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둘레산길 잇기 제 4구간 2010년 2월 15일(월) 음력 정월 초이튿날 ▲ 음력 정월 초이튿날, 몸이 근질근질하여 대전 둘레 4구간 단독 산행 ▲ 09 : 30 집에서 603번 버스 탑승 ▲ 10 : 00 대전 역에서 501번(마전 행) 버스 탑승 ▲ 10 : 20 삼괴동 덕산 마을 하차 ▲ 삼괴동 - 鷄峴山城 터 - 닭재 - 325m 峰 - 望德峰.439m - 379m 峰 - 昆龍재.372m - 428m 峰 - 424m 峰 - 용오리 고개 - 574m 峰 - 바람고개 - 食藏山.580.7m - 자살 바위 - 해돋이 전망대 - 開心寺 - 판암 주공 아파트 1단지 - 지하철 판암역
10 : 20 ▲ 1982년 보호수(정자목)로 지정된 수령 50년, 높이 20m, 넓이 2m입니다.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三槐洞)입니다. 동쪽으로 옥천군 군서면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소호동, 장척동과 접해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상소동과 북쪽으로는 구도동과 이웃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에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정자처럼 한 곳에 서 있어 나그네의 쉼터인 동시에 마을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놀던 자리가 되었다 하여 <삼괴정> 또는 <뺏>이라 부르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현종 9년(1018) 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본래 공주군 산내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소룡리, 마달리, 소호리 일부와 외남면의 덕산리를 병합하여 <삼괴리>라 해서 대전(대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고, 그 후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행정동은 산내동이다가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 <닭재 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합니다.
▲ <경로당>입니다. 歲밑이라서 그런가요? 아무도 안 계십니다.
▲ <탱자나무> 울타리입니다. 옛날 노래와 그에 얽힌 아픈 사연이 떠오릅니다. <산이슬>이 부른 노래였지요?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탱자나무 꽃잎만 흔들었다네 지나버린 어린 시절 그 어릴적 추억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피어 오른다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탱자나무 생울타리 지날 때 - 복효근
탱자나무 생울타리 그것은 아주 안 보여주지는 않고 다 보여주지도 않아서 그 가시나 낮달 같은 얼굴이 보일락말락 탱자 잎사귀들이 그렇게 원망스럽던 것을 세수 소리보다 작게는 우물가에서 들려오는 차박차박 물 붓는 소리 초승달이었던가 잠깐씩 구름을 벗어난 사이 푸르스름하게 비쳐오던 것은 막 맺혀드는 탱자알이었을까 막 부풀어오는 젖가슴였을까
겨울은 차박차박 물 붓는 소리도 없이 탱자울 가지에 분분한 새소리뿐 나이만 먹고 밤은 길었다 기다림이 찌그러든 탱자알 같은 봄날 접어 날린 쪽지 편지가 탱자 가시 사이에 찢어져서 낱낱이 찢어져서 하얗게 탱자꽃이 피고 나만 보면 앵돌아진 탱자꽃 아프게 피고 탱자나무 생울타리, 그것은 아주 안 보여주지도 않고 다 보여주지도 않아서 아직도 뉘 집 생울타리 가를 지나면 그 뒤에 숨어 뒷물하는 그 가시나가 하냥 그립다
▲ 유형의 땅 제주! 秋史로 더 잘 알려진 완당 김정희는 당쟁으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55세 되던 해인 1840년 제주도로 귀양길을 떠나게 됩니다. 김정희는 제주도, 북청을 포함 총 13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나 귀양살이 기간에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를 그리는 등 학문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 친 ‘圍籬安置’를 당하게 됩니다.. ‘위리안치’는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을 말하는데, 전근대 시대 유형(流刑)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래는 도형(徒刑)을 받은 자에게 노역시키는 것을 가리켰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귀양 간 곳에서 다시 거주를 제한시키는 형벌을 말합니다.
▲ <계현산성(鷄峴山城) 터>입니다. 대전 동구 삼괴동 산3-1에 소재하며, 1991년 7월 10일에 시도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 닭재 위의 북쪽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20m입니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으나 남동쪽의 성벽 일부분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밑에서 1.8m까지의 성벽은 안으로 약간씩 오므리며 쌓다가 그 위 1.5m 정도의 성벽은 거의 수직으로 쌓았습니다. 이곳에서 백제의 것으로 보여지는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안에는 남쪽 성벽 부분에 폭 6∼8m의 평평한 대지가 마련되어 있으며, 북쪽에는 장대로 보이는 시설이 있습니다. 남쪽벽과 북쪽벽에는 성문터가 보입니다. 계현산성은 충청남도 금산군 마전 방면의 <추정리 산성>, <금성 산성>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서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동으로는 <성치 산성>, 서로는 <소호동 산성>, <사정성>, <보문 산성>으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쪽 성벽은 해발 315m의 능선 상에 축조되었는데, 서쪽 성벽 부분으로 꺾여서는 해발 320m의 능선 부분으로 올라가면서 쌓여 있습니다. 북쪽 성벽은 계속 동벽으로 이어지나 중간 부분부터 다시 해발 315m 지점에 쌓여져 남벽과 만나고 있습니다. 남동쪽 성벽 부분에는 일부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성벽의 높이가 3.3m 가량되었습니다. 그 축조 방법은 밑에서 1.8m까지는 안으로 약간씩 오무리며 쌓다가 그 위 1.5m 정도의 거의 수직으로 쌓아 성벽의 단면이 규형(圭形)을 이루고 있습니다. 동북쪽 성벽 부분도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바깥 높이 4.2m, 안쪽 높이 0.8m, 성벽 아랫부분의 폭이 4.5m 정도입니다. 성안에는 남쪽 성벽 부분에 폭 6∼8m의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백제 시대의 것으로 보여지는 토기편과 기와편을 수습할 수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케 합니다. 또한 성안의 북쪽에는 장대로 보이는 시설도 있습니다. 한편 남벽에 가까운 곳에 동문터가 있고, 북벽에도 문터로 생각되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 <닭재>입니다. 정자로 오르는 길목입니다.
10 : 50 ▲ <닭재>입니다. 대전과 충북 옥천을 잇는 고개였답니다.
▲ <식장산>까지 6.8km입니다.
▲ 이 높은 곳까지 <산소>를 쓰신 조상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上石이 시멘트로 되었습니다. 눈이 내려서 그런가요? 후손들이 省墓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 325m 峰입니다. <鷄峴山城>의 흔적인가요? 쓸쓸하게 눈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 325m 峰 너머로 <望德峰>이 손짓합니다.
▲ 325m 峰 아래로 大田 - 錦山 간 도로가 시원하게 달리고, 그 너머로 <낭월동> 시내 버스 차고지가 보입니다.
▲ <望德峰>峰이 눈앞에 보입니다.
▲ 325m 峰 건너 <보문산>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 325m 峰 너머로 <식장산> 중계탑도 보입니다. 오늘 목적지입니다.
▲ 325m 峰 건너 <보문산>이 다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춥니다. 날씨가 변덕스럽습니다.
▲ <兄第> 나무인가요? 4兄第인지, 5兄第인지, 하얀 눈 속에도 서로의 몸과 마음을 모아 마지막 겨울의 寒氣를 이겨내는 그들의 兄第愛가 부럽습니다.
▲ <望德峰.439m>입니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분입니다. <만인산>까지 가신다는군요. 젊은 <아우라지>님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대단한 체력에,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 쌓인 눈이 발목까지 차 올라와서 발길을 잡습니다. 덕택에 <아이젠>은 차지 않고 <스틱>만 의지한 채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 옥천군 군서면 舍陽里입니다. 햇볕이 잘 드는 동네라는 뜻인가 봅니다. <鐵塔>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電線은 산허리를 자르고 야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 379m 峰입니다.
▲ 이 지점의 아래로 <곤룡.昆龍 터널>이 뚫렸습니다.
▲ <곤룡.昆龍 터널> 아래 <사양리>마을이 고즈녁하게 자리합니다.
▲ 곤룡(昆龍재)입니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舍陽里를 경계로 하는 곤룡산(372m)을 南,北으로 횡단하는 고개입니다. <곤룡티>, <골링이>, <골룡이>, <곤룡고개>라고도 부릅니다. <티>는 <치.峙>가 구개음화되기 전 발음입니다. 본래는 山의 형세가 마치 龍과 같다는 데서 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노인들에 따르면, 6.25 당시 이곳에서 양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여 죽은 분들의 뼈가 山처럼 쌓였다고 하여 <골룡이.骨龍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아픔이 땅의 의미조차 바꾼 사례이겠지요. 지금은 곤룡재 아래로 왕복 2차선의 <곤룡 터널>이 뚫려서 이 <재>를 넘는 인적은 거의 끊긴 상태입니다. 고개를 나타내는 지명은 한자어로 <령(嶺), 현(峴), 치(峙), 천(遷)> 등이 있고 우리말에는 <재, 고개> 등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의 고개 지명에서 현지 주민에 의해 사용되던 우리말 지명은 대부분 <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개 名이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령(嶺), 현(峴), 치(峙)가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 <428m> 峰입니다. 北西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동료들이 새삼 소중하게 그리워집니다.
▲ <낭월 林道> 직전에서 반가운 세 분을 만났습니다. 마침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아서 제가 雪景을 뒤로 기념 촬영해 드렸습니다.
▲ 한 다리만 건너면 다 가까운 일가친척입니다.
▲ <낭월 林道> 직전에서 손에 잡힐 듯 <식장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 <낭월 林道> 직전의 정자에서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합니다.
▲ 산새도, 그 흔한 까마귀도 없이 혼자서 쌀국수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넘겨버립니다.
▲ <낭월 林道>입니다.
▲ <낭월 林道>에서 戀人인지, 夫婦인지, 다정한 密語를 속삭이십니다. 샘이 나서 그림에는 담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초상권 침해 당할까봐 담지 못했습니다.
▲ <鐵塔> 아래를 지납니다.
▲ <食藏山>의 양쪽 중계탑이 정면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산행도 마무리에 가까워집니다.
▲ 왼쪽에는 <보문산> 능선이, 오른쪽에는 <식장산>의 능선이 손에 손을 맞잡습니다.
▲ 2009년 04월. 충북 옥천과 대전시 동구에 걸친 <食藏山>에 산불이 발생했었지요. 당시 박성효 대전시장은 訪美 도중 식장산 화재 소식을 전해 듣고 철저한 진압을 당부했었습니다. <死後藥幇文>이지만 그래도 새롭게 다짐해야겠습니다. 자연을 지키는 데는 내가 우선 앞장서야겠지요.
▲ <枯死木>으로 火魔의 상처가 드러납니다. 중앙 아래편은 <장중 저수지>입니다. 산불을 끄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지요.
▲ 애꿎은 한 인간의 실수가 우리의 핏줄인 자연을 <枯死木>으로 흉물스럽게 바꿔버렸습니다.
▲ 가는 곳마다 <枯死木>은 눈과 가슴을 아프게 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 본래는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했겠지요.
▲ 불행인지, 다행인지, 꼿꼿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가 반갑다 못해 고맙습니다.
▲ <동오리 고개>입니다.
▲ 왼쪽으로 가면 <해돋이 전망대>, 오른쪽으로 가면 <구절사>입니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 어느 분이신가요? 庚寅年 新年 휘호를 써 두셨습니다. <謹賀新年>. 모든 분들! 庚寅년 새해에도 白虎를 능가하게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바람 고개>를 지납니다.
▲ <해돋이 전망대>와 <구절사> 갈림길입니다. 왼쪽으로 갑니다.
▲ <食藏山.580m>입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었으며 한밭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 있습니다. 또한 신라군이 백제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며 자연적으로는 한 고을의 병풍처럼 한 面을 가리고 안락한 먹을 풍기는 산으로도 유명합니다. 냇물이 곳곳에서 흘러 들을 이루고, 들을 가리는 산맥의 줄기가 신기하므로 옛날에는「식장산하 가활만인지지(食臧山下 可活萬人之地)」라 하여 만인이 모여 살 수 있는 고을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100만을 넘어서는 가활지지(可活之地))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옛날부터 <食藏山>엔 식량을 저장하고 있다는 설화도 있으나 이것은 백제의 군사들이 숲이 우거진 食藏山에 식량을 쌓아놓고 싸움을 하였다는 기록에 연유한 것이며 식장산에 산성이 겹겹으로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설화에 동살미(지금의 홍도동)에 살고 있던 ‘전우치’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3일간 또는 3년간은 먹고도 남을 만한 보물을 食藏山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食藏山 아래의 뜰이 기름지고 윤택해서 만인이 살 만한 터전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으며 지금 대전이 근 百년간에 비약적인 발전이 된 것도 食藏山 같은 명산이 있고 옛사람이 이 한밭을 짐작해서 발전할 곳으로 지적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산나물하며 고사리나물을 꼽습니다. 제삿상에도 오르는 고사리나물, 그 고사리 산나물이 많기로 전해 내려오는 食藏山 아래 산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들 슬하에는 자식이 하나 있었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항시 웃고 지내는 집안이었습니다. 아들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맛있는 산과일을 만나면 자기 입에 넣을 줄을 모르고 꼭꼭 홀어머니에게 드렸고 산나물 캐는 며느리도 맛있는 산나물을 먼저 어머님에게 드린 다음 장터에 팔곤 했습니다. 이렇게 효심이 지극한 그들에게도 차츰 근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자라면서 그들이 정성껏 해드리는 음식을 아들이 먹어치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그들의 어머니가 음식을 먹을 때는 아이를 업고 나와 밖에서 서성거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할머니 앞에 놓이면 밖에서 서성거리는 그들의 자식은 더욱 소리내어 울어 그들의 어머니는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궁리한 끝에 자식을 산중에 버리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효도를 하려해도 자식 때문에 효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그들은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여보,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님은 한번 돌아가시면 그만 아니오. 사람이 짐승이 아닌 이상 부모에의 효도는 잊어서는 안돼요.」 아내의 이와 같은 말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삽자루를 들었습니다.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업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산의 숲을 헤칠 때에도 아이는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산마루에 올라섰다가 양지바른 한 곳을 발견한 그는 우선 뗏장을 뜨고 흙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수난을 아는지 눈을 끔벅거리는 아들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땅이 파여서 아이가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자 아이의 눈에서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돌아서서 치마로 눈시울을 닦습니다. 땅을 파고 겨우 흙을 정리하고 땅 밑의 흙을 한 삽 파내려는데「덜거덕」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는「큰 돌이구나」하고 두 손으로 흙을 파는데 어찌된 일인가? 땅 속에 그릇이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릇을 파낸 다음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은 두꺼비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을 그냥업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했습니다. 할머니가 음식을 먹으려 하니까 더 날쌔게 먹어치웁니다. 그날 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연달아 담뱃대에 담배를 넣고 불을 붙였습니다. 담뱃재는 산 속에서 캐내온 그릇에 털었습니다. 담배를 열 대를 피워도 효도할 궁리가 나서지 않았습니다. 밤이 이슥했습니다. 그는 그만 한구석에서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가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담뱃재가 그릇에 소복이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담배를 많이 피웠지만 저렇게 많은 재가 생길 리는 만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갈수록 음식이 할머니 입에 들어가기 전에 먹어 치우는데 정말 그들로서는 딱 질렸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내와 상의한 끝에 그 그릇에 곡식을 넣고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았습니다. 이번엔 곡식이 그 그릇에서 철철 넘치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일이라고 돌아와 보았습니다. 이번엔 곡식이 그 그릇에서 철철 넘치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이번엔 돈을 한 잎 넣어 보았습니다. 이번엔 그릇에 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가 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 후 더욱 홀어머니를 잘 모셨습니다. 아들도 자라면서 철이 드는지 전보다는 습성이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에도 한계가 있는 것, 그들의 어머니는 어느 날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식기를 그날 산속에 가져다 묻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산을 밥그릇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食器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먹을 것이 많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食藏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조상님의 산소에 등산객의 발길이 닿지 못하도록 쇠사슬을 둘러쳤습니다. 후손들의 정성이 눈물겹습니다. 그런데 <설날>에도 조상들이 <省墓>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그 뒤로 한 사나이가 걸어옵니다.
▲ 음력 正初에 혼자서 山을 찾는 미친 사나이가 또 있습니다. 저희 직장 동료입니다.
▲ <食藏山>은 높이 598미터로 대전에 있는 산 중 가장 높으며 우람합니다. 또 무성한 숲과 높은 바위 벼랑, 깨끗한 호수와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도 있습니다. 식장산 남북으로 양 날개를 펼친 산줄기는 대전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대전 시민들은 식장산 위로 여명의 해돋이를 보며 떠오르는 달을 본다고 합니다. 5월 하순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이면 <세천 공원>에서 철탑 사거리를 지나 <구절사> 길까지 온통 아카시아 꽃천지입니다. 온 산에 짙게 밴 꽃향기를 맡으며 하얀 아카시아꽃으로 뒤덮인 길을 걷노라면 하늘 나라의 화원을 걷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식장산의 꽃길 10리가 아카시아꽃으로는 가장 훌륭한 곳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식장산> 세천공원 수원지 아래에는 벚꽃이 유명합니다. 또 수원지 호수와 계곡이 아름답습니다. 숲으로 싸인 호수와 독수리峰에서 후주에 이르는 계곡은 어느 산의 계곡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습니다. 숲 속에 묻혀 있는 계곡은 돌, 바위, 나무가 한데 어울려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 <食藏山>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멀리 <만인산>에서 <닭재>를 거쳐 <망덕봉>도 보입니다.
▲ <食藏山>은 국립 지리원의 측량에 따르면 동경 127도 29분 12초, 북위 36도 17분 48초, 높이 약 580m입니다.
▲ <食藏山>에는 오래된 절이 셋 있습니다. 서쪽에는 <고산사>, 북쪽에 <개심사>, 동쪽 동수리峰 아래에는 <구절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숲이 짙으며 대전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속리산, 백화산, 덕유산, 민주지산, 대둔산, 계룡산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 <食藏山>의 <자살 바위>인가요?
▲ <食藏山>의 <중계탑>입니다.
▲ <해돋이 전망대>입니다. 매년 새해에는 이 자리에서 東區 지역의 <해맞이 행사>가 열립니다.
▲ <食藏山> 중계탑을 배경으로 직장 동료를 모델 삼아서 한 컷 찍습니다. <태극기>보다 <산불 조심>이 더욱 소중합니다. 힘차게 바람에 휘날립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산불 조심'을 외마디로 목놓아 외칩니다. 높이가 약 598m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 두 연인을 모델로 <산내> 방향으로 왔던 길을 復記합니다.
▲ <食藏山>에서 바라본 <보문산>입니다. <보문산성>과 <시루봉>이 눈에 들어옵니다.
▲ <판암동> 방향으로 <開心寺>를 향해 하산합니다. 경인년에는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야겠습니다.
▲ <판암동> 방향으로 우측에 <식장사>가 있습니다. 태고종이더군요. 그 아래로 <개심사>가 있습니다. <비구니 승>들이 계십니다. <개심사>는 판암동 산 87번지에 있으며 조계종 사찰로 1940년 말에 창건한 절입니다.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체가 있으며 절을 짓기 전 스님이 왔을 때 온산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 현재 산산각에서 대웅전이 있는 곳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터를 잡고 개심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왼쪽으로 가면 <고산사>입니다.
▲ <고산사> 위에는 '龍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밑에 샘이 있고 옛날에 이 샘에서 昇天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살다가 龍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를 龍바위라 부르며 날이 가물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龍샘>은 고산사 위에 있는 샘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대성 산악 약수터>를 거쳐 판암 주공 1단지로 내려와 지하철 <판암역>에서 오늘의 산행을 마칩니다. 뜻하지 않게 직장 동료를 만나 여유있는 산행을 마치고 '대전 생막걸리' 3병에다가 순대를 곁들이고 귀가했습니다. 모두들 경인년 새해에도 <白虎>의 등에 올라타고 올해의 主人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0. 02. 15. 용머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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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 홀로> 산행에 익숙해져서 매번 나서긴 맙니다만,
이제는 <대둘>에 익숙해져서 점점 외로움 속에 그리움을 느낍니다.
<돌까> 대장님의 손 전화를 몇 번 누르려다가 망설였습니다.
명절 끝이라서... 음력으로도 福 듬뿍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산행기의 새로운 장을 여셨군요. 일일이 자료를 찾아서 엮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계속 이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과 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아우라지>님의 흉내를 내보려고 하는데 늘 한계를 느낍니다. 능력이 닿는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모습으로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월 초 이튿날 4구간 즐산하셨네요. 산행기 자세히 보고,읽고 배워갑니다.
정초에 지각생으로 <둘레>길을 더듬는 것이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산의 보배>를 느낄 수 있어서 기분 좋은 산행이었습니다.
정초에 힌쌀로 덮힌 식장산을 홀로즐산해 수고한덕택으로 먹는복 듬뿍받었으니 대둘님들 먹는것 걱정"끝"같군요.
자연을 소제로한 상세한산행기즐감하고가며 감사합니다.대둘에 머지안아 또 한분이 안내대장이 나타날같군요.
뒤늦게 <대둘>에 참여해서 한꺼번에 떼우려니 힘이 듭니다. 그래도 끝나고 나면 끝없이 <개운>합니다.
멋진 풍경과 멋진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덕분에 공부 많이 하게 되네요. 건강한 모습으로 재회를 기다립니다.
누구는 산에 점점 미쳐 가고 있네요... 뭐시기 꼬리 아줌마만 불쌍하다 ㅎㅎㅎ.. 둥지마루는 고향에서 어머님께 효도한다고 같이 하지 못했네요... 다음에 불러만 주세요.....
손전화에 자꾸 손이 가는 걸, 겨우 참았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정초엔 효도가 최고지요. 어머님과 <둥지>님의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 경인년이기를 기원합니다.
현장학습을 하는 기분입니다. 잘보고 느끼고 갑니다.
여전히 건강하게 이 山 저 山을 행복하게 누비시는 <山 아이>님.
童心을 보여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변함없이 산에서 만나기를 기다립니다.
어! 내가 안보이네 그시간에 제가 보문산에서 막걸리 한잔 했거든요....오늘은(17일) 계룡산 산제 지내고 내려오다 복불복에 지는바람에 알탕도하고.....
<대강> 막걸리가 자꾸만 당기더니...
그래서 <보문산> 쪽으로 시선이 자주 갔나 봅니다. 동행하면서 한 잔 하기를 기대합니다.
용머리님...대전 사랑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올려 주신 좋은 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라는 소중한 역사와 문화적 자료라 생각되며, 오래오래 기록이 보존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나홀로 4구간 산행을 하기위해 용머리님 산행기를 교본삼아 열심히 예습을 했건만 하산 하고보니 산내동삼거리~~
하산길만 한번더 도전하기로 하면서 스크랩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