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예술가의 사회-39] 프리드리히 굴다 (피아니스트, 1930~2000)
매일경제 2019.12.13
턱시도를 벗은 피아니스트, 굴다는 아름다운 테러리스트였다
◆ 굴드와 굴다
20세기가 배출한 피아니스트 중 글렌 굴드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굴드는 유독 바흐를 사랑했다. 그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파격적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덕분에 이른 나이에 스타가 됐다. 하지만 음악만이 굴드를 특별한 예술가로 만든 건 아니다. 미스터리와 같았던 굴드의 삶이 그를 전설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굴드는 바흐처럼 '탐구자의 삶'을 살았다.
다만 굴드는 강박적이고 고독한 탐구자였다. 굴드라는 이름 앞에는 '괴짜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굴드의 강박은 병적이었다. 한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장갑을 꼈다. 악수도 안 했다. 세균에 감염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굴드만의 규칙은 수두룩했다.
관중의 환호가 연주에 방해된다고 여기며 전성기인 32세에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 뒤로 스튜디오 녹음으로만 음악 작업을 이어갔다. 굴드는 고독 속에서 살았다. 연애와 결혼은커녕 타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줄도 몰랐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두컴컴한 집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집요하게 아름다운 소리를 건져 올렸다.
음악계는 다른 예술 장르와 비교해 천재도 괴짜도 많은 동네다. 굴드만큼 괴짜로 불린 또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는 굴드와 이름마저 비슷한 프리드리히 굴다. 굴드가 바흐 연주로 명성을 얻었다면, 굴다는 모차르트 연주로 사랑받은 피아니스트다.
굴드는 자신이 창조한 우주 안에 틀어박혀 아름다운 소리를 탐구한 고독한 탐미주의자였다. 반면, 굴다는 자신이 사랑한 모차르트처럼 다채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흔든 천재였다. 그는 기존 우주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흠집을 내며 새 영역을 구축한 개척자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자유분방한 예술가는 모두가 단 한 번만 겪는 죽음조차 두 번 경험했다.
▲ 굴다와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께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1번. /사진 제공=도이치 그라모폰(DG)
◆ 클래식보다는 재즈 같았던 삶
천재에게 '전형적'이라는 수식이 마땅할지 모르겠지만, 굴다는 전형적인 천재였다. 고전 음악 중심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굴다는 7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12세에 빈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4년 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 뒤로 유럽과 남미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쌓았다. 당시 오스트리아엔 굴다 외에 외르크 데무스, 파울 바두라-스코다라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굴다와 그들은 '빈 3총사'로 불렸다. 셋 중 가장 어린 굴다가 '빈 3총사'로 불렸을 때 그는 여전히 10대였다. 스무 살 되던 해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며 화려한 미국 데뷔전을 치른다. 눈부신 조명이 굴다를 비추는 순간이었다. 이른 나이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굴다는 20대 초반부터 제자도 뒀다. 현역 피아니스트 중 가장 존재감 큰 인물은 '활화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르타 아르헤리치다. 그는 10대 때 굴다에게 2년 가까이 가르침을 받았다. 굴다는 아르헨티나에서 유학 온 흑발 소녀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불가능에 가까운 무리한 과제도 내줬다. 아르헤리치도 굴다 못지않은 천재였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굴다가 내준 과제를 해냈다. 굴다는 아르헤리치에게 "너도 나와 같은 족속이구나!"라며 감탄했다.
굴다의 손을 거친 거장은 더 있다. 아르헤리치 옆에서 굴다에게 음악 교육을 받던 학생 중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있다. 그는 훗날 카라얀 후임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10년 넘게 이끈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다. 굴다가 연주한 모차르트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건 '피아노 협주곡 20번'이다. '스승' 굴다가 연주하고 '제자' 아바도가 지휘한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모차르트 명반을 꼽을 때 항상 순위권에 들어간다.
굴다는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20대 초반에 한껏 누렸다. 자신 앞에 놓인 꽃길을 우아하게 걷기만 하면 됐다. 거장이라는 칭호도 예약돼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어떤 사람들은 편한 길에서 기꺼이 이탈한다. 그리고 낯선 길로 뛰어들어 모험을 즐긴다. 굴다도 그런 부류였다.
그는 천재가 누릴 수 있는 전형적인 영광의 길을 거부했다. 굴다의 삶을 음악 장르로 비유하면 클래식보다는 재즈에 가깝다. 굴드는 까다로운 규칙이 가득한 클래식 음악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인생만큼은 클래식이 아닌 재즈처럼 살았다. 굴다는 자유로웠고, 가뿐했고, 즉흥적이었고, 유연했다. 그리고 정말로 재즈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와 함께한 앨범 'The Meeting'. /사진 제공=필립스 레코드
◆ 테러리스트 피아니스트
굴다는 20대 때부터 재즈에 심취해 종종 즉흥 연주를 했다. 베토벤을 연주한 후 앙코르로 자신이 작곡한 재즈 음악을 들려주는 식이었다. 30대 들어서부터는 진지하게 재즈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1966년에 오스트리아에 재즈 경연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칙 코리아, 허비 행콕 등 내로라하는 재즈 아티스트와 팀을 꾸려 활동했다. 클래식과 재즈를 융합하기도 했다.
클래식 기법을 재즈에 적용하거나 모차르트 음악을 즉흥 연주했다. 록 밴드 도어즈(The Doors) 대표곡 'Light my fire'를 재즈로 편곡하는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음악을 즐겼다. 재즈계에선 굴다라는 손님을 기꺼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는 굴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굴다를 고전 음악 품위를 해치는 이교도로 여겼다. 굴다는 '테러리스트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을 얻는다.
굴다는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계의 보수적인 문화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왜 연주자들은 턱시도를 입어야 할까.' '왜 고전 음악은 상류층 전유물로 여겨지는 걸까.' 그는 규칙을 하나둘 깼다. 불편한 턱시도부터 벗어 던졌다. 편안한 티셔츠, 꽃무늬 셔츠,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선글라스나 모자를 착용하고 연주하기도 했다.
히피 같은 차림으로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연주했다. 연주를 하다 관객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빈 음악 아카데미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에게 수여 하는 '베토벤 반지(Beethoven Ring)'를 굴다에게 줬다. 굴다는 이 상을 반납했다. 빈 음악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교육방식을 겨냥한 저항 행위였다.
이슈 메이커 굴다는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언론은 굴다의 파격적인 행보를 자주 가십거리로 다뤘고 혹평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 피아니스트'의 용기 있는 모험에 박수를 보내는 팬도 늘었다. 굴다 역시 클래식과 재즈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했다.
▲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연주하는 굴다. /사진=유튜브 캡처
◆ "나 아직 안 죽었어"
1999년 3월 28일 한 신문사 편집국에 팩스 한 통이 왔다. 거기엔 '프리드리히 굴다 뇌졸중으로 사망. 시신은 행방이 묘연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굴다는 죽기 직전 언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죽으면 구구절절한 부고 기사를 쓰지 말고 '굴다, 죽었다'라고만 적어달라고. 물론 굴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은 "20세기 가장 창조적인 음악가를 잃었다"며 굴다를 추모했다. 그런데 며칠 뒤 굴다가 되살아났다.
그는 아예 부활 공연까지 열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너무 좋아하지 마시게"라며 너스레를 부렸다. 굴다의 죽음은 자작극이었다. 신문사에 부고 팩스를 보낸 사람은 굴다였다. 자신을 괴롭혔던 언론을 향한 짓궂은 복수이자 농담이었다. 첫 번째 죽음 이후 10개월 후 굴다는 '진짜' 죽었다. 사인은 뇌졸중이 아닌 심장마비였다. 그는 모차르트 생일인 1월 27일에 떠났다.
굴드, 굴다는 모두 고전 음악 권위에 도전한 이단아다. 하지만 권위에 균열을 낸 원동력은 달랐다. 이 차이는 두 예술가가 태어난 곳 때문일지도 모른다. 굴드는 클래식 음악 변방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그에겐 이렇다 할 스승도, 지켜야 할 규칙도 없었다.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굴드의 파격적인 음악은 그의 결벽증과 완벽주의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굴드가 불모지에서 탄생한 돌연변이라면 굴다는 풍요로운 땅에서 활동한 반항아다. 굴드와 반대로 굴다는 고전 음악 최전선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스승과 동료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어떤 틀에도 갇혀 있길 거부한 굴다에게는 주변 모든 것이 타파 대상이었다. 규칙을 깨길 두려워하지 않은 굴다는 한쪽에선 '저항군' 또 한쪽에선 '테러리스트'로 불렸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굴다가 파괴한 건 단 하나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이 음악이 주는 충만함을 누릴 수 있도록 권위라는 장벽을 무너뜨렸다. 누군가는 굴다가 허문 장벽의 잔해를 딛고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의 위대함을 마주했을 것이다.
유튜브에 '굴다(Gulda)'를 검색하면 꽤 많은 연주회 실황 영상이 뜬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굴다가 있고, 재즈 아티스트와 함께 즉흥 연주를 하는 굴다가 있다. 누구와 협업하든 어떤 장르를 연주하든 어깨에 힘을 뺀 사람 특유의 여유로움이 감돈다. 편한 복장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는 천재의 천진함도 전해진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다. 격식을 훌훌 벗어던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우아한 격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