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는 11개의 본이 있습니다.
안동 · 예천 · 경주 · 진주 · 밀양 · 대전 · 안성 · 전주 · 강릉 · 광산 · 청주 등이며, (네이버 백과사전인용)
인구 순위별로 보면,
인구수 : 204,013가구, 652,495명
1. 안동권씨 : 196,566가구 629,291명
2. 예천권씨 : 1,512가구, 4,876명
3. 강릉권씨 : 1,619가구, 4,677명
4. 경주권씨 : 1,180가구, 3,583명
5. 안성권씨 : 1,075가구, 3,271명
6. 광산권씨 : 569가구, 1,774명
7. 밀양권씨 : 475가구, 1,472명
8. 전주권씨 : 324가구, 1,083명 으로 나타났습니다.
안동권씨(安東權氏)에 대(對)하여
1. 시조(始祖) : 권행(權幸)
2. 유래(由來) :
(安東權氏) 시조(始祖) 권행(權幸)은 신라(新羅)왕실(王室)의 후손(後孫)으로 본래(本來)의 성(性)은 김씨(金氏)이다.
신라(新羅)말(末) 경애왕(景哀王)때 신라(新羅)가 극도(劇盜)로 부패(腐敗)하고 잇단 민란(民亂)으로 국운(國運)이 기울어가자 927년(신라 경순왕(敬順王) 원년(元年))에 후(後)백제(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新羅)를 침입(侵入) 포석정에서 경애왕(景哀王)을 살해(殺害)한다.
이에 격분(激忿)한 권행(權幸)은 930년(경순왕(敬順王) 3년) 겨울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이 대군(大軍)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侵入)하여 고려(高麗) 태조(太祖)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指導級)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議論), 함께 향병(鄕兵)을 모으고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甄萱)의 8천 대병(大兵)을 함몰(陷沒)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當時) 고창은 후삼국(後三國)의 전략상 중요(重要)지역(地域)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사람의 도움으로 승리(勝利)함으로서 열세에 있던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우세(優勢)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병산전투의 승리(勝利)는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新羅)의 항복 등 삼국통일(三國統一)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太祖)가 크게 기뻐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昇格)하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시조(始祖) 권행(權幸)의 묘소(墓所)는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삼국통일(三國統一)에 공을 세운 시조(始祖) 권행(權幸)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3. 가문의 번영 고려(高麗) 개국(開國)과 함께 이땅에 뿌리를 내린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무수한 인물(人物)들을 배출(輩出)했다.
고려시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高麗)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記錄)된 인물(人物),그의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最初)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人物)이며, 권수평의 증손(增損)이며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은 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安東權氏)는 3백59명의 문과(文科) 급제(及第)자를 배출(輩出)하여 찬란(燦爛)한 꽃을 피운다.
4. 안동권씨 인물
- 권근(根) : 예문관, 대제학, 대사성,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함.
- 권제(蹄) : 우찬성을 역임함.
- 권벌(橃) : 중종때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선조초에 좌찬성에 추증됨.
- 권철(轍) : 명종때에 삼정승을 두루지냄,
- 권율(慄) : 권철의 자(子) 조선의 명장
- 권응수(應銖) : 충의공
- 권협(悏) : 예조판서로 지냄.
- 권상하(尙夏) : 조선시대학자.
- 권일신(日身) : 조선시대 천주교인
- 권람(擥) :
- 권부(溥) :
5. 안동권씨 집성촌
- 강원 명주군 사천면 노동리
- 강원 명주군 왕산면 송현리
- 강원 삼척군 하장면 일 원
- 강원 통천군 서 면 송탄리
- 강원 평강군 일 원
- 경기 양평군 양서면 일 원
- 경기 연천군 일 원
- 경기 용인군 남사면 아곡리
- 경기 용인군 모현면 일 원
- 경기 이천군 설성면 일 원
- 경기 파주군 적성면 가월리
- 경기 포천군 소흘면 고모리
-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 경남 진주시 수정동
- 경북 고령군 성산면 기족동
- 경북 금릉군 조마면 장암동
- 경북 문경군 산양면 일 원
- 경북 문경군 영순면 사근리
-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 경북 봉화군 봉성면 원둔리
- 경북 상주군 공검면 양정리
- 경북 상주군 모서면 대표리
- 경북 선산군 도개면 신림동
- 경북 선산군 옥성면 농소동
- 경북 선산군 도개면 궁기리
-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동
- 경북 안동시 용상동 일 원
- 경북 안동시 안흥동 일 원
- 경북 안동시 서부동 일 원
- 경북 안동시 율세동 일 원
- 경북 안동시 신세동 일 원
- 경북 안동시 법상동 일 원
- 경북 안동시 노하동 일 원
- 경북 안동군 와룡면 서지동
- 경북 안동군 와룡면 중가구
- 경북 안동군 와룡면 가야동
-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계동
-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하동
-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상동
- 경북 안동군 풍천면 갈전동
- 경북 안동군 북후면 연곡동
- 경북 안동군 풍천면 가곡동
- 경북 안동군 임하면 임하동
- 경북 안동군 남선면 신석동
- 경북 안동군 남선면 원림동
- 경북 안동군 풍천면 구호동
- 경북 안동군 풍산읍 노 동
- 경북 안동군 풍산읍 막곡동
- 경북 안동군 임동면 사월동
- 경북 안동군 서후면 명 동
- 경북 안동군 서후면 이재동
- 경북 안동군 일직면 국곡동
- 경북 안동군 일직면 광연동
- 경북 안동시 동부동 일 원
- 경북 영양군 영양면 상원동
- 경북 영덕군 입암면 신사동
-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
- 경북 영덕군 병곡면 송천동
-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동
- 경북 영천군 화산면 가상리
- 경북 예천군 예천읍 왕신동
- 경북 예천군 지보면 수월리
- 경북 월성군 강동면 국당리
- 경북 월성군 양북면 구길리
- 경북 월성군 내남면 망성리
- 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동
- 경북 의성군 옥산면 구성동
- 경북 의성군 다인면 삼분동
- 경북 의성군 옥산면 입암동
- 경북 청송군 안덕면 장전동
- 경북 청송군 진보면 후평동
- 경북 청송군 진보면 이촌동
- 경북 청송군 진보면 진안동
-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학산동
- 경북 칠곡군 석적면 도개리
- 전남 곡성군 고달면 고달리
- 전남 광양군 옥용면 죽천리
- 전남 나주군 봉황면 욱곡리
- 전남 승주군 쌍암면 봉덕리
-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 전북 김제군 죽산면 신흥리
- 전북 무주군 무주면 내도리
- 전북 순창군 순창면 가남리
- 전북 순창군 귀림면 일 원
- 전북 순창군 순창면 신남리
- 전북 순창군 적성면 일 원
-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 전북 익산군 팔봉면 임상리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 전북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
-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 전북 정읍군 정우면 장순리
- 전북 정읍군 태인면 매계리
- 제주 남제주 서귀읍 하효리
- 충남 대덕군 산내면 정생리
- 충남 대덕군 산내면 목달리
- 충남 대덕군 산날면 무수리
- 충남 서천군 화양면 남성리
- 충남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
- 충남 연기군 전동면 청송리
- 충북 괴산군 괴산면 정용리
- 충북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 충북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 충북 중원군 소태면 야 동
- 충북 중원군 소태면 복탄동
- 함남 문천군 명귀면 장발리
- 함남 문천군 명귀면 수치리
- 황해 봉산군 기산면 북천중
- 황해 서흥군 매양면 양사리
- 황해 신천군 궁흥면 성암리
- 황해 신천군 문무면 추령리
- 황해 신천군 용진면 삼봉리
7. 계파
- 검교공파 : 권척
- 광석공파 : 권대
- 군기감공파 : 권사발
- 동정공파 : 권체달
- 별장공파 : 권영정
- 복야공파 : 권수홍
- 부정공파 : 권통의
- 부호장공파 : 권시중
- 수중공파(종파) : 권수중
- 시중공파 : 권인가
- 좌윤공파 : 권지정
- 중윤공파 : 권숙원
- 호장추공파 : 권추
- 추밀공파 : 권수평
- 급사중공파 : 권형윤
세차 |
배정 항렬자 |
계묘년 예비자 |
추가 예비자 |
31세 |
병(丙) |
대(大) |
만(萬) 우(友) |
32세 |
중(重) |
종(宗) |
인(仁) 무(武) |
33세 |
태(泰) |
춘(春) |
용(龍) 정(正) |
34세 |
영(寧) |
헌(憲) |
탁(鐸) 작(爵) |
35세 |
오(五) |
숙(肅) |
오(悟) 오(歨) |
36세 |
혁(赫) |
기(奇) |
경(景) 영(英) |
37세 |
순(純) |
택(宅) |
처(處) 우(虞) |
38세 |
용(容) |
준(俊) |
열(說) 익(益) |
39세 |
구(九) |
숙(塾) |
궤(軌) 예(藝) |
40세 |
승(升) |
협(協) |
사(士) 두(斗) |
41세∼50세:항렬자가 이름의 뒷자가 됨
세차 |
배정 항렬자 |
계묘년 예비자 |
추가 예비자 |
41세 |
일(一) |
만(萬) |
백(百) |
42세 |
원(元) |
인(仁) |
완(完) |
43세 |
전(全) |
용(龍) |
장(長) |
44세 |
택(澤) |
탁(鐸) |
서(署) |
45세 |
서(書) |
오(悟) |
오(梧) |
46세 |
명(溟) |
경(景) |
곤(袞) |
47세 |
칠(七) |
처(處) |
건(虔) |
48세 |
준(駿) |
열(說) |
태(兌) |
49세 |
욱(旭) |
궤(軌) |
구(究) |
50세 |
갑(甲) |
사(士) |
남(南) |
세차 |
배정 항렬자 |
계묘년 예비자 |
추가 예비자 |
51세 |
의(懿) |
우(友) |
승(承) |
52세 |
항(恒) |
무(武) |
천(天) |
53세 |
옥(玉) |
정(正) |
삼(三) |
54세 |
덕(德) |
작(爵) |
환(篻) |
55세 |
조(肇) |
오(歨) |
아(衙) |
56세 |
경(京) |
영(英) |
기(琦) |
57세 |
세(世) |
우(虞) |
호(毫) |
58세 |
팔(八) |
익(益) |
일(佾) |
59세 |
집(執) |
예(藝) |
환(紈) |
60세 |
구(求) |
두(斗) |
연(年) |
9. 대표적 인물
고려 개국과 함께 이땅에 뿌리를 내린 안동권씨는 무수한 인물들 을 배출한다. 고려시대 추밀원부사공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된 인물,그의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이며, 권수평의 증손이며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 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9봉군(當代九封君)은 역 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는 3백5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찬란한 꽃 을 피운다.
- 권근(近, 1352~1409)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고려 공민왕 때 17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려 우왕 때 성균 대사성, 예의판서 등을 역임. 조선 태조 때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공을 세웠다. 예문관 대제학, 대사성,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명으로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입학도설'은 후에 이황, 장현광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의 저서로는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등이 있다.
- 권제(蹄, 1387~1445) 권근 2子. 호 지재(止齎), 시호 문경(文景).
태종 때 집현전 부제학, 한성부윤을 지내고, 세종 때(1429년) 명나라에 진헌사로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이조판서에 승진, 1436년 '동국연대'를 편찬하고, 다음해에 예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원사, 지춘추원사 등을 지냄. 1440년 '고려사' 편찬에 참여, 1445년(세종 27년)우찬성이 되어 정인지,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왕에게 바침.
- 권벌(1478~1548) 시호 충정. 호 충재(沖齎).
고려 중종 때 예조판서를 지냄. 선조초에 좌의정에 추증됨.
- 권철(轍, 1503~1578)
권율의 아버지. 명종 때 3정승을 두루 지며 오랜 기간 정권에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이가 없을 정도 이었다.
- 충장공 권율(慄, 1537~1592) 호 만취당. 시호 충장. 영의정 권철 아들.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로 금산군 이산사에서 왜군을 대파, 전라도 순찰사로 수원 독왕산성에서 적을 대파하고, 행주산성에서 3만 대군과 싸워 적병 2만4천명의 사상자를 내게한 행주대첩의 공을 세워 도원수에 오르고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음. 정유재란에서도 공을 많이 세워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됨.
- 충의공 권응수(權應銖)
1584년(선조17)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탈환하고, 병마우후가 되었다.
다시 문경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고,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에 특진되었다.
그 후 충청도 방어사 겸 밀양부사 등을 역임하고, 1604년 선무공신 2등으로 화산군에 봉해졌으며, 도총관을 겸했다.
좌찬성에 추증, 경북 영천의 귀천서원에 제향되었다.
- 권협(1542~1618) 시호 충정
임진왜란 때 장령으로 서울 사수를 주장. 1597년 정유재란 때 고급사로 명나라에가서 원나라 군사를 끌어들이는데 성공, 귀국후 호조참의에 오르고 1604년 길창군에 봉해짐. 1607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했다.
- 권상하(尙夏, 1641~1721) 호는 수암(遂菴). 시호는 문순(文純).
조선의 학자. 송시열의 수제자. 송시열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음. 숙종이 총애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이, 송시열로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임. 글씨에도 뛰어남.
- 권일신(日身, ?~1791)
조선시대의 천주교인. 교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 실학자인 안정복(安鼎福)의 사위. 남인의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다 1782년(정조 6년)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1782년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1787년 지금의 명동성당(1898년 축성) 부근 명례방(明禮坊)에서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등 조선의 교인들이 모여 직제를 결성하여 조선천주교회를 창립, 주교가 되어 1789년 교우 우모(禹某)를 북경에 보내 북경에온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나 노모를 생각하여 신앙에 동요가 생겨 배교(背敎)했다.
- 권람(權擥)
1450년(세종32) 식년문과에 장원하고, 감찰을 거쳐 다음해 교리로서 <역대병요>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되었다.
1453년(단종1) 김종서(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 때에 앞장서서 정난공신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좌익공신 1등으로 대제학에 승진, 길창군에 봉해졌다. 우찬성,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라 다음해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활을 잘 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에 <소한당집>이 있다.
- 권부(權溥)
1280년(충렬왕6) 문과에 급제, 첨의사인을 거쳐 1289년 밀직사, 우부승지, 예빈윤, 지공조, 사림시독학사가 되었다.
1302년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밀직사사, 도첨의참리를 역임, 1309년(충선왕1) 정조사로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에 찬성사 판총부사가 되고, 1313년 영가군에 봉해졌다.
충숙왕 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했고, 첨의정승 판총부사, 영도첨의사사를 지냈으며, 부원군에 진봉,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이 되었다.
일찍이 <사서집주>의 간행을 청하여 주자학 발전에 공헌했다.
안동권씨는 조서시대에 2명의 왕후를 배출하였다.
10.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든 안동권씨(安東權氏)
안동권씨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族譜)를 만든 것이 자랑이다.
그것이 '성화보(成化譜)'라는 한국 최초의 족보인데 이조 성종 7년 병신(丙申), 서기 1476년에 출간되었다. 이때가 중국 연호(年號)로 명나라 헌종(憲宗)의 것인 성화(成化) 12년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서기(西紀)를 쓰듯이 당시 중국 연호를 썼기 때문에 이 시기를 성화연간(成化年間)이라 하고 성화연간에 나온 족보라는 뜻으로 '성화보'라 세칭하게 되었다. 이를 달리 '성화병신보(成化丙申譜)'라고도 하는데 본디 명칭은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이다.
이 성화보가 나온지 1백여년 뒤에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가 나왔다. 가정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이다. 이로부터 각 성씨의 족보가 잇따라 나와 우리 나라로 하여금 세계에서 따를 자가 없는 족보의 선진국이 되게 하였다.
11. 안동권씨 인구
안동권씨는 2000년 현재 남한에 629,291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