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28 수요산행은 춘전 김유정문학관의 문화탐방과 실레이야기길을 따라
금병산에 올라 춘천의 시가지를 조망도 하면서 건강한 즐산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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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철로 김유정역에 하차후 문학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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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유정 동상에서 기념촬영후~~~
김유정 시인은 한국의 소설가.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봄봄》, 《금 따는 콩밭》, 《동백꽃》, 《따라지》등의 소설을 내놓았고 29세로 요절할 때까지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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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마을은 김유정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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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로 부터 멋진 해설도 들어면서~~~
내일 3.29일이 81주년 추모제행사가 있다네요!!!
한국 단편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김유정 선생(1908-1937)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문학사적 업적을 되새기기 위하여 1969년부터 시작된 김유정 선생 추모제는 선생의 기일인 매년 3월 29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徽文高普)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를 중퇴, 한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中外日報)》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구인회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후 각별한 교우로 지내게 된 이상을 만나게 되었다.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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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어떻게 할 수 없게 하는 그 그림자!
1930년 8월 말이다. 스물두 살의 청년은 늑막염이었다. 청년은 유산을 틀어쥐고 앉은 고향의 형에게 치료비와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그때 청년은 둘째 누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형은 고향에서 술과 난봉질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병석의 동생이 보낸 구조 요청을 외면했다. 겨우 몇 푼 보내주는 시늉을 하고서는 입을 씻은 것이다. 둘째 누나와 동거하고 있던 정 씨(鄭氏)가 청년에게 형님이 재산을 탕진해버리기 전에 재산분할을 정식으로 청구하라고 옆에서 부추겼다. 거기다 잘 안다는 법률사무소까지 소개했다.
“아무 때 분가해도 할 것이구, 이젠 자네도 어린애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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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저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고, 매형인 정 씨가 저를 해롭게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을 상대로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정 출두통지를 받은 형은 당황했다. 형은 청년에게 고향에 내려와서 타협을 보자는 편지를 보냈다. 청년은 소송을 취하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지만, 형이 끝내 저를 외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도 먼 일가가 형님에게 “동생에게 분재를 해주게. 그래야 공부를 더 하든지 할 것 아닌가.”라고 충고했다가 취한 형이 집어던진 목침에 맞아 앞니 두 개가 부러졌던 것이다. 형은 입만 열면 “일찍 분재하면 사람 버려! 나처럼 되면 어떻거나? 너는 공부 다 하고 나중에 살림을 내주마.”라며 분재를 미루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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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참 잘난 양반을 몰라뵙고 나 같은 놈이 공연히 그랬습니다.” 고향에 내려온 청년을 보고는 형은 빈정거렸다. 술이 몇 잔 들어간 뒤엔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하고 드잡이를 했다. 그리고는 숯불이 타오르는 화로를 방바닥에 내던져 엎어버렸다. 어떻게든 형의 마음을 바로잡아 보려던 청년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청년은 서울로 다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돈 때문에 형제의 의가 돌이킬 수 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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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년이 바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1908.1.11~1937.3.29)이다. 김유정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일기 6편, 번역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보기다. 1935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신춘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 김유정은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 ‘떡’, ‘만무방’, ‘봄봄’ 같은 걸작 단편을 잇달아 내놓아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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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본강점기 때의 행정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 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무렵 나라 곳곳에서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에 의한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맞서 의병 부대가 들고일어난다. 김유정이 살던 실레 마을도 국적토벌(國賊討伐), 국모보수(國母報讐), 배양척외(排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의병진의 후방기지가 있던 곳이다. 의병들은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소작농, 유랑민, 노동자, 실업자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에 의병들과 맹꽁이, 만무방, 들병이, 금장이, 거지들의 모습은 뒷날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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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일가가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 한 게 1913년이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했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잡기로 탕진하는 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친구인 안회남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님은 미인이다!” 하고 자랑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그리움은 연희전문 시절까지 이어져 연상의 여인에 대한 짝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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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보를 나와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록주(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편지를 보냈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록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부쳤다. 유정이 기거하던 방안은 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러나 박록주는 연하의 김유정을 얕잡아본 것인지 그가 보낸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편지 공세가 그치지 않자 하루는 박록주가 가정부를 시켜 김유정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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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겐 그만한 돈조차 융통해 볼 방법이 없었다. 유정은 안회남이 보내온 돈이 될 만한 탐정소설을 열심히 번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제 몸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느꼈다. 밤을 새워가며 탐정소설 번역 일을 하는데 유정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곤 했다. 닭 삼십 마리와 살모사 열 마리를 고아먹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병을 떨쳐내고 살기 위해. 한밤중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소리를 질러 조카를 불렀다. 누님을 오게 해 홍문(항문)을 보아달라고 했다. 누님이 치질이 악화한 홍문을 들여다보지만 통증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홍문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 때문에 한잠도 못 자고 비명을 지르며 밤을 새웠다. 가래도 끓고 기침도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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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년 1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해서 이곳 실레마을은 김유정 덕분에 먹고 산다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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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도 실패했다. 사업도 실패했다. 인생살이가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편의 소설을 써냈지만 그것으론 약값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암담했다. 유정은 폐지 위에 “운명!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 하는 그 그림자!”라는 글 따위를 끼적이며 탄식을 했다. 그는 혜화동의 누님 집을 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운명이 치질과 폐병을 안은 그의 몸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는 더욱 소설에만 매달렸다.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 형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유정은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유정은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공부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님이 그를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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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3월 29일, 새벽이 오고 있었다. 유정은 그날 새벽 6시 30분경 길게 숨을 한번 몰아쉬고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을 마지막으로 잘 보겠다는 듯이. 그리고 이내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김유정, 스물아홉 나이였다. 시신은 화장을 시켰고, 조카가 한강에 나가 분말로 변한 뼛가루를 뿌렸다. 김유정이 죽고 난 스무날 뒤 멀리 도쿄에 있던 이상(李箱)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문화해설사로 부터 김유정에 대한 상세한 인생사를 듣고 금병산행을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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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산행코스는 김유정역->문학관->실레이야기길-<금병산정상->산골나그네길->저수지->
봄봄마을->김유정기념비-<김유정역까지 안산즐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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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이의 인생사가 느께지는 실레이야기길을 지나 울창한 숲길을 숨가쁘게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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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상 전망대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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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산 정상에서 인증샷
춘천시에서 남쪽으로 8km 지점에 자리잡은 산으로 춘천시를 에워싼 산들 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대룡산(899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수리봉(645m)을 솟구친 후 그 맥이 원창고개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마지막으로 솟은 산이 이 산이다.
사계절 중 겨울에 오르기 가장 좋은 산으로 가을이면 낙엽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수목이 울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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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내를 조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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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데크레스또랑에서 중식과 "봄봄 막걸리로 정상주 한잔후~~~ 하산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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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하산하니 수아리저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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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시인의 대표작 "봄봄 마을"을 지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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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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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은 동백꽃길로 한다. 동쪽 능선은 동내면 원창고개로 내려서는 봄봄길이다. 멀리 삼악산과 북한강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송전탑에서 왼쪽 좁은 능선길을 택하면 실레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무덤을 지나 폐농가가 나온다. 여기서는 들머리인 금병예식장이 바로 보인다. 느린 걸음으로도 4시간이면 충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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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산을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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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철로 무사히 귀경했습니다.
첫댓글 글을 너무 잘 써서 김유정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어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