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집 제19권 / 묘갈명(墓碣銘) / 황경원(黃景源)
고려 고 좌사의대부 우문관 제학 충선 문공의 묘갈명 병서
(高麗故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忠宣文公墓碣銘 幷序)
충선 문공(忠宣文公)이 돌아가신 지 370여 년이 되었는데 그 15세손 취광(就光)이 공의 사적을 모아서 경원에게 명을 청하기를, “저희 조상의 묘는 단성현(丹城縣) 갈로개산(葛蘆介山)에 있는데 무덤에 명(銘)이 없을 수 없으므로 감히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경원이 이르기를, “충선공은 고려를 섬김에 순수한 충성과 높은 절개가 사방에 알려졌으니, 법식상 명을 짓는 것이 마땅하거늘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하였다. 살피건대 공의 휘는 익점(益漸)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초명은 익첨(益瞻)으로 진주 강성현(晉州江城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문과급제자로 발탁되어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이 되었다. 몽고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공의 강직한 명성이 천하에 높았다. 타환첩목아(妥懽帖木兒)가 공에게 묻기를, “너의 왕은 황음무도하므로 짐이 폐하려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신하에게 있어서 임금은 땅에 대해 하늘과 같으니, 신이 비록 죽더라도 감히 명령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타환첩목아가 매우 노하여 말하기를, “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거늘 너는 속국의 배신(陪臣)으로서 천자의 명을 따르지 않았으니, 죽을죄를 지어 용서할 수 없다.”하였다.
이에 교지(交趾)의 남쪽 만 리 밖으로 유배되어서 3년 후 석방되어 고려로 돌아왔다. 이에 학자들이 모두 공이 능히 충정(忠貞)의 절의를 지켰다고 칭송하였다. 송나라가 망해버린 이후로 학교가 무너졌으니 공이 개연히 공자(孔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의 도를 지키기를 자기 임무로 삼고 불교를 비판하고 폄훼하였다.
제자들을 교육함에는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써 깨우치고 권면하였다. 공민왕 때 또 상서(上書)한 것이 고금을 드나드는 수천 언이었으나 왕이 능히 쓰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 공이 배움이 끊어진 것을 창성하게 하고 문교를 환히 다시 빛나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모두 공이 능히 도덕을 온축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얼마 있다가 지청도군사(知淸道郡事)가 되었는데 대사헌 조준(趙浚)이 공의 직책을 파하라고 탄핵하니, 공이 그날로 시골로 물러나 살다가 마침내 지리산(智異山) 속에 숨어 사은(思隱)이라 자호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자애롭고 효성스러웠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는데, 왜노의 난 때 사람들이 모두 숨었으나 공은 홀로 떠나지 않았는데 왜노가 감히 해를 가하지 않았다. 왕씨(王氏)의 정치가 어지러워졌을 때는 병을 핑계하고 벼슬하지 않다가 기회를 보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에 학자들이 모두 공이 능히 은둔의 의지를 이루었다고 일컬었다.
홍무(洪武) 16년(1383) 계해 2월 8일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가 53년이었다. 신우(辛禑)가 명하여 갈로개산(葛蘆介山)에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또 빗돌을 세워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였다. 건문(建文) 3년(1401)에 본 조정에서 가정대부 참지의정부사 겸 영경연사 예문관제학(嘉靖大夫參知議政府事兼領經筵事藝文館提學)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였으며 도천(道川)에 사당을 세웠다.
공의 증조는 아무개이며, 조부는 아무개이고, 부친은 아무개이다. 초취는 주씨 부인(周氏夫人)이었고, 재취는 정씨 부인(鄭氏夫人)이었는데 아들 5명이 있었다. 장남 중용(中庸)은 사간원 헌납이었고, 차남 중성(中誠)은 진사였으며, 3남 중실(中實)은 문하시랑이었고, 4남 중진(中晉)은 진사였으며, 5남 중계(中啓)는 예조 판서였다. 손자 화(和)는 승정원 도승지였고, 내(萊)는 찬성의정부사(贊成議政府事)에 장연백(長淵伯)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공이 교지에서 돌아올 때 목면을 얻어 붓대 속에 감추어 돌아와서 나라에 심었으니 고려 목면은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후(夏后) 시대에 이미 목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공(禹貢)〉에서, “섬오랑캐〔島夷〕는 훼복(卉服)을 입었고,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직패(織貝)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훼(卉)라는 것은 목면 등속이다. 지금 남이(南夷)의 목면으로서 고운 것을 길패(吉貝)라고 한다. 그러니 목면은 남이에서 산출된 지 또한 오래되었는데, 어찌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의리는 족히 군신의 윤리를 바루었고 / 義足以正君臣之倫
학문은 족히 천인의 진리를 궁구했으며 / 學足以窮天人之眞
지혜는 족히 초야의 육신을 보전했거늘 / 知足以全丘壑之身
어찌 꼭 남방의 한 식물로써 공의 어짊을 기릴 것인가 / 何必以南夷一卉誦公之仁
<끝>
[註解]
[주01] 고려 …… 문공 : 고려 말의 문신인 문익점(文益漸, 1329~1398)으로,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삼우당(三憂堂), 아버지는 문숙선
(文淑宣)이다. 1360년(공민왕9) 문과에 급제하였고 1363년에 좌정언(左正言)으로 계품사(啓稟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
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최유(崔濡)가 원나라의 허락을 얻어 충선왕(忠宣王)의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여
요동까지 진군하였으나 최영 등에게 패했다. 문익점은 귀국하여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
귀국할 때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진주에서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이에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痲布]에서 무명[綿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조준
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 태종 때 그 공을 기리어 참지의정부사ㆍ예문관제학ㆍ동지춘추관사ㆍ강성군(江城君)을 추증하고, 두 아들을 사헌부 감찰로 발
탁했다. 1440년(세종 22)에는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하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주02] 취광(就光) : 조선 후기의 학자인 문취광(文就光, 1752~1835)으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명진(明進), 호는 무민재(无憫齋)
이다. 전라남도 장흥(長興)에서 출생하였으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1794년 대과에 급제하였다.
1785년 문익점과 문위세(文緯世)의 서원을 중수하였고, 상소하여 강성사(江城祠)가 사액(賜額)되었으며, 1798년 호남의 유생과
함께 상소하여 문위세가 참판에 추증되었다. 1818년, 문익점의 문집을 문계항(文桂恒)과 함께 간행하였으며, 다음 해에 문위세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 등의 많은 연구를 하였다. 1893년 그의 효행에 대해 장흥에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동몽교관
(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무민재문집(无憫齋文集)》이 있다.
[주03] 단성현(丹城縣) : 경상남도 산청 지역의 옛 이름이다.
[주04] 진주 강성현(晉州江城縣) 사람이다 :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에서 출생하였으니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이다. 본관은 전라남도 남평
(南平)이다.
[주05] 타환첩목아(妥懽帖木兒) : 토곤테무르(1320~1370, 재위 1333~1368)로, 원나라의 제11대 황제 혜종(惠宗), 즉 순제(順帝)의
이름이다. 고려 출신 공녀 기씨(奇氏)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주06] 교지(交趾) : 현재의 베트남 북부 지역을 가리킨다.
[주07] 조준(趙浚) : 1346~1405. 여말선초의 문신이다. 고려 말 개혁파 사류의 대표적 인물로서 조선 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ㆍ송당(松堂)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고, 1390년(공양왕2) 전제개혁을 단행
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고,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여 좌정승ㆍ영의정 부사가 되
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08] 대사헌 …… 탄핵하니 : 《고려사절요》 공양왕 1년(1389) 8월 기사에 나와 있다. 이성계 일파의 사전(私田) 혁파 논의에 대하여 문
익점이 찬성하지 않고 병을 핑계하여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조준이 탄핵하기를, 문익점은 본래 유일(遺逸)로서 진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질다 하여 간대부(諫大夫)로 임명하여 왕의 자문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나 간쟁하는 절개가 없으므로 삭탈관직하여
산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주09] 신우(辛禑) : 1365~1389. 재위 기간은 1374~1388년이다. 고려 제32대 임금 우왕(禑王)을 폄하한 호칭이다. 이성계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하였으며, 우왕은 아들 창왕과 함께 폐위되어 죽음을 당
하였다.
[주10] 갈로개산(葛蘆介山)에 …… 지내고 : 문익점의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에 있는데, 묘 아래 도천서원이 있다.
[주11] 도천(道川)에 사당을 세웠다 : 이 사당은 도천사(道川祠)로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전신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2년
(광해군4)에 중건되었고, 1787년(정조11)에 도천서원으로 다시 사액을 받았다. 그 후 권도(權濤)를 추가 배향하였다. 고종 때 서
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복원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다.
[주12] 내(萊) : 문래(文萊)로, 자는 자봉(子蓬), 호는 이곡(理谷),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경사(經史)에 통하였고 천문ㆍ지리ㆍ음양ㆍ산
수(算數)ㆍ척도(尺度) 등에 밝았다. 1395년(태조4)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가 치사(致仕)하였고,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大夫)ㆍ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실 잣는 기구인 물레라는 이름은 바로 문래에게서 비
롯되었다고 한다.
[주13] 섬오랑캐〔島夷〕는 …… 직패(織貝)이다 : 《서경》 〈우공〉 제44절에서, “공물은 3가지의 쇠붙이와, 구슬과 옥돌과 크고 작은 대나
무와, 상아와 짐승 가죽과 새깃과 소꼬리털과 나무이다. 해도(海島)의 오랑캐는 훼복을 입으니,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직
패이며, 싸가지고 오는 귤과 유자는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면 바친다.[厥貢, 惟金三品, 瑤琨篠簜, 齒革羽毛, 惟木. 島夷卉服, 厥篚
織貝, 厥包橘柚, 錫貢.]” 하였다.
채침(蔡沈)의 주에 의하면, “섬오랑캐[島夷]는 동남쪽 해도(海島)에 있는 오랑캐이며, 훼(卉)는 풀이니 갈월(葛越)과 목면(木綿)
등속이다. 직패(織貝)는 비단 이름으로 짜서 자개 무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남이(南夷)의 목면 중에서 정(精)하고 좋은 것을 길패
(吉貝)라 이르니, 해도의 오랑캐들이 훼복을 입고 와서 공물을 바치되 직패의 정한 것을 광주리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라고 하였
다.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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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故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忠宣文公墓碣銘 幷序.
忠宣文公旣卒之三百七十餘年。其十五世孫就光。輯公之事。乞銘于景源曰。吾祖之墓。在丹城縣葛蘆介山。不可無幽堂之銘。敢以爲請。景源曰。惟忠宣公事高麗。純忠高節。聞於四方。法宜銘。余何敢辭。謹按。公諱益漸。字日新。初諱益瞻。晉州江城縣人也。少好學。與文忠公鄭夢周。擢文科第。爲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奉使蒙古。公剛直名重天下。妥懽帖木兒問公曰。爾王荒淫無度。朕欲廢之。何如。公對曰。君之於臣。猶天之與地也。臣雖死。不敢聞命。妥懽帖木兒大怒曰。朕志已决。而汝以屬國陪臣。不遵天子之命。罪死不赦。乃流于交趾之南萬里之外。居三年。釋還高麗。於是。學者皆稱公能守忠貞之節也。自宋室旣亡以後。學校頹癈。公慨然以孔子,子思,孟子之道。爲己任。詆毁釋氏。敎弟子。必以孝悌忠信。風勸之。恭愍王時。又上書。出入古今數千言。王不能用。當是時。公倡絶學。使文敎。煥然復明。於是。學者皆稱公能得道德之蘊也。已而。知淸道郡事。大司憲趙浚劾罷公職。公卽日退居田里。遂匿於智異山中。自號思隱。爲人慈孝。丁母憂。廬墓三年。倭奴之亂。人皆匿。公獨不去。而倭奴不敢加害。及王氏政亂之時。稱疾不仕。見幾而歸。於是。學者皆稱公能成隱遯之志也。洪武十六年癸亥二月初八日。以疾卒。享年五十三。辛禑命禮葬葛蘆介山。又立石以旌其閭。建文三年。本朝贈嘉靖大夫參知議政府事兼領經筵事藝文館提學。謚曰忠宣。立廟道川。公曾祖諱某。祖諱某。父諱某。初配曰夫人周氏。繼配曰夫人鄭氏。有子五人。長曰中庸 。司諫院獻納。次曰中誠。進士。次曰中實。門下侍郞。次曰中晉。進士。次曰中啓。禮曹判書。孫曰和。承政院都承旨。曰綿 萊。贊成議政府。事長淵伯。世稱公歸自交趾。得木綿。藏之筆管。及旣歸。植于國中。高麗木綿自公始。然夏后之世。已有木 綿 。故禹貢曰。島夷卉服。厥篚織貝是也。蓋卉者。木綿之屬。今南夷木綿之精者。謂之吉貝。然則木綿出於南夷也。亦久矣。烏可謂自公而始邪。銘曰。
義足以正君臣之倫。學足以窮天人之眞。知足以全丘壑之身。何必以南夷一卉。誦公之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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