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복음: 루카 4,14-22ㄱ
경쟁의 허용이 괴물의 세상을 만드는 이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소명’(召命)을 공적으로 표현하시는 내용입니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지만 ‘당신이 깨달은 하늘의 뜻’(知天命)을 공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 구절을 찾아 회당에서 읽으심으로써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을 공표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을 지니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누구나 이 사명을 물려받습니다.
성모 마리아나, 세례자 요한, 또 사도들은 모두 이 사명에 결합한 이들입니다.
이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 모두가 주님의 계획안에서 어떠한 사명을 지니게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사명과 반대되는 개념이 있는데 ‘꿈’(이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꿈’(dream)과 ‘소명’(vocation)은 반대말입니다.
창조될 때부터 주어진 사명을 ‘소명’이라 한다면, 자기 자신이 이루고자 정한 것을 ‘꿈’이라 합니다.
소명, 즉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분명 자신이 선택한 꿈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소명도, 꿈도 없다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좇는 사람은 세상에서 ‘괴물’이 되고, 소명을 찾은 이들은 그런 괴물에게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명을 성취하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꿈과 소명은 상반되고 살아가는 각자의 이유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괴물 한 명을 생각해 봅시다.
히틀러는 분명 괴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 대신 폭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바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예외 없이 ‘경쟁’을 통해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 합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대학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좋은 평을 받게 되고 정치로 나아가서는 더 좋은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경쟁’을 통해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게 만드는 전쟁을 시작한 괴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됩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는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꿈을 가지게 되며,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그 꿈이란 것이 결국엔 자신 안에 있는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람들은 무작정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을 좇는 것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그들 모두가 작거나 크거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나라에서 웹툰으로 그린 이가 있고 그것을 드라마로 만들어 지금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홈’입니다.
이 드라마는 잔인한 괴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괴물이 된다는 설정을 ‘욕망’에서 찾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욕망에 자신을 맡긴, 그 욕망을 꿈으로 실현하는 이들은
타인을 죽이는 괴물이 됩니다.
이 괴물들은 남의 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괴물, 힘으로 타인을 눌러버리는 괴물, 자신의 것을 쌓아놓는 괴물들로 나뉩니다.
이것을 만든 작가도 몰랐겠지만 그 괴물들은 결국 삼구에 자신을 맡겨버린 이들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그 욕망을 절제하는 인간들이 생겨나는데
그들은 그런 욕망을 지닌 괴물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합니다.
자신들 안에 분명 그런 욕망이 있지만, 그들은 그런 욕망을 추구하는 경쟁의 분위기에서 벗어난 이들입니다.
그중 ‘현수’란 캐릭터는 경쟁에서 도태되어 세상에서는 자살밖에 할 것이 없는 친구였습니다.
이미 그는 세상의 경쟁에서 아무 꿈도 꿀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아파트의 주민들을 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좋은 사람들은 다 사회 경쟁에서 도태된 인물들입니다.
더는 세상에서 삼구를 추구할 수 없는 상태의 인물들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소명을 공표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하신 일이 광야에서 삼구(三仇)의 유혹을 이기는 싸움이었습니다.
돈도, 쾌락도, 명예도 아니면 세상에서 무엇을 추국해야 할까요?
바로 그런 것들을 좇는 이들로부터 피해를 보는 이들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소명은 꿈을 좇는 세상의 경쟁적 분위기에서 물러나 그 반대로 향할 때 찾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도 모두 그런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한발 물러섰기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바치며 추구해야 할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굳이 이런 분들만이 아니라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 등의 거부들도 경쟁 속에서 성공은 했지만, 그들은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것보다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오다 보니 성공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가진 재산 전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약속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꿈을 찾으라고 하고 그 꿈을 추구하도록 경쟁시킵니다.
그리고 부모들도 그것에 많은 학원비까지 써가면서 아이들을 삼구의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히틀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먼저 자녀들에게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괴물들의 세상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학교가 이런 욕망을 제어하고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만드는 곳으로 바뀌게 해야 합니다.
꿈이 아닌 소명을 좇는 아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독서 :요한 1서 4,19―5,4
사랑의 실천에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년을 보낸 에페소에서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1서는 복음의 진수(眞髓)이자 핵심을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를 읽다보면 수시로 등장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제자단의 일원이자 예수님의 애제자(愛弟子)로서 공동체 생활, 그리고 초대 교회 공동체 지도자로서의 만만치 않았던 삶을 통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고,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사도 요한이었기에,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야말로 ‘뼈때리는’ 내용입니다.
오늘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찔리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살아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1서 4장 20절)
요한 사도의 권고 말씀을 들으면서 든 한 가지 생각입니다.
‘사랑의 실천에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것이로구나!’
가끔씩 이러 분을 만납니다.
하느님 사랑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눈만 뜨면 기도요 미사입니다.
하루 온종일 성경과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특기는 피정이나 성지 순례입니다.
취미는 성전에서의 봉사요 전교 활동입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합니다.
그들이 삼시세끼 제때 챙기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이 잔뜩 안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상 속 예수 그리스도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경우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어색한 사랑, 20퍼센트 부족한 사랑, 아직 갈길이 먼 사랑입니다.
반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격이 원만해 가족들과는 물론 주변 사람들과 너무나 잘 지냅니다.
어디 가나 ‘핵인싸’로 박수갈채와 큰 환영을 받습니다.
광범위한 소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탁월한 해결사로서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너무 바쁜 나머지 하느님께 나아갈 시간을 조금도 낼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희희낙락 즐기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단 1분도 성체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역시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너무 지우친 결핍된 사랑입니다.
요한1서에 의하면 사랑은 행동으로 진실되게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으로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덜 중요한 것에서 더 중요한 것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하느님, 또한 하느님에게서 인간! 이런 무한 순환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한 신앙인이 자신의 눈앞에 다가와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해버리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영적인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랑은 가짜 사랑이요,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애는 언제나 함께 가야 마땅합니다.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뿐만이 아니라 형제들도 하느님 사랑 안에 사랑받아야 마땅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복음: 루카 4,14-22 :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 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 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 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 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