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안개 속으로
조 진 태 (cjt2038@daum.net)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양평군 서종면에 속하는 양수리에 있다. 청평 쪽에서 도도히 흘러오는 북한강의 물줄기가 대성리의 욧드장을 거쳐 이 곳 양수리에 이르고, 충주호에서 흘러 내려 양평대교를 빠져나와 양수리에서 합류하게 되는 남한강은 양평읍을 지나면서부터 산자락과 강기슭 따라 세워진 수십, 수백개의 교각을 부딪치고, 피하고, 밀치면서 누수 되어 천천히 흘러서 마치 두 강이 점잖게 예절을 갖춘 듯 서로 만나는 양수리 합수머리는 흡사 바다와도 같은 대하를 이루면서 명실상부한 한강을 생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양수리는 사 계절을 통해 안개가 잦기로 유명하다. 더구나 팔당댐으로 인한 유수의 정체 현상은 안개를 피워 올리는데 일조를 해서 양수대교에서 시작된 안개는 국수리를 지나 양평읍에 다다를 때까지 지척을 분간 못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때가 많다.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어찌 보면 아름다운 풍경일 수도 있겠지만,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안개로 인하여 빈번히 일어난다. 그렇게 일어난 사건, 사고들은 나름대로의 각기 다른 사연들을 간직한 채 짙은 안개 속으로, 혹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함께 묻히고 잠겨져 소멸돼 버리기 예사였다.
소영이와 창수 역시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들의 삶을 이 안개 속에 묻고 말았다. 한 때 가없는 세례(洗禮-몰아치는 비난의 공격)도 가뭇없이 소멸되건만 퇴색된 시간 속에서도 이들의 이야기가 후일담으로 남아 뜬금없이 회자 되면서 지금도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과 짙은 안개 속에서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떠돌기도 한다.
*
그 날도 구 월을 접어들면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는 이틀이 멀다하고 우윳빛 물안개가 햇살을 가리고 장엄하게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두 강의 합수머리는 거대한 호수만큼이나 넓은 수면으로 짙은 물안개를 뚫고 강물은 소리 없이, 그리고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안개 낀 강물 위로 왕복 4차선의 양수대교가 놓여있다. 양수대교가 끝나자마자 마치 여인의 다리 같이 미끈하게 뻗은 직선의 교각을 받침해서 강기슭으로 이어지는 편도 2차선의 다릿길은 길길이 뻗어 양평 가까이 가서야 끝이 난다.
이 길을 오늘도 우윳빛 안개는 장엄하게도 지척을 분간 못하도록 잔뜩 끼어있었다. 그 안개 밑으로 강물은 쉬임 없이 흐르는 데.
* * *
지금 막 택시에서 내린 소영은 양수대교가 끝나는 지점에서 국수리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안개와 함께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 보며 걸었다. 물기 서린 은빛 가드레일에 한 손을 짚어가며 힘없는 발길을 옮겨 놓았다. 몸을 휘청거리며 걷는 그녀의 발걸음엔 어딘지 모를 허탈과 고뇌와 분노가 함께 뒤엉켜 흔들거렸다. 얼룩진 삶의 무늬는 이슬비처럼 내리는 안개와 범벅이 되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적셨다.
안개로 인하여 가시거리가 짧은 다릿길을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 승용차가 간간이 지나간다.
소영은 잠시 멈추어 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야지. 내가 이 세상에 살았던 그 자취도 강물과 안개는 덮어 주리라.’
소영은 그 순간 은회색 가드레일을 넘어 강물에 뛰어들려는 순간이었다.
“빠아-앙, 빠아-앙---!”
자동차의 경적이 연속 울렸다. 소영은 눈부시게 쏘아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바라보며 잠시 행동을 멈추었을 때 경찰관 두 명이 달려와 소영을 난간으로부터 분리시켰다.
“ 청춘이 만리 같은 이가 뭐하는 짓이여!”
소영은 잠시 몸부림을 치다가 경찰관에 끌려 인근 파출소로 갔다.
나이깨나 들어 뵈는 경찰관은 소영을 의좌에 앉힌 후 따뜻한 찻물을 건너며 말했다.
“물어보나마나 거기서 투신자살을 할 모양이었는가 본데, 따끈한 차나 한 컵 들고 흥분을 가라앉힌 뒤 그 사연이나 들어 봅시다.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잘 아느냐고 ? 바로 그 장소가 투신자살의 명소? 란 말이여. 그래서 오늘 아침나절처럼 안개가 짙는 날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거던. 투신자살이 월 평균 한 두 건이라야 말이지. 인간의 생명처럼 귀한 것이 없는데··· 이런 날은 한 시도 맘 놓고 일을 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제길헐! 그렇다고 도로나 강줄기를 딴 곳으로 돌릴 수도 없고.”
투들거리던 경찰관은 한나절이 다 돼서야 안개가 걷히면서 눈부신 햇살과 더불어 쾌청한 날씨를 보이자 눈을 감고 조는 듯이 벤취에 앉아 있는 소영을 불러 마주보며 앉았다.
“벌써 가을도 중턱에 왔군, 단풍은 붉게 물들고, 강물은 저다지도 푸른걸 보니. 시가 절로 떠오르는 계절이 것만··· 그건 그렇고 어째서 자살을 하려고 했소?”
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하기가 뭣하면 간단하게 서면 진술을 해 주시오.”
경찰관이 내민 백지 한 장과 볼펜을 받아 쥔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쓰기 시작했다.
소영이 써 놓은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 * *
소영은 유복녀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쩌다 물어도 어머니는 한 번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시장 들머리의 난전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간혹 불러주는 식당이 있으면 일당으로 나가 일도 했다. 딸 하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서 사는 어머니처럼 보였다. 그 덕으로 소영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소영에게는 고삼(高3) 때부터 사귄 남자 친구였던 상수가 있었다. 부모도 없이 외조모 밑에서 자란 상수였다. 서로 처지가 비슷해 집에 자주 데려오면 어머니는 친아들처럼 반겼다. 오년이란 시간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끈끈하게 맺어진 정은 어머니로 하여금 소영의 배필로 여기게 만들었다. 소영이 졸업과 동시에 A항공사에 공채로 합격이 되었고, 상수 또한 K그룹에 공채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소영의 어머니도, 상수의 외조모도 춤을 출 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입사를 압두고 둘은 설악산 등산을 갔다. 대청봉 민박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귀가할 예정으로 하산을 하던 중이었다. 때 아닌 폭우가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밀어닥친 계곡물에 둘은 변을 당했다. 구사일생으로 소영은 깨어났지만 상수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상수의 주검은 소영의 어머니와 상수의 외조모에게 크나큰 상처와 절망을 안겨 주었다.
우연찮게 불의의 사고를 당한 두 사람으로 인해 소영 어머니의 충격은 그녀가 이 세상과 이별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수의 외조모도 그 후 노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소영이 알았을 때는 소영도 혼자만 남아 있어야할 의미를 이미 상실하고 말았다.
한꺼번에 들이 닥친 세 사람의 사별 앞에 무성해만지는 슬픔과 칼로 오려내는 아픔과 공포는 소영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
그녀에게 하루하루의 시간은 빛이 거두어진 어둠만으로 채색되었다.
그리하여 소영은 주검을 택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이랗게 기록된 소영의 자술서를 들여다보던 경찰관은 휴-하고 길게 한숨을 쉬면서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청춘이 만리 같은 젊은이가 그러면 못 쓰지. 뭐라싸도 저승 보다 이승이 낫다고들 하던데---”
무궁화꽃을 단 계급장으로 봐서 경찰간부라 그런지 소영의 처지를 흔히 있는 사건으로 넘기지 않고 고뇌에 빠진 소영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더운 찻물을 주고,위로의 말을 건너고,그러더니 물었다.
“집에 돌아가면 내일이라도 직장에 나가야지?”
“직장도 이미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겠지요.”
나이가 지긋한 간부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무엇이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 순찰대에서 보내고 내일 소개 한 곳 해 줄테니 한 번 가 볼 텐가?”
그 다음 날로 찾아간 곳이 파출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지복지원>이었다.
관리업무와 요양사 보조로 근무하게 된 소영은 침식을 그 곳에서 하며 세상을 잊고 삼년을 보냈다. 그녀는 간혹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파출소의 이소장을 찾아와 놀다 가곤 하였다. 이소장이 마치 아버지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 * *
어느 날이었다.
파출소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양수대교가 끝나고 국수리 쪽으로 뻗은 다릿길, 소영이 3년 전에 투신자살을 하려고 은빛 가드레일에 발을 놀려 놓았던 바로 그 곳에서 한 청년이 강물로 뛰어들려는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잠깐만요!”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 그 청년을 마구 잡아 끌었다.
갑자기 한 여자로부터 끌어당긴 청년은 황소 눈망울로 알수 없는 여인을 응시했다.
여인의 가느다란 팔뚝에서 어찌하여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알수 없었다. 청년은 여인의 팔에 끌려 국도변을 벗어나 한갓진 장소에 나란히 섰다. 짙은 안개는 점차 사라지고 눈부신 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죽은 셈 치고 다시 출발해 보자구, 응?!”
둘은 조용히 서로를 훑어 보았다. 청년도 소영의 나이와 비슷했다.
“나는 임 소영이에요.”
“아, 아 --- 그래요. 김창숩니다.”
창수가 멋쩍게 대답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주검이란 게 지금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아요.산다는 것이나 죽는다는 것은 둘 다 별 것이 아니라 여겨져서 말이오. 어차피 인생은 천년이고 만년을 사는 게 아니니까.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끝까지 살아 보자는 거에요.”
창수는 소영을 뚫어지게 건너다 보다가 자신을 추스렸다. 자신의 몰골이 너무나 초라했다.
창수는 자신과 소영을 번갈아 살피다가 소영으로부터 뭔지 모를 감성이 창수에게 한 줌의 빛살로 다가왔다.
소영도 창수의 눈빛에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면서 그의 얼굴을 덮었던 암울한 그늘이 지워져감을 직감했다.
“---그렇게 하는 게지요?”
창수는 한참 소영을 바라보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 배가 고픈데, 참, 창수도 뭘 좀 먹어얄 것 아냐?”
둘은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
국수리 쪽으로 길게 뻗어간 왕복 4차선 국도를 따라 나란히 걸었다.
걸어가면서 식사를 할만한 음식점을 찾고 있었다.
얼마가지 않아 등산객들이나 들렸다 가는 허수룩한 음식점에 들려 칼국수를 먹고 나니 둘 다 시장끼가 가고 한 층 기운이 솟았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이 길이 끝나는 데까지 한 번 가 볼까?”
“그래, 이 길의 끝까지---”
둘은 금시 서로 말을 텄다. 상호도 그르칠 게 뭣이 있으랴.
음식점을 나온 두 사람은 마침 정차한 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종착지가 어디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은 노랗고 빨간 단풍의 일색이었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의좌에 기대어 졸기도 하고 눈이 뜨이면 까칠한 목을 음유수로 추겼다. 거의 해질녘에야 강릉에 도착했다. 민박집에 방 하나를 얻어 놓고 해변으로 나갔다. 길길이 펼쳐진 모래사장 위를 나란히 거닐었다. 잔잔한 바다 위에서 그리 높지 않는 파도가 살짝 밀려 왔다가 모래사장 위에서 촤르르 소리를 내고 부서진다.
“파도가 밀려왔다 부서지는 것을 보니까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일본작가 나마모도유조의 <파도>라는 소설이 생각나네.”
소영의 말에 창수가 말을 받았다.
“나도 그 무렵 쯤 읽은 기억이 나. 주인공 고스께가 백사장에 누워 그의 아들 스스무짱에게 모래로 전신을 덮어 달라고 한 마지막 장면이 퍽 감동적이었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의 운명을 아들에게는 물러 주지 않겠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스스무짱도 다리를 절게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거였지.”
“그랬구나. 나도 파도가 몇 천 년, 몇 만 년 전부터 저렇게 철썩였고, 지금도 저렇게 반복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파도의 운명이나 마찬가지라는 장면의 글에서 무척 공감을 한 적이 있었어. 부서지고 사라지면 또 밀려 와서 부딪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게 되는 파도처럼 우리 인간 삶도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에 태어나서 죽고, 죽고 나면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도 파도 같은 운명일 거란 생각이었어. 우리도 아무리 그 운명을 벗어나려 해도 불가능할 지 몰라.”
“그래, 우리도 그 운명에 맡기고 살 수 밖에. 소영이나 나도 우리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자살하는 것도 당사자의 의지에 의한 것이 못되고 운명에 맡겨야만 되는 모양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굳어만 있던 표정도 풀리고 마음까지도 점차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바다 위에는 먼 수평선 쪽으로부터 황금색 낙조를 받아 금모래 같은 빛살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둘은 길다라란 그림자를 모래사장 위에 뉘어 놓고 동해바다 저 멀리 수평선에 깔린 낙조를 보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마음 좋아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들여다 주는 저녁상에 마주앉아 소주잔을 부딪쳐 가며 식사를 했다.
술을 몇 잔 돌린 다음 소영이 3년 전에 자살을 하려 했던 사실을 들려 주자 창수도 이 때까지 함구했던 자살하려든 동기를 간단히 털어 놓았다.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 떠난 후 아버지는 곧 재혼을 했지. 그런데 아버지마저 뇌경색으로 쓰러져 약 반년 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시자 재혼한 어머니는 자기 친자식과 살겠다고 훌쩍 떠나버린 거야. 법대를 나와 계속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든 나는 그제서야 혼자임을 알고 정신을 차려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챙겨 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 재혼한 어머니가 제다 갖고 떠나버렸으니까. 한 푼 없는 빈 털털이가 된 나는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졌어. 그런 처지에 어떻게 살아.”
여기까지 듣고 있던 소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이나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 한 잔 더 꺾어!”
창수는 순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스스로 술을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이제 그만 해. 그리 절망하지 말어. 과거지사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죽은 걸로 접어두고 살아보는 거야. 가진 것 없다고 다 죽는 건 아니잖아. 아예 너, 나 없이 태어날 때도 맨손이었잖니.하던 공부를 계속해.”
“ 어떻게? ”
“생활비는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마련할 테니 너는 하던 공부를 계속해. 사법고시에 패스만 하게 되면 문제는 해결 되지 않겠어! 어차피 우리 인생 덤으로 살기를 작정했으니 우리 둘은 부담 없이 살자 그 말이야.”
창수는 한참 동안 소영을 건너다보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창수의 두 번째 물음에 소영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못할 게 뭐 있겠어. 하겠어. 이런 인연도 어떤 운명이 이미 점지해 두었던 것인지도 몰라.”
소영이 창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수도 소영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는 그들에게 절망과 암울함을 털고 훻훨 타오르는 열정을 갖고 새출발을 하기로 다짐했다. 다시 술 한 잔씩을 비웠다. 밤이 꽤 깊은 듯 했다. 파도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모든 과거를 다 묻어버리고 새 출발을 다짐하며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브라보!”
상을 밀쳐놓고 둘은 나란히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가을 문턱에 접어든 밤 기온이지만 덥지도 춥지도 않아 방바닥에 등을 대기가 바쁘게 둘 다 깊은 잠에 빠졌다.
둘은 그 다음 날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 동안 소영이 양지복지원에서 받은 월급으로 사글세 방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말죽거리에서 성남 가는 길을 가다가 꽃시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 한갓진 단독 주택 지하방을 얻어 놓고 보니 참으로 조용했다. 작은 방 두 개에 부엌 따로 있어 소영이 가진 돈으로는 딱 들어맞았다. 넓은 방 하나 있는 것을 얻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창수의 고시 준비에 지장을 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이래서 시작된 동거 생활은 무려 4년을 보내는 동안 소영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고시 준비하는 창수의 뒷바라지에 소홀함이 없었다.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이웃 사람이나 집주인까지도 대화할 시간 마저 갖지 못했다. 그저 월말이 돼 월세를 지불하기 위해 주인 한테 들리면 소영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새댁은 쉬는 날도 없이 무척 바쁘신 모양인데 남면은 무얼 하길래 바깥출입이라곤 하지 않고 두문불출이오?”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다.
“공부하느라고 정신 없답니다.”
“공부라니? 취직 시험 보려고요?”
“그래요, 취직 시험요.”
“얼마나 좋은 곳에 취직 할려고 그리 오래도록 공부를 한대요?”
“그, 글쎄요!” 그렇게 근성으로 대답해 놓고 보니 주인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아예 신혼부부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 아무렇게 생각하던 상관할 바 아니잖는가. 창수가 고시 합격만 하면 어차피 둘이 조촐하게 결혼식도 올리고 살 테니.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대로 그 날을 위해 이 따위 고생 쯤이야 대수로울 건가 뭐.’
소영은 창수만을 위해 살기로 작심했다. 고달프고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창수를 위하는 일이 곧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일상의 하는 일들이 즐겁고 보람과 희망으로 가득차 오르는 듯 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눈 부릅뜨고 악착같이 살기를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다가도 그녀는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무엇 때문에? 왜 ?’
그런 생각이 문득 들면서 일탈과 쓸데없는 욕망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흔들어 부정하며 참고 견뎌 나갔다.
창수 역시 강한 집념으로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다. 때론 소영의 젖어 있는 눈빛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제하느라 애먹었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자제력에는 흐트려짐이 없었다.
소영이 생활 전선에서 꿀벌처럼 일을 할 때 창수는 깊은 골방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창수는 작년에 처음으로 고시에 도전하여 실패했다. 1차에는 합격했으나 2차에 낙방했다. 다시 재도전하였다. 다행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소변도 참으면서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두 번째로 재도전하여 1,2차 모두 합격했고, 그 것도 수석 합격이었다.
그런 소식을 들은 소영은 그날 하던 일을 다 접어 두고 오직 정성을 다해 창수의 고시합격 축하를 위한 저녁상을 마련했다. 그들의 살림살이에 과분할 정도였지만 진수성찬에 고급 와인까지 마련해 놓고 창수와 마주 앉았다.
“정말 축하해!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뻐.”
소영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창수를 쳐다보았다.
“모두 소영이 덕택이야. 고마웠어!”
두 사람은 와인 잔을 부딪쳤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우리들 앞날의 영광을 위하여!”
“브라보! 브라보!”
소영은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니 3년의 세월이 고달프고 힘들고 지겨운 날들이 많았지만, 이 날을 위하여 참고 견디며 될 수 있는대로 풋풋한 젊은과 생기 발란한 모습을 여러 사람에게는 물론 창수 앞에선 더더욱 보여주려고 애써왔던 소영이었다.
“이제 식사를 하자. 자,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 봐!”
소영은 정성껏 만든 음식들을 창수 앞으로 밀어주며 많이 먹기를 권했다.
“응, 그래 같이 들어!”
둘은 음식을 서로 권하며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소영이 식사를 하면서 감격스런 눈으로 창수를 한참 주시하다가 말했다.
“역시 우린 죽는 것 보다 살기를 잘 했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 보다 이승이 낫다지 않아. 이렇게 <살아있음>으로 해서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렇지.”
둘은 식사를 끝낸후 창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소영은 설거지를 하느라 오래 동안 주방일을 끝내고 자기 방에 들어와 화장까지 고친 다음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우린 부부나 마찬가진데, 오늘 밤부터 같은 방을 쓰자고 할까? 창수에게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는데... ’
소영은 창수의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섰다.
‘아니지, 아직 직장을 잡은 것도 아니고. 창수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게 옳을 거야.’
그 날 밤도, 그 다음 다음 날 밤도, 전과 다름 없이 각방을 썼다. 창수도 아무련 말을 하지 않았다. 소영은 자기가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을 만 번 잘 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소영은 지난 날과 다름 없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전히 사방팔방 뛰었다. 창수는 창수대로 2년 간 사법연수를 거쳐 수석 합격에 걸맞는 중앙관서의 요직에 발령을 받기까지 끈질긴 인내력을 보였다.
창수가 중앙관서에 검사로 보직을 받던 날도 고시 합격하던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상을 근사하게 차려 놓고 소영도 으썩해진 기분으로 창수와 함께 마주 앉아 삼페인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양주 꼬냑을 서로 잔이 넘치게 주고 받았다.
정말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소영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창수를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밤부터 한 방에 같이 자기로 해! 응?”
소영은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부드럽고 애교 띤 말로 창수의 의사를 떠보았다.
“왜,갑자기?”
“인젠 더 미룰 필요가 없잖아?”
“뭘 말야?”
“우린 죽은 셈치고 함께 살기로 했잖아. 뭐,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서 안 되는 거야?”
“그건 안돼!”
“왜 안돼? 결혼식은 너가 하자는 대로 할게.”
“그게 아냐!”
“그럼 그게 아니고 뭔데?”
“나는 얼마 전에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있어. 약혼도 했어.”
소영은 창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왜 그래? 내가 앞으로 보답할 길은 그 길 밖에 없잖아. 그 집에서도 예외 없이 세 개의 키(자동차 키. 아파트 키. 증권 금고 키)는 덤이고 평생 생홥비도 대 준대.그러니 내 출세를 도와 준 친구로서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를 도와 주겠어.”
“친구로서 ? !”
“그래. 친구로서 도와준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게. 우린 동거인이었지 부부로 살자는 것은 아니었잖아!”
“그랬어!? 그럼 가! 가란 말야!”
소영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그런 일이 있은 후 줄곧 소영의 소식은 묘연했고 창수는 예정대로 재벌의 딸과 결혼을 했다. 중앙관서의 요직에서 그의 실력은 인정을 받아 잘 나가는 검사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비리를 척결하는 선두주자가 되어 크고 작은 사건을 수사하고 구속 기소해서 유죄판결을 이끌어 내는 명검사가 되었다.
그런 창수의 뒷전에는 Y재벌의 총수인 그의 장인이 있어 정계와 관계에 뿌려지는 돈의 위력은 창수가 명성을 떨치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데 한 몫이 아니라 두 몫, 세 몫이 돼 주었다.
그런 그에게도 행운만 있어라는 법이 없었다. Y그룹에 거액의 탈세 사건이 M신문에 보도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음페돼 온 것은 정, 관계에 로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사가 단독 보도되었다. 그 기사로 인해 정,관게는 물론 Y그룹 내의 모든 회사가 발콱 뒤집혀졌고 즉각 명예훼손 협의로 M신문 박일도 기자를 고소했다. 박일도 기자는 너무나 억울해 분통을 터뜨렸지만 권력과 금력의 위력에는 맥을 출 수가 없었다.
당연지사로 이 사건은 김창수 검사가 맡게 되었다.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구속적부심사까지 거쳤지만 구속영장이 떨어져 세균박사라는 박일도 기자도 구속되고 말았다. 그 사건이 국민으로서는 초미의 관심꺼리였지만 몇 개의 신문에서 짤막한 기사가 났을 뿐 유야무야로 넘어가면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헤손죄를 뒤집어 쓴채 박일도는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김창수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김창수 검사에요?”
“네, 그런데요?”
“ 나, 소영이.”
“뭐, 소영이?”
“그래, 임소영.”
“그 그래, 도대체 어찌된 거야. 지금껏 소식도 없이.....”
“너무 오래 되었는데. 우리 꼭 한 번 만나자.”
“일요일이라면...”
“그래, 그럼 이번 일요일 3.1다방에서 9시에 만나. 이야기는 거기서 하기로 하고. 끊는다!”
전화를 끊고 난 창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반갑다기 보다 종문소식이든 소영이 뜻밖에 전화로 만나자는 것도 그렇고, 한 밤중에 집을 나간 후 십년이 넘도록 전화 한 번 없던 그간의 행적이 참으로 궁금했다. 줄곧 궁금증으로 사흘을 보낸 후 소영이 만나자던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만났다. 얼굴을 맞대고 앉자마자 소영이 말했다.
“한 가지만 부탁 좀 하겠어. 박일도 기자 풀어줘!”
창수는 뜻밖의 요구에 황당했다.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었다.
“그는 내 남편이야! 안 되겠어!”
창수는 더욱 황당해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말하지 않겠어. 그것도 사흘 안으로. 그런 다음 다시 만나.”
작고 낮은 목소리였건만 창수에겐 바위처럼 무겁고 천둥소리 같이 큰 소리로 들렸다.
그렇게 말을 남긴 소영은 갖다 놓은 찻잔에 입도 대지 않고 일어서 나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창수는 머리가 지근거리며 자꾸 흔들렸다. 기이한 인연과 운명을 새삼 되씹었다. 나르는 새도 단번에 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창수였지만 일개 나약한 한 여자 앞에서 목에 힘 한 번 줄 수 없는 존재가 된 셈이었다. 창수는 그녀의 요구 대로 사건의 동기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유예처분을 해 박일도를 풀어줬다.
박일도가 풀려난 다음 날 소영과 창수는 3.1다방 앞 차도에서 다시 만났다.
“부탁을 들어줘 고마워. 다른 얘기는 조용한 곳에 가서 하기로 하자”
“그럴까.”
“자가용은 그만 두고 택시를 타. 답답한 도시 보다는 야외가 좋지 않겠어.”
“아무러문...”
창수와 소영은 택시가 워크힐 앞을 거쳐 덕소와 팔당을 지나 양수대교가 끝날 무렵까지도 입을 걸어매 놓기라도 한 듯 열지 않았다.
“자, 여기서 내려.”
눈을 감고만 있던 창수는 얼결에 택시에서 내렸다.
“내가 창수와 헤어진 후 언젠가는 둘이 함께 이 곳을 와 보고 싶었어.”
창수는 거제서야 십년 전 투신자살을 하려 했던 바로 그 장소에 서 있음을 새삼 발견했다.
“ 그랬어. 나는 바빠 까맣게 잊고 있어서. 왠 놈의 안개가... 꼭 그 때처럼.”
비로소 창수가 겨우 뱉아낸 말이 그 정도였다. 그의 말대로 그때처럼 지척을 분간키 어렵게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안개 밑으로 강물은 유장하게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소영은 왼손으로 가만히 창수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한 손은 자기의 가슴 깊숙이 찔렸다. 딱딱한 물체가 손바다에 와 닿았다. 그녀는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창수의 얼굴을 똑 바로 보며 말했다.
“우린 여기서 다짐했지.죽은 셈치고 덤으로 함께 살자고.”
여전히 창수는 고개만 끄득인채 말 없이 발걸음만 떼어 놓았다. 소영은 창수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물기가 번지르르한 은회색 가드레일 쪽으로 창수의 몸을 밀었다. 창수는 스르르 가드레일에 기대섰다.
“그 땐 그랬는데 지금은 그 반대의 입장에 우리 둘은 섰어.”
“거게 무슨 소리야?”
“지금은 살았다고 셈치고 함께 죽자 이 말이야! 이제 알아들었어! 이 자식아!”
창수가 화들짝 놀라 소영을 뿌리치려 할 땐 이미 소영의 권총 한 발이 창수의 가슴팍에 박히고 말았다.
“비겁하고 더러운 자식! 이승이 아닌 저승에 가서라도 물귀신이 되어 너를 상대해 주마.”
소영은 있는 힘을 다해 창수의 몸둥이를 뻗어간 다릿길 난간 아래로 밀쳐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난간에 몸을 걸쳐 자기 이마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방의 총소리는 메아리지며 우유 빛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안개와 더불어 강물은 여전히 유장하게 흐르는데, 헛소문처럼 떠도는 이들 이야기가 뜬금없이 나타나 가뭇없이 소멸되고 퇴색되면서도 끊임없이 이 세상에 회자되는 그 이유를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첫댓글 시국이야기를 매우 재치있게 잘 요리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