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에 나에 대한 뜻밖의 소문들이 퍼져갔다.
내가 간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다는 거였다. 원래부터 방송출연은 잘하지 않아 사람들이 나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고, 더구나 콘서트마저 뜸한 사이 나에 대한 그런 소문이 퍼졌었나 보다. 심지어 매일 보는 친구들마저도 어느날 나를 만나면 병원에서 어떻게 나왔느냐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뿐만 아니라 친척들마저도 전화를 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난리들이었다. 비록 몸이 약해져 한동안 활동의 공백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이길 방법은 특별하게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방송에 나가 나는 건강하노라고 외치고 다닐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화마다 일일이 소리칠 수도 없었다.
조용히 침묵하는 길뿐이었다. 사실 그 소문이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은 별로 없지 않은가.
조용히 음악을 만들고 침묵하는 길뿐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문은 점차로 퇴색해갔다.
그럴즈음 나는 색다르다면 색다른 일을 시작했다.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구 강인원이 영화음악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곡은 강인원이 만들었고, 나 이외에도 가수로서 권인하, 신형원 등이 같이 참여했다.
영화는 신인 곽재용 감독이 만들었고 젊은 배우 강석현, 옥소리 등이 출연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 <비오는 날의 수채화>였다. 오랜만에 그룹사운드가 아닌 보컬그룹 형태로 노래를 불렀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강인원이 만든 곡과 노래가 무척 예뻤다. 영화의 주제가를 묶어서 앨범을 내면서 나는 또 어느새 <비오는 날의 수채화>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나의 5집 앨범을 냈다.
<넋두리>를 타이틀로 그동안 생각했던 멜로디와 가사를 모았다. 자켓의 사진도 사진작가 김중만씨가 멋지게 찍어주었다.
재킷의 앞면에는 나의 얼굴사진을 넣었고 뒷면에는 김중만씨의 독특한 감각으로 나의 발 사진을 넣었다.
해진 청바지에 운동화, 그위에 올려놓은 나의 포동포동한 발. 나는 참 많이도 걸어왔고 이제는 잠시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렇게 걸어온 길을 막 돌아보려고 정지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타이틀 곡 <넋두리>는 그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내용의 가사만큼이나 멜로디 또한 느리고 낮아 마치 노래 전체가 하나의 희고조 소설같았다.
4집 이후 거의 2년만에 나온 앨범인데도 나를 기억하는 팬들이 구입해주어 아주 좋았다. 5집에는 또한 복음성가로 <할렐루야>도 집어넣었다. 그야말로 이제 중년의 나이에 선 가수로서 앨범에도 신중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만든 앨범이었다.
5집을 내고도 주로 동부이촌동의 집에서 칩거했다. 집에서 외국의 록비디오도 보고, 나 이외 가수들의 음악도 듣고, 가끔씩 집을 찾아오는 외판원들과도 얘기하고, 동네 가게방 아저씨들, 아파트 청소원 아주머니들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가수로서 가수가 아닌 사람들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들을 나에게 무척 소중했다.
이제 나의 얘기만이 아닌 그들의 얘기도 귀담아 들어야 할 나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방송에도 잘 나오지 않아 내가 가수라면 깜짝 놀랐다. 무척 부자고 잘 생기고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 나같이 평범하고 그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사람이 가수라는 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일본에 갔다온 친구가 60년대 우드스톡 공연 실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갖다주었다.
카를로스 산타나, 존 바에즈, 조 커커 등 전설적인 록스타들이 총망라돼서 그 테이프 속에 담겨있었다.
특히 조 커커의 노래부르는 모습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였다. 전신을 떨면서 발끝에서부터 입으로 노래를 끌어모으는 듯한, 그래서 노래부를 때는 아무런 가식도 위장도 없이 그저 노래 속의 세계가 전부라는 듯이 노래부르는 조 커커의 모습은 우드스톡 드넓은 벌판, 수십만의 관중 속에서 단연 압권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노래부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도 나이가 들어 머리가 허옇게 세고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다면 나도 저렇게 미친듯이 노래부르다 무대 위에서 쓰러지고 싶었다.
요즘은 가끔 <비오는 날 수채화>팀과 함께 방송에 나가면서 활동한 탓인지 기자들이 찾아왔다. 그중 어느 기자는 나에게 나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예외없이 기타를 들로 노래를 들려준다. 내 노래를 하기도 하고, 옛날 데뷔시절에 불렀던 외국노래, 그리고 우리 민요 아리랑을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대개의 기자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나는 그들에게 가수는 작가가 아니고 음악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가수가 말로써 스스로의 음악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가끔 또 나는 기자들과 세상얘기도 한다.
나도 신문을 통해서 본 정치얘기며 청소년 문제에 관한 얘기도 하고 그외 잡다한 경제 사회에 대한 얘기를 나는 아는대로 그들에게 듣고 대답을 열심히 듣는다.
나는 우리 대중문화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청소년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들은 매우 민감해서 내가 어느 콘서트에서 어느 가사 한 대목을 착각하거나, 옷차림에 이상이 있으면 전화를 해서 확인하려 든다.
심지어 어떤 여고생들은 나의 외모가 왜 요즘은 옛날처럼 멋있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외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내가 봐도 20대 초반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정상이지 조금도 안변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어느 사람의 말도 있듯이 나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거기에 맞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의 얘기를 정리할 떄가 된것 같다. 벌써 스무번째의 얘기를 내놓으면서 첨으로 태어나서 나에 관해 많은 얘기를 한 것 같다. 동시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나에 관해 속속들이 알아버린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런 것들이 썩 내키지 않아 그동안 매스컴을 꺼렸는지도 모른다.
연재가 시작되면서 깜박 잊고 지내던 많은 친구들이 전화를 했다. 그들의 첫마디는 하나같이 '야, 너 스타 됐더라'라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그렇게 스타가 됐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내가 스타라서 이 스토리를 시작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런 기회에 할 얘기를 하려고 시작했을 뿐이다. 나의 진실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사건을 살아온 사람들의 진실로 애기하려고 의도했을 뿐이다.
그 의도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나는 가수일 것이다. 가수는 가장 확실한 나의 미래다. 지금까지의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형의 가수였다면 앞으로 또한 나는 내가 원하는 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거기서 언제나 나의 전제는 사랑이 될 것이다.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통일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싶다.
아이에서부터 백발이 정정한 할아버지까지 누구나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하나 만들어 부르고 싶다. 마치 지금 누구나가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처럼 말이다.
한 사람의 대한 얘기를 관심있게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고 또한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고 매일 조금씩 나올 때는 원하는 대로 분량을 조절해 읽을 수도 없는 만큼 감질나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그동안 나의 얘기를 관심있게 읽어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바로 그들의 그런 관심으로 나는 앞으로도 좋은 가수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