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회 공작산 생태숲 문예축전 작품낭송회 其 二
식사를 마치고 용호와 명숙이를 읍내로 보냈다. 부전이를 태우고 와야 했고 연근이가 성남서 일부러 굴운리에 와 있다고 하니 먼저 준선네 집에 가있으라고 당부하고는 우리는 아직 이른 솔밭주변을 서성이다 일본 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있는 금강 노송의 칼자국 맞은 유물을 찍어본다. 지금은 송진이 흐르도록 집을 낸 자국은 부식을 막기 위해 시멘트로 발라놓은 상태다.
아직 이십여 그루 건재하고 솔밭의 명맥을 이 노송들이 이어주고 있는 형편이니 대력 150년은 다 넘었을 칼 자욱 맞은 노송을 살리느라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이 소나무 숲이 사라지면 솔밭의 그늘이 사리질 것이 뻔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강점 치세의 유물도 사라질 것이 자명하다. 마치 옥구도 늙은 왕 벗이 신사참배단 앞에서 강점의 역사를 말해주다 작년에 모조리 죽은 형국이 될테니까.
오십년도 더 오래전의 일, 연봉리에 예까지 걸어오느라 지친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곳 부도탑과 수타사의 사천왕상, 그리고 여기 칼집 있는 노송은 어린나이에 매우 인상적이었다.오늘은 부도밭을 자세히 관찰해야 겠다.
부도밭이라 이름한 것은 수태사 입구 차량통행을 막는 초소 오른쪽으로 솔밭이 있고 그 위로 부도탑이 여나무기 늘어선 철책 친 경내를 말함이다.
철책이 녹 쓴 자물쇠에 의해 꿈쩍도 안한다. 1m 50쯤 높이의 철책을 뛰어넘어 좌우로 부도탑과 송덕비를 합쳐 12기의 일렬로 도열한 탑들을 왼쪽부터 살펴본다. 내가 어릴 적 보던 그 부도탑 그대로니 그 후로는 열반하여 여기에 부도탑을 남긴 스님이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리라.
부도탑(浮屠塔)이란 말은
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봉안한 것을 말한다.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부도는 사찰 밖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 중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큰 규모의 부도도 있지만 대개 간결하고 소박한 범승(凡僧)의 부도가 많다.
여기 안치된 사리는 모두 현 사찰인 수타사에서 적멸한 고승 내지는 범승의 사리탑인데 모두 수 백년은 넘을 듯한 부도들이다. 이중 확실한 것은 대표적으로 홍우당 선천 대사비가 있는데 철책 전면에도 이 비와 탑이 기념물임을 밝히고 있다. 이 비는 316년 전인 강희(康熙) 29년에 새겼다고 하니까 서력으로는 기원 1690년에 해당한다. 300년이 넘는 셈이다.
홍우대사는 조선조 광해 3년인 1611년에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에 입적하였다.
비신은 부도밭의 중앙쯤에 위치했는데 비신의 문장이 선명하여 해독이 가능하나 그럴 시간이 없다
<그래서 돌아와 http://blog.daum.net/jsy1851/2840의 자료를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해석과 편집을 구성하여 보았다.
洪川 壽陁寺 紅藕堂 善天大師碑文
紅藕堂大師浮屠碑銘 幷序
知雄守雌 知白守黑 知言守 知智守愚 能爲溪谷 不害大制者 其唯先師與
法諱善天俗姓洪 三重大匡 南陽洪殷說之苗裔也
髫依龍門 雪明長老 薙髮受具 冠討香峰寂照大師 學佛玄機 犧牲獨行 硏交無比 初幼則循此南陔 長則遵彼西域 如騏之纏 如玉之溫精勤三業 遍弘念佛 一心獨人般舟 塵靜昏衢 波澄智海 際己巳 巳月(陰 四月) 上浣順世歸眞 享年七十九 僧臘六十三 月餘闍維 頭髗一片 超登於七步許盤石上 奉藏寺北岩穴 翌年仲春 初八日 起始祈禱 結果纔訖 爰得銀色舍利二顆 一方一圓 圓置寺北 方奉龍門 寔有其義 忘其辭也 况復枸緣花染 果熟香飄 茶毘之日 布薩之辰 靈瑞非一 多言必非先師所取 紀其語煩 畧記始末 嗚呼 淨源 浮圖之甥 浮圖 淨源之師 師資膠漆四十餘年 孝未竭力 幽明間隔 哀感曷旣 抆淚爲銘
達人貴克已 得一能溪谷 知雄守其雌 知言守其
早入不二門 銕☐☐☐德 支支出唐城 其祖洪相國
志學謝朋親 知命專念佛 心想白玉毫 頂禮黃金骨
舍世忽歸眞 八十須欠一 眞空不空空 妙有非有有
絶跡離名言 茲乃先師跡 泥洹一何速 困極薪盡悲
泣把龜毛筆 敢訣兎角碑 天鎭刦石盡 地入☐☐夷
康熙 二十九年 庚午(1690) 六月 日 弟子 淨源 謹識
해석
홍천 수타사 홍우당 선천 대사비문
이 비는 316년전인 강희(康熙) 29(기원 1690년)년에 건립한 비다.
홍우당 대사 부도비명 서문을 아울러 쓰다.(紅藕堂大師浮屠碑銘 幷序)
수컷을 알아 암컷을 지키며 (知雄守雌)
흰색을 알아 검은 색을 지키며 (知白守黑)
말을 알아 말하지 않음을 지키며 (知言守)
지혜를 알아 우매함을 지킨다. (知智守愚)
능히 계곡이 되어 해치지 아니하고 (能爲溪谷)
크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사뿐이로다. (不害大制者其唯先師與)
법휘(法諱)는 선천善天이요 속성(俗姓)은 홍(洪)씨이니 삼중대광(三重大匡) 남양(南陽) 홍은설(洪殷說)의 후예이다.
속세의 긴 다박머리는 용문의 설명장로(雪明長老)에 의탁하여 머리를 깍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향봉 적조대사(香峰 寂照大師)를 찾아가 불교의 오묘한 이치를 배우고 성심을 다하여 홀로 수행하고 연구 비교하는데 견줄 이가 없었다.
처음 어려서는 이쪽 남해(南陔-시경의 편명?)를 쫓았으며 자라서는 저쪽 서역(西域)에서 들어온 가르침을 따르니 마치 준마 몇 필이 함께 메여 있는 것 같으며, 옥의 따듯함과도 같았다. 또 삼업(三業)을 정성스럽게 닦고 두루 염불에 힘쓰니 마음을 오롯이 해서 홀로 배를 몰아 번뇌로 시끄러운 네거리를 조용하게 하며 파도가 지혜의 바다를 맑게 하는 격이었다.
기사년 사월(음력 4월) 상순 속세에서 물러나 참된 세상으로 돌아가니 향년 79요 승랍 63이었다.
한 달 남짓 다비를 거행하는 데 머리 뼈 한 조각이 7보쯤 되는 반석위로 튀어 올라갔으며 절 북쪽 바위굴 속에 봉안하였다.
다음 해 중춘 초파일에 비로소 기도를 올림으로써 결실을 맺어 마침내 끝마쳤다.
이에 은색 사리(舍利) 이과(二顆)를 얻었는데 하나는 모난 형태이고 또 하나는 둥근 형태였다.
둥근 것을 절 북쪽에 두고 모난 것은 용문에 봉함으로써 그 뜻은 남겨두었으되 그 말은 잊었다.
하물며 다시 구연의 꽃이 물들어 열매가 익고 향기가 날리니 다비(茶毘)날의 태양과 포살(布薩) 날의 별 등 영묘함과 상서로운 현상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많은 말은 대사가 취할 바는 못 되므로 그 말의 번뇌함을 계통지어 대략의 내력을 기록한다.
오호라! 정원(淨源)은 부도(浮圖)의 조카이며 부도(浮圖)는 정원(淨源)의 스승이기도 하다.
스승과 쌓인 돈독한 교분이 40여년! 효의 마음도 아직 그 힘이 다하지 않았건만 삶과 죽음이 그 사이를 갈라놓네.
슬픔의 감정을 어찌 다할 수 있으리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명문을 짓노라.
통달한 사람은 극기를 소중히 여겨 능히 계곡을 얻을 수 있었도다.
수컷을 알아 그 암컷을 지키며 말을 알아 그 말하지 않음을 지켜내 도다.
어려서 불이문에 들어가 ooo같은 덕을 굳건히 하였나니 떳떳하게 텅빈성[당성]을 벗어난 것은 그의 조상 홍 상국이로다. 학문에 뜻을 두어 벗과 친지와 이별하고 천명을 알아 염불에만 전념하여 마음으로는 백옥 같은 부처님의 백호상을 생각하고 황금골에 예배하도다.
세상을 버리고 홀연히 참된 것으로 돌아가니(舍世忽歸眞) 팔십에서 하나가 모자라는구나(八十須欠一)
진공(眞空)은 불공(不空)의 공(空)이요 묘유(妙有)는 비유(非有)의 유(有)로다.
자취를 끊어버리고(絶跡) 이름과 언어를 떠나니(離名言) 이것이 곧 대사의 자취로세(茲乃先師跡).
니원(泥洹-열반(涅槃)이라고도 함)이 어찌 이리도 빠른가.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땔감이 다 타버리는 슬픔이로다.
눈물 흘리며 거북이 털로 만든 붓을 잡아 굳이 토끼 뿔로 된 비석에 애도를 표하도다.
하늘이 돌을 마모시켜 다하는 것을 지켜주며 땅이 00하여 없어지는 것을 거두어 드리노라.
강희(康熙) 29(기원 1690년)년 경오 6월 0일에 제자 정원(淨源)이 삼가 기록하다.
이제 시간이 되었는지 마이크 소리가 앰프와 거리가 맞지 않아 하울링음이 삑삑거리기 시작한다.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고 노래 가락 화두를 던지며 작년에 우리를 위해 흥을 모두에 돋우신 김명옥님에게 "올해는 선배님, 무슨 가락으로 즐겁게 해 주시겠습니까?" 하자 "세월로 참사로 생략키로 했습니다" 한다. 나가신다는 홍천 노인복지관 문화센터 국악강의도 차질 있음이 분명하리라.
석도익 회장님
문협의 사무국장 박선영씨가 재치 있는 유머와 위트로 말머리를 풀어나가는데 먼저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잡시의 묵념이 있다. 그리고 회장 석도익의 인사말을 필두로 김두수님의 낭송이 시작된다. 준선이네 책방에서 신세 많이 지고 준선이 오빠 개인교수도 하셨다는 강정식님은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첫 순서에 제외된걸 보면 안 오신 것이 확실하고 이어서 김명옥님으로 순서가 이어지더니 김정헌님, 박만수님을 지나 홍천 부군수님의 인사말이 이어진다.
작년엔 군수께서 직접 인사를 했는데 금년에 선거철이라 그런가 부군수를 보냈다. 키 크고 인물 훤칠한 양반이 어찌 그리 어눌한가, 숫제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대사를 여나므 장 에이포지에 적어 읽고 있다.
홍천 군수 후보들 두어 명의 소개가 있더니 용인 문협 지부장 함동수님이 무슨 일로 가셨는지 호명에 응답이 없다. 다급한 연락이 있어 인사도 개별 못 하고 되돌아 가셨다는 것이다<집에 돌아온 후 급한 일로 되돌아와 죄송하다는 문자가 왔다> 이어 류각현님, 박봄심님, 허성님 유진각님 박세자님, 박영권님, 황장진님,
그리고 박유석님 순인데 특히 이 분의 인사말씀이 장황하여 모두 불안해하였다. 정호승 시인과의 인연 설명이 있었고 특히 시작(詩作)법을 강연이 20분이 족히 넘어서야 끝을 내시는데 시집을 열다섯 권이라던가 열일곱 권이라던가를 내셨다고 했다. 다음으로 배명숙님, 이계영님, 이진규님이 나오셨는데 님께서는 우리 문인들이 지닌 저작권적 가치를 하나의 훌륭한 문화적 콘텐츠로 설명하시고 이어 이충용님, 아호가 운정이라는 초대 여류작가께서 나오셨고 전상기님, 정원재님,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좀 전 인사 말씀이 길으셨던 분이 생각나서 말 길어지지 않기를 긴장하니 정말 간단한 인사말이 가능했다.
“여러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홍천초등학교 48회생이고요 경기도 시흥에서 왔습니다. 시작(詩作)에는 별 재주가 없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곤혹스러웠는데 올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이주호란 동창이 있었는데 각별이 친했습니다.
그런 동창이 미국을 떠난지 사십년 만에 왔다고 했는데 나하고 헤어진지는 오십년 만이지요. 그런 친구가 만나지도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소재를 한 점 끄적인 것을 오늘 낭독해 보겠습니다.
정(情)
정이란 푸른 마음
마음이 푸르니 정이라
푸르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뜻
마음이 살아있으니
푸를 수밖에
미국 간 주호가 사십년 만에 왔다는데
나는 오십년 동안 못 보았지
이 녀석 야속하게 떠났다
참기름 동동 노오랗게 뜬 콩나물국
주호 어머니가 끓여 주셨던 콩나물 국
오늘 밥상 콩나물국엔
노오란 참기름은 없고
인자한 주호 어머니의 얼굴이
동동 뜬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내 일정의 중요한 과업은 끝났다.
이어 허대영님, 최복형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춘천에 계시고 한국 캐릭터 협회 강원 지부장이시라는 서영은님의 순으로 끝이 났다.
준선네 집으로 먼저 간 용호는 이미 메기탕을 끓여 놓고 오기를 재촉하는 것이 벌써 부터였는데 대규와 도착한 것이 네 시 반은 넘어서였다.
이미 연근이 부전이가 합류하여 있고 준선이랑 마당에 나와 반갑게 맞이한다.
내가 준선네 재호(齋號)를 연산유수재(連山流水齋)라 명명하여 액자 글 까지 써준 것이 병풍처럼 두른 앞산의 등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개울이 있으며 다시 둔덕으로 준선이의 예쁜 집이 그림같이 자리했다.
작년에 이곳으로 입양하여 비명에 간 가루(애완견)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질까 초장에 그런 모습 안 보이려 화제에 넣기조차 안했다.
모두 기다리다 지친 모습. 이내 상 차려 오른 메기탕은 여간 먹음직스럽지 않다.
비린내 없이 담박하게 끓인 매운탕의 비결이 무어냐 하니까 순전 준선이의 노하우, 흔히 쓰는 죄피 가루 첨가가 아니고 무어라 설명은 했지만 기억은 안 난다.
누구의 솜씨냐는 질문에 메기 잡은 건 용호 덕이고, 탕은 공동의 작이라 했다. 당연한 설명이다.
두어 시간 한담에 밥상머리 동창간의 어렸을 때 정담까지 나누고 출발한 것이 여섯시, 거침없이 막힘없이 달려 도착하니 밤 여덟시다.
들어오자마자 아직 가루가 새끼 낳다 죽은지 모르는 집사람이
“가루는 잘 있어요?‘ 한다.
“몰라, 시간 없어 동창 네는 못 들렸어. 근데 잘 있다고 그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