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해건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고서...
13살에 해방이 되고 18살에 6.25 사변이 나 어느 날 보위부대원에게 잡혀가 인민군으로 서울까지 와 덕수상업고등학교에 주둔하고 훈련을 받던 중 갑자기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가 UN군의 출현으로 전력이 밀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후퇴를 하던 중 강원도 금화에서 UN군의 포로가 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죽지 못해 목숨을 유지 하던 중 이름 모를 질병이 생겨
살아남기 힘든 상항에 ‘나인웅’ 수용소 연대장님의 배려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 할 수가 있었다.
3년 만에 휴전 협정이 이뤄져 남과 북의 포로들을 자유로히 되돌려 보내게 된 시점에 나는 나인웅 연대장님의 뜻을 받들어 남한을 선택하게 되었다. 남한을 선택한 사람들 중 나는 광주 사월산 수용소에 정착하여 석방날을 기다리며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김정국’이란 친구를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야말로 불같은 성령님이 나에게 주님의 임재를 체험시키신 것 같았다.
53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완전 자유의 몸이 되어
무턱대고 기차를 얻어 타고는 순천역이란 역에서 내려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에서 본 이름 ‘나덕환’ 목사님을 찾아갔다. 나 목사님은 한국명(민유수)란 선교사님을 소개하여 주시어 내가 한국군 복무를 3년 간 마친 후 공부 할 길을 열어주신 믿음의 어머니이시다. 민 선교사님 덕분으로 순천고등성경학교 졸업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그날 오후에 결혼도 하였다.
64년 졸업 후 경기도 안양지역의 호계교회를 섬겼다. 68년 신도장로교회의 1대 목사로 취임을 하였다. 열과 성을 다해 재미있게 목회를 하던 중 방지일 목사님의 권유로 70년 동신교회 부목사로 가게 되었다. 동신교회 김세진 목사님 밑에서 성실히 목회를 배우던 중 79년 하외이에 있는 신학대학원에 유학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고 하와이 한인교회 설교목사로 일하게 되었다. 1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와이 힐로한인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초청하여 80년 4월에 가족과 함께 가게 되었다.
82년 6월에 Alaska 몬테이 중앙장로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84년 Washington 서울장로교회서 시무하게 되었다,
90년-99년 Lexington 한인교회서 시무하다가 은퇴하였다..
99년 Columbus 한인교회, 2000-2004년 Homestead 교회에서 설교목사였다.
2004년 귀국 후 선교회 사역활동 중이다.
미주에서 이곳저곳을 두루 거쳐 목회 사역을 마치고는 무남독려 외동딸이 한국에 살기도하고 나 태어난 곳 어린시절을 지내온 북한에는 못 가더라도 제 2의 고향인 대한민국이 그리워 내나라 내 땅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중이다.
사반세기를 외국에 살다가 귀국하였기에 동문을 만나는 기쁨이 남 다르다.
그래서 은퇴목사님들 부부가 모이는 로뎀교회와 목자교회를 다니고 있는 중이다.
나의 목회 여정에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들 나인웅 연대장님, 방지일, 나덕환, 김세진, 김득렬, 김중기, 박창환, 김정국 목사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인생길에 동반자인 ‘이영숙’ 나의 아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나의 삶의 여정에서 평생 고락을 함께한 현숙한 여인임을 자랑하고 싶다. 특별히 늙어가면서 가장 가까운 친구로 내조자로 건강을 챙겨주고 위해 기도해 주는 그녀이기에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라.
양해건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북한의 두고 온 가족들의 그리움 보고 싶은 마음 그 한을 풀지 못해 지금도 통일의 그날 만 기다리는 마음에 가슴이 아려 와 한편의 영화를 본 듯한 감성이라 그 내용을 대충 요약하면서 감상문을 써 본다. 그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시시때때로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주의 종이 되시고 유학도 하시고 미국생활도 해 보신 양해건 목사님의 일대기를 열거 하였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총이십니다. 강건하게 오래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
김용기 목사부인 이기숙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