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 주해
1. 제자들은 3년 동안 복음을 듣고 수많은 표적을 보아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나” 예수님은 이제 “그의 메시야적 행위로서의 복음”을 전한다.
1)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자,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비로소 가르치신다.
2) 베드로가 항변하나 예수님도 크게 책망하시며 자기 부인의 제자도를 말씀해 주신다.
3) 책망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변화산에 데리고 가서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하늘에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이 들린다.
2.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제자들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1)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며 축사해 주신다.
2) 귀신들린 아들의 문제로 나아온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먼저 그의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3) 아이 아버지는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했고, 예수님은 귀신들린 그의 아들을 고쳐주신다.
4)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자,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고 하신다.
3. 예수님은 세 번 수난을 가르치신다.
1) 그 형식은 ‘길→수난예고→제자들의 몰이해→-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제자도)’의 순서다.
2) 첫 번째 수난예고는 ‘가이사랴 빌립보→수난예고→베드로의 항변(몰이해)→제자도(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로 말씀하셨다.
3)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수난예고다.
‘갈릴리→수난예고→제자들의 몰이해→제자도(섬김)’로 말씀하신다.
4) 막 10:32-45는 세 번째 수난예고로 ‘예루살렘 상경길→수난예고→제자들의 몰이해→제자도(죽음과 섬김)’으로 가르치신다.
4.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주 사역지로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많은 무리가 따랐던 갈릴리에 이른다.
1)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는데 집중하기 위함이다.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만 초점을 맞추고 듣게 하기 위함이다.
막 9: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9: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5.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당하고 죽임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라는 말로 축약하신 것 외에는 처음 수난 가르침과 같다.
1)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 당하신다.
2) 여기서 “넘겨지다”(헬, 파라디도미)는 ‘신학적 용법’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
3)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4) 예수님이 넘겨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를 위하여 그를 죽음에 내어주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6. 처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시고, 변화산에 데리고 가시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믿음을 가르쳤으나 두 번째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칠 때에도 제자들의 반응은 역시 ‘몰이해’이다.
1)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수많은 표적으로 큰 무리들이 환호하고 따를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환호하고 따랐다.
2)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가려하자, 제자들의 마음과 태도는 주님과 멀어진다.
7.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막9: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1) 이런 반응은 만물 안에 속한 신앙 즉 상황해결, 감정체험, 삶의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 물론 베드로에게 바른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며,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다.
3) 이런 바른 신앙과 함께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기대하고, 그 메시야로 인하여 나도 높은 자리를 얻고 삶의 질을 좋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8. 바른 신앙생활이어도 만물 안에 갇힌 신앙은 만물 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묻기도 두려워한다. 즉 듣고 싶지 않은 저항감이 있다.
1)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거나,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거나 하는 말씀에 은근히 저항하는 마음이 있기에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알려고 묻지도 않는다.
2)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는 이유는 가르치는 내용을 알기 위함이다.
- 제자들이 두려워한 ‘고난과 죽음’은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9. 믿음이 없는 세대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것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다.
1) 이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거나 두려워 묻지 않는 것을 책망하지 않는다.
2) 베드로가 십자가를 전하는 예수님을 꾸짖는 극단적인 저항은 “사탄아 물러가라”며 강하게 책망했지만, 그 외의 저항감, 깨닫지 못함, 묻지 않음은 책망하지 않고 이해해 주신다.
- 심지어 십자가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를 미워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셨고, 다시 베드로를 사랑으로 찾아 오셨다.
3) 변화산에 데려가서 구름 속에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온유함과 긍휼로 십자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이해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기에 또 가르치신다.
1) 베드로의 집으로 추정되는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길에서 “누가 크냐?”라고 다툰 것(논쟁)을 아시고 그들에게 물으신다. 제자들은 당황하여 침묵한다.
[표준새]막 9: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향해 가는 길,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는 데만 집중하고 계신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제자들은 ‘누가 위대하냐’라는 서열문제로 다투었다.
11. 제자들이 길에서 한 논쟁은 어떤 공동체, 어떤 교회에서도 있는 문제다.
1) 사순절 기간에도 섬김을 받고자 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논쟁과 다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2)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는데, 제자들은 그 반대의 길, 누가 큰가로 다툰다.
12.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큰 자에 대해 가르치신다.
[표준새]막 9: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1)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한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꼴지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의 예를 보여주신다.
- 한 어린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포옹하며 애정을 표현하신다.
13. 당시 어린아이의 지위는 가장 낮았다(비천했다).
1)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 제자는 공동체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자다.
2) 공동체 안에서 가장 낮은 자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며, 얼마나 큰 자가 되는지를 설명해 주신다.
[표준새]막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3) 큰 자는 극히 미미한 자들, 신분이 낮은 자들을 예수님처럼 여기며 영접한다.
14. 그냥 어린이를 영접하는 선행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예수님처럼 여기고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1) 마태복음 25:31-46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은 예수님 때문에 “작은 자”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3)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를 사랑하고, 그 안에 예수님이 있기에 그를 섬기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 영적으로 가장 부요한 자가 된다.
15. 영광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 영생(영광)에 이르는 문을 열어 주시려고 한다.
1) 그러나 타락한 죄인, 비참한 자인 제자들은 영광을 받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2) 예수님 때문에 높은 자리를 꿈꾸는 그들에게 십자가 죽음의 말씀이 깨달아질 리 없다.
16. 우리는 이 제자들의 결론을 안다.
1) 그들은 크고자 하는 허영심으로 십자가를 앞두고 모두 도망치며 실패자로 남는다.
2)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찾아오시고 성령을 보내, 하나님 나라의 큰 자로 세운다.
3) 깨닫지 못하고, 실패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인자와 신실하심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나의 묵상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건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은 반대의 길을 간다. 만물 안에 갇힌 자는 어쩔 수가 없다. 만물 위에 속한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는데, 깨닫고자 하지도 않는다. 만물 위를 뚫고 올라가야 하는데, 만물 안에 갇힌 내 마음은 복음에 무지하다. 만물 위의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는데, 만물 안의 문제에 갇힌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신뢰해야 하는데, 내 생각이 가득하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 이전이고 성령을 받기 전이다. 그런데 나는 십자가 복음과 부활복음이 성취되고 믿는 상태이고, 성령님을 받은 자인데도 제자들과 이렇게 동일하니 어찌한단 말인가? 복음을 알고, 성령을 받고도 만물 안에 갇히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스하게 밥을 사주고 플로잉하는 것도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지극한 고통을 받아들임으로 나를 영접하셨다.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나를 영접하셨다. 누군가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된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가시고, 제자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신다. 그 고통을 피하여 도망나온지 오래다. 그런데 작은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로 주님이 초대하신다. 십자가의 처참한 고통은 아니지만 지기엔 버겁다. 그래도 주님이 져주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아는 내가, 그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다. 뭇 사람의 꼴찌가 되어 섬기는 자의 자리에 머문다. 주님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으나,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며 주님의 마음을 품어본다. 내가 싫어하는 이 자리는 주님이 기뻐하는 자리다. 꼴찌가 되어 뭇 사람을 섬기는 자리다.
깨닫지 못하고 높아지고자 한 제자들을 사도가 되게 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을 기대한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소망이다. 언제나 일정한 빛같이 다가오시는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 묵상 기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주님의 길과 저의 길이 이렇게 다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주는 높임을 받고 나를 위한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되는데 여전히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도 가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는 길도 가지 못합니다. 이 두마음이 제 안에 함께 있어 저를 괴롭힙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르침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고 하는데, 제 마음은 넓고 편한 길을 원합니다. 알아도 알지 못하여 헤매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성령으로 깨닫고, 생명의 충만함으로 주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깨닫지 못하고 크고자 다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생명주시고, 십자가를 전하게 하신 주님이 저의 주,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상한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되, 주의 인자와 신실함 안에서 심판을 받아들이고 주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교육부와 복음충신학당을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관하여 주옵소서. 믿음 없는 저희들이 기도하며 주님의 마음과 뜻을 구하게 하옵소서. 교역자와 교사들에게 주의 마음, 주의 생명, 주의 지혜를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사랑과 승리가 임하게 하시고, 주님의 믿음으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