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n Eak-tai - Symphonic Fantasy Korea
안익태 - 한국 환상곡
안익태 [1906 ~ 1965]
Ahn Eak-tai - Symphonic Fantasy Korea
우리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함께 묘사한 안익태(1905-1965) 선생님의 대서사시 교향곡 "한국 환상곡"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 부분입니다. 서두에 진동하는 관현악의 울림으로 고조선이 개국을 알리고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그리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며 이어 우리의 민요 가락이 여러 가지 악기 소리와 더불어 타령조의 멜로디로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가 표현됩니다.
둘째 - 일제 아래 신음하는 한반도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무겁고 침통한 선율이 슬프게 이어집니다.
셋째 -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애국가의 1절부터 4절까지를 합창으로 표현했습니다.
넷째 - 6.25로 인한 처절함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선율은 다시 슬픔으로 바뀌고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퍼진 뒤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의 만세 소리와 함께 곡 전체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클래식 음악산책
안익태(安益泰) (1905-1962)
안익태는 1905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창호, 안중근 등 애국지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그 당시 중류층 가정의 셋째아들이었던 안익태는 형 익심이 선물로 사다준 바이올린을 받으면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19년 독립 운동에 연루되어 반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1932년에는 미국으로, 1936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안익태는 1946년 7월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였고 그해 마요르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습니다. 그가 오랜 방랑 생활 끝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제에 초청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후 고국에서 음악을 계속하려 했던 안익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9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각기병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평소 그의 소망대로 1977년 7월 국립묘지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들려드리는 "한국 환상곡"은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6.25 전쟁을 묘사한 것으로 1935년 7월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카네기 홀에서의 작곡 콩쿠르에 응모, 입선된 곡으로 몇 번의 수정을 거친 후 초연되었습니다.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조언이 많이 포함된 교향곡 [한국 환상곡]은 해방전에는 합창 부분까지만 연주돼오다 6.25 이후 제4부를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귀하는 훌륭한 능력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지휘자라는 엄연한 사실을 나와 우리 벗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하의 탁월한 능력을 더욱 넓은 세상에 확신을 갖고 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더구나 귀하의 그 민족음악적 작품은 대단히 가치있는 것으로 그 탁월한 솜씨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것은 또한 착실한 심포니의 연주회 곡목으로 선택된다면 반드시 흥미를 끌 것입니다. 나는 귀하의 음악예술가로서의 장래에 큰 희망을 갖습니다. 신의 가호아래 대성의 길로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위의 글은 후기 낭판파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가 안익태에게 준 추천장의 내용입니다.
* 그는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창호, 안중근 등 애국지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그 당시 중류정도의 가정의 셋째 아들이었던 안익태는 형 안익심이 동경 유학 중 방학을 이용해 귀국하면서 선물로 사다 준 바이올린을 받으면서 그의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정년회관(YMCA)을 발판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마침내는 미국유학을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아끼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에게 사사받고 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6.25 전쟁을 묘사한 이 한국 환상곡은1935년 7월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카네기 홀에서의 작곡 콩쿠르에 응모, 입선되었던 곡으로 몇번의 수정을 거친 후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 중심의 악곡 전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애국선열 추도곡 "진혼곡"은 의식이나 행사의 요소가 짙은 곡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며 교향시 "강천선악"은 아악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한 순수 관현악으로 구사나 악상이 뛰어납니다.
그의 작품은 휄릭스 바인가르트너,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레오폴드 스토콥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후기 낭만주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과 민족주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한국 환상곡이나 이 후에 작곡되는 "애국가"는 후자의 경우로서 일생을 조국을 떠나 방랑하며 망명생활을 해야했던 음악가의 민족혼을 불어 넣어 만든 곡이라 하겠습니다.
일제 치하의 한국이라는 약소국 출신으로 세계를 방랑하며 망명 음악생활을 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헝가리 작곡가 졸탄 코다이, 에르네스트 프릿즈 라이너, 휄릭스 바인가르트너 등의 기라성같은 음악가들에게서 작곡과 지휘를 사사받고, 푸르트뱅글러, 알프레드 카젤라, 피제티, 토스카니니, 폰 카라얀과 교류를 나누었으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한국인 음악가 안익태...
유능한 지휘자로서 각국을 순회연주했는데 파리 콩세르, 런던 로열 필하모니, 로마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일본 NHK 등 저명한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그는 스페인 백작의 딸 이었던 로리타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갖고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서 활동하다 1965년에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이 후로 스페인에서는 소규모이지만 안익태 추모행사가 매년 열리며 마요르카의 안익태 박물관 앞 거리는 안익태 거리로 명명되어 오늘날에도 망향의 아픔으로 민족혼을 살랐던 음악가를 기리며, 약소국 출신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음악가의 넋을 위로하고 있습니다.연주시간 약 24분...
한국 환상곡 (Symphonic Fantasy Korea)
시대 20세기 이후
분류 20세기 음악>기악곡
제작시기 1935년
작곡가 안익태(Ahn Eak-tai, 1906~1965)
초연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 더블린, 안익태 지휘, 아일랜드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구성 단악장
제1부 개국과 평화로운 우리 조국
제2부 일제의 압박과 백성들의 암울함
제3부 조국의 광복
제4부 한국전쟁과 조국의 영광
요약 이 작품은 193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된 곡으로 합창과 관현악으로 이루어진 교향적 환상곡이다. 1938년 작곡가의 지휘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내셔널 심포니에 의해 초연되었다.
〈애국가〉의 음악을 소재로
〈한국 환상곡〉은 역시 안익태가 작곡한 우리나라의 국가 〈애국가〉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안익태는 1965년에 죽었기 때문에 현재의 저작권법에서 저작권이 만료되는 시점은 2035년이다. 그러나 안익태의 미망인 로리타 탈라벨라 여사가 200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애국가는 한국인 것”이라며 애국가의 저작권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최근까지도 애국가의 작사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나라 정부는 오랫동안 〈애국가〉의 작사가를 찾는 작업을 해왔고, 최근에는 6·25 동란 직후 한국 공보처가 개설한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브로슈어에 영어로 번역된 애국가의 악보가 윤치호 작사, 안익태 작곡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작사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곡은 안익태의 곡임은 확실하다. 〈애국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의 공식 국가로 불려오고 있다.
미국에서 작곡되어 유럽에서 초연
〈애국가〉가 〈한국 환상곡〉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안익태의 행적은 오랫동안 베일에 감춰져 왔었다. 아직도 안익태의 유럽과 미국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몇몇 한국 음악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것들이 밝혀지고 있을 만큼, 우리는 아직 우리나라 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오랫동안 이 곡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음악학자 허영한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 환상곡〉은 안익태가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인 193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다고 밝혀졌다.
안익태의 친일 논란
문제는 몇몇 학자들이 안익태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활동을 조사해본 결과, 안익태가 친일행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안익태는 일본식 이름인 ‘에키테이 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그는 법적으로 일본인으로 살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가 지휘한 베를린에서의 음악회는 사실상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였고, 그 공연에서 〈만주 환상곡〉이 연주되었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만주 환상곡〉과 〈한국 환상곡〉에 들어있는 비슷한 부분들을 지적했고, 이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돌았다. 게다가 안익태가 유럽에서 활발하게 지휘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으로 연주했던 곡들은 〈한국 환상곡〉이 아니라, 〈만주 환상곡〉, 〈에텐라쿠〉, 〈교향적 환상곡 교쿠토〉 등 일본 색을 그대로 표면에 드러낸 작품이었다는 사실도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한국 환상곡〉, 〈애국가〉와 관련해서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되어왔다.
〈한국 환상곡〉의 정체성
그러나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안익태 연구를 수행해온 음악학자 허영한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 따르면 〈한국 환상곡〉은 1937년 봄 미국에서 완성되어 그곳에서 비공식 리허설 혹은 비공개 연주회를 통해 처음 연주되었다. 또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이루어진 초연 당시 〈한국 환상곡〉의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과 달리 합창이 아니라 관현악 연주로만 구성이 되어있었다. 이후 안익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작곡가 도흐나니 에르뇌의 지도로 이 곡의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이 후 안익태는 유럽 여러 곳에서 자신의 지휘로 〈한국 환상곡〉을 연주한다. 하지만 1940년 9월 부다페스트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안익태가 지휘하는 공연에서 〈한국 환상곡〉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친일과 애국의 이분법을 넘어
음악학자 허영한은 또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이 일본 외교 당국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작곡가가 작품명을 변경해서 〈쿄쿠토〉, 〈만주국〉 등으로 연주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허영한은 안익태의 오케스트라곡 〈전원〉이 우리나라 신민요 〈방아타령〉의 선율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곡이고, 이 곡이 〈한국 환상곡〉, 〈쿄쿠토〉, 〈만주국〉 모두에서 계속 2악장에 위치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 세 곡이 사실 각각 다른 곡이 아니라, 〈한국 환상곡〉의 변형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지식인인 그가 유럽 땅에서 어떻게 지휘자로 살아갔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단면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는 그를 친일 혹은 애국의 이분법 안에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들이 그의 삶에 얽혀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글 정이은 서울대학교 작곡과 이론전공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한 뒤, 홍콩대학교 음악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글 출처 클래식 백과 클래식 음악의 개요는 물론, 작곡가와 음악에 담긴 이야기들까지 세세하게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