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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0)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남강 수계) ③ 진주(1)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출행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진주(晋州)
한반도의 중추(中樞)를 이루며 뻗어 내려온, 장대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끝자락 지리산(智異山) 줄기가 경호강-진양호로 이어진 남강(南江)을 만나면서 조용히 그 대미(大尾)를 내린다. 그러므로 진주(晉州)는 지세로 보아 지리산 정기를 고스란히 받아 안은 곳이다. 백두대간의 정기는 이 지역에서 강직한 의리로 살아 있고, 청정한 남강의 유장한 기운은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을 이룬다. 특히, 진주는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 처절한 전투를 겪은 역사와 함께 빛나는 유산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천 년 고도 진주(晉州)는 서부 경남의 중심지이다. 낙동강 서부의 경남은 조선시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지칭되는, 지리적으로도 진주는 남강(南江)의 중심(中心)에 있고, 예부터 경상우도의 경제, 역사, 문화, 교육, 학문, 행정, 예술의 중심도시로, 풍부한 지역의 물산이 모이며 이 지역의 인구유입지역이다. 그리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모든 인재들이 세상에 두각을 드러냈다.
진주(晉州)는 매력이 넘쳐나는 천혜의 자연친화적인 도시다. 도심을 가로 지르는 남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진양호에 넘실대는 물이 풍부한 도시다. 그리고 대나무 숲과 어우러져 광활한 잔디밭으로 이어지는 초원의 도시다.
진주(晉州)는 행정구역으로 보아, 동쪽의 함안군과 창원시, 동북쪽으로 의령군과 합천군, 서북쪽으로 산청군과 함양군을 접하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고성군과 통영시, 남쪽에는 사천군, 서남쪽에는 하동군이 자리하고 있다. 남강(南江)은 이 지역의 지천과 지류들이 받아들여 하나의 장대한 흐름을 이룬다. 남강수계에 포합되는 장대한 영역만큼이나 그 역사와 문화의 진폭이 또한 크다.
* [자연환경] — 진주시의 서부에는 백두대간의 지리산 지맥이, 북부에는 남덕유산에 분기한 황매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고, 진주(남강)의 남부에는 지리산 능선 영신봉에서 분기한 해안산맥(낙남정맥)이 동서로 뻗어 있으나 험준한 산지는 없고 대부분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진주시의 북·서부에는 천황산(天皇山, 364m), 망룡산(望龍山, 442m), 검무봉(劍舞峰, 280m) 등이, 해안산맥(낙남정맥)이 뻗어 가는 동남부에는 오봉산(五峰山, 525m), 영봉산(靈鳳山, 395m), 보잠산(寶岑山, 439m), 봉대산(鳳臺山, 409m) 등이 솟아 시계(市界)를 이룬다. 시의 중앙에는 월아산(月牙山, 471m), 장군대산(將軍臺山, 482m) 등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지리산 천왕봉 동쪽 산록에서 발원한 덕천강(德川江)이 하동군과의 경계를 따라 남동류하여 ‘진양호’에 유입되며, 함양의 산곡에서 발원, 산청을 경유하여 내려온 경호강-남강은 진양호를 이룬 뒤, 진주시의 중앙을 굽이쳐 흘러 북동쪽으로 곡류(曲流)하여 낙동강(洛東江)에 유입된다.
진주시 권역에서는 나불천, 지내천, 영천강, 정수천, 향양천, 지수천 등이 남강으로 유입되며, 남강 유역에는 고도 20~30m에 대상의 범람원으로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남서부에는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공급 등을 위해 1970년대에 건설된 ‘남강댐’과 그로인한 인공호수인 ‘진양호’가 있다.
진양호(晉陽湖) — 남강(南江)
함양의 백두대간 남덕유산·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천이 산청(山淸)의 경호강(鏡湖江)으로 굽이쳐 흘러 내려와, 진주시 대평면에 이르면 깊은 산곡까지 맑은 물로 가득 채운 거대한 호수, 진양호를 이룬다. 진양호(晉陽湖)는 1970년 산청에서 내려온 경호강(鏡湖江, 남강)을 막아서 만든 남강댐에 의해서 생긴 인공호수로, 면적 29.4㎢, 유역면적 2,285㎢, 저수량 3억 1000만t이다.
일찍이 남강 유역은 하천의 범람이 잦아 1969년 홍수방지 및 관개, 발전의 목적으로 다목적댐을 구축하였다. 진주시 나동면 삼계리와 판문동사이에 댐을 건설하여 진양호가 만들어졌는데, 물을 사천만(泗川灣)으로 방류하는 방법으로 ‘가화천’의 유로(流路)를 변경하는 등의 공사를 통해 낙동강 및 남강 하류지역의 수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댐공사로 인해 대평면·나동면 일부지구는 수몰되었다. 진양호가 차지하는 지역으로 보면,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귀곡동·대평면·내동면과 사천시 곤명면에 걸쳐 있다. 진양호는 홍수 조절과 주변 일대의 상수도·관개용수·공업용수 등으로 이용되며, 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좋아 진주시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서부 경남의 유일한 인공호수인 진양호를 끼고 도는 진양호 일주도로는 그 풍경이 아름다워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 받는 곳이다. 아름다운 호수의 풍광과 야트막한 산길은 차를 타고 한 바퀴 돌아도 좋고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느끼며 달리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특히, 저녁노을이 질 때쯤 이곳을 찾으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호수의 환상적인 풍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강과 호수의 절경을 품고 있는 진양호 일주도로에서는 매년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다. 마라톤 애호가들은 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달리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진주시는 전국 10대 자전거 거점 도시다. 남강변 진양호-금산교 자전거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자전거 길 100선에 선정된 진주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진양호 주변에 선착장과 물홍보전시관, 동물원, 어린이동산, 호텔, 여관, 식당 등의 위락시설이 있다. 4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과 동물원, 어린이동산은 유료이고, 물홍보전시관은 무료입장할 수 있다. 진주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양호행 시내버스를 타거나, 사천공항에서 승용차로 20분, 고속도로에서 서진주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와 2분 정도 달리면 나온다.
진주(晋州)의 역사, 유서 깊은 천 년 고도(古都)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이 이곳에 비정되고 있으며, 이어 ‘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거타주’가 설치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에 ‘청주’로 고쳐졌고,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의 하나인 ‘강주도독부’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고려 초에 강주(「대동지지」에는 처음으로 ‘진주’라고 기록함)로 개칭했으며, 983년(고려 성종 2) ‘진주목(晉州牧)’이 되었다. 일찍이 고려시대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가 상주목사 최자(崔滋, 1190~1266)에게 보낸 우정 어린 시(詩)가 남아있다. 최자는 고려시대 유명한 문인으로 『보한집(補閑集)』을 남겼다.
寄尙州牧伯崔學士滋 (상주목사 최자에게) / 金之岱 (김지대)
去歲江樓餞我行 거세강우전아행 작년에는 진주로 떠나는 나를 전송하더니
今年公亦到黃堂 금년공역도황당 금년에는 그대 또한 목사가 되었구려
曾爲管記顔如玉 증위관기안여옥 전에는 그대 얼굴 옥 같이 고왔지
復作遨頭鬂未霜 부작오두빈미상 우리 더 늙기전에 다시 하번 놀아보세
洛邑溪山雖洞府 낙읍계산수동부 낙읍(상주)의 계산은 비록 좋기는 하나
晉陽風月亦仙鄕 진양풍원역선향 그래도 진양의 풍월이 선향이라네
兩州歸路閒何許 양주귀로한하허 두 고을 길이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一村離懷久已傷 일촌리회구이상 잠시 헤어지면 이별의 아쉬움이 오래가지
欲把琴書尋舊要 욕파금서심구요 거문고 책을 뒤쳐 옛노래를 찾아
況看簾幕報新京 황간렴막보신경 가을에 발을 치고 놀아봄이 어떠랴
嗟公虛負中秋約 차공허부주중약 아, 추석에 만나자는 약속을 어그러졌으니
更約重陽飮菊香 갱약중양음국향 이번 중양절에 국향주 마시길 다시 약속함세
상주와 진주를 다 신선이라고 예찬하면서 다시 만나 국향주로 회포를 풀기를 기약하는 시이다. 서거정에 동문선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 진주에서 지어진 최초의 시이다.
조선 초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晉州牧)’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유지되었다. ―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진주가 정치적·경제적·행정적인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왔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市長)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 진주시(晉州市)’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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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팔경(晋州八景)
진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진주 12경이나 10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때로 뛰어난 풍광을 되뇌면서 외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군데 옛 모습이 없어졌거나 소실되어가고 있는 과정에서, 시대와 현실에 맞는 진주 풍광을 새롭게 제정하고 가꾸어 나가자는 여론이 시민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중반 진주환경운동연합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여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진주12경 대신에 ‘진주8경(晋州八景)’을 선정했다. 진주8경은 ‘진주성’과 ‘촉석루’, ‘남강’과 ‘의암(義巖)’, ‘뒤벼리’와 남가람문화거리, ‘새벼리’, ‘망진산(望晋山) 봉수대’, ‘비봉산(飛鳳山)’에 '진양호'가 추가되었다.
* [제1경] — ‘진주성(晋州城)’ ‘촉석루(矗石樓)’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晋州城)은 석성(石城, 둘레 1,760m)으로 축조되었고,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본래 토성이던 것을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진주성은 400여 년 전인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군을 대파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다. 특히 왜군과의 2차 전쟁 때인 1593년 6월에는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남강가 바위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矗石樓)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영남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이다. 흔히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비교하여 북쪽을 부벽루, 남쪽을 촉석루라 하였다. 1241년(고려 고종 28)에 창건하여 여덟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촉석루는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남장대(南將臺)로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촉석루가 국보였으나 전쟁 중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1960년 5월 시민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진주고적보존회를 통하여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 의기사 · 창렬사 ·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 [제2경] ‘남강(南江)’과 ‘의암(義巖)’
천 년 고도 진주시는 남강(南江)이 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남강은 진주성과 함께 400여 년 전인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남강의 발원지는 경상남도 함양군 남덕유산 정상 아래 해발 약 1,400m에 위치하고 있는 ‘참샘’이다. 남덕유산을 출발한 남강은 경상남도 함양군을 지나서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에서 전라남도 구례군의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 아래 심원계곡에서 발원하는 임천강과 합류한다. 산청군 신안면 원지에서는 의령군과 합천군에 걸쳐있는 자굴산과 합천군 황매산에서 흘러온 단계천이 남강 본류와 만나 큰 물줄기를 이룬다. 남강댐으로 흘러온 남강은 다시 산청군 시천면과 삼장면 등 지리산으로부터 흘러온 덕천강이 합류한다.
남강댐에서 큰 강의 면모를 과시한 남강은 진주시를 관통하면서 촉석루 아래 논개(論介)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충절의 현장 의암을 만나고, 뒤벼리와 새벼리 절벽을 지나 의령군이나 함안군 등으로 흘러간다. 이후 남강은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과 합류하여 부산 앞바다로 흘러간다.
임진왜란 전까지 위암(危巖)이라고 불렀던 의암(義巖)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논개(論介)가 이 바위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투신한 후 의암(義巖)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바위는 편평한 윗면의 크기가 3.65m x 3.3m로 강물 위에 솟아 있다. 오랜 시일을 두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움직여 때로는 육지의 암벽 쪽으로 다가서고 때로는 강 속으로 들어가서 암벽에서 건너뛰기가 힘들 정도로 떨어지곤 한다. 언제부터인가 진주에서는 이 바위가 암벽에 와 닿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바위 서쪽 면에는 정대륭(鄭大隆)이 논개의 충절을 기리어 새긴 ‘義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제3경] ‘뒤벼리’와 ‘남가람문화거리’
남강 가에 우뚝 솟은 ‘뒤벼리’는 남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뒤벼리는 진주성과 논개의 혼이 숨 쉬는 촉석루 아래 의암을 지나 동쪽으로 흐르는 남강이 ‘선학산’을 만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낸 절벽이다. 진주성에서 뒤벼리까지는 불과 400~500m 거리이다. 뒤벼리는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과 아름다움이 다르다. 우선 북쪽의 동방호텔 쪽에서 바라본 남쪽으로 늘어진 뒤벼리의 모습은 흡사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남강 건너의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본 맑은 남강에 비쳐진 뒤벼리 모습은 병풍을 놓은 듯하다. 현재 뒤벼리 절벽과 남강 사이에는 왕복 6차선의 도로가 건설되어 진주의 도심지와 동부지역을 연결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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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벼리전적비(戰績碑)’
최강(崔堈) 장군은 1559년 2월 10일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자 형에게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를 이어왔는데 나라가 흔들리는 이때를 당하여 숲속으로 도망가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마땅히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며 형제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형 최균(崔均)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최강(崔堈) 장군은 우선 고향 구만을 노략질하던 왜적을 무찌르고 곧 인근 의병장인 대소헌 조종도, 망우당 곽재우 송암 이노, 모촌 이정 등과 함께 합세해 경상도 일대에서 왜적을 물리친다. 의숙공 최강 장군의 전적비(戰績碑)가 진주에 세워진 것은, 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에서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 최강(崔堈) 장군은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崔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1605년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56세로 죽었다. 1816년(순조 16) 형 최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최강(崔堈)이 왜적과의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형 의민공 최균(崔均)의 도움이 컸다. 최균은 1537년 고성군 구만에서 태어났다. 아우 최강이 가리포 첨사로 있을 때, 공이 마침 같이 있어 왜적 대처방안을 아우에게 이르기를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적군의 전력이 매우 날카로워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그 형세를 보건대 화공법이 맞을 것 같다.”고 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 3등을 내렸다.
* 최균(崔均) 장군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최강(崔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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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맞은편의 남가람문화거리는 문화·휴식공간이자 연인들의 산책로이다. 천수교~진주교~경남문화예술회관~진양교에 이르는 2.9㎞의 거리엔 광장, 야외공연장, 체육시설, 휴게공간, 전망대 등이 있다. 촉석루 맞은편에 위치한 약 200m 길이의 죽림산책로는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한다. 경남문화예술회관은 경상남도의 대표적인 문화·예술공간으로 대공연장(1,424석), 소공연장(250석), 놀이마당(540석) 등을 구비하고 있어 지역의 문화수준을 향상시키고 있다.
* [제4경] 진주의 관문 ‘새벼리’
예전에는 남해고속도로에서 진주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새벼리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지금은 상평교나 남강교가 건설되어 교통이 많이 분산되었지만, 여전히 새벼리고개는 진주의 관문이다. 새벼리고개에서는 멀리 비봉산과 뒤벼리, 선학산도 보이고, 진주시청과 상평공단 등 도동지역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뒤벼리에서 새벼리 아래로 시원하게 흐르는 남강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새벼리’ 정상에 위치하는 ‘석류공원(石榴公園)’은 진주시 진입 관문에 위치하며 팔각정에서 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원이다. 그리고 도로 반대편에 있는 경상남도 산림환경연구원 남부임업시험장에는 숲과 인간을 주제로 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 죽종(竹種) 견본원 50종 85,000㎡, 식약용 전시원 181종 181㎡, 난대수종 수목원 403종 485본, 지역수종 59종 168본, 기타 삼나무와 편백나무 각 47종 정도를 관리하고 있다. 방문 시에는 체험학습 연구사가 직접 연구실에서 안내 설명하고 있다. 진행순서는 ‘숲의 이해→나무식별하기→항공사진보기→곤충관찰→숯만들기 및 숯으로 풍경만들기→한지만들기→인쇄하기’로 운영되고 있어 산림 체험의 장(場)이 되고 있다.
* [제5경] ‘망진산(望陣山) 봉수대(烽燧臺)’
망진산(望陣山)은 망경동의 뒷마루에 있기 때문에 보통 ‘망경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정상 주변에는 약 300m의 토성지가 남아 있다. 성터 안에 망진산(望陣山) 봉수대지(烽燧臺址)가 자리하고 있다. 망진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시가지 전경은 신안·평거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흥주택단지와 진주성이나 비봉산을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다.
복원된 봉수대는 원래 망진봉수(望陣烽燧)란 이름으로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이다. 고종 32년인 1895년 폐지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전통적인 통신수단으로 기능해왔다. 망진산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들었고, 전국의 다섯 개 직봉 노선 가운데 동래 다대포진에서 목멱산(현 서울 남산)에 이르는 제2노선의 보조노선(간봉)으로서 남해 금산~사천 안점의 봉수를 받아 진주시 명석면 광제산 봉수대로 이어주는 곳이었다. 망진산 봉수대의 복원은 광복 50주년인 1995년 진주문화사랑모임을 비롯한 각종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봉수대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시작되었다. 2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6천5백21만5천원(1구좌 5천원)의 성금을 모았으며, 문화재전문위원들의 감수와 고증을 거쳐 봉수대모형을 확정지어 다시 세우게 되었다.
* [제6경] ‘비봉산(飛鳳山)’
비봉산(飛鳳山)은 진주시 상봉동에 위치한 비봉산은 높이 138m로 진주의 진산(鎭山)이다. 비봉산 남쪽에 시가가 발달하였고, 시가지의 남쪽으로 진주성이 있고, 그 앞으로 남강이 흐른다. 비봉산 서쪽에는 가마못[釜池]이 있었고, 진주에서 합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비봉산을 중심으로 비봉공원이 형성되어 있으며, 산 동쪽에 의곡사(義谷寺)와 연화사 등이 있고, 서쪽 기슭에는 대봉정(大鳳亭)가 있으며, 진주 강씨 시조인 강의식 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봉산사(鳳山祠)라는 사당이 있다.
* [제7경] ‘월아산(月牙山) 해돋이’
월아산(月牙山)은 달이 떠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으로 진주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1986년 3월 6일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건설교통부 고시 제 93호)된 월아산은 일명 ‘달음산’이라고도 한다. 진주시내에서 20여 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이고, 산세가 아담하고 험하지 않아 가족 단위의 등산객들이 주말을 이용해 즐겨 찾는 산이다. 높이가 482m밖에 되지 않아 한나절 산행으로 알맞은 곳이다.
정상인 장군대는 예부터 금산·진성·문산 주민들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김덕령 장군이 목책성(木柵城)을 쌓고 왜적을 무찌르던 본영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는 곳이다. 월아산에는 동쪽에 천룡사, 남쪽에 두방사, 서쪽에 청곡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다. 정상까지 등산거리는 평균 4.6㎞이고,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2시간 정도이다. 종주코스는 5~6 시간 정도 소요된다.
* [제8경] ‘진양호(晉陽湖)’
우리나라 다목적댐 1호인 남강댐 준공으로 만들어진 진양호는 덕유산과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 형성되었다. 경상남도 유일의 동물원에는 호랑이·사자·곰·독수리·기린 등 야생동물을 직접 관람할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다. ‘진양호 전망대’는 3층 규모의 현대식 휴게 전망대로 시원하게 트인 넓은 호반과 지리산을 비롯하여 와룡산·자굴산 금오산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전망대와 연결된 365개의 1년 계단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높다. 그밖에도 상락원 가족쉼터, 진주랜드 등 가족단위로 휴식과 즐거움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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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적 관광지
진주의 관광지로는 진주팔경 이외에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와 청원리 일원에 있는 ‘방어산’,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 자연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진주시 명석면의 ‘광제산’, 진주시 관내에서 가장 높은 진주시 집현면 소재 ‘집현산(572m)’ 등이 있다.
역사가 깊고 문화재가 많은 사찰로는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의 ‘청곡사’,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에 있는 ‘성전암’,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의곡사’,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에 위치한 ‘호국사’,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에 있는 ‘응석사’,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에 있는 ‘두방암’ 등이 있다.
그 밖의 일반명소로는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에 있는 ‘경상남도 수목원’, 진양호반에 위치한 ‘물문화관’,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에 소재한 ‘금호지’,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소재한 ‘고분군’, 진주시 옥봉동에 소재하는 ‘진주향교’,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소재하는 ‘남악서원’ 그리고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소재한 ‘우곡정’ 등이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서부 경남의 고고학적 연구·조사를 담당하는 국립기관으로 1984년 11월에 개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내에 자리 잡고 있는 입지조건과 ‘임진왜란’ 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8년 1월 ‘임진왜란전문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1997년부터 국내외에서 임진왜란 관련 유물 약 600여점을 대여 받았으며, 다시 1998년에 56점을 수집하여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전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간의 흐름을 위주로 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결과 및 후대평가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향에서 관련된 유물 2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1년 11월 19일 국립진주박물관은 새롭게 ‘두암관’을 개관하면서 더욱 다양하고 품격 높은 문화를 소개하였다. 경남 사천 출신의 재일교포 실업가 두암 김용두 선생이 수십 년간 일본에서 수집한 우리 유물 가운데 179점을 기증하여 그 중 ‘백자철화죽문죽절형병’을 비롯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목제생활품, 금속공예품, 회화, 서예작품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리미술품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8년에는 역사문화실을 신설하여 경남 서부지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지역문화를 선도하는 문화중추시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진주의 유물·유적
진주시에는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 보물 10, 사적 2, 천연기념물 2, 중요무형문화재 1),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35, 기념물 14, 민속자료 1, 무형문화재 9), 문화재자료 52점, 등록문화재 4점이 있다.
남성동·본성동에 걸쳐 있는 진주성(사적 제118호)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진주대첩이 치러진 성이다. 이곳에는 남장대인 촉석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를 비롯하여 서장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북장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영남포정사문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창렬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의기사·호국사 등의 유적이 있다.
대표적인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망경동의 단성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1호), 이반성면 용암리의 용암사지부도(보물 제372호)·수곡면 효자리의 진양효자리3층석탑(보물 제379호)·남성동 국립진주박물관의 중완구(보물 제858호)·현자총통(보물 제885호)·차륜식토기(보물 제637호), 평거동의 진주평거동고려고분군(사적 제164호)이 있다.
그밖에 도지정문화재로서 본성동의 김시민장군전공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촉석정충단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쌍충사적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용암사지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청곡사3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호)·옥봉동의 진주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청곡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상봉동의 삼선암고려동종(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 평거동의 평거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집현면 정평리에 응석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1호)·사곡리의 주자어류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1호)·지수면 압사리의 동강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금곡면 죽곡리의 남악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호) 둥이 있다. 특히 남악서원에는 김유신·최치원·설총을 봉안하고 있다.
진주향교(晉州鄕校)
진주시는 예로부터 교육도시라고 불릴 만큼 규모에 비해 교육기관이 많은 도시이다. 조선시대에는 향교도 존재했었다. 2007년을 기준으로 대학원 9개와 3개의 대학교, 1개의 교육대학교, 2개의 전문대학 등이 있다. 학생 수는 진주시 인구의 1/3에 이르는 100,601명으로 이 중 남학생이 56,898명, 여학생이 43,703명이다.[18] [국립대학] 국립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한국폴리텍7대학 진주캠퍼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립대학] 한국국제대학교, 연암공과대학교 등이 있다.
연암공과대학교(蓮庵工科大學校)
1940년대 이후 화학과 전자, 전기, 통신등 주요 산업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우리나라 산업화의 물결을 주도해 온 럭키금성(LG)은 고도산업 사회의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69년에 연암문화재단을 세웠다. 아울러 1973년에 학교법인 연암학원을 설립하고, 1984년 3월에 구자경(具滋暻, 1925~ 2019)이 운영하는 학교법인 연암학원(蓮庵學園)에서 첨단 기술 사회의 주역이 될 공업인력 개발의 필요성이 절실해짐에 따라 연암공업전문대학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초대학장에 김호길(金浩吉)이 취임하였으며, 전자과와 전자계산과를 설치하였다.
1986년 2월에 제1회졸업생 125명을 배출하였으며, 1997년에는 전국 전문대학 최초 진주창업보육센터 중소기업청 설립인가를 받았다. 1998년 3월에는 연암공업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9년 3월에는 연암공업대학 부설 '평생교육원' 교육부 설립인가를 받았다. 2006년 7월에는 일본공업대학 교류협정 체결하였다. 2016년 연암공업대학에서 연암공과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실립자 상남 구자경(具滋暻, 1925~ 2019) 회장은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 LG 창업 회장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5년간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이사로 합류했다. 1970~1995년 ‘럭키금성그룹’ 회장으로 있으면서 취임 당시 매출 260억원이었던 그룹을 30조원 규모로 키웠다. 1995년 1월 럭키금성 그룹의 명칭을 ‘LG그룹’으로 바꾸면서 첫째 아들인 구본무(具本茂, 1945~2018)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스스로 물러났다. 말년에 천안에 있는 연암대 농장에서 배우자와 함께 버섯을 키우며 여생을 보냈다. 2019년 12월 14일에 숙환으로 인해 향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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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晋州 矗石樓)
대한민국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8호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 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將臺)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일명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한다.
1365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으며 앞면 5칸, 옆면 4칸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남강(南江)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 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2]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선조실록》 (1593년 6월 1일). “《선조실록》 26년권 27권”. 《조선왕조실록》]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崔慶會)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祭)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義烈)을 찬송하였다. 《조선왕조실록》중《영조실록》 65권 (1747년 1월 26일). “《영조실록》 23년”에 실려 있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애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義妓))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다산연구소. “다산의 생애, 성장기-청년기 / 벼슬시절”]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義巖'(의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 한 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군사시설과 과거 시험장 —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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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晉州城) | 사적 제118호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晉州城 大捷)’을 이룬 곳이다. 당시 진주는 군량 보급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는 길목이어서 진주성을 두고 조선과 왜적과의 전투가 치열하였다. 곧 조선 선조 25년(1592)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이 진주성을 지키면서 왜군 2만 명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다음해 6월에는 왜군 4만 여명이 진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등이 성 안의 모든 주민과 함께 성을 지키려고 하였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진주성에는 현재 내수문(內水門), 외수문(外水門), 암문, 장대(將臺), 포루(砲樓), 촉석루(矗石樓), 서문, 내북문(內北門), 함옥헌(涵玉軒), 진남루(鎭南樓), 산성사(山城寺), 창렬사(彰烈祠), 충민사(忠愍祠), 화약고, 관덕당(觀德堂), 공신당(拱辰堂), 포정사(布政司), 군기고, 중영궁(中營宮)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공북문(拱北門)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이다. 공북문의 공(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여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가리킨다
↑ 영남포정사는 618년(광해군 1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관문이었고 1896년 경상남도 관찰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라고 하였다. 1925년 경상남도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문루였다.
[잔주성의 역사적 변천] — 촉석성(矗石城), 진주읍성이라고도 불린다.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은 촉석루 기문에 ‘촉석루’라는 글자가 나오므로, 촉석성이 촉석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고려사(高麗史)』나『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촉석성’이 보이지 않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촉석성이 나타나므로, 고려 말에 확장되면서 촉석루를 포함하자 촉석성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성지 촉석산성은 본주성으로 고려 신우 3년(1377)에 토축성을 개석축하였는데, 주위 800보로 3문을 설치하고 촉석성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하륜이 지은 진주성 성문기(城門記)에 자신의 어린 시절에 이미 성터가 허물어져 있었다고 한 점과 정사년(1377) 가을에 조정에서 변방 방비를 위하여 여러 도에 관리를 보내어 주현의 성을 수리하면서 옛터에다 흙으로 쌓았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고 한 기록 등으로 보아, 이 성은 고려 말에 이미 흙으로 쌓은 모습으로 있었다가 1377년에 다시 돌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년 뒤에 왜구의 침입으로 무너지자 우왕 6년(1380)에 다시 쌓아 완공되었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800보, 높이가 3길이 넘었으며,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 각각 의정(義正), 지제(智濟), 예화(禮化)라고 이름붙인 성문을 두었고, 문 위에는 모두 문루를 올렸다고 전한다.
[진주성의 내용] —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4년(1591)에는 영·호남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 1537∼1615)가 옛 성이 좁다고 하면서 동쪽을 넓혀 외성을 두었다. 1593년 이후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수일(李守一, 1554∼1632)이 진영을 촉석성으로 옮기고, 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성 안에 여러 시설을 두었다. 내성을 쌓고서 대홍문을 설치하였으며, 촉석과 관탕의 두 둔덕을 가로질러 동쪽과 북쪽에 홍문을 설치하였다. 그 밖에 내외문 위에는 모두 문루를 설치하였고, 수문 2개와 대변루 2개를 설치하는 등 큰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 뒤 1607년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김태허(金太虛)가 내성과 외성에 포루 11곳을 두었으며, 1618년에는 경상도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이 내성의 동문을 고쳐 세우면서 그 옆에 대변루를 건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 지금의 진주성은 1970년대에 진주성 정화사업을 거쳐 복원 정비된 것이다. 그 뒤에도 발굴이 진행되어 기록에 전하는 내부 시설이 일부 밝혀졌다. 특히 1999년에 진주성 공북문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공북문 받침돌 아래에서 약 80㎝ 이상되는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에서는 저습지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호지(湖池)가 4곳이라고 한『여지도서(與地圖書)』의 기록이나「진주성도(晋州城圖)」의 성 안 건물터 배치와 부합되는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진주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던 축성 방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임진왜란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성으로, 당시의 무기, 화약 등 국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갖춘 성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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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 10. 05~1592. 10. 10)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 군대와 의병군이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고 일본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저 진주성을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1)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가 선봉에 선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갔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전투이다.
육상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던 조선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곡창지대 호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남해에서 일본 수군을 격퇴하고 있었고, 충청도 금산 지역에서는 조헌(趙憲)이 분발하고 있었다. 국립진주박물관 잔디밭에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아 구국의 선봉에 섰던 이순신 장군, 김시민 장군, 곽재우 장군 등의 어록비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1592년 4월 경상도 남해안으로 첫 출전하면서 조정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린다.
"한 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쳐들어가 요망한 적들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 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합니다. /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제가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닌 것임을 삼가 갗추어 아룁니다. ― 이순신(李舜臣) "
곽재우 의병대도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창의한 곽재우 장군은 의병을 일으키며 다짐한 큰 각오를 임금에게 올리고 있다.
"신은 진실로 둔하여 시골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왜란을 당하여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 스스로 생각하니 저희 선조 삼대가 조정에 벼슬을 하였습니다. 신묘한 꾀가 미치지는 못하오나 복수하려는 마음은 진실로 가지고 있습니다. 까닭에 목숨을 내걸고 4월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방어하였습니다. 다행이 전하의 빛나는 위세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죽기를 맹세하고 온 힘을 다하여 죽은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 임진년 4월 의병을 일으키며 / 곽재우(郭再祐)"
김시민(金時敏) 장군
김시민은 1554년 8월 27일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마을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안동이다.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시했고,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이 무렵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김성일은 김시민으로 하여금 진주목사직을 대행토록 명했다.
김시민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가 사랑암 부근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목사 김시민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했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 8월에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진주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했다. 또 9월에는 경상남도 진해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0월 6일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요충지인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모두 나서 일본군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적군은 2만여 명이었으나 김시민의 군사는 3,800여 명에 불과했다.
[김시민 장군] ☞ 장군의 손은 일본 쪽을 향하고 있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바로 볼 수 있다. 공북문은 진주성의 정문이다.
"나는충의를 맹세하고 진주성을 지켜 국가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 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 나를 따르는 자 살 것이며 도망하는 자 멸할 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 나의 엄지[拇指]는 이미 떨어졌고 식지(食指)와 장지(長指)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 임진년 10월 초 김시민(金時敏)"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친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김시민은 죽은 체하고 사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저격을 받고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상처가 심각했지만 김시민은 이 사실을 함구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국사를 근심하다가 39세의 나이에 운명했다. [김시민 장군의 사망일시는 임진잡록에는 10월 18일로 되어 있고, 족보에는 12월 26일로 되어 있다. ☞ [(사) 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김시민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출함에 있어 중요한 길목이 된 이곳을 지킴으로써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1604년에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1702년에는 영의정의 직위와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시민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는 현재 진주성 내의 계사순의단(옛날에 충민사가 있었던 자리) 옆에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비(碑)는 받침대 위로 비의 몸통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277cm, 비의 폭 99cm이다. 1619년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 06. 22~06. 29)
일본군은 1592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에 7만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2월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고, 3월 10일과 4월 22일에도 연이어 진주성을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1593년 5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공격을 위해 장수 및 부대 배치를 확정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 구로다 나가마사 · 가토 기요마사 ·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병력 25,624명과, 고니시 유키나가 · 소 요시토시 휘하 병력 26,182명을 제1군,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병력 18,882명을 제2군, 모리 테루모토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병력 22,344명을 제3군으로 하여 모두 92,972명에 대해 진주성 공격에 직접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에서부터 진주성까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성을 연결하여 배치하고 부산에는 모리 테루모토의 병력, 동래읍성에는 마에노 나가야스, 김해에는 모리 시게마사(毛利重政), 부산 기장성에는 가메이 코레노리(龜井慈矩) 등 병력을 각각 배치했다. 이밖에 거제도에는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가덕도에는 구키 요시타카(九魁嘉隆) 등의 선단을 배치했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18일 의령(宜靈)으로 들어갔고, 다음날 군사를 돌려 진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진주 동북쪽 마현봉(馬峴峰)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제1, 제2, 제3군 약 7만의 병력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있는 진주성(晉州城)을 포위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일본군 부대인 제4군과 제5군이 진주성을 구원하러 올 조선군에 대비하여 진주성 외곽에 진을 쳤다.
진주성 방어는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지휘 하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이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일본군과 맞섰다.
외부의 조선군 지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2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6월 22일 성에 접근해 공격을 시작했다.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약 7만 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부른다.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고 성을 빼앗긴 참으로 처절한 전투였다.
당시 교전 중에 황진이 죽자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구역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하여 최경회가 그를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맡겼다. 그런데 장윤도 곧 조총에 맞아 전사했기에 이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에게 응수했다. 6월 29일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입하자,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 숨어 있다가 잡혀 살해당했다. 그의 처 이씨와 맏며느리 노씨, 시집가지 않은 딸 모두 남강에서 투신했다.
왜적의 귀갑거(龜甲車)와 양민 학살
전투 사흘째 되던 날 일본군은 튼튼한 나무궤짝을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 위에 올려놓고 궤짝 속에 군사들이 들어가 손으로 수레를 앞으로 굴려 전진하고 후퇴할 때에는 밧줄을 뒤에서 당기는 무기를 사용했다. 이 무기는 궤짝의 윗부분이 거북의 등같이 생겼다 하여 ‘귀갑거(龜甲車)’라고 불렀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묻힌 뒤 불을 붙여 귀갑거 위로 던져 불태우자 일본군은 일단 퇴각했다. 그리고는 귀갑거(龜甲車) 위에 물기가 도는 쇠가죽을 씌워 화공에 대비한 다음 돌격대를 선발하여 동문 성 밑으로 투입했다. 6월 29일 성벽의 기초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은 힘없이 무너지고 일본군 몇 명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뒤이어 일본군이 몰려왔고 곧이어 서문과 북문 방어도 무너졌다.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쫓긴 나머지 조선군은 촉석루 밑 남강가 바위에 모였다. 장수들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이 차례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의 손을 잡고 투신했고, 이종인은 적군과 격투하다가 양쪽 팔에 적군을 하나씩 끼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은, 이리 쫒기고 저리 몰려다니며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창고로 들어가면 죽이지 않겠다고 소리쳤고 이에 살아남아 있던 군졸과 백성들이 창고로 들어가자 그대로 불을 질러 불태워 죽였다. 이렇게 6월 22일부터 8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은 6월 29일 처참하게 함락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이종인 · 이잠 · 강희진 · 오유 등이 전사했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 고종후 · 양산수 등 대부분의 지휘부가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일본군에게 밀려 촉석루로 온 조선군은 맞아죽거나 남강에 투신했다. 성 안에 있는 시체는 촉석루에서부터 남강 북안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 있었고, 청천강으로부터 옥봉의 강가에도 시체가 가득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임진년(壬辰年, 1592년)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이듬해 계사년(癸巳年,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殉國)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성이 함락된 후 도망가 숨어 있던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은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그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예원의 목을 김시민의 수급인 줄 알았다. … 처절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 ; 조선군·일본군 주요 지휘관
ㆍ[조선군(의병장 포함)] —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사천현감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김해부사 종인(李宗仁), 감포현령 송제화(宋悌和), 해미현감 정명세(鄭名世), 진주판관 성수경(成守璟), 공조좌랑 양산숙(梁山璹), 의병장 고종후(高宗厚), 의병부장 오유(吳宥),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의병장 이계련(李繼璉), 의병장 강희보(姜希輔),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의병부장 이잠(李潛), 의병부장 고득뢰(高得賚), 해남 의병장 임희진(任希進), 영광 의병장 심우신(沈友信)
ㆍ[일본군]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고바야카와 다카카케(小早川隆景), 기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마쓰이 토모유키(松井興之),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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