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어느 작가(김지원)가 작품에서 말했듯이 햇빛 속에서는 행복해지기가 쉬웠다. 남녘의 따뜻한 바람이 조금은 발을 가볍게 했고, 천년의 삶을 지닌 경주와 남산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흔쾌히 즐길 수 있었다.
15일 오전 7시 25분 전철을 내리니 낯익은 얼굴의 꼬맹이와 가상이가 웃음이 가득 번진 얼굴로 불렀다. 셋이 나란히 약속 장소로 발을 옮기니 아침 찬바람에 모자를 덮어쓴 알 대장과 그린랜드 아저씨, 노들강, 멍게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 조금 있으니 아브몰이 왔다. 그런데 정작 댕기가 오질 않는다. 5분 전에 전화를 했더니 천호대교 부근이라고 했단다. 아직은 아침의 바람이 차기에 기사가 미리 오지 않는다며 궁시렁거리고 있으니 댕기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어머니가 아침을 먹고 가라고 권하시는 바람에 늦었다고. 그려, 기사가 든든히 먹어야지. 우리의 안전이 달렸으니...
잠깐 인사를 나누고 곧장 출발했다. 알은 아침을 먹고 오라고 시간을 느지막이 잡았다면서 정작 자기는 옆구리에 김밥 한 꼬투리를 끼고 있다. 아침이란다. 큭. 어쨌든 한 차 가득 9명이 쟁이듯이 앉아서 가니 꽉찬 느낌이 왠지 모르게 든든하다.
중간에 휴게실에서 커피와 함께 서운한 맘에 오뎅 한 조각씩 간단히 먹었다. 대학옥수수를 팔기에 맛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샀더니 푹 삶지를 않아서 딱딱했다. 게다가 나중에 냄새를 많이 풍겨서 머리 긴 차 주인 댕기 할멈(? 미안 ㅎ)의 잔소리를 들었다.
어쨌든 고속도로를 운전 잘하는 댕기가 맹렬히 달려 경주로 들어가니 12시가 채 못 되었다. 산에 오르기 전에 보문단지 입구에서 그런 대로 맛있는(?) 순두부를 먹고 산으로 향했다. 용장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 간단히 물을 사서 챙기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대략 12시 40분 정도.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간 산을 오르니 웬걸 생각지도 않았던 바위들이 버티고 앉아 쉽게 걸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군데군데 밧줄을 매달아 잡고 올라가야 한다니, 에효,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코스다. 산은 높지 않아도 바위 타기가 만만치 않다.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오르고 또 올랐으나 그때마다 또 바위가 나타나 길을 막는다. 진짜 야등을 원했다니, 꿈도 야무졌다! 밤에 올랐다간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중간에 내려오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나를 보더니 한마디 한다. “아이구,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벌써 주저앉으면 안되는데요.” 그린랜드 아저씨가 “이왕 말씀하시는 거 다 왔다고 해주시지 않고” 하고 건네니 웃고 간다. 요즘은 시골 사람들도 달라졌다. 그러나저러나 완전 유격 훈련이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니 일행이 오지 않는다. 중간에 잠시 쉬면서 보니 빈 몸으로 출발했던 알이 배낭을 메고 있다. 물어보니 뜻밖에 댕기 배낭이란다. 댕기가 혈압약을 먹지 않아서 몸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다들 걱정을 하며 기다리니 진짜 얼굴이 창백한 댕기가 멍게와 함께 나타났다. 다들 도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냐고 걱정을 하니 천천히 컨디션 조절을 하면서 가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냥 속도를 조절하며 계속 가기로 하고 어렵게 고위재에 올랐다. 시간은 3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남산의 최고 봉우리는 금오봉이다. 고위산은 남산의 옆에 있는 다른 산인 셈이다. 그래도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경주의 풍경은 안온했다. 밝은 햇살 속에 저 멀리 강이 흐르고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지는 게 지리나 설악의 연봉에 못지않았다. 주위 산들에 둘러싸인 경주가 새삼스레 천혜의 마을로 보이기도 했다. 고위재에서 다들 모여 사진을 찍고 금오봉을 향해 출발했다.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야 했다. 노들강이 예약한 감포의 갈매기횟집에서 우리를 6시 30분까지 데리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속도를 내며 웬만한 고적은 빼고 진행했다. 여자들은 힘들다며 몇 개 불상들은 보러 가지도 않고 길을 재촉했다. 그래도 가는 길 곳곳에 머리 없는 불상들이 많아서 참배하며 움직였다. 내려가는 길은 삼릉으로 잡았다. 배병우 사진작가가 소나무 사진을 찍은 곳으로 주변의 소나무가 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삼릉의 소나무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이번 경주 나들이의 목적이었다. 금오봉을 거쳐 하산하는 길에서 노들강은 차를 가지러 간다며 먼저 바쁘게 내려가고, 꼬맹이, 가상이, 나, 이렇게 셋은 수다를 떨면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거의 6시 무렵에 내려오니 노들강이 길 건너에 차를 세워놓고 손짓을 한다. 아직 후미는 내려오지 않았다. 고적 구경을 열심히 하고 오나 보다. 기다리다 전화를 하니 맞은 편 길 쪽에 일행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들 차를 타고 숙소로 잡은 한화콘도로 향했다. 급하게 체크인을 하고 횟집 차를 찾으니 씩씩한 경상도 아줌마(?) 기사가 우리를 맞는다. 다들 올라타자마자 즉시 출발. 레이서가 따로 없을 정도로 꼬불꼬불한 길을 세차게 달려 거의 30분 정도 지난 뒤 내려놓는다.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바깥 풍경이 환상이다! 보름달이 둥실 떴고, 그 달빛이 바다 위를 비추니 물결이 일렁일렁 무늬가 번진다. 그린랜드 아저씨가 창문가에 앉아 가끔 문을 열어 파도 소리를 음악 삼아 들려준다. 횟집의 상차림 또한 훌륭했다. 맛있는 것만 알차게 내오고, 푸짐한 회를 곁들여 그렇게 우리는 잔을 주고받았다. 아브몰이 오랜만에 폭탄주 제조를 맡아서 연방 공급하기에 바빴다. 바깥 풍경을 보려고 사이키델릭은 아니지만 불도 껐다가 켰다가 하면서 신라의 달밤을 흥겨운 대화와 함께 상에 불러들였다. 9시쯤 자리를 파하고 밖에서 보름달 비치는 바다를 더욱 깊이 호흡하다가 다시 숙소로 향했다. 노래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를 잡아준 노들강의 친구가 하는 업소로 인사 겸해서 들렀다. 댕기는 몸이 좋지 않아 빠지고, 아브몰은 노래방에서 계속 졸고 있어 그냥 숙소로 돌려보냈다. 피곤하다던 일행들은 그래도 마이크를 잡자 맹렬히 불러제꼈고, 뺄 수 없는 노래 신라의 달밤도 불렀다. 소리를 빽빽 질러 다음날까지 목이 아팠다.
방에 돌아오니 이번엔 씻는 게 전쟁이다.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럭저럭 씻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아이구 자자.
16일 오전. 댕기가 주장해 콩나물과 파도 넣고 끓인 라면을 맛있게 먹고, 경주 관광에 나섰다. 석탈해왕릉, 백련사 입구 마애불을 거쳐 골굴사로 향했다. 선무도 공연이 11시부터 있다. 처음 가 본 골굴사는 생각보다 좋았다. 올라가는 길이 다소 힘들긴 했지만 언젠가 템플스테이를 해보리라 마음먹어본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공연을 보고 출발을 하자니 알이 축구 경기 취재를 위해 울산으로 간단다. 히치하이크를 해보겠다면서 알은 내리고 우리는 기림사로 갔다. 수수한 절집이 맘에 들어 대적광전에서 삼배를 했다. 그러다 벗어놓은 모자를 그냥 두고 와버렸다. 점심을 먹은 뒤 생각이 나서 다시 갈까 하다가 김연아 식으로 ‘누군가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겠지’하고 맘을 접었다. 그냥 맘을 허허로이 하는 수밖에...
절 앞에서 점심을 먹고 2시 무렵 곧장 서울로 출발했다. 경주를 벗어날 동안 노들강이 운전을 하고, 그 뒤로는 댕기가 받아서 정말 논스톱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집을 지척에 두고도 서울까지 일행을 데려다준 댕기 덕에 무사히 그것도 5시간도 안 걸려서 안착했다.
<뱀발>
아침 강변역의 다소 차가웠던 바람, 따뜻했던 남산의 기운, 양지바른 곳의 주인 모르는 무덤들, 곳곳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우릴 맞았던 불상들, 삼릉의 자유분방했던 소나무들, 하늘에 둥실 떴던 보름달, 의외로 맹렬히 해변가 돌에 와서 부딪치며 으르렁거렸던 파도, 달빛에 부서진 사금파리처럼 조각조각 반짝이던 바다, 골굴사와 기림사 등등. 이렇게 여러 장면들이 또 하나의 기억으로 우리들 인생의 갈피에 빼곡하게 들어찬다.
댕기가 아무래도 산행기 약속을 못 지킬 것 같기에 내가 어려운 시간을 내서 썼으니 부족하거나 틀린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댓글로 보충하시길...
첫댓글 어려운 시간을 내신 회장님의 자진납세...ㅎㅎ
댕기 씨가 클날뻔했네요..저는 목요일였나 혼절에 가까운 두통이 밀려오기에 산행 포기했는데 갔으면 댕기와 함께 실려갔을 것 같어요. ㅠ
삼릉의 소나무들은 굽이굽이 흐르는 혼돈 속에서도 아름다운 질서가 느껴졌었어요. 그 숲에 안개까지 쳐들어오면 금상첨화일 텐데요. ㅎ
둘이면 헬리콥터 부를 수 있었어. ㅋ 암튼 건강 조심해라. 옆에서 살펴줄 사람도 없는데...
회장님 산행기 쓰시느라 고생하셨구요, 잘 읽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산행기를 제가 써야하나 고민했었습니다. 왜냐면 회장님께 지목된 댕기형은 아무래도 힘들 것같다고 얘기했었고, 이번 산행의 기획자로써 경주에 대해서 제일 많이 아는게 제가 아닌가... 뜻밖에도 회장님께서 자진납세하셔서 제 고민을 덜어주시네요. ㅎㅎ
저는 이번 산행의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장소간 이동을 하면서 시간을 맞추느라 긴장하고 노심초사(?)했었습니다.
덕분에 사전에 생각하고 공지했던 일정중에서 칠불암 마애불, 안압지 야경, 백율사 등 몇군데를 스킵하긴 했지만 그래도 알차게 일정을 소화한 듯합니다. 보름밤에 바다에 비친 달빛과 어우러진 파도소리, 남산의 암릉구간, 삼릉골 소나무, 골굴사의 마애불과 선무도 공연 등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들이 많네요.
그래, 노들강 수고했다. 가장 수훈갑이야. 덕분에 경주의 여러 곳을 잘 보고 즐겼다.
사실 저도 제가 써야 하나, 걱정했었습니다. 이유인 즉 역시 댕기가 산행기 쓰기 어려울 것 같아서...ㅠㅠ 부지런하신 회장님 덕분에 숙제 하나 제낀 기분입니다. 너무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횟집 이름은 돌고래횟집이었던 것 같구요.ㅋㅋㅋ. 간만의 산행에 다리에는 아직도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앞으로 얼마간 살아갈 생기를 얻었나고나 할까요? 기회가 된다면 해설사 대동하고 경주의 곳곳을 다녀보는 새로운 소망을 하나 새기고 왔습니다. 노들강, 막내가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 고맙다. 댕기도 고맙고...우리 모두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해준 산행이기도 했습니다.
맞어, 돌고래였구나, 이상하다 생각했지. 근데 니네들이 잘알고 있나 시험한 거야. ㅋ
좋았겠다.
제가 가본 횟집 중에 전망도 좋으면서, 내부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회가 맛있기까지 한 삼박자 횟집으로 최고였어요.
돌고래횟집, 좀 짱인 듯!! ^^
이쯤에서 한 번 의심해 봐야 한다. 왜 그 아줌씨는 그 곡예운전을 하며 우리를 실어 날랐을까. 군소리 한마디 없이. 돌고래횟집은 어떻게 그렇게 전망 좋은 곳에 위태롭게 자리하게 됐을까. 우리나라 공무원들 정말 경쟁력 있는 것 아닌가. 그 횟집은 또 왜 그렇게 맛난 밑반찬에 고소한 향내 가득한 쑥국 등 푸짐한 상을 차리고 왜 그렇게 저렴한 값을 불렀을까. 맥주와 소주를 흔히 말하는 면세주로 공급받을까. 난 이 모든 게 경주에 아는 사람 많은 노들강이 섭외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걸 합리적 의심이라 하지 않나?
@알자지라 역시 예리하신 알대장님. ㅋ 맞습니다 맞고요, 제가 야로를 좀 부렸나봅니다.
그 돌고래횟집은 제 기대보다도 많이 좋았습니다.
또 저렴하게 넓은 콘도를 이용하게 해준 그날 보셨던, 제 동기인 노래방 사장에게 우리 산악회의 이름으로 감사인사를 전했습니다.
부럽당.......
지금에야 차분히 재밋게 읽었네요.노들강이 기획과 진행을 아주 멋지게 해냈구먼.
암릉이 많은 산을 좋아하는 나로선 꼭 가보픈 산이네. 즐거운 모임을 함께 하지 못해 무지 섭하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