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는 회덕현계(懷德縣界)까지 69리, 진잠현계(鎭岑縣界)까지 64리이며, 남쪽으로는 부여현계(扶餘縣界)까지 49리, 이산현계(尼山縣界)까지 43리, 연산현계(連山縣界)까지 53리, 전라도 진산군계(珍山郡界)까지 80리이며, 서쪽으로는 대흥현계(大興縣界)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천안군계(天安郡界)까지 57리, 연기현계(燕岐縣界)까지 2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이곳으로 옮겨 도읍하였다가 성왕(聖王)에 이르러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과 백제를 공격하여 멸하고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군병을 주둔시켰는데, 당 나라 군사가 철수하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점유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쳐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목(牧)을 두었으며,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안절군(安節軍)이라 하고 하남도(河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를 폐하였고,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고, 충혜왕(忠惠王)의 후(後) 2년에 원(元) 나라의 평장(平章) 활활치(闊闊赤)의 아내가 된 경화옹주(敬和翁主)의 외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시켰고,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르다가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성현(儒城縣) 주(州) 동쪽 54리에 있다. 본래 백제(百濟)의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노사지의 사(斯)는 어떤 데는 질(叱) 자로 쓰기도 한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인 비풍군(比豐郡 회덕(懷德)) 영현(領縣)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에 와서 본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웅천(熊川)ㆍ웅진(熊津)ㆍ웅주(熊州)ㆍ회도(懷道)ㆍ안절군(安節軍).
【성씨】본주(本州) 이(李)ㆍ정(鄭)ㆍ송(宋)ㆍ박(朴)ㆍ황(黃)ㆍ고(高)ㆍ임(任)이 있으며, 황(黃)ㆍ백(白)ㆍ하(河) 모두 촌성(村姓)이다. 김(金) 당 나라에서 투화(投化)한 성이다. 현(玄)ㆍ최(崔) 모두 역성(驛姓)이다.유성(儒城) 이(李)ㆍ임(任)ㆍ전(田)ㆍ주(朱)ㆍ유(兪)ㆍ미(米). 덕진(德津) 고(高)ㆍ현(玄)ㆍ서(徐)ㆍ진(陳)ㆍ오(吳). 신풍(新豐) 최(崔)ㆍ백(白)ㆍ박(朴)ㆍ신(申)이 있으며, 현(玄) 촌성(村姓)이다.양화(良化) 지(池)ㆍ송(宋). 완부(薍釜) 유(兪) 귀지(貴知)와 같다.갑촌(甲村) 주(朱) 복수(福水)ㆍ촌개(村介)와 같다.박산(撲山) 황(黃) 금생(金生)과 같다.
【풍속】 남자는 쟁(箏)과 피리[笛]를 좋아하고, 여자는 가무(歌舞)를 좋아한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당 나라 유인궤(劉仁軌)가 백제를 격파하고 웅진부성(熊津府城)에 주둔하자 당 나라 악공(樂工)들도 따라 왔다. 왕이 성천(星川)ㆍ구일(丘日) 등 38명에게 명하여 가서 당악(唐樂)을 배우게 한 뒤로는 고을 사람들이 음악을 잘하게 되었다.
【형승】 웅천(熊川)은 바다에 접해 있고, 계룡산(鷄龍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네 이익박(李益朴)의 시(詩). 계룡산은 진산(鎭山)이요, 웅진(熊津)이 금대(襟帶)를 이루었다 서거정(徐居正)의 취원루기(聚遠樓記).
【산천】 계룡산 주 동쪽 40리에 있다. 또 연산현(連山縣) 조에도 나와 있다. 공산(公山) 주 북쪽 2리에 있는 진산으로, 산의 모습이 공(公) 자 같기 때문에, 공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무성산(茂城山) 주 서쪽 32리에 있다. 월성산(月城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주미산(舟尾山)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지산(艇止山) 주 서북쪽 5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주 서쪽 3리에 있다. 여미산(余美山) 주 서쪽 7리에 있다. 무악산(毋岳山) 주 북쪽 10리에 있다. 유점산(油岾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탄현(炭峴) 주 남쪽 30리에 있다. 고화점(古火岾) 주 서쪽 45리에 있다. 자을매산(慈乙每山) 주 서쪽 20리에 있다. 차유현(車踰峴) 주 서쪽 35리에 있다. 어을온현(於乙溫峴) 주 서쪽 35리에 있다. 적유현(狄踰峴) 주 동쪽 27리에 있다. 판현(板峴) 주 동남쪽 31리에 있다. 차현(車峴) 주 서북쪽 5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訓要)에 이르기를,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등을 지고 뻗어 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현(馬峴)ㆍ화현(火峴) 모두 주 동쪽 25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주 북쪽 84리에 있다. 온양(溫陽)과 경계이다. 능현(陵峴) 주 동쪽 5리에 있다. 옛 능터가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인데, 속설에 백제의 왕릉(王陵)이라 전해 온다. 사공암(沙工巖) 주 남쪽 3리에 있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고을의 형세가 물 위에 가는 배와 같기 때문에 주미(舟尾)ㆍ정지(艇止)ㆍ사공(沙工)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한다. 동월명대(東月明臺) 주 북쪽 1리에 있다. 서월명대(西月明臺) 주 서쪽 2리에 있다. 잠연(潛淵) 계룡산 아래 있다. 두 봉우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돌이 구멍을 이루어 마치 거북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넓이는 30여 척 가량 되고 그 가운데에 물이 있는데, 깊이가 한이 없어 사람들이 나무와 돌로 메우면, 다음날 모두 못 아래로 나온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항상 용이 구름기운을 타고 출입하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매양 영험이 있다.” 한다. 금강(錦江) 주 동쪽 5리, 즉 적등진(赤登津) 하류에 있다. 옥천군(沃川郡)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고려 정지(鄭地)의 시에, “수(隋) 나라의 하약필(賀若弼)과 진(晉) 나라의 조 장군(祖將軍)은 칼을 짚고 강물을 건너면서 해를 가린 구름을 쓸고서야 돌아오리라 맹세했네.” 하였다. 웅진도(熊津渡) 주 서쪽 7리에 있으니, 적등진의 하류이다.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니, 절도사(節度使) 김은보(金殷甫) 등이 이 나루에서 맞았다. 현종이 시를 짓기를, “일찍이 남쪽 땅에 공주(公州)가 있다고 들었더니, 선경(仙境)이 영롱(玲瓏)하여 길이 있었구나. 이러한 마음 즐거운 곳에 이르러, 군신(群臣)과 함께 모여 일천 시름 놓아본다.” 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거란이 강조(康兆)를 잡아 죽이니, 왕순(王詢)이 평주(平州)로 달아났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강물은 아득히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푸른 산 그림자 속에 한 조각배로세. 백년 동안 남북으로 오가는 사람은 일도 많건만, 모래밭 갈매기만이 자유롭구나.”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완산(完山)은 멀고 멀어 길 막혔는데, 웅천(熊川) 강물 출렁출렁 구름도 아득하다. 물 얕은 데를 건너자니 돌이 발을 깨물겠고, 깊은 곳을 건너자니 물이 치마를 적시겠다. 어옹(漁翁)이 나에게 사당주(沙棠舟)를 빌려주니, 계수나무 도(櫂)를 삿대로 삼고 목란(木蘭)으로 노를 삼았네. 돋는 해 돌아보며 중류에 띄웠더니, 잠시 사이에 이미 서쪽 언덕에 대었네. 나는 언덕에 올라 말[馬]을 울리고 떠나는데, 어옹은 노를 두드리며 창랑가(滄浪歌)를 부르네. 어옹이여, 나의 도(道)는 그대의 노에 비유하노니, 쓰면 행하고 버리면 간직하네. 하였다. 음암진(陰巖津) 북쪽 4리에 있으니, 곧 금강(錦江)의 하류이다. 지동진(紙洞津) 주 동쪽 31리에 있으니, 적등진(赤登津)의 하류이다. 금상진(今尙津) 남쪽 15리에 있으니, 금강의 하류이다. 삼기강(三岐江) 독락정(獨樂亭) 기문(記文)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동천(銅川) 주 서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熊津)의 하류로 들어간다. 일신북천(日新北川) 주 북쪽 10리에 있다. 쌍령(雙嶺)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의 상류로 들어간다. 유포천(柳浦川) 유성현(儒城縣) 동쪽 20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현(珍山縣) 경계에서 발원한다. 성천(省川) 유성현 동쪽 7리에 있다. 연산(連山)과 진산(珍山) 두 고을 경계에서 발원하여 진잠현(鎭岭縣)에서 합류하여 지나, 유성현 동쪽에 이르러 성천이 된다. 대전천(大田川)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다. 전라도 금산군(錦山郡) 경계에서 발원한다.
○ 이상의 세 냇물이 합류하여 회덕현(懷德縣)의 갑천(甲川)이 된다. 온천(溫泉) 유성현 동쪽 3리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계룡산에 대궐터를 잡으려고 할 때와 태종(太宗)이 임실현(任實縣)에 가서 강무(講武 사냥하는 군사 연습)할 때, 여기에서 목욕하였다. 【토산】 수철(水鐵)ㆍ동철(銅鐵)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 잣[海松子]ㆍ누치[訥魚]ㆍ게[蟹]. 【성곽】 공산성(公山城) 주 북쪽 2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그 주위가 4천 8백 50척, 높이가 10척이며, 안에 우물 셋과 못[池]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속설에 전하기를, 이는 곧 백제 시대의 옛성으로 신라 김헌창(金憲昌)이 점거했던 곳이라 한다. ○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시에, “금대(襟帶)의 강산에 그려 만든 것 같은데, 기쁘도다. 오늘에는 고요히 병진(兵塵) 사라졌네. 음풍(陰風)이 홀연히 놀란 파도 일으키니, 그 당시의 전고(戰鼓) 소리 아직도 회상된다.” 하였다. 【봉수】 월성산 봉수(月城山烽燧) 남쪽은 이산현(尼山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은 고등산(高燈山)에 응한다. 고등산 봉수(高燈山烽燧) 주 북쪽 30리에 있다. 남쪽은 월성산에 응하고, 북쪽은 쌍령(雙嶺)에 응한다. 쌍령 봉수(雙嶺烽燧) 북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고등산에 응하고, 북쪽은 천안군(天安郡) 대학산(大鶴山)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옛날의 관정정(觀政亭)이다. 정자가 연못 가운데 있었는데, 목사(牧使) 권체(權體)가 정자를 헐고 누(樓)로 만든 것을 뒤에 목사 홍석(洪錫)이 동헌(東軒) 동쪽에 옮겨 세웠다.
○ 정이오(鄭以吾)의 관정정기(觀政亭記)에, “공산(公山)의 공관(公館) 동쪽에 옛날부터 연못이 있었으니, 거의 1, 2묘(畝)나 되었다. 지금의 부유후(副留後) 영가(永嘉 안동) 권씨(權氏) 담(湛)이 일찍이 이 고을에 목사로 와서 그 못에 초정(草亭)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 봄에 목사(牧使) 이공(李公)과 통판(通判) 유군(柳君)이 옛것에 인하여 증수(增修)하되 옛못을 개발 확장하고, 그 가운데 돌을 쌓아 터를 돋우고 넓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단청을 하였으니, 바라보기에 날아갈 듯하였다. 또 조그마한 시냇물을 끌어 못으로 흘려보내니, 깊고 맑게 물이 고여 깊이가 4척이나 되었다. 버들에 부는 바람ㆍ연꽃에 비치는 달ㆍ무성한 대[竹]ㆍ아름다운 화초가 맑고 상쾌하며, 무성하고 향기롭게 좌우로 서리고 얽혀 있어 성곽과 산천을 궤석(几席)에 앉아 대해 보면, 실로 한 고을의 아름다운 경치라고 이를 만하다. 이 사군(李使君)이 그 기이한 승경(勝景)을 갖추어 기록하여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지어 주기를 청해 왔다. 내가 그 글을 읽어 이 정자가 절승한 줄을 알고는 한번 그 가운데 종유(從遊)하여 못물을 굽어보며 마음을 씻어 보고 싶었으나 얻어서 이룰 수 없는지라, 사사로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못물에서 정사하는 것을 본다.[池水觀爲政]’는 시구(詩句)를 취하여 이름 붙이기를, ‘관정정’이라 하였다. 군자는 물(物)을 보면 도(道)가 있지 않는 데가 없음을 아는 것이니, 정사를 하는 데도 보고 본받을 만한 것이 이 못물보다 나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못물이 고인 것은 맑아서 요동하지 않고 평평하여 넘치지 않으며, 더러움을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으며, 나쁜 것을 흘려 버려서 머물러 두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기를 무궁히 하는 것을 보면 정사하는 도리도 또한 이에 있을 것이니, 정자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이를 정사하는 데 비유한 것은 못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령(守令)의 직임이란 백성을 친애(親愛)하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정사가 한 가지가 아니나 요체는 왕인(王人)을 예로 접대하고, 조정의 전장(典章)을 삼가 지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정자에 오르는 부절(符節)을 가지고 온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특히 그 직무의 노고를 잊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못물을 보고 정교(政敎)를 베풀게 한다면, 이 정자를 지음이 또 그 백성에게 관계되지 않겠는가. 이공의 이름은 정간(貞幹)이요, 유군의 이름은 지례(之禮)이니, 이 일을 보면 그가 정사하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취원루기(聚遠樓記)에, “차현(車峴) 이남에서 산천의 맑은 기운이 충만하고 쌓여서 큰 고을을 이룬 것에는 오직 공주(公州)가 제일이 된다. 장백산(長白山) 한 갈래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계림(鷄林)에 이르러서는 원적산(圓寂山)이 되고, 서쪽으로 꺾여서 웅진(熊津)을 만나 움츠려 큰 산악을 이룬 것을 계룡산(鷄龍山)이라 한다. 물이 용담(龍潭)ㆍ무주(茂朱) 두 고을에서 발원하는데 금산(錦山)에서 합류하여 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청주(淸州) 세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서는 금강(錦江)이 되고, 꺾여 사비강(泗沘江)이 되어서는 더욱 큰 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웅진이라 한다. 그래서 공주는 계룡산이 진산(鎭山)이 되고 웅진이 금대(襟帶)가 되니, 그 산천의 아름다움을 알겠도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 공주에 와 놀면서 금강루(錦江樓)에 올라보니, 그 조망(眺望)의 풍부함이 과연 전에 듣던 바와 같았다. 그러나 주(州)와의 거리가 멀어서 잠깐 동안에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고, 주의 객관은 누추하고 좁고 또 올라가 볼 만한 누각(樓閣)도 없어, 사람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하였다. 객관 동쪽에 연정(蓮亭) 두어 칸이 있어 조금 머뭇거릴만하나, 규모가 너무 좁아서 마음을 상쾌히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나는 이것을 이 한 주의 큰 흠점이라 여기었다.
전일에 나의 친척 조카 안동 권공(安東權公) 체(體)가 이 주에 목사로 되어 나갔는데, 누가 내게 말하기를, ‘권 목사가 연정을 헐고 그 동쪽에 누각을 세우다가 역사를 거의 마칠 무렵에 마침 흉년이 들어 낙성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계사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남양(南陽) 홍석(洪錫)이 판목(判牧)으로 와서 정사를 잘 다스려 폐단을 털어내자 다시 동헌(東軒) 동쪽에 자리를 택하여 그 누각을 옮기고 몇 칸을 고쳐 지어서 사신과 손님들이 오면 매양 이 누에 올라 술 마시고 시를 읊으니, 이 주의 풍경의 정채(精彩)가 전보다 백배나 되었다. 목사가 이제 예빈시 정(禮賓寺正) 김수손(金首孫)공을 통하여 나에게 정자의 이름과 기문(記文)을 청해 왔다. 나는 말하기를, ‘이 정자의 좋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먼데 것을 모은 것[聚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멀리 있는 모든 좋은 경치를 이 한 누(樓)로 모아 들였다는 것이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좌우와 전후에 강과 산이 두루 비치니, 아래 위 수백 리 사이에 저 들판의 광활함이며, 여염집의 즐비함이며, 나루터와 다리에의 다니기 고생하는 모습과, 역원(驛院)에 드나드는 나그네의 힘든 형편과, 밭가는 자ㆍ누에 치는 자ㆍ나무하는 자ㆍ소 말 먹이는 자ㆍ고기잡는 어부ㆍ물건파는 장수들ㆍ사람들이 생활하며 오가는 것들이 한이 없다. 아침에 해뜨고 저녁에 그늘지며 사철이 서로 바뀌는 것과, 우로(雨露) 상설(霜雪)의 변천이며 초목(草木) 화훼(花卉)가 피고 지는 것이며, 스스로 날고 스스로 울며, 스스로 모양을 이루고 스스로 빛을 내는 것 등 형기(形氣) 속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그 기상(氣象)이 각기 일정치 않음을 이 누에서 한번 눈을 들어보면 모두 알 수 있다. 아, 어쩌면 멀리서 이 누에 모여드는 것이 이와도 같은가. 올라 구경하는 좋은 경치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누각을 세운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볼 때에는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고, 여염을 바라볼 때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하며, 나루터와 다리를 바라볼 때에는 어찌하면 내를 잘 건너게 할 수 있을까 하며, 나그네를 바라볼 때에는 어찌하면 우리의 길에 나오기를 원하게 할까 하며,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 가지가 아님을 볼 때에는 죽는 이를 살려 주고, 추운 자를 따뜻하게 할 것을 생각하게 하며, 산천 초목과 조수(鳥獸) 어별(魚鼈)에게 이르기까지 화락하게 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멀리는 물(物)에서 취하여 이 누에 모으고 이 누에 모은 것을 다시 마음에 모아서, 이 마음이 항상 주(主)가 되어 내 눈과 귀에 부딪치는 것이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이 누에 이름 붙인 의의(意義)에 거의 가까울 것이며,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에도 또한 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홍후(洪侯)와 평소에 두터운 친분이 있고, 또 내가 앞서 알고 있었던 공주의 흠절을 후가 크게 이루었으니 내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후가 일찍이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어서 혜정(惠政)을 베푼 적이 있어 지금까지도 백성들이 부모같이 사모하니, 후가 광주에서 다스리던 것을 공주에 옮긴다면 공주가 어찌 잘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후는 곧 임기(任期)가 차서 돌아갈 것이나 후는 비록 가더라도 가지 않을 것은 이 누이다. 그러한즉 공주 백성들이 이 누를 생각하기를 옛날 주(周) 나라 백성들이 소공(召公)이 자주 쉬던 감당(甘棠)나무를 보고 소공을 생각할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이것이 기록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금강루(錦江樓) 금강 남쪽 언덕에 있다.
○ 박팽년(朴彭年)의 시에, “동정호(洞庭湖)만 어찌 홀로 강남(江南)에서 제일이랴. 금강의 기이한 풍경 세상에서 일러오네. 강머리에 손[客]을 보내는데 배는 뜨고, 청삼 물가에 갓끈[纓] 씻노라고 푸른 옷 벗어 거네. 물결은 만고의 외로운 달을 머금었고, 산은 천추의 한 조각 푸르름을 띠었고나. 이곳은 아름답고 화려한 해동의 땅, 지나는 손이 구경하노라고 몇 번이나 말을 멈추었나.”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금강의 봄물이 이끼보다 푸른데, 두 언덕 푸른 산은 그림을 펼쳤도다. 물가에 가득한 잔디풀 한 가닥 푸르고, 길에 쌓인 버들가지 천 무더기 희구나. 석양 나루터엔 사람들 다투어 건너고, 가랑비 내리는 빈 해자[空壕]에 기러기 홀로 오네. 역마(驛馬) 탄 총총 걸음 돌아가기 바쁘니, 물결 위의 흰 갈매기 응당 조롱하리.” 하였다. 망북루(望北樓) 성 북문루. 원수대(元帥臺) 주 서쪽 7리에 있다.
『신증』 응벽당(凝碧堂) 취원루(聚遠樓) 곁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주 서쪽 3리에 있다. 서편에 옛 능(陵)이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는 백제의 왕릉이라 하나, 어느 왕인지 알 수 없다.
【역원】 일신역(日新驛) 주 북쪽 10리에 있다. 광정역(廣程驛) 주 북쪽 45리에 있다. ○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아침해 둥그렇게 뜨자 광정역을 떠나니, 흰구름이 일만 산 푸른 것을 깊이 감추었네. 들꽃 난만(爛熳)히 주인 없이 피어서, 봄빛을 단장하여 그림 병풍 이루었네.” 하였다. 경천역(敬天驛) 주 남쪽 40리에 있다. 이인역(利仁驛) 옛 이름은 이도(利途)인데, 주 남쪽 25리에 있다.
○ 승(丞)이 있는 본도에 예속된 역이 아홉이 있으니, 용전(龍田)ㆍ은산(恩山)ㆍ유양(楡楊)ㆍ숙홍(宿鴻)ㆍ남전(藍田)ㆍ청화(靑化)ㆍ두곡(豆谷)ㆍ신곡(新谷)ㆍ영유(靈楡)이다. ○ 승(丞) 1인. 단평역(丹平驛) 주 서쪽 17리에 있다. 유구역(維鳩驛) 신풍(新豐) 서쪽 8리에 있다.
○ 《보한집(補閑集)》에, “고려 의왕(毅王)이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고 놀이를 좋아하므로, 문극겸(文克謙)이 정언(正言)이 되어 소(疏)를 올려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극겸이 드디어 집에 돌아와 시를 짓기를, ‘주운(朱雲)이 난간을 꺾은 것이 이름을 구함이 아니며, 원앙(袁盎)이 수레를 막은 것이 어찌 제 몸을 위함이랴. 한 조각 붉은 정성 하늘이 몰라주니, 파리한 말[馬] 억지로 몰아 머뭇거리며 물러왔네.’ 하였는데, 경인년 가을에 무신(武臣)들이 난을 일으켜 왕이 남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새로 이 역을 수리할 때에, 공장(工匠)을 불러서 벽에 단청을 하였는데, 공장은 당시의 묘수(妙手)로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잊었는데, 침실 서쪽 벽에 흰 옷에 갓 쓰고 말탄 사람이 시름없이 말 가는 대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가는 것을 그렸으니 행색이 처량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보아도 무슨 그림인 줄을 몰랐는데, 뒤에 송광사(松廣社)의 무의자(無衣子)가 승려 천여 명을 인솔하고 서원(西原 청주)으로 가는 길에 이 역에 투숙하였다가 이 그림을 보고 탄식하더니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이것은 바로 간신(諫臣)이 서울을 떠나가는 그림이다.’ 하고 드디어 시를 짓기를, ‘벽 위에 이 그림을 뉘 그렸는고. 간하던 신하 서울 떠나니, 일이 위태하네. 산승(山僧)이 그림 보고 오히려 서러워하거늘, 하물며 벼슬하는 사대부(士大夫)랴.’ 하였다. 뒤에 지나가던 행인이 또 그 시를 보고 차운(次韻)하여 벽에 쓰니, 그 한 시에는, ‘곡돌(曲堗)로 하라는 앞말을 일찍 도모하지 못하고, 머리 데고 나서 후회한들 쓸데 있나. 그 누가 이 간신(諫臣)의 가는 모습을 그렸는고. 벽 위에 가득찬 맑은 바람이 나부(懦夫)를 격동시키네.’ 하였고, 또 한 시에는, ‘흰옷에 누른 띠 간신(諫臣)의 그림, 이가 바로 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 떠나니, 붓 끝에 그림 솜씨 허비하여 무엇하리.’ 하였다.” 하였다.
보통원(普通院) 주 동쪽 3리에 있으니, 이는 곧 옛날의 영춘정(迎春亭)이다. ○ 중 연감(淵鑑)의 기문(記文)에, “큰 주(州)나 부(府)에는 반드시 영춘정이 있다. 동지(冬至)를 지난 지 95일이 되면 양기(陽氣)가 비로소 열리고, 만물이 맹동(萌動)하는 것을 입춘(立春)이라 이른다. 옛날에 큰 고을에서는 토우(土牛) 및 쇠붙이와 나무로 만든 농기구 약간과, 채소ㆍ과일ㆍ술ㆍ찬(饌) 등 제물 약간을 갖추게 한 다음 주관하는 관리가 문서를 가지고 이를 감독하여 갖추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한 뒤에 목사나 판관(判官)이 여러 아전과 장졸(將卒)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에 나가 각기 관복을 갖추고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직을 받들고 농사를 익히기 위함이요, 그 밖에 1년의 수입을 회계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며 경축을 행하는 등, 1년 중 행사를 하려면 이 영춘정이 아니면 마땅치 않은 것이다. 큰 고을에는 또 반드시 영빈정(迎賓亭)이 있었으니, 상사(上司)가 순시하거나 왕명으로 민정을 살피는 대소(大小)의 사신들이 오갈 때, 반드시 여러 장졸과 아전들에게 명하여 기(旗)를 들고 관대(冠帶)를 갖추어 먼저 멀리 그 고을 경계(境界)까지 가서 맞게 하고, 목사나 판관들은 속관을 통솔하되, 또한 군복(軍服)을 입고서 알장(謁狀)을 받든 채 근교(近郊)에서 기다리는데, 위의(威儀)와 예절을 엄숙히 하여 주객(主客)의 예를 도탑게 하며, 존비(尊卑)의 위차(位次)를 차리면서 맞고 보내는 것은 오직 이 영빈정에서 하였다.
지금 이 공주는 옛날 절도부(節度府)로서 계룡산이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고, 웅진 물이 서남쪽으로 감돌아 지리적으로 영수(靈秀)한 기운이 배태(胚胎)되어 역대로 크게 떨쳐왔다. 주 동쪽 2백 보에 폐허(廢墟)가 있는데, 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이것이 옛날 영춘정이라는 것이다. 주춧돌과 섬돌이 무너져 뒹굴고, 무성한 풀섶에 덮여 수백 명의 태수(太守)를 겪었건만 아무도 이 정자를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사설서 영(司設署令) 여흥(驪興) 민상백(閔祥伯)이 이 주에 부임한 지 1년이 못 되어서 직책을 닦고 치적을 이루어 모든 정사에 여가가 있었다. 공이 드디어 소속 관내(管內)에 공문을 보내어 공장(工匠)을 모집하고 역군을 징발하여 주(州)의 치소(治所)의 관사(館舍)ㆍ창고ㆍ학교ㆍ사원(寺院)ㆍ누각 등, 누추하거나 없어진 것들을 중수하고 복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생각건대 직위가 백성을 다스리는 장(長)으로서 권농(勸農)하는 직책을 띠고 있으므로 농사의 지도를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또 이 주의 치소는 전라ㆍ충청 두 도의 요충(要衝)에 처해 있어 실로 한 방면의 번화한 도회지이니, 빈객을 맞이하고 공로를 전별하는 예절도 소중한 것이다. 영춘정[東亭]은 이 두 가지의 일을 행하는 곳인지라 이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빨리 이 정자부터 세우자.’ 하였다. 이에 아전들은 마음을 다하고 공장 역군들은 힘을 다하여, 북을 울려 소집하기 전에 모이고 먹줄[繩]과 막대기로 독촉을 가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노력하여, 강 상류에서 재목을 흘려 내려오고 동쪽 언덕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게 하고는, 목사가 아침저녁으로 친히 현장에 임하여 전후로 지시 설계하여 길이와 넓이를 혹은 줄이고 혹은 늘렸으며, 지형에 따라 동쪽에 객청(客廳)을 만들고, 남향으로 원채를 높이며, 서쪽과 남쪽에 행랑채가 모두 14칸으로 옷 갈아 입는 방이 있는가 하면 음식 차릴 장소가 있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방, 여름에는 서늘한 대청이었다. 터 닦고 지으며 흙 바르고 단청을 칠하니, 그 제도는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그 꾸밈은 추하지도 않고, 펀펀한 뜰 다듬어진 층계(層階)와 행랑ㆍ보도 등이 있어, 위로는 예(禮)를 행할 수 있고, 아래로는 일을 볼 수 있도록 되었다. 정자가 이미 낙성되자 정자 아래를 지나가던 어느 사람이 머뭇거리며 칭찬하고 노래하며 돌아가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공이 공주를 다스려 공주가 비로소 번성해지니, 공주 백성은 공의 덕을 칭송하여 다투어 노래하도다. 공이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니 백성들은 생업(生業)을 이루게 되었고, 공이 사신을 맞으니 왕의 명령에 공손하였다. 공이 지은 정자를 보고 공의 행정을 알 수 있으니, 공이 베푼 정치는 이 정자로 거울이 된다.’ 하였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남북으로 오가며 보내고 맞는 땅에, 한덩이 높은 정자 갈래길을 굽어보네. 맑은 호수빛은 벽옥(碧玉)자리 펼친 듯, 가벼운 버들가지 황금실 나부낀다. 마을 배 돛대소리에 닭 오리 놀라 일어나고, 들 연기 낮은 곳에 갈매기 길 잃는다. 아, 이몸 구구하게 세공(歲貢)에 쫓겨, 꾀꼬리 울고 꽃피는 좋은 시절 보지 못하누나.” 하였다. 금강원(錦江院) 금강 북쪽 기슭에 있다. 환희원(歡喜院) 주 남쪽 35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주 북쪽 26리에 있다. 궁원(弓院) 주 북쪽 40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주 북쪽 52리에 있다. 웅진원(熊津院) 웅진 언덕에 있다. 공서원(公西院) 주 서쪽 31리에 있다. 반야원(般若院) 주 서쪽 49리에 있다. 고관원(古館院) 주 서쪽 67리에 있다. 공제원(公濟院) 주 북쪽 28리에 있다. 내창원(內倉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광도원(廣道院) 주 동쪽 57리에 있다. 불현원(佛峴院) 주 동쪽 82리에 있다. 효가리원(孝家里院) 주 동쪽 10리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단풍잎 몰아치고 원(院) 마을 비었는데, 산 앞에 선 옛 빗돌[碣]에 석양이 붉었네. 넓적다리 살 베인 효자 지금 어디 있느냐. 밤마다 저 달빛이 거울 속에 떨어지네.” 하였다. ○ “한 줄기 맑은 강물 푸른 하늘 담겼는데, 양쪽 기슭 붉은 나무 서풍과 싸움하네. 효가원이 어디메인가, 희멀건 가을빛 속으로 새 날아 없어지네.” 하였다.
【불우】 계룡갑사(鷄龍岬寺)ㆍ등라사(藤蘿寺)가 있으며, 가섭암(迦葉菴) 서거정(徐居正) 기문(記文)의 대략에, “산마루에서 샘물이 솟는데 항상 금(金)이 뛰는 것 같은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아래에 용담(龍潭)이 있으니 검푸른 빛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산 뒤에는 육왕탑(育王塔)이 있고 그 남쪽에는 아름다운 기운이 가득히 차 있어 제왕(帝王)의 도읍터가 될 만하며, 그 밖에 유명한 암자와 큰 사찰들이 모두 이 산의 승경(勝境)을 차지하고 있는데, 정 남쪽 고개 옛 암자 밑에 암자가 있으니 이를 가섭암이라 이른다.” 하였다. 율사(栗寺)ㆍ중심사(中心寺)ㆍ동학사(東學寺)ㆍ상원사(上院寺) 모두 계룡산에 있다. 반룡사(盤龍寺)ㆍ마곡사(麻谷寺) 모두 무성산(茂城山)에 있다. 수원사(水原寺) 월성산(月城山)에 있다. 동혈사(東穴寺) 동혈산(東穴山)에 있다. 서혈사(西穴寺)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주미사(舟尾寺) 주미산(舟尾山)에 있다. 정지사(艇止寺) 정지산(艇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공산(公山)에 있다. 계룡산사(鷄龍山祠) 계룡산 남쪽에 있다. 신라 때에 오악(五岳)에 견주어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에서는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정하여 매년 봄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서 제사하게 한다. 웅진사(熊津祠) 웅진 남쪽 기슭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독(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에서는 남독(南瀆)으로 삼고, 중사(中祀)로 정하여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하게 한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웅진은 옛날 백제국의 바다 어구에 있는데, 당(唐) 나라에서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하였다. ○ 당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평정하고, 좌위 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 도독에 임명하여 남아 있는 백성들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문도가 바다를 건너오다가 죽으니,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당시 백제의 땅은 전란을 겪은 나머지 집집마다 쇠잔 퇴폐하고, 시체가 수풀과 같이 널려 있었는데,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들을 거두어 묻고, 호구(戶口)를 적(籍)에 올리고, 부락을 정리하고, 관장(官長)을 임명하며, 길을 통하고, 교량(橋梁)을 가설하며, 제방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원하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 독려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거두어 기르며, 당 나라의 사직(社稷)을 설치하고, 책력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각기 그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되었다. 덕진폐현(德津廢縣) 주 동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소비포현(所比浦縣)이었는데, 신라 때 적오(赤烏)라 고쳐 비풍군(比豐郡)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공주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신풍폐현(新豐廢縣)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으로 혹은 무부현(武夫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청음(淸音)이라 고쳐 웅주(熊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공주 속현으로 삼은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고유성(古儒城) 유성현 동쪽 4리 광도원(廣道院) 옆에 있다. 객사(客舍)ㆍ향교ㆍ창고 등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취리산(就利山) 주 북쪽 6리에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 나라 칙사 유인원(劉仁願), 웅진 도독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같이 맹세하였다. 그 맹세한 글에 이르기를, “지난날 백제의 선왕(先王)이 거역하고 순종하는 도리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의 우호(友好)를 돈독히 하지 않으며, 친척들과 화목하려 하지 않고,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과 포악을 일삼고,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치고 백성을 도륙하는 등 조금도 평온한 해가 없었다. 천자께서 한 백성이 제 삶을 잃는 것도 민망히 여기고, 죄 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누차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라 타일렀으나 지리가 험하고 거리가 먼 것만을 믿고, 업신여기고 거만하므로 천자가 크게 노하여, 고생하는 백성을 조상(弔喪)하고 죄 있는 이를 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한 번 군사 행동으로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그 궁궐과 제택(第宅)을 헐고 터를 파서 웅덩이로 만들어 앞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경계를 삼아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후대의 자손들에게 교훈을 내려야 할 것이나, 먼 나라 사람들을 포섭하여 귀순하게 하고 반역하는 자만 치는 것은 옛 제왕들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긴 나라를 잇게 하는 것은 지난 날 철왕(哲王)들의 공통된 법칙이다. 모든 일에 반드시 옛것을 본뜨라는 것이 옛 책에 전해오기 때문에 전 백제의 대사가 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扶餘隆)을 웅진 도독(熊津都督)에 임명하여 그 제사를 받들어 지키며 그 강토를 보존하고,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서로 친선한 나라가 되어 각각 지난 감정은 버리고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기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되게 하고 인하여 사신 우위 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와서 친히 권유하고 칙지(勅旨)를 선포하여 서로 혼인을 약속하고, 거듭 맹세하여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함께 시종(始終)을 도탑게 하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서로 구휼하여, 그 정의를 마치 형제같이 할 것을 공경히 조서(詔書)를 받들어 감히 어김이 없게 할 것이며, 이미 맹세한 뒤에는 다같이 끝까지 변함없을 것이다. 만일 맹세한 바를 배반하고 마음을 두 가지 세 가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변방을 침범하면, 밝은 신(神)이 감림(監臨)하시어 백 가지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여 제사도 없어질 것이며 씨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鐵券)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여 자손만대까지 감히 어김이 없게 할 것이다. 신은 이를 들으시고 복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이것은 유인궤가 지은 글이다. 피를 마시고 나서 희생과 폐백을 맹세한 단(壇)의 북방에 묻고, 그 글은 신라 종묘에 간직하였다.
효가리(孝家里) 주 동쪽 10리에 있다. 향덕(向德)은 신라 때의 사람이었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주리는 중에 거기다가 여역(癘疫 전염병)마저 유행하였는데, 부모가 주리고 또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풀고 잘 겨를도 없이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였으나, 봉양할 도리가 없어 마침내는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공궤하였고, 또 모친이 종기가 나자 향덕이 이것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왕이 명령을 내려 벼 3백 곡(斛)과 집 한 채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하사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그곳을 효가리(孝家里)라 일컬었다. 독락정(獨樂亭) 주 동쪽 30리 삼기촌(三岐村)에 있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전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임후(林侯)는 일찍이 정사로써 안팎에 이름을 날렸다. 전일에 선군(先君)이 함주 목사(咸州牧使)로 계실 적에 임후가 통판(通判)으로 있어 두 분의 정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나는 이런 연유로 임후를 아버지같이 섬긴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다. 하루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내 집이 여러 대를 두고 공주 금강 상류에서 살아왔는데, 경상ㆍ전라ㆍ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이곳을 삼기(三岐)라 이른다. 내가 살고 있는 남쪽 5리에 산이 끊어진 곳이 있다.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나간 것이 2리쯤 가서 솟아 작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긴 대와 무성한 솔이 우거져서 사랑스럽고, 세 강물이 꿈틀거리며 동쪽으로부터 그 아래를 감싸 흐른다. 내가 일찍이 그곳을 지나다가 기이하게 여겨 한 번 올라가 본즉 북쪽으로 원수산(元帥山)을 쳐다보니 성곽같이 둘러 있고,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니 하늘에 드높이 솟아 있는데, 동서의 여러 산들이 혹은 조회하는 듯 혹은 읍(揖)하는 듯 기이한 형상을 바치는 것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며, 마을과 논밭의 이랑들이 멀고 가까이 바둑판처럼 펼쳐 있었다. 나는 이 기이한 경치를 즐거워하고, 앞 사람들이 내버려둔 것이 애석하여 드디어 그 봉우리 왼편에 별장을 짓고 그 위쪽에 정자를 세웠다. 강은 질펀한 모래밭에 넓게 흐르니, 하늘과 물은 한 빛이요, 바람불면 푸른 주름살 같고, 달 비치면 은빛 물결이었다. 저 돛과 노, 물고기와 새들이 가고 오고 떴다가 잠겼다 하는 것들이 다 내 발 밑에 있고, 산의 층층이 솟은 봉우리, 겹겹이 둘러싼 석벽, 큰 산기슭, 긴 숲이 가까이는 들판의 푸른 데에 접하고, 멀리는 하늘이 푸른 데에 혼연해 있다. 또 구름 연기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들도 다 궤석(几席) 위에서 대하게 되며, 심지어 밭가는 자, 소치는 자, 고기잡이, 나무꾼들의 노래하고 화답하는 것들과 놀이하는 사람 길가는 나그네들이 사방 들판에서 꾸불거리며 연달아 끊이지 않는 것도 또한 앉아서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복건(幅巾)과 명아주 지팡이로 날마다 이 정자에 오르니, 마음이 한가로워 자신과 세상을 모두 잊고, 혼자 강 위에서 낚시질하고 혼자 산에서 나물 캐면서 봄날 아침의 꽃과 가을밤의 달을 내 혼자 읊어 즐기고, 구름 낀 봉우리의 기이한 것과 눈 덮인 소나무의 맑음을 내 혼자 보고 즐겨, 무릇 경치의 즐길 수 있는 것을 나 혼자만이 점유하고 있는 듯, 그 상쾌한 기분이란 마치 매미가 더러운 데에서 벗어난 것같이 높은 세상 밖에서 논다. 사철의 경치는 같지 않으나 나의 즐거움은 홀로 무궁한 것이다. 이에 감히 송(宋) 나라 속수(涑水 사마광(司馬光)) 선생의 원명(園名)인 독락(獨樂) 두 글자를 취하여 내 정자에 편액(扁額)하고 보니 참람한 것도 같다. 그러나 그가 즐긴 것은 이(理)요, 내가 즐기는 것은 물(物)이니, 그 이름이 같다고 혐의쩍을 것은 없다. 자네에게 기문을 지어 주기를 청한다.’ 하니, 나는 임후에게 글이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옛날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고, 또 안자(顔子)를 칭찬하여, ‘누추한 마을에서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을 마시고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그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지 않았으며, 송(宋) 나라 정명도(程明道) 형제도 학자로 하여금,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발단만 하고 설명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임후가 홀로 그 정자를 즐기면서 나의 말을 구한다. 이미 혼자서 즐긴다고 하였으니 더욱이 남이 알 바 아니거든 하물며 내 비록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나, 이른바 즐거움이란 것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니, 감히 임후의 정자의 기문(記文)을 짓겠는가. 그러나 임후의 말씀이. ‘저 속수 선생의 즐거워한 바는 이(理)요,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물(物)이다.’ 하였는데, 내가 듣기로는 이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이가 없는 것이니,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이나,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것이며,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나는 것이며, 풀과 나무가 무성하였다가 시들고 떨어지는 등, 이 눈과 귀에 들어오는 모든 만물이 그 어느 하나도 지극한 이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즉, 후가 즐거워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성현의 즐거워하는 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한갓 그 경치만을 완상할 뿐이겠는가.
가만히 요새 세상의 사대부(士大夫)들을 보건대 비록 스스로 편히 할 만한 전원(田園)이 있는 자도 모두 명리(名利)의 고삐에 얽매여서 동서로 분주하여 쉴 때가 없고, 심지어는 종신토록 그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자도 있으며, 간혹 고향에 돌아오는 자가 있다 해도 또한 산대[籌]를 잡고 전곡(錢穀)이나 계산하는 데 불과하니, 이는 그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후는 작위(爵位)가 그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도 아직 그리 늙지도 않은 터에 영화로운 벼슬을 사양하고 세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산수 사이에 한가롭게 소요하기를 이같이 하니, ‘독락’이란 편액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정자가 속수(涑水)의 독락원과 함께 아름다움을 짝하여 길이 전할 것은 의심이 없다. 사마공(司馬公)이 천하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끝내 낙양(洛陽)에서 한가롭게 살지 못하였던 것인데, 지금 후도 일시의 명망을 지고 있으니,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은 조정의 벼슬만을 헛되게 차지하였을 뿐 세상에 보익이 없는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분주하며 그칠 줄을 모르니, 부끄럽지 않겠는가. 어찌하면 관을 걸고[掛冠] 이 정자에서 후를 따라 속수(涑水)의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외고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으면서 한 번 그 즐기는 바의 고상한 지취(志趣)를 엿볼 수 있을까.” 하였다.
『신증』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년의 성가(聲價)를 누가 그대에 비기리. 그 다리[脚] 아래 만리의 청운(靑雲) 길이 평평히 보였네. 잠깐 조정에 나왔다가 옛 고장 다시 찾고, 또다시 영화로운 벼슬에 높은 공훈 이루었다. 공명(功名)이란 참으로 조물주의 작희(作戲)런가. 남아의 출처(出處)를 어찌 쉽사리 논하리오. 말방울 울리며[鳴騶] 길을 재촉하니, 북산(北山)의 원학(猿鶴)이 다시 이문(移文)할까 두렵도다.” 하였다.
○ 이름난 동산[園]이 저 금강을 눌러 나직하게 있는데, 옛날에 내가 찾으려다 길을 몰랐네. 하씨(何氏)의 임정(林亭)이 가장 좋은 줄 알았어도, 두릉(杜陵)이 오동잎에 시를 쓰지 못하였네.수레에 기름칠해 반곡(盤谷)에 따르지 못하니,눈 속에 배를 저어 마침내 섬계(剡溪)를 찾으리.여울 물 감추고 안개 걷지 말라.도리(桃李) 나무 밑에 이미 길이 났다고 들었노라. 안무정(按舞亭) 금강 아래쪽에 있는데 주에서 2리쯤 된다. 옛날 어느 안렴사(按廉使)가 이 정자에 올라와 멀리 앞을 바라보고 술이 취하여 저도 모르게 춤을 추었다 하여 안무정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가 폐하여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뒤에 어느 목사가 중수하려 하다가 감사(監司)에게 견책을 받아 이루지 못하니, 사람들이 조롱하여 말하기를, “전에는 취해서 춤추는 안렴사가 있는가 했더니, 뒤에는 술깨서 읊조리는 감사도 있구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안무정 앞에는 강산도 좋은데, 안무정 속에는 풍월(風月)이 늙었구나. 그 당시의 안렴사는 진정 호걸이로다. 술이 취해 일어나 춤추니 옥산(玉山)이 스스로 거꾸러졌네. 그 풍류가 질탕(跌宕)하기 천하 제일이라, 아름다운 그 이름 정자와 함께 전하네. 뒤에 오는 사신(使臣)들은 어이 그리 삭막(索寞)하던고. 강산과 풍월이 오랫동안 한가했네. 들으니 금강의 어진 주인, 정자를 고쳐 지어 경물도 새로울 뻔했는데, 이것을 살풍경(殺風景) 만든 자 그 누구이던고. 백두(白頭) 감사가 참으로 악한 손[賓]일세. 옛날에 어떤 이가 황학루(黃鶴樓)를 부수려 할 때, 황학은 노기 띠고 하늘도 부끄러워했네. 다락은 부술지언정 강산 풍월이야 어찌하리. 천년 지난 지금까지 웃음만 사는고야. 그대는 못 보았나, 그 옛날 안무정(按舞亭)에서, 황금빛 아름다운 술을 백옥병에 가득 담고, 미인이 흰 이빨 드러내고 노래하고 가는 허리 춤을 추니, 손님도 덩실덩실 두 소매 나부낀 것을. 또 보지 못하였나, 오늘의 안무정엔, 앙상한 떨기 병든 잎새에 조수(潮水)만이 가득하니, 새들 노래하고 이무기[蛟龍]가 춤을 추니, 저 먼 산이 미인의 푸른 눈썹 흉내 내는 것을. 옛 사람 지금 사람이 때가 같지 않으니, 술 취해 춤춘 이와 깨어서 읊은 이 그 누가 잘한 것인가. 인생이란 행락(行樂)하고 볼 것이니, 이 밖의 남은 일은 도무지 모를레라.” 하였다. 정지방(亭止房) 금강 가에 있다. 주와의 거리는 3리이다.
○ 고려 권적(權適)의 시에, “반년 티끌 속에 청산과 등졌더니, 고요한 절간에 하루의 한가로움 얻었네. 처음 국화 보고 가절(佳節)인 줄 알았고, 붉은 단풍잎에 쇠(衰)한 얼굴 비친 것 놀랐네. 저 하늘은 끝없는 들판 밖을 둘러쌌고, 배는 맑은 강 위 적막한 사이에 떠 있고나. 상방(上房)에 고주인(沽酒引) 있으니, 비낀 해 저녁 연기 올라도 돌아갈 줄 모르네.” 하였다. 명학소(鳴鶴所) 유성현(儒城縣) 동쪽 10리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 6년에 명학소 사람 망이(亡伊)가 그 도당들을 모아서 본주(本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정에서 이 명학소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으로 만들고, 영(令)ㆍ위(尉)를 두어 안무(安撫)하게 하였더니, 그 뒤에 항복하였다가 다시 배반하므로 곧 폐해 버렸다. 청류부곡(淸流部曲) 주 동쪽 40리에 있다. 지금은 구을촌(仇乙村)이라 칭한다. 양화부곡(良化部曲) 주 동쪽 40리에 있다. 완부부곡(薍釜部曲) 주 서쪽 40리에 있다. 완동(薍洞)이란 곳이 있는데, 아마 그곳인 듯하다.
이인부곡(里仁部曲) 바로 이인역(利仁驛)이다. 미화부곡(美化部曲) 유성현 동남쪽 28리에 있다. 귀지부곡(貴智部曲) 주 남쪽 29리에 있다. 금단소(今丹所) 주 남쪽 20리에 있다. 갑촌소(甲村所) 유성현 북쪽 10리에 있다. 촌개소(村介所)ㆍ복수소(福水所) 모두 유성현 동쪽 23리에 있다. 박산소(撲山所) 덕진현(德津縣) 동쪽 5리에 있다. 금생소(金生所) 덕진현 동쪽 7리에 있다. 고조산(古曹山) 주 동쪽 50리에 있다. 속설에 옛날 현(縣)의 터라 하나, 어느 현인지 알 길이 없다. 이인산성(里仁山城) 주 남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0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양화산성(良化山城) 주 남쪽 4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3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풍산성(新豐山城) 신풍현 남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1척이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유성산성(儒城山城) 유성현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80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덕진산성(德津山城) 덕진현 남쪽 1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67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신라 한서의(韓恕意) 당 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웅천 조교(熊川助敎)가 되어 고을 사람 번길(番吉)의 묘비를 지었는데, 지금도 효가리(孝家里)에 있다.고려 김은부(金殷傅) 고려 현종 때에 본주 절도사가 되었는데, 왕이 거란(契丹)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오자, 은부가 예를 갖추고 교외로 나와서 맞으며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시며, 서리와 눈을 무릅쓰고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하고, 의대(衣帶)와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파산역(巴山驛)에 도착하니 아전들이 다 도망하여 수라를 거르게 되었다. 은부가 또 음식을 올려 아침저녁에 나누어 공궤하였다. 거란병이 물러가자 왕이 돌아오는 길에 공주에 머물렀다. 은부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니, 왕이 곧 총애하였는데 이가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송자호(宋子浩) 판관(判官)이 되어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 권근(權近)의 시에, 견견(狷狷)하게 강직한 뜻 품었고, 명관(名官)으로 높은 치적(治績) 있었네. 위태함에 당하여 어찌 환란을 피하랴. 적진으로 달려가 곧 목숨 버렸네. 주었다가 앗아가니저 하늘 멀구나. 지극한 그 충성 태양처럼 밝도다. 그대 죽음 듣고 내 간장 뜨거워, 답답하여 편안하지 못하네.” 하였다. 이백겸(李伯謙) 충렬왕(忠烈王)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백성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었다. 심양(沈諹) 충렬왕 때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장성현(長城縣)에 사는 여자가 말하기를, “금성대왕(錦城大王 신(神)의 칭호)이 나에게 내려서 하는 말이, ‘네가 금성당(錦城堂)의 무당이 안 되면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이리라.’ 하기에, 내가 두려워서 복종했다.” 하고, 또 그 고을 사람 공윤구(孔允丘)와 간통하고는 신의 말이라고 지어서 말하기를, “내가 장차 중국에 가려고 하는데, 반드시 공윤구와 동행할 것이니, 나주(羅州) 관원은 역마(驛馬)를 주라.” 한다고 했다. 하루는 역리(驛吏)가 도병마사(都兵馬使)에게 급히 보고하기를, “금성대왕이 온다.” 하니, 도병마사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또 나주 사람으로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있어서 그 신이(神異)한 사실을 갖추어 왕에게 귀띔하니 왕이 의논하여 맞이하려고 하자 그들이 지나가는 고을의 수령들은 모두 공복(公服)을 입고 교외에 나와 맞아서 음식 대접을 극진히 했다. 무당이 본주에 왔을 때 심양(沈諹)이 접대하지 않으니, 무당이 노하여 신의 말이라고 전하기를, “내가 반드시 심양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하고는 일신역(日新驛)으로 물러가서 투숙했다. 밤에 심양이 사람을 보내어 엿본즉 계집무당이 공윤구와 동침하고 있었다. 드디어 잡아다가 국문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진화(陳澕) 우사간(右司諫)으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왔다가 임기 중에 죽었다. 최재(崔宰)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로 왔다. 전유(田濡) 판관(判官)이 되었다.본조 맹사성(孟思誠) 치적이 도내에서 최고였다. 황자후(黃自厚)ㆍ이정간(李貞幹)ㆍ권담(權湛)ㆍ이석형(李石亨)ㆍ이명신(李明晨)ㆍ이영구(李英耈)ㆍ함우치(咸禹治).
【인물】본조 이명덕(李明德)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효자】신라 향덕(向德) 고적조(古蹟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려 이복(李福) 본주 아전이다. 이장생(李長生), 강성(姜成) 낭장(郞將)이다. 모두 효자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열녀】고려 고씨(高氏) 현감 정자구(鄭自求)의 아내이다. 정문을 세웠다.『신증』본조 고씨(高氏) 양한필(梁漢弼)의 아내이다. 남편이 죄로 죽고, 고씨가 연좌되어 관비(官婢)가 되었는데, 관노(官奴)가 강탈하려 하자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금상(今上) 18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장증문(張曾文)의 아내이다. 남편이 외출하고 혼자 있는데, 이웃 사람이 밤에 그 방에 들어와서 강탈하려고 칼을 빼들고 위협하며, 온몸에 자상(刺傷)을 내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금상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설청강로마지지(雪晴江路馬遲遲) 고려 전유(田濡)의 시에, “공사(公事)는 구름같이 쌓여 귀밑털 세려는데, 눈 갠 강변길 말걸음 더디구나. 백성 걱정하는 이내 마음, 아전들은 제 모르고 강산(江山) 보고 시구(詩句) 생각한다고 잘못 이르리.” 하였다. 이락황휴일경미(籬落荒畦一逕微) 정추(鄭樞)의 시에, “누런 구름 자욱하고 눈송이 퍼붓는데, 울타리 밑 거친 밭둑 사이 한 가닥 길이 가늘다. 소나무 언덕 밑 말에게 물을 먹이고, 채찍 흔들면서 천천히 백사장 돌아가누나.” 하였다. 취헌대운연분첩(翠巘帶雲連粉堞) 김휴(金休)의 시에, “푸른 산은 구름 띠어 성첩에 연해 있고, 붉은 노을 따오기와 함께 푸른 섬에 떨어진다.” 하였다. 강류청사사군심(江流淸似使君心) 이첨(李詹)의 시에, “산빛은 기생의 눈썹보다 푸르고, 강물은 원님의 마음같이 밝았네.” 하였다. 일말웅강청요지(一抹熊江靑繞地) 남수문(南秀文)의 시에, “한 가닥 웅진 강물 새파랗게 땅을 두르고, 일천 겹의 계룡산 파랗게 허공에 떴다. 고목에 연기 엉긴 데 관도(官道)를 나누고, 풀에 덮인 긴 둑은 논밭을 싸고 있네.” 하였다.
십경(十景) 서거정(徐居正)의 시. 금강의 봄놀이[錦江春遊] “탁금강(濯錦江) 가에 천지가 봄이로다. 2ㆍ3월 접어드니 천기(天氣)가 새로워라. 옥병에 술 사들고 꽃다운 봄 찾아가니, 긴긴 해 따스한 바람이 사람을 못 견디게 하네. 날씨 갠 강물 새로 불어 누른 포도주가 넘치는 듯, 가는 목란 멋대로 저어 그림배 옮겨지네. 살구꽃 엉긴 그림자에 만취해 돌아가니, 옥저(玉笛) 한 소리에 산 달이 높았구나.” 하였다. 월성의 가을 흥취[月城秋興] “가을 바람 한들한들 강 물결 이는데, 앞산 뒷산에 단풍잎도 많구나. 등산임수(登山臨水) 솟는 흥취 타락[酥]보다 더 진한데, 십천(十千)의 아름다운 술 금잔으로 따르며, 국화를 가득 꽂으니 사모[帽]가 기울어지네. 술을 고래같이 마시고 시를 무지개같이 토하기를 어찌 사양하리오. 송옥(宋玉)이 신산(辛酸)하게 한 평생 헛되이 비추사(悲秋詞)만 짓는 것 배우지 말게.” 하였다. 웅진의 밝은 달[熊津明月] “웅진 강물은 맑고도 잔잔한데, 웅진에 달이 언제 오려나. 백제의 옛일은 새 날아 지나간 듯, 내 저 달에게 묻노니 달은 응당 알리라. 당 나라 군함인 한 누선(樓船)이 한 번 건너온 뒤로, 사직(社稷)이 폐허되고 도독부(都督府) 된단 말인가. 낙화암(落花巖) 앞에는 봄 시름도 깊은데, 조룡대(釣龍臺) 아래에 조수[灣水]는 돌아오네.” 하였다. 계룡산의 한가로운 구름[鷄嶽閑雲] “계룡산 높고 높아 푸른 층층 솟았는데, 맑은 기운 굼실굼실 장백(長白)에서 달려왔네. 산에 못이 있으매 용이 서렸고, 산에 구름 있으매 만물에 혜택 주리. 전날에 시험삼아 산 속에 놀아보니, 신령함이 다른 산과 판이하더라. 마침내 비를 내려 천하에 혜택 줄 제, 용은 구름 몰고 구름은 용 따르리.” 하였다. 동루에서 손을 보냄[東樓送客] “금강 강가의 금강루, 황학이 한 번 간 뒤 구름만이 유유(悠悠)하네. 남북으로 환유(宦遊)하는 자 그 몇이더냐. 방초(芳草)에 이별하는 서러움 어느 해나 멎을고. 옛날에 작별할 땐 칠(漆)빛 같던 그 머리가, 올해 이별에는 눈보다 희단 말인가. 흐르는 저 강물과 이별의 이 한 어느 것이 얕고 깊으랴. 양관(陽關) 한 곡조가 끊어지니 시름일세.” 하였다. 서사에 중을 찾음[西寺尋僧] “조각배 매어놓고 옛절을 찾아드니, 강 언덕 가는 길이 높았다 낮았다 하네. 10년 동안 중을 찾아 한가로이 오가니, 청등(靑藤) 지팡이, 흰 버선, 한 켤레 짚신, 나도 역시 평생에 지허(支許)의 무리라. 결사(結社)할 그 약속을 왜 저버리랴. 마침내 용면 노거사(龍眠老居士)의 손을 빌려서, 호계(虎溪)의 삼소도(三笑圖)를 그려 내리라.” 하였다. 삼강에 불은 녹수[三江漲綠] “세 강의 근원 은하(銀河)에서 흘러나와, 합세하여 금강되니 이끼보다 푸르도다. 어젯밤 작은 비에 반 상앗대[半篙] 물 불으니, 포도주가 처음 괴는 듯. 저문 날에 누구 집 두세 척 배가, 복사꽃 뜬 물결 속을 목란(木蘭) 삿대로 헤쳐가나. 도롱이 입고 부들 삿갓 쓴 현진자(玄眞子)를 물어서, 창랑곡(滄浪曲) 노래하며 찾으려네.” 하였다. 오현에 쌓인 푸르름[五峴積翠] 오현은 차현(車峴)ㆍ판현(板峴)ㆍ마현(馬峴)ㆍ화현(火峴)ㆍ적여현(狄餘峴)이다.
○ “공주성의 이 승경(勝景)이 천하 제일 아니런가. 다섯 봉 높이 솟아 사각(四角) 진산(鎭山) 이루었네. 멀리 푸르름이 아득히 연했는데, 삼삼(森森)한 전나무 솔나무 구렁에서 하늘로 솟아 있다. 몇 번이나 이 인간 세상에 추위와 더위 바뀌었던고. 사시(四時)에 늙지 않고 푸른 빛을 지녔어라. 산중에 황정(黃精)을 캐어 먹고, 학(鶴) 타고 저[筌] 불면서 오락가락 하고저.” 하였다. 금지의 연꽃[金池菡萏] “직녀성[天孫] 고운 손으로 비단틀에 짜아내어, 푸른 빛 치마하고 붉은 빛 적삼했나. 바람에 좋고 비에 좋고 달에 또한 좋으니, 가벼운 연기 가는 안개 향기가 부슬부슬. 어느 해 태화 봉두(泰華峯頭)에서 옮겨 왔던가. 꿀맛, 눈[雪]맛 입에 넣으매 오랜 병도 낫는다오. 재목이 너무 크면 쓰기 어렵나니, 연밥의 그 크기가 배[船]보다 커서 무엇하리.” 하였다. 석옹의 창포[石甕菖蒲] “백제의 고물(古物)이란 다만 이 돌항아리, 배만 크고 펀펀하니 무엇에 쓰랴. 창양(菖陽)은 천지의 정기라 구름 헤치고 돌 쪼개어 여기에 옮겼는 줄 누가 알랴. 구절(九節)의 뿌리에는 교룡(蛟龍)이 늙은 듯, 신령스러운 그 약성(藥性) 천하에 드물리라. 이를 먹으면 긴 수명 살 것이니, 구구히 요초(瑤草) 찾아 무엇하리.”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仁祖) 24년에 공산현(公山縣)으로 강등시켰다 유탁(柳濯)의 변란 때문이었다. 이어 다시 승격시켰다. 현종(顯宗) 11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숙종 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영종(英宗) 4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성지】 쌍수산성(雙樹山城) 북쪽 2리에 있고 백제(百濟) 성왕(聖王) 1년에 웅진성(熊津城)으로 수리한 것이 이것이다. 《승람(勝覽)》에 이르는 경치는 공산성(公山城)은 석축(石築)으로 한 우물[井]과 세 개의 못[池]이 있고, 신라 때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본조 선조(宣祖) 계묘년(癸卯年)에 수축하였는데, 인조(仁祖)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임금께서 남쪽으로 거둥하실 제, 이곳에서 주필(駐驆 임금의 행차가 잠시 머무르는 것)하였다가 쌍수석축(雙樹石築)이라 이름하고 갔다. 둘레가 2천 4백 4보이고, 남북으로 두 개의 문이 있고, 동북쪽으로 수구문(水口門)이 있으며, 밖에는 하나의 못이 있다. 바깥 성의 길이는 3백 50장(丈)인데, 좌측 익성(翼城)은 길이가 25장이고, 우측 익성의 길이는 좌측 익성과 같은데 암문(暗門)이 있다. 한 성의 북쪽에는 북루(北樓)를 끼고 있으며 주위가 절벽이고 강물과 연해 있다. 유성고성(儒城古城) 우측 현(縣) 동쪽 5리에 있다. 둘레가 6백 80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덕진고성(德津古城) 좌측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1백 67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신풍고성(新豐古城) 우측 남쪽 3리에 있는데, 둘레가 7백 1척이다. 양화고성(良化古城) 우측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둘레가 7백 67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이인고성(里仁古城) 서남쪽 20리에 있는데, 둘레가 1천 5백 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독현고성(禿峴古城) 북쪽 20리에 있고, 둘레가 1천 5백 척이다. 무성(武城) 옛날에는 무성산(武城山) 위에 있었다. 고성(古城) 월성산(月城山)에 옛날 성터가 있다.
【영아】 순영(巡營) 본조 태조 4년에, 충주(忠州)에 이 영을 세웠는데, 선조(宣祖) 35년 관찰사 유근(柳根)이 본주로 옮겼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ㆍ공주 목사(公州牧使)를 겸한다. 도사(都事) 옛날에는 해운판관령(海運判官領)을 겸하여 아산현(牙山縣)의 공진창(貢津倉) 세곡(稅穀)을 바쳤다. 영종(英宗) 임오년(壬午年)에 없어졌다. 심약(審藥)ㆍ검률(檢律) 각 1인. 우영(右營) 인조(仁祖) 조에 세웠다. 우영장(右營將) 한 사람이다. 속읍에는 공주(公州)ㆍ옥천(沃川)ㆍ연기(燕岐)ㆍ석성(石城)ㆍ부여(扶餘)ㆍ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노성(魯城)ㆍ진잠(鎭岑)ㆍ회덕(懷德)ㆍ전의(全義)이다. 【진도】 금강진(錦江津) 동북 5리에 있다. 웅진(熊津) 서쪽 7리에 있다. 지동진(紙同津) 동쪽 30리에 있다. 잠상진(岑尙津) 서쪽 15리에 있다. 【산물】 종이[紙]ㆍ먹[墨]ㆍ감[枾]ㆍ대추[棗]ㆍ쏘가리[錦鱗魚]ㆍ웅어[葦魚]ㆍ숭어[秀魚]. 【사원】 충현서원(忠賢書院) 선조(宣祖) 14년에 세웠다가 인조(仁祖) 을축년(乙丑年)에 사액(賜額)하였다.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 여주(驪州)에 보인다. 이목(李穆) 자는 중옹(仲甕), 본관은 전주(全州)인데, 연산군 때 무오사옥(戊午史獄)의 화를 입어 문과관(文科官)으로 영안도(永安道) 평사(評事)가 되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성제원(成悌元)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州)이며, 본관은 창녕(昌寧),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조헌(趙憲) 김포(金浦)에 보인다. 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모두 문묘(文廟)에 보인다. 서기(徐起) 자는 대가(大可), 호는 고청(孤靑), 본관은 이천(利川)인데, 지평(持平)을 추증받았으며, 별사(別祠)에 배향한다. 창강서원(滄江書院) 인조(仁祖) 기사년에 세웠다가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황신(黃愼)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본관은 창원(昌原)인데, 광해주 정사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으며,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주D-001]수(隋) 나라의……조 장군(祖將軍) : 수(隋) 나라 장수 하약필은 부에서 양자강을 건너가서 진(陳) 나라를 평정하였고, 진(晉) 나라 조적(祖逖)은 강동에서 양자강을 건너면서 당시에 중원(中原)을 점령하고 있는 오랑캐를 숙청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주D-002]창랑가(滄浪歌) : 굴원(屈原)의 글에 어부(漁父)가 굴원과 이야기하다가 노를 두들기며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을 것이며,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 하였다. 그것은 굴원에게 세상을 따라 처신하라는 뜻이다. [주D-003]쓰면 행하고 버리면 간직하네 : 이 일절(一節)은 공자가 그의 높은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한 말이다. [주D-004]못물에서…… 본다 : 두보(杜甫)의 시에, “지수관위정(池水觀爲政)”이란 구절이 있다. 그것은 여기와 비슷한 경우에 지어 준 것인데, 못물의 맑고 고요한 것으로 그 정치에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D-005]왕인(王人) : 왕명(王命)을 받들어 지방에 일 보러 온 사신(使臣)을 왕인이라 한다. [주D-006]어찌하면……있을까 하며 : 《주역(周易)》에, “큰 내를 잘 건너는[利涉大川] 격이니 가서 공이 있으리다.” 하였고, 《서경(書經)》에도, “큰 내를 건넌다면 너로써 배를 삼으리라.” 하는 등의 말이 있는데, 모두 군자의 덕과 잘하는 정치에 비유한 말이다. [주D-007]어찌하면……원하게 할까 하며 : 《맹자(孟子)》에 “관(關)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검문(檢問)만 하고 통행세를 받지 않는다면 천하의 나그네가 다 기뻐하여 모두 그 나라의 길로 나가기를 원할 것이다.” 하였다. [주D-008]산천 초목과……위한 것이다 : 《서경》에, “천하가 태평이 되어 초목과 새짐승과 물고기와 자라 등속이 다 화락하다.” 하였다. [주D-009]주(周) 나라……생각할 것 :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지방관이 되었을 때에 민간에 나오면 감당나무 밑에 쉬면서 일을 처리하였는데,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시를 읊기를, “무성한 감당을 꺾지 말고 치지 말라. 소백(召伯)의 쉬던 곳이다.” 하였다. [주D-010]가 태부(賈太傅)가 상수(湘水)에 글을 던지고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조정에서 쫓겨나서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멀리 좌천(左遷)되어 가면서, 충신 굴원(屈原)이 빠져 죽은 상수(湘水)를 지나다가 글을 지어 물에 던져 굴원을 조상하였다. [주D-011]이 한림(李翰林)이……읊은 것 : 이태백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쫓겨나서 강남에 가서 황학루에서 시를 지었다. [주D-012]병든 몸이……이른 것 : 이것은 정도전 자신이 조정에서 쫓겨나서, 전라도 나주(羅州)에 귀양갔다가 3년 만에 돌아온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13]《보한집(補閑集)》 : 고려 시인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책이다. [주D-014]주운(朱雲)이 난간을 꺾은 것 : 한(漢)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이 임금에게 바른말로 간하다가, 임금이 노하여 형벌을 주려고 어사(御史)를 시켜 끌어내니, 주운이 소리를 지르며 난간을 휘어잡아 난간이 꺾어졌다. [주D-015]원앙(袁盎)이 수레를 막은 것 :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놀러 나갔다가 수레를 몰아 높은 언덕으로 달려가려 하니, 원앙이 몸으로 수레를 막으며 간절히 간하였다. [주D-016]곡돌(曲堗)로 하라는……쓸데 있나 : 《한서(漢書)》에서 나온 말인데, “어느 집에서 아궁이와 구들과 굴뚝을 바로 내고, 굴뚝 옆에다 섶을 쌓아 놓았다. 한 친구가 보고 말하기를, ‘이러다가는 화재가 나기 쉬우니 구들을 구불구불하게[曲堗] 고치고 섶을 다른 데로 옮기라.’ 하였으나, 주인은 듣지 않더니 수일 후에 과연 불이 났는데, 이웃에서 와서 불을 끄느라고 머리가 타고 이마가 데인 이가 있었다. 그 집에서 이웃 사람들을 대접하는데 머리 타고 이마 데인 사람을 윗자리에 앉게 하고, 전일에 구들을 고치라고 미리 말하던 사람의 고마움을 몰랐다가 다시 옆의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전일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는 말이 있다. [주D-017]벽 위에……나부(懦夫)를 격동시키네 : 《맹자(孟子)》에, “백이(伯夷)의 맑은 바람은 천추 뒤에서도 나약(懦弱)한 자를 격동시킨다.” 하였다. [주D-018]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 굴원은 초왕(楚王)이 자기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자 서울을 떠나 상수(湘水)가에 돌아다니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미자(微子)는 은(殷) 나라 왕족(王族)으로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제기(祭器)를 가지고 나라를 떠났다. [주D-019]당 나라의……묘휘(廟諱)를 반포하니 : 당 나라의 영토가 되었다는 표시로 당 나라의 역서(曆書)를 쓰게 하고, 묘휘(廟諱)는 임금들의 이름인데, 당 나라 백성이 되었으므로 당 나라 임금의 이름을 부르거나 쓰지 못하도록 알려 주는 것이다. [주D-020]구분전(口分田) : 그 집의 식구에 따라 나누어 주는 농토이다. [주D-021]관을 걸고[掛冠] : 한(漢) 나라 매복(梅福)이 벼슬을 버리고 성동문(城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가버렸다. [주D-022]소동파(蘇東坡)의 시 : 소동파가 사마속수(司馬速水)를 위하여 독락원의 시를 지어 주었다. [주D-023]출처(出處) : 출은 출세하는 것이요, 처는 들어앉는 것이다. [주D-024]말방울 울리며……다시 이문(移文)할까 : 육조(六祖) 시대에 주옹(周翁)이 처음에 종산(鍾山)에 고상한 처사(處士)로 있다가 뒤에 부름을 받아 벼슬하였는데, 지방에 수령(守令)으로 가면서 고향에 한번 들리려 하니, 그의 친구 공덕장(孔德璋)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종산(鍾山)의 신령을 대신하여 주옹을 오지 못하게 조롱하였다. 명추(鳴騶)니 원학(猿鶴)이니 하는 것은 모두 〈북산이문〉 중에 있는 문구(文句)이다. [주D-025]하씨(何氏)의 임정(林亭)이……쓰지 못하였네 : 두보(杜甫)가 하 장군(何將軍) 임정(林亭)에 놀면서 지은 시에, “오동잎에 시를 쓴다.”는 말이 있다. [주D-026]수레에……못하니 : 한유(韓愈)가 반곡(盤谷)에 숨으러 가는 이원(李愿)을 보내는 글에, “다른 날에 나의 수레에 기름칠하여 자네를 따르리라.” 한 구절이 있다. [주D-027]눈 속에……섬계(剡溪)를 찾으리 :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猶)가 산음(山陰)에 사는데, 밤에 눈 속 달이 밝으니, 문득 섬계(剡溪)에 있는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생각이 나서 배를 저어 100여 리를 찾아갔다. [주D-028]여울 물……걷지 말라 : 이것도 역시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있는 구절인데, “우는 여울물을 감추고 가벼운 안개를 거두고 주옹의 오는 수레를 골짝 어구에서 막으라.” 하였다. [주D-029]도리(桃李) 나무 밑에 이미 길이 났다 : 《사기(史記)》에, “도리(桃李) 나무가 말하지 아니하여도 그 밑에 절로 길이 난다.” 하였다. 여기서는 훌륭한 경치가 있으면 구경하는 사람이 절로 많이 찾아간다는 뜻이다. [주D-030]옥산(玉山)이 스스로 거꾸러졌네 : 진(晉) 나라 혜강(嵇康)이 풍채가 좋으므로 술이 취해 넘어지면 옥산(玉山)이 무너지는 듯하다 하였다. [주D-031]강산과……한가했네 : 옛 시에, “이백(李伯)이 고래를 타고 날아 하늘에 오르나니, 강남의 풍월이 한가하기 오랫동안일세.” 하였다. 그것은 풍월을 두고 시 지을 사람이 없으니 풍월이 한가로웠다는 뜻이다. [주D-032]살풍경(殺風景) : 당 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몇 가지 살풍경을 말하였는데, 그중에 거문고를 불 때어서 학을 삶아 먹는 것 등이 있다. 여기서는 이 정자를 짓지 못하게 한 감사를 살풍경이라고 한 것이다. [주D-033]황학루(黃鶴樓)를……부끄러워했네 : 이백의 시에, “한 주먹으로 황학루를 방망이로 때려부수겠다.”는 말이 있는데, 다른 이가 시를 지어, “황학이 하늘에 올라가 상제(上帝)에 호소하였다.” 하였다. [주D-034]상방(上房) : 절을 상방이라 한다. [주D-035]고주인(沽酒引) : 고주인은 술 사는 표다. [주D-036]견견(狷狷) : 꼿꼿하고 개결(介潔)한 것이다. [주D-037]주었다가 앗아가니 : 하늘이 인재를 세상에 낳아 주었다가 발용하지 못하고 죽게 하였다는 뜻이다. [주D-038]탁금강(濯錦江) : 중국 성도(成都)에 있는 금강(錦江)을 탁금강이라고도 한다. [주D-039]가는 목란 : 시에 난주(蘭舟)니 난도(蘭棹)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이 목란(木蘭)이란 나무로 배를 만들기 때문이다. [주D-040]십천(十千) : 이태백의 시에, “금 항아리 아름다운 술 한 말[斗]에 십천전(十千錢)이다.” 하였다. [주D-041]비추사(悲秋詞) : 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비추부(悲秋賦)〉를 지었다. [주D-042]황학(黃鶴)이……유유(悠悠)하네 : 당 나라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시에, “황학이 한 번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구름만이 유유하네.” 하였다. [주D-043]양관(陽關) : 당 나라 왕유(王維)가 친구를 안서(安西)로 보내면서 지은 시에, “그대에게 한 잔 술 다시 들기 권하노니, 서로 양관(陽關)을 나서면 친구 없으리.” 한 것이, 명작으로 전하여 양관곡(陽關曲)이라 하는데, 멀리 이별하는 친구들 사이에 부른다. [주D-044]호계(虎溪)의 삼소도(三笑圖) : 진(晉) 나라 여산(廬山)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과 도연명(陶淵明)을 전송하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벌써 호계를 지난 줄을 몰랐다가 깨닫고는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삼소도(三笑圖)라 한다. [주D-045]도롱이……현진자(玄眞子) : 당 나라 은사(隱士) 장지화(張志和)의 호(號)가 현진자(玄眞子)인데, 어부(漁父)로서 강호(江湖)에 살았다. 그가 지은 사(詞)에, “푸른 부들 삿갓 푸른 도롱이로 비낀 바람 가는 비에 돌아갈 줄 모르네.” 하였다. [주D-046]연밥의……무엇하리 : 한유(韓愈)의 시에, “태화봉(泰華峯) 머리 옥정의 연꽃[玉井之蓮]은 열길(十丈)이나 되고, 연밥은 배만 하네. 맛이 차기는 서리ㆍ눈에 비하겠고, 달기는 꿀에 비하겠는데, 한 조각이 입에 들면 고질병이 낫네. 어찌하면 사다리 놓고 그 열매 따다가 칠택(七澤)에 옮겨 심어 뿌리가 크게 할꼬.” 하였다. [주D-047]창양(菖陽) : 한유의 글에, “창양으로 오래 살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창양은 곧 창포다. [주D-048]구절(九節)의……늙은 듯 : 창포 중에도 구절 창포가 선약(仙藥)이라 한다. [주D-049]요초(瑤草) : 신선의 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