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역사관*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대역사가이며, 최대의 역사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사
기” 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당대까지의 걸쳐 그가 알 수 있었던 범위의 중국
및 외국 민족의 역사서이다. “사기”가 씌어지고 난 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
의 모든 역사서중에서 가장 널리, 가장 감명깊게 읽혔던 책의 하나였다.
그 체재는 후세기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헤로도투스(Herodotas)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사서전통에 끼쳤던 것과 같은 영향을
사마천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사서에 영향을 끼쳤다.
5대 왕주(하,은,주,진,한)와 무수한 봉건 제국을 망라하고 있는 사마천의 역사는 변
화의 과정을 기록한 가장 뛰어난 역사서이다. “사기”의 기록된 2천년은 흥망을 되
풀이하는 정치적 운명의 끊임없는 리듬으로 운동하고 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그 리
듬은 더 큰 사계와 성좌의 리듬이 인간의 영역에 자연적, 필연적으로 반영된 것이
다. 사마천의 목적은 그 자신이 명언하고 있듯이 “과거의 행위를 궁구하고 그 성공
과 실패, 흥기와 쇠망의 배후에 가로놓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의 대역사서들이 모두 그랬듯이 “사기” 역시 교훈적이다.
즉, 잘 사용되는 성서로 말한다면 `권성징악'을 의도한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알 수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모두 썼다. 중국인은 물론이고 타지역
인민들을 논할 경우에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 최고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그 자신
이 살고 있는 시대까지 기술을 계속했다. 그는 중국인과 외국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서술을 시작한 시대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존재하고 있
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최고의 사람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 자료들이 그 점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
문이다.
사마천 시대의 중국인은 자기의 열등한 풍습을 버리고 중국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민족과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 대의 중국인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사람들과 마찬가지
로 자신의 문화가 옛날의 좁은 왕국의 경계선을 넘어서 모든 인류를 하나의 큰 가족
가운데 포용하는 위대한 날을 목전에서 볼 수 있다는 자신과 진보의 단계에 도달에
있었다. 사마천이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모든 시대, 모든 민조기의 역사 기술에 착수
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암뭄적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은 사마천의 역사 기록에 기초해 있는데 그는 무제의
정책에 대한 가장 신랄한 반대자의 한 사람이었다. 무제를 섬기며 전생애를 조정에
서 보낸 관료로서, 이 시대에 행해진 것에 대해 사마천만큼 정확하게 상황을 알고 있
는 자는 없었다.
사마천은 너무도 솔직하게 비판을 해서 무제로부터 궁형(宮形)에 처해지는 괴로움을
맛보았고, 이 때문에 무제에 반대하여 그 시대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하는 역사를 썼
다고 지금까지 말해지고 있다. 이 무서운 형벌이 이 불행한 남자의 신랄함과 분노를
더욱 깊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역사를 쓴 동기는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는 불행을 당하기 이전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또 그의 불행이 무제와 무제가
행한 정치를 비난하게 된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마처니의 옛 친구 익주 자사(刺史)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기의 저술
의 의의를 문왕(文王)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을 연역하였고 공자는 곤란한 처지
를 당하여 “춘추”를 지었고 굴원(屈原)은 쫓겨가서 “이소”를 썼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에 “국어”를 지었고 손자(孫子)는 발이 잘리고 “병법”을 편찬하였고 여
불위(呂不韋)는 촉에 유배되어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는 진(秦)에 체포되
어 “세산”“고분”을 저술하였으며 “시경”300편, 시는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
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힌 바가 있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통할 수 있었기 때
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 줄 것을 생각했던 것
이다. 좌구와 같이 눈이 없고 손자와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끝끝내 세상에서 아무
런 소용이 없지만 물러나 서책을 써서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이론적인 문장을 세
상에 남겨 자신을 드러냈다.
“저는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 흥망의 원리를 살려 모두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
자 하였습니다. 그러나초고를 다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
지 못한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 당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몰랐던 것입니
다. 저는 진실로 이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
게 전하여 촌락, 도시에 유통되게 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번이나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서술하
고 있다.
위와 같이 “사기”는 천하에 흩어져 있던 옛기록을 망라하였다. 여러 왕이 이룩한
사적에 대하여 그 처음을 탐구하고 그 끝을 고찰하였으며 그 융성하던 시대를 보고
그 쇠퇴한 때는 관찰하였다.
행해진 일을 논증하고, 고찰하여, 대략 3대(三代)를 추정하고 진한을 기록하엿다. 위
로는 현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본기(本紀)를 지었다. 본기는 조리
를 세워 정리하였으나 시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연대 차이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10표(表)를 지었다. 예악(禮樂)이 변화한 것, 율력(律歷)이 개정된 것, 병
권, 산천, 귀신, 하늘과 인간관계 시폐가 있으면 그에 따라 바뀌는 경제행위 등등에
대해 8서를 지었다. 28의 성좌가 북극성을 들고 30개의 수레바퀴 살이 하나의 바퀴
중심을 향해 잠시도 쉬지 않고 운행하듯이 손발처럼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들이 있어
충신으로 도를 수행하며 주상을 받든다. 그들에 대해 30세가(世家)를 지었다. 의를
부지(扶持)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자신에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고명을
세운 이들에 대하여 70열전(列傳)을 지었다. 모두 130편, 52만 6천 5백자이며 이책
을 “태사공서”라 하였다.
사마천은 “춘추”와 “사기”에 관한 논의에서 상대부 호수가 사마천에게 묻기를
“옛날 공자가 춘추 ”를 지은 까닭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태사공 천은 “대저 춘추 는 위로는 3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의 법칙
을 분별하여 혐의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며 애매한 것을 결정합니다.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며 훌륭한 자를 칭송하고 하찮은 자를 비난합니다. 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몰락한 가문을 이어주며 낡은 것을 보완해주고 없어진 것을 부흥시켰으니
왕도의 가장 중요한 것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난세를 다스려 올바른 데로 둘다 가게
하는데는 ”춘추“만한게 없습니다. ”춘추“는 수만의 글자를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가리키는 뜻은 수천을 헤아립니다. 만물이 어떻게 이합집산하는지 모두 ”춘추“에
실려 있습니다. ”춘추“에는 군주를 시해한 일이 36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52
건, 제후가 망명하여 사직을 보전하지 못한 것은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
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춘추“를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를 알지 못하면 면
전에서 참언을 해도 알지 못하며 등 뒤에 역적이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상대부 호수가 말하였다. “공자의 시대에는 위로는 밝은 임금이 없었고 아래로는 유
능한 자가 임용하지 못했소, 그러므로 공자는 ”춘추“를 지어 그 이론적 판단을 후
세인에게 남겨 예리 문제를 논란하고 와의 규범을 세웠던 것입니다. 지금 선생께서
는 위로는 밝은 천자를 모시고 있으며 아래로는 그 지위에 적합한 인물이 있는 시대
에 살고 계십니다. 모든 일이 다 갖추어져 있고 모든 것이 바른 위치에서 각각 질서
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 저작을 하여 무엇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까?”
태사공이 말하기를 “태사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밝고 거룩한 천자의 성덕
을 기록하지 않으며 공신, 세가, 현대부의 업적을 버려 두고 기술하지 않아 선친의
맔슴을 망각한다면, 이보다 큰죄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말하려 하는 것을 옛일은 있
는 그대로 기술하고 대대로 전해온 것을 정리하겠다는 것일 따름이며 공자처럼 저작
을 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마천의 역사적 교훈적 기능에 대한 자각은 왕조의 유덕한 창업자, 쇠퇴해 가는 왕
실의 운명을 부흥시킨 현군, 충신과 간신을 둘 다 거느리고 있던 모악하고 타락한 최
후의 군주라는 유형은 사마천의 이야기에 반복해 나타나며, 자기 시대에 대한 설명에
서조차 언급되고 있다. 사마천은 과거의 역사에서 발견했던 유형을 자기 시대에로 계
속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역사에서 이둘 유형의 반복해 나타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계의 생장과 쇠미, 4계절의 부단은 교대에 바
탕을 둔 흥망의 유형이 존재한다. 이는 역사의 자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한 부분이
다.
사마천은 이 흥망의 순환을 두 종류의 윤리적인 용어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첫 번째는 `질(質)즉 소박함'과 `문(文)즉 세련됨'이 서로 교대한다는 이론이다. 질
의 시대가 있고, 문의 시대가 있다. 양자는 서로 교대한다라고 사마천은 서술하고 있
다.
두 번째는 과거의 왕조는 각기 하나라의 성실, 은나라의 경건, 주나라의 세련이라는
독자적인 덕성으로 특징지어지고, 각 왕조가 쇠하면 이 덕성은 결함을 노정하게 되는
데 그 시점을 위해서는 순환상 그 다음의 덕성을 필요로 한다는 이론이다.
사마천은 또한 역사란 끊임없고 생장의 과정이어서 정지된 과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
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에 어울리는 도덕적
가치를 알맞게 적용함으로써 현대에 새로운 황금시대를 창조하는 것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상은 사마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가 역사에 존재하
는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항우의 놀란만한 흥가에 대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의 유형, 국가의 흥망, 도덕적 가치의 교대, 제도와 예의 바
뀜을 훨씬 더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역사가 크로체는 “역사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여지거나 인가니의 주도하에 추
진된다고 여겨지지 않고, 바위덩어리가 불시에 떨어지듯 그에게 엄습한다고 느낄 때
인간은 공통적으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사마천조차
도 “위세가”의 경우 명석한 태도에서 벗어나 크로체가 말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견해에 빠진 것을 보면 그 저술이 인간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오류를 범할 수도 있
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중국인에게 주(周)의 궤멸은 경악할 만한 사태롤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초자
연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그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황우본기”의 끝에서 이 군사적인 지도자의 눈부신 흥기에 대해 서술한
뒤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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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역사관
h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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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0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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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흠; 들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수업을 참 재밌게하시네요 ㅋㄷ -_- 고딩때와는 다른 교수님만의 주관적인 역사적 견해 멋집니다 +_+
ㅋㅋ 그래서 내가 인기 있는거 아닌감유^^ ㅁ미모도 한몫 하겠지만거두...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