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고려때 보조국사(普照國師),범일(梵日),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차례로 중수하고,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려 ‘영산전(靈山殿)’이라고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의 대사찰이었는데,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801)·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802)·영산전(보물 800)·사천왕문·해탈문(解脫門) 등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사보(寺寶)로는 5층 석탑(보물 799)·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62),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20)가 있고,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270) 및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269)이 있다.
마곡사 해탈문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태화산(泰華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의 정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두번째 문인 마곡사 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62)이 박공지붕집인 데 비하여,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벽으로 막았다.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상부에 조두형(鳥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및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봉안하고 있다.
마곡사 담장. 담당내에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마곡사 영산전 [麻谷寺靈山殿] 보물 제800호
마곡사에 유존(遺存)된 건물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된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창건은 640년(신라 선덕여왕 9, 백제 무왕 41)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려시대 명종 때 보조국사가 중수한 것을 비롯하여 몇 차례 손질을 하였다. 조선 세조는 친히 이 절에 와서 ‘靈山殿’이라는 판액(板額)을 써서 하사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한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기둥머리 바로 위에서 받친 공포) 계통으로, 고려건축양식이 잘 전해진 건물이다
영산전 편액
세조가 하사한 편액이다
편액 좌측(세조대왕어필)
영산전內 /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극락교 / 태극형인 마곡사는 이 다리를 기준으로 남북으로가람을 취하고 있는 특이한 가람형태이다.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그 뒤로 대웅보전이 보인다.
마곡사 오층석탑 [麻谷寺五層石塔] 보물 제799호
높이 약 8.7m. 정전(正殿)인 대광보전(大光寶殿) 앞에 있는 석탑으로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2층 기단(基壇)의 지대석(地臺石)으로 되어 있고, 초층의 탑신(塔身) 정면에는 자물쇠를 모각(模刻)하였으며, 2층의 탑신 사면에는 사방불(四方佛)을 1구씩 조각하였다. 탑신은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률이 낮아서 세장(細長)해지고, 옥개(屋蓋)는 편평하며 얇고, 처마의 곡선은 네 귀에서 반전되어, 고려 석탑의 특색을 보이고 있으나, 탑 꼭대기에는 금동제(金銅製) 상륜(相輪)이 있어 그 세밀한 조각과 더불어 나마탑(羅츈塔:라마탑) 형식을 하고 있다. 1972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라마식보탑에서 합자(盒子) 1개,쇠로 만든 향로 2개, 문고리 3개, 卍자가 새겨진 금포(金布) 1장이 나왔다.
탑 꼭대기에는 금동제(金銅製) 상륜(相輪)이 있어 그 세밀한 조각과 더불어 나마탑(羅츈塔:라마탑) 형식을 하고 있다.
1972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라마식보탑에서 합자(盒子) 1개,쇠로 만든 향로 2개, 문고리 3개, 卍자가 새겨진 금포(金布) 1장이 나왔다.
이거는 뭐꼬??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麻谷寺尋劍堂-庫房]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35호
태화산(泰華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의 경내에 있는 요사(寮舍:스님들이 거처하는 집)와 그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창고 건물이다. 심검당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선실(禪室)이나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붙이는 이름이다. 심검당의 창건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며, 1797년(조선 정조 21)에 중수된 기록이 사적입안에 나오고 전내(殿內)의 편액(篇額) 명문에 의하면 "함풍(咸豊) 6년(1856)에 중수하고 융희 3년(1909)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심검당은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한 벌의 기단(基壇)을 조성한 후 둥글넓적한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주춧돌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심검당의 배치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있는 'ㄷ'자 형인데 양쪽으로 날개처럼 방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 쪽은 겹집이고 다른 한 쪽은 홑집 형식이다. 이러한 건물의 경우 대개 평면을 거의 비슷하게 만드는 데 비하여 다르게 만든 것은 후기에 중수하면서 원형이 많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동향인 본채에서 동쪽으로 5칸씩 단 형태로 지붕 모양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으로 혼합되어 있다. 이렇듯 심검당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고방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남향집으로 '一'자형 평면이지만 심검당 동쪽에 있다. 심검당의 앞마당을 막고 있으므로 심검당과 함께 보면 'ㅁ'자 집 배치가 된다. 마치 규모가 큰 조선 양반집과 같은 모습이다. 이 고방은 2층 구조인데 아래층은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룻바닥이며, 사괴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은 자연석인 둥글넓적한 주춧돌이다. 아래층 기둥은 둥그런 원주를 세우고 상층은 방주를 세워 일반적으로 중층 건물의 경우 위아래 기둥을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데 비하여 여기서는 아래, 위층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아래층의 문은 심검당 안마당 쪽으로 내고, 벽은 흙을 바른 심벽(心壁)으로 만들었으며, 위층의 벽은 나무로 막은 판벽이다. 이 고방도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본다.
마곡사 대광보전 [麻谷寺大光寶殿]
보물 제802호
17세기 말∼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단층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전면 5칸, 측면 3칸. 마곡사대웅보전(大雄寶殿)의 아래쪽에 있는 법당으로, 내사출목(內四出目) ·외삼출목의 형식을 갖추었다. 외부 전면의 살미첨차(檐遮)는 3앙 1수설식(三仰一垂舌式)인데, 앙설(仰舌:쇠서받침)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다. 반면에 후면의 첨차는 중첩된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 있고, 내부는 연화(蓮花)로 조각하였으며, 가구(架構)는 무고주(無高柱)와 1 ·2고주의 합성으로 된 특이한 형식이다.
대광보전 불상
법신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이다
지권인(智拳) / 왼쪽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모양
옛날 스님들이 굴참나무껍질로 만든 바닥재. 지금은 그 위에 카펫을 깔고 사용한다.
대명보전 기둥중 하나
대광보전 후불벽화 / 백의 관음도
학창때 저렇게만 공부 했어도...
마곡사 대웅보전 [麻谷寺大雄寶殿] 보물 제801호
17세기 조선 중기에 건립되었다.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중층(重層) 다포계(多包系)의 팔작건물로서, 공포(栱包)는 상층 ·하층 모두 내 ·외 삼출목(三出目)이고, 첨차(檐遮)는 조선 전기의 교두(翹頭)이며, 다른 건축양식에 비해 구조가 특이하다. 외부는 일부가 변형되었으나 내부는 거의 원형대로 있어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고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거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 협시..
갑사
갑사는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절로 420년(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대사가 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여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679년(문무왕 19) 의상대사가 당우 천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으로 삼아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다. 887년(위덕왕 3)에 무염대사가 중창했다. 조선시대 임진·정유 두 병란 때 모두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1654년(효종 5) 사정·신휘 등이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 다시 중건하였다.
국보 1점, 보물 4점, 유형문화재 7점, 문화재자료 5점, 미지정문화재 106점이 있어 천년 고찰의 면모를 더해주고 있다.
갑사 일주문
갑사 대웅전
대웅전內 불상
갑사동종 / 보물478호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 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4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입구 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시대때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비천상대신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갑사 철당간 / 보물256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갑사(甲寺)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네 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基壇) 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인데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30년(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
.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갑사부도 보물 제257호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나,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졌다. 특히 지붕돌이 지나치게 작아져 전체적인 안정감과 균형을 잃고 있다.
높직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아래받침돌에는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새겨 놓았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탑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는 등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백 년 전. 이 땅에 침입한 왜구들은 많은 절에 불을 지르고 우리 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노략질해 갔다. 왜구의 불길은 의상대사가 화엄대학지소를 열 었던 계룡산의 천년 고찰 갑사에까지 옮겨져 천 여 칸의 화엄대찰이 일시에 잿더미 로 화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평정된 후 뿔뿔이 흩어졌던 스님들은 폐허가 된 절을 찾아 다 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보게, 학인들이 이렇게 찾아드니 아무래도 중창불사를 시작해야 할 것 같네.』 『시중 살림도 살림이지만 마을 신도들도 난리에 시달려 모두 생활이 어려운데 불사 가 여의할까?』 난을 피해 피난을 가지 않고 절을 지킨 인호, 경순, 성안, 병윤 네 스님은 갑사를 다 시 중창하여 지난날처럼 많은 학인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도량을 이루기로 의견 을 모으고 모두 탁발에 나섰다.
어느 날 해질 무렵, 동쪽으로 길을 떠난 인호 스님은 어디선가 절박한 듯 울어대는 소 울음소리를 들었다. 『저 울음소리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군.』 인호 스님은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까이 가보니 고삐가 소나무 에 칭칭 감긴 어미소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옆에는 송가지 한 마리가 어미소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듯 「음메에∼」거리며 소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 다.
스님은 소의 고삐를 잘라서 소를 구해 주었다. 『자 이제 시원하지? 마음 놓고 풀을 뜯어 먹어라.』 소를 구해준 후 스님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스님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탁발하기 어느덧 7년. 인호 스님을 비롯한 네 명의 스님 들은 고픈 배를 주리며 비바람 풍랑 속에서 구한 시주금을 한데 모아 대웅전 건립 불 사를 시작했다. 목수의 손길이 바빠지면서 법당이 제법 그 모양새를 드러내게 되자 스님들은 흐뭇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일시적이었다. 서까래를 얹어 야 하고 아직도 법당이 완성되려면 돈이 더 필요한데 계획한 공사금이 예산보다 훨 씬 부족했다. 스님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불사를 중단하고 다시 시주에 나선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호 스님은 소 한 마리가 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인 부들이 못 들어오게 내몰았으나 소는 막무가내로 들어와 인호 스님 앞에 멈췄다. 『스님,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저는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왔사옵니다. 법당 건립 불사를 제가 도와드릴 것입니다.』
소는 이렇게 말하고는 느릿느릿 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잠을 깬 인호 스님은 꿈 이 하도 생생해서 다시 꿈 속의 소를 되살려 보았다. 『아, 바로 그 소였구나!』 인호 스님은 몇 년 전 시줏길에 구해준 소 생각이 떠올랐다. 스님이 문밖으로 나서 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꿈에 본 소가 스님을 기다리기나 한 듯 문밖에 서 있는 것 이 아닌가. 소는 스님을 쳐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3일 후 서까래를 한 마차 싣 고 왔다. 다시 3일 후, 이번에는 기와를 가득 싣고 왔다. 소의 도움으로 대웅전 불사 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당 마루만 깔면 불사는 완공을 볼 수 있었 다. 『마루는 단단한 향나무가 좋은데…』 『향나무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번번이 소한테 신세만 질 수 없으니 이번엔 우리들이 직접 탁발에 나서도록 하세.』
옛부터 울릉도 향나무와 백두산 향나무가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스님들은 2명씩 짝 을 지어 한편은 백두산으로 다른 한편은 울릉도로 떠났다. 백두산에 도착한 스님들은 향나무를 구하긴 했으나 운반할 일이 걱정이었다.
인호 스님과 경순 스님이 서로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미풍이 일더니 그 바람 을 타고 온 듯 갑자기 소가 나타났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운반해 드릴 것입니다. 어서 이 나무를 제 등에 앉으세요.』
소는 마치 무쇨로 된 듯 그 무거운 나무를 지고도 끄떡없이 훌쩍 가버렸다. 절에 와 보니 소는 어느새 향나무를 절에 실어다놓고 또 나가는 것이었다. 소는 다시 울릉도에 나타났다. 향나무를 등에 진 소는 바다를 헤엄쳐 건너갔다. 무쇠 같던 소도 여러 차례 걸쳐 바다를 오가며 향나무를 운반하더니 지쳤는지 입가 에 흰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먹이를 주었으나 소는 먹지도 않고 여러 차례 쓰러지면서도 쉴새없이 울릉 도 향나무를 뭍으로 옮긴 후 계룡산 불사의 현장까지 무사히 운반을 마쳤다. 필요한 향나무가 다 마련되자 목수들은 나무를 켜고 다듬어 법당 마루를 깔았다. 법당 안에 는 은은한 향내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향나무 운반을 마친 후 지쳐 쓰러진 소는 영 일어나질 못했다. 법당 불사가 완공되던 날, 인호 스님 등 네 명의 스님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소에게로 갔 다. 소는 큰 눈을 껌벅이며 스님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스 르르 눈을 감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스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의무덤을 잘 만들어준 후 왕생극락을 빌었다.
『아무래도 소는 우리 절과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을 걸세. 그리고 그 소가 아니 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법당을 중창할 수 있었겠나. 후세에까지 소의 거룩한 뜻을 기 리기 위해 탑을 세우세.』
스님들은 절 입구에 소의 공을 칭송하는 3층탑을 세우고 「공우탑」이라 명했다. 지 금도 갑사로 오르다 보면 중창리에 석탑이 하나 서 있으니 이 탑이 바로 공우탑이다
승병장인 영규대사의 묘소로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의 갑사(甲寺) 진입로를 조금 지나 서쪽편에 위치한다. 영규대사는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騎虛)이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한다.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 전투와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소식을 듣고 영규대사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는데, 하사한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부상한 몸을 이끌고 현재의 묘소부근까지 와서 숨을 거두었다 한다. 해발 150m의 산록 경사면을 깎아 만든 묘소는 최근에 봉분 , 축대, 계단 등의 시설을 보수공사 하였다. 묘비 는 순조 10년(1810)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