악인은 176명입니다.현존하는 다양한 크기의 밴드 34팀, 총 17개의 악기가 있습니다.용문석굴에는 현재 알아볼 수 있는 악기가 무려 백76점이 있습니다.용문석굴의 음악이란 사실은 악기와 악기의 그래픽입니다.
용문석굴의 중국 고유악기로는 생황, 소, 쟁, 경, 판 등이 있습니다.모든 단음자 악기는 중국 고유의 악기이고, 모든 이중음자 악기는 기본적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전래된 악기이며, 배소 열외입니다.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외국의 음악교류를 연구하여 두 악기로 설명하겠습니다.
(1) 공후라는 악기는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고대 실크로드에서 최초로 사용된 악기입니다.유럽에서 현재 사용하는 하프는 고대 공후에서 변천한 것입니다.공후는 용문석굴 중 공의석굴사 제3굴 서벽에 있습니다.또 하나는 용문 만불동 벽화 중에 있습니다.
고창석굴벽화의 수레 篥 서기 9세기 메소포타미아의 공후는 한문헌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공후가 서역에서 중원으로 전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역이 굉장히 큰데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들어온 걸까요?궁형 공후는 기원전 4000년 이후에 두 강 유역에서 생산되었으며 각형 공후는 기원전 1900년경에 생산되었습니다.
고대 문구가 새겨진 진흙 판본에는 오래된 수공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 그래픽 문자의 기호에는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가 있으며 악기에 대한 설명에는 활 모양의 삼현공후가 포함됩니다.
수메르인의 공후는 현존하는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글자의 이미지에서 활 모양(공명 상자 포함)의 거문고 몸체를 알 수 있으며, 활 모양의 목과 공명 상자 사이에 세 개의 현이 연결되어 있으며 활 모양의 거문고에 속합니다.
이 상형문자는 기원전 3000년에 나타나는데, 공후는 이미 존재하고 소리를 낼 수 있어 연주할 수 있습니다.현재 학계에서는 우르 제1왕조 왕실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황금포금우수인 '공후(箜)'(7현)가 있습니다.
금우수공후가 발견된 우르 제1왕조 왕릉은 우르성 유적 중앙의 서북사원구 동남향사전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르성 유적은 서아시아의 수메르-아카드 왕조 시대의 유적으로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무카예르.기원전 3000년 중반, 우르는 번영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강력한 노예제 도시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자료로 볼 때 메소포타미아의 바오황소머리의 '공후'는 기원전 2500년의 유물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르 왕조의 리라, 기원전 2500년, 현재 소장 이라크 국립박물관
신장 자굴루크 1호 무덤의 공후 기원전 8세기 페르시아의 공후 메소포타미아 공후가 페르시아에 전해진 가장 이른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입니다.수공후는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져 꽤 오랫동안 전해져 왔으며, 특히 사산 왕조 때 절정에 달했습니다.
사산 왕조 이후에도 수공후는 여전히 두 강 유역에 옛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은잔의 조각품은 서기 8세기 사산 황궁의 연회 장면을 보여줍니다. 가로형 각형수공후와 각종 취관악기들은 모두 황궁에서 왕을 위한 연주진에 등장합니다.
적어도 서기 8세기경에는 가로 각형의 수공후가 여전히 서아시아 일대에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수공후는 독주뿐만 아니라 합주 형식으로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석굴 속의 조각들을 보면 당시 악대가 6대의 수공후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활 모양 공후는 5대, 뿔 모양 공후는 1대입니다.사산 왕조 시대에 수공후가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후가 서역에 전해진 현재 중국 신장 문물 고고학자들은 7개의 공후를 발굴했으며 그 중 말현 자홍루크 고분에서 가장 먼저 출토되었습니다.
7개의 공후 중 비교적 완전한 것은 4개로 모두 수공후와 같은 각형 공후입니다. 자굴루크 1호 묘지의 두 개의 공후는 세 개의 현이고, 양하이 고분은 다섯 개의 현입니다.양하이 고분 공후는 자굴루크 공후 연대를 넘지 않을 것이며 늦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비교적 원시적인 공후입니다.자굴루크공후 출토는 우리로 하여금 중국 신장에서 기원전 8세기 전후의 공후 실물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양해공후의 발견으로 대체적으로 신장에서 발견된 공후 원형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현 재료와 스피커의 장치 방식을 모두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피커에 있는 5개의 현 위치와 거문고 기둥에 있는 5개의 현의 흔적은 우리에게 중국에 처음 소개된 수공후가 3개의 현과 5개의 현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8세기입니다. 공후가 중원에 전해진 수공후가 중국에 전해진 시기와 관련하여 일찍이 '후한서·오행지'에 '영제는 호복, 호장, 호상, 호좌, 호반, 호공후, 호적, 호무를 좋아하여 교토의 귀척들이 모두 경쟁하였습니다.
"한 영제 때 공후가 중국 중원 지역에 전해져 유행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사실 이 기록은 잘못된 것입니다.위의 고증은 역사 문헌의 기록을 뒤집었습니다.
둔황 막고굴 제248굴에는 칠현(七根)인 각형수공후(角形修箜, 북위)가 있고, 제249굴과 제285굴에도 칠현의 각형수공후(西魏)가 있습니다.
돈황 막고굴 112굴에 있는 대형수공후(성당)는 수말 당초 주천서구묘의 화상벽돌에도 칠현의 수공후가 있습니다.
주취안 서구묘의 초상화 벽돌에 있는 수공후(수나라 말 당나라 초)는 북제 시대 서역악무가 중원에 전해진 후 성행하였으며, 많은 유물에서 공후 악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산시성 고고학 연구소는 시안시 동쪽 교외에서 당나라 현종 천보 4년(745)에 묻힌 쑤쓰 勖 묘를 청소했으며, 무덤에서 풍부한 벽화와 석각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동벽에는 악무도가 있어 그림이 생생하고 보존이 완벽하며 예술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그중 수공후를 연주하는 그림이 매우 선명합니다.허난성의 가장 대표적인 수공후는 수나라 개황 15년(595년)에 안양 장성묘 악무용에서 수공후용을 연주한 것입니다.
수공후는 기둥을 바닥에 대고 두 손으로 돌리면 거문고의 현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지가 매우 사실적이어서 서역 수공후가 중원에 전해진 사실적인 그림일 것입니다.
북제 시대의 초상석 중 수공후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서기 6세기 북위 시대의 수공후는 주로 공의 석굴사에서 나타납니다.
공의석굴사4굴기악인중수공후를탄주하는부조가있는데장성묘악무용의수공후와기본적으로일치합니다.
공의 석굴사 제1굴 남벽 동쪽에는 기악인 중 공후가 연주되고, 위쪽에는 황비들의 공양인도가, 아래쪽에는 기악인 조가 연주되고, 왼쪽에는 두 번째 사람이 공후를 연주합니다.
공의 석굴사 제3굴 동벽에 기악인이 있습니다.위쪽에는 불감(佛龛)이 있고 아래쪽 왼쪽에는 공후(箜篌) 연주자가 있습니다.
용문 만불동 기악인 중 공후(箜篌)는 영락(璎珞)을 착용하고 오른손에는 거문고를 들고 왼손에는 공후(箜篌)를 치는 초당(初唐)시대의 작품입니다.
후진 개운 2년(945년)에 위휘존승다라니경동악기에는 수공후를 연주하는 부조가 있었는데, 작은 수공후는 한 손에는 거문고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만지작거렸습니다.
수당 시대 안양 천령사 서탑 북벽 우측에 수공후를 탄주하는 부조가 있는데, 그 크기가 당막고굴 벽화에 나오는 대공후와 같은 크기입니다.
북송 카이바오 9년(976년), 정저우 카이위안사 산악석관에서 수공후(首箜篌)의 부조를 연주했습니다.
공후가 조선 남북조에 전래되었을 때 고구려, 신라의 악무는 이미 중원지방에 전래되었습니다.북위 평풍 발후도 고구려, 백제 악무에 전래되었습니다.
북주 때 고구려, 백제가 다시 중원을 찾아와서 악무를 췄습니다.《삼국사기·악지》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에서 많은 악기를 받아들였는데, 고려악의 19가지 악기 중 8가지가 서역에서 왔고, 그 중 수공후가 있었다고 합니다.
공후는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서대사자산유수장》에도 당전의 악기로 언급되어 있습니다.니시오사는 나라 서부에 건축된 도다이지와 마주보고 있는 절로 보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중 2개의 공후가 있는데, 둘 다 23현의 대형 수공후입니다
.정창원에는 나전홈과 옻홈이 있는 두 개의 공후(箜篌)의 잔품이 보존되어 있습니다.모두 대형 악기이고 중요한 부분과 일부 현이 모두 존재합니다.
일본 정창원에서는 수공후를 복원하여 2를 연주하고, 횡적과 횡적은 북조시대에는 많이 사용되었으나 당대에는 쇠퇴하였습니다.
그동안 음악학계에서는 클라리넷에 대한 연원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실크로드(丝绸路)는 우리에게 횡적(横笛)의 신비를 풀어줍니다.
인도의 클라리넷은 필자가 생각하는 클라리넷의 발원지가 인도입니다.인도의 베다 시대에는 음악을 좋아했기에 사마베다에 딸린 것은 간드하르바(Gandharva), 즉 음악의 신이라는 한역 불전의 간드하르바(Gandharva)가 있습니다.
당시 인도인들은 피리(Vana)와 툰두브(Dundub)라는 악기를 사용했습니다.bi), 오이나(yina) 등의 악기.불교가 생긴 이후로 악기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묘법연화경·편리품 제2'에 기록된 '소, 피리, 거문고, 공후, 비파, 놋쇠 심벌즈' 등은 인도의 석굴 벽화와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몇몇 이미지에서 고대 인도의 기명악기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는 리코더가 소량일 뿐이지만 가로로 된 리코더는 많습니다.악무론(樂舞論)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기명악기는 대나무로 만든 횡적 웜사(vamsa)입니다.
대나무 관을 뜻하는 베누(venu)라고도 불립니다.베다 문헌에는 취주 악기의 명칭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약 서기 100년 이전에 두 번째 과도기 동안 횡적 조각이 있는 최초의 이미지를 발견했습니다.
이번 작품은 아마라와티 대탑의 복발을 얹은 돌판을 교체한 부조로, 인물 모양이 발랄하고 부드러워지기 시작해 고풍 때처럼 딱딱하지 않게 된 것.아마라와티 부조에서는 붓다를 전통적인 상징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동시에 상징과 사실의 두 가지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남인도의 보수적인 소승교파와 혁신의 대승교파가 공존하거나 엇갈리거나 혼재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가로 피리는 조각이 거칠고 연주 손동작도 잘 모릅니다.
마라티 석조 중 피리 부는 서기 1세기 성숙기는 약 150년에서 200년 사이입니다.
이 시기 조각은 아마라와티 탑의 울타리 부조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울타리 시기라고도 불리며, 가장 많은 수의 부조가 남아 있고 수준이 높았습니다.
조각된 악무도에서 솔리스트는 장구와 클라리넷에 맞춰 춤을 췄습니다.
발후트, 산치보다 연꽃 문양이 더 아름답습니다.울타리 바깥쪽의 부조 소재는 주로 본생이야기와 불전이야기이며, 불전이야기가 대부분이며 상징과 사실의 두 가지 표현방식을 겸비하고 있습니다.이야기는 종종 원형 부조로 그려지며, 인물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 시기 릴리프 캐릭터는 특히 여성의 나체가 길고 가늘고 풍만하며 근육이 유연하고 자세가 유연하며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구부리거나 춤을 추거나 비상하는 등 유연하고 아름다운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로 피리와 오현비파 화주가 나체로 늘씬한 댄서를 반주하는 듯한 모습.이 그림에서 가로 피리는 비교적 정확하게 조각되었습니다. 굽타(笈多) 시대는 인도 불교 예술의 전성기입니다.
신전의 조각은 기본적으로 반나체로 되어 있고, 클라리넷 연주자가 다른 악기 연주자와 함께 반주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반수리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섯 개의 손가락 구멍과 한 개의 취구가 있는 인도 아대륙 악기를 말합니다.
불교 회화에 등장한 것은 서기 100년 경.인도(印度)의 횡적(b笛)은 신성한 악기라고 추앙받습니다.
길이가 보통 14인치 정도인 북인도의 반수리는 전통적으로 음악 반주로 쓰입니다.지금도 힌두스탄 클래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반주악기입니다.
인도 오랑가바드 신전의 악무 조각은 5세기 남아시아 인도의 횡적(横笛)이 불교의 동점과 함께 서역에 전래되어 허전(和阗) 지역에 처음 전래된 후 서역에 널리 전해졌습니다.
진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따르면 "횡풍, 호락야(胡樂也).장보는 서역에 들어가 그 법을 서경에 전하기를 바라지만, '마하도륵' 두 곡을 얻었고, 이연년은 호곡으로 인해 28개의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장건은 두 번째로 서역에 출사했습니다(첫 번째는 무제 건원 2년인 기원전 139년, 두 번째는 원수 4년인 기원전 119년).당시 서역 민간에는 이미 횡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건이 어떻게 횡적을 '서경에 그 법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역 가로피리 서역 석굴벽화와 출토유물 중 악기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존하는 신장 커쯔얼 제38굴은 구즈석굴의 전형적인 중심 기둥식 동굴로, 이 동굴은 회화가 정교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권정릉격 구도 내에 본생의 이야기와 인연의 이야기 그림이 교차로 그려져 있어 매우 독특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방 양쪽 벽에 걸려 있는 '천궁기악'입니다.이 굴의 양벽 벽화는 '설법도'와 '천궁기악도'가 함께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궁기악도는 각 벽의 7개 그룹에 14명, 두 벽의 총 14개 그룹에 28명의 사람들이 있는 법도 위에 있습니다.
불우벽의 첫 번째 천궁기악도에서 남기는 2주관을 쓰고 귀걸이는 큰 귀걸이를 하고 손에 악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데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고 거문고 몸체가 매우 짧고 거문고 막대가 상부에 있습니다.
여치는 상투를 머리에 착용하고 상체를 노출하고 풍만한 젖가슴이 돋보이며 양손에 가로 피리를 잡고 연주하고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를 음공에 대고 집게손가락을 꼬고 가로 피리의 길이는 약 30cm입니다.
신장 및 전요트간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자기 조각은 1900년 영국 스타인이 허톈요트간 고대 도시에서 발굴하여 가져간 것으로 스타인의 '중앙아시아 및 중국 서부 시찰 세부 보고서'에 게재되었습니다.
잔토 조각은 높이 12.0, 너비 13.5cm입니다.두 감방은 기둥머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아랫부분은 하나의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습니다.감실 한가운데에는 두 명의 반신기악이 있는데, 하나는 동발벌즈를 치고, 다른 하나는 가로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악기 형태가 투박한 편입니다.내용은 천궁기악(天宮伎樂)으로 보이며 사원 모처의 장식품으로 보입니다.
신장과 전요테칸 유적에서 출토된 피리 부는 도자기 조각은 서기 4세기 신장 커쯔얼 제76굴은 사각형 동굴로 회화 스타일과 주제 내용을 분석한 결과 모두 초기 동굴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 독일 탐험대가 이 굴을 답사하면서 벽화를 대부분 벗겨내고 '공작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76개의 돔 지붕과 네 벽이 만나는 지점의 하피와 네 벽의 상부에는 연속된 천궁기악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궁의 기악은 부처나 미륵보살을 중심으로 기악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고, 기악의 이미지가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는 전개도입니다.
천궁의 윗부분은 서까래를 본뜬 처마, 아랫부분은 요철형 난간으로, 부처 양쪽에 각각 6신기(身伎)의 낙천인(樂天人)을 배치하였습니다.
기악에는 피리를 부는 기낙천인이 난간에 서서 머리를 두 개의 큰 상투로 묶고 머리 뒤로 늘어뜨린 긴 띠를 일주일 동안 감싸고 가랑이 오른쪽에 매듭을 지어 브래지어를 입은 모습이 아주 독특합니다.
가로 피리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은 연주를 하며 춤을 추는 아름다운 자태였습니다. 신장 커쯔얼 제193굴은 커쯔얼 석굴골 동쪽 끝에 있는 동굴로 192, 194굴과 하나의 단원을 이루며 석굴 사원으로 보입니다.
2000년대 초 독일 탐험대가 이 굴을 답사해 용왕굴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이 굴의 주실 권정 좌측 벽면에는 인연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부처의 왼쪽에 피리 부는 천인이 있습니다.하늘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웃통을 벗고, 녹색 치마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발을 마주하고 앉아 부처님을 돌아보고, 양손에 가로 피리를 들고 연주하려고 합니다.피리 길이는 약 20센티미터입니다. 베쯔크리크 33굴과 31굴은 차례로 뚫은 동굴로 벽화 내용이 동일합니다.연대는 서기 약 9세기입니다.
2000년대 초 일본 오타니탐험대가 베르쯔크리크 석굴을 답사하면서 벽화의 일부를 벗겨낸 것도 그중 하나.이 그림은 1915년 '서역 고고학 지도'에 발표되었습니다.
왼쪽 위는 피리 부는 사람으로 머리에는 꽃이 핀 머리, 팔에는 팔찌, 양손에는 가로 피리를 들고 연주하고 왼손에는 엄지손가락으로 피리를 받치고 음식, 중간, 약지 손가락 구멍에 대고 새끼손가락을 치켜올립니다.
오른손 엄지는 피리를 받치고 가운데 약지는 구멍을 누릅니다.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신장 바이쯔크리크 제33굴의 피리 부는 벽화, 서기 9세기에 중원 횡적이 중원에 전해진 시기는 아직 문헌이 없지만, 북량시대 둔황 제275굴의 벽화에서 피리의 묘사를 볼 수 있습니다.
동굴의 북쪽 벽 아래에 공양인 행렬을 그리고 있으며 모두 둥근 고깔모자 帻, 좁은 소매의 긴 셔츠, 허리띠, 바지, 검은 장화, 그리고 나란히 서서 경건하게 부처님을 향해 서 있습니다.
양손에 악기를 하나씩 들고 연주하고, 양각, 두 줄의 퉁소, 두 줄의 퉁소, 두 줄의 퉁소, 두 줄의 퉁소, 두 줄의 퉁소 순으로 연주합니다.앞뒤 8신 공양인, 취주악대 결성
북량시대 돈황의 275굴에 있는 횡적은 서위시대의 제285굴인 천궁기악도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 굴의 네 벽 위에 그려진 천궁의 기악은 나란히 채색된 궁문 난간 벽권의 꼭대기 감에 각각 도사리고 있으며, 높은 계보와 상체를 두르고 치마를 두르고 숄을 팔꿈치로 휘날리고 있습니다
.남벽 상단의 인피(人字) 아래에는 천궁기악(天宮伎樂) 19신이 그려져 있으며, 연주악기로는 배소(排箫), 완함비파, 공후(箜篌), 횡적(横笛) 등이 있습니다.
북벽 상층부에는 하층회천궁기악공 8신이, 연주악기는 횡적·장구·리코더·비파 등이, 동벽 상층부에는 천궁기악 14신이, 연주악기는 횡적·완·첨고 등이 있습니다.
수나라 때 제390굴 비천기악도에서도 횡적을 볼 수 있습니다.굴의 우물 한가운데에는 활짝 핀 연꽃이 그려져 있고, 연꽃은 사방에 대칭으로 작은 연꽃이 하나씩 그려져 있고, 우물 네 귀퉁이에 연꽃이 하나씩 그려져 있으며, 모두 연꽃 위에 앉아 있습니다.
주변 사면에는 휘장 아래 6개의 에키라 비천공이 줄지어 서운화비의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습니다.악기의 긴 수건이 펄럭이고 편하여, 온 벽에 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화면에서는 악기가 춤을 추거나 흥에 겨워 연주합니다.
보유하고 있는 악기로는 공후, 쟁, 소라, 장구, 배소, 篥, 직항비파, 곡항비파, 생황 및 횡적 등이 있는데 수나라 민속악대의 규모와 기세를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정관 16년 220굴 악무도에서도 횡적을 볼 수 있습니다.
화면 아래 넓고 화려한 계단 아래에는 4명의 춤꾼이 팔을 들어 수건을 흔들며 춤을 추는 '홍훈 경건 번개 번개'와 '좌우로 돌아가도 지칠 줄 모르는' 무대가 있습니다.
대형 밴드는 플랫폼 양쪽에 가지런히 배열되어 담요에 걸터앉아 댄스 반주를 합니다.연등녀가 등나무에 불을 붙이자 온 벽이 금빛으로 빛나고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군중들의 감정이 들끓어 휘황찬란한 천국의 즐거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서쪽의 악공은 15명이며 악기는 갈고, 도담고, 횡적, 鼗고, 다랍고, 징, 조개, 박자, 수공후(修箜篌), 생황(生笙), 수렵(筚篥), 篥(竖笛), 리코더 등이 연주됩니다.
간쑤성 지우취안의 그림 벽돌에도 가로 피리가 그려져 있는데 왼쪽은 플루트, 오른쪽은 가로 피리가 연주됩니다.
<한희재야연도>는 5대 남당 궁정화가 고굉(顾闳)이 지은 것입니다.그림에는 다섯 명의 가기가 한 줄로 앉아 총 세 개의 篥와 두 개의 가로 피리가 '청취'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사람은 두 여성 예술가.
五代《韩熙载夜宴图》中的横笛演奏
초당기 돈황 220굴에 있는 횡적 5대 왕건묘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횡적을 부는 악기가 있는데, 왕건묘의 동좌에서 네 번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눈이 처지고 입이 움푹 들어가며 두 손으로 피리를 잡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눌러 연주하는 것 같습니다.
용문석굴에는 공의석굴사 제1굴 남벽 동쪽에 기악인 그림이 있는데, 위 사진은 황후를 앞세운 여성 공양인이고 아래 사진은 공후, 횡적, 수레, 篥, 배소 등의 악인이 연주하는 기악인 그룹입니다.
클라리넷 연주자가 왼손으로 피리를 연주하는 것은 기존의 오른손잡이와는 다릅니다. 공의 석굴사 제1굴 서벽에도 가로 피리가 연주되는데, 위의 연주 자세와는 반대로 전통적인 연주 자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용문교각미륵감불배광기락비천중의횡적연주자세입니다. 공의 석굴사 제3굴 동벽의 횡적 연주 자세는 제4굴 서벽의 횡적 연주자와, 제1굴 남벽의 자세와 동일합니다.이것은 독특한 연주 자세이거나, 그림에 필요한 것이거나, 왼손잡이 연주자입니다.
또한 용문팔작사불단의 횡적, 용문교각미륵보살감불배광기락비천중의 횡적도 있습니다.위의 가로 피리의 묘사는 모두 북위부터 초당 시기까지입니다. 조선에 횡적(横笛)이 들어온 시기는 서기 4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중국 고대 문헌에서는 고구려와 고구려를 병용했고, 북위 정시(504508)에는 고려라는 호칭으로 고구려를 후대에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고구려 때 중국에 전해진 기악통칭은 고려악.문헌에 따르면 고구려 때의 악기는 36종으로 이 중 21종은 중국 지린(吉林) 지안퉁거우(集安通沟) 벽화와 조선 안악(安岳, 지금의 황해도) 벽화(약 4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악기들 중 횡적(横笛)은 중국 중원지방에서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북사에는 고려, 백제, 신라 열전이 있습니다.
고려에 대한 기술은 과거 정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오현금, 쟁, 누에 篥, 횡취, 퉁소, 북이 있습니다.갈대를 불어 곡을 화답합니다.매년 초 탁수에서 모입니다.
"조선 문헌인 삼국사기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요코피리는 조선에서 들어온 것으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453년이라고 합니다.당시 신라는 윤공천황의 장의에 악인 80명을 보내 울면서 가무를 연주했습니다.
이후 백제악(554년), 고려악이 전래되었습니다. 요코피리의 진화는 현재 신장 위구르인들이 연주하는 요코피리는 막 구멍을 테이프로 붙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며 고대 서역의 요코피리는 막 구멍이 없어야 하며 고대 인도의 요코피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횡적은 중원에 유입된 후 점차 막 구멍을 증가시켰으며, 시기는 대략 청나라 때였습니다.명나라 문헌 '삼재도회'에 나오는 피리에 막구멍이 없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때 막 구멍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띄게 나타났습니다.광서 34년에 완성된 '사원'의 '피리' 목에는 '피리, 대나무, 왼쪽 구멍은 취구, 두 번째 구멍은 대나무 막, 오른쪽 6개의 구멍이 모두 올라와서 가로 불기라고도 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청사고·악지》에도 막공(膜孔)에 대한 기술이 있습니다.보아하니, 피리는 청대에 이르러 이미 정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두 악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실크로드의 악기 교류가 매우 빈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곡항비파, 오현비파, 삼현, 응우옌함, 수레 篥, 날라리, 플루트, 갈고, 계루고(鸡娄鼓), 모원고(毛員鼓), 탄라고(答腊), 세장고(細腰), 대고(大鼓), 동심벌즈와 호금(湖琴), 활현악기 등이 있으며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중앙아시아·남아시아·서역·둔황·용문 등의 경로로 전파되었습니다.
물론 중원의 배소, 쟁, 생황, 훈 등의 악기들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돈황, 서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배소는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 등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한당중국은 세계 각국의 음악문화를 널리 흡수하여 점차적으로 이러한 악기를 개량하여 민족의 전통악기가 되었으나, 이러한 악기의 발원지는 점차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분류:고고학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