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사제는 양들을 목자에게 이끄는 ‘양치기 개’”
춘천교구 문화홍보국장 겸 소양로 본당 주임
최 기 홍 바르톨로메오 신부
순교와 희생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 이어온 소양로 본당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5년 동안 미디어 전반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공부하고 돌아와 2009년 2월부터 춘천교구 홍보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최기홍(崔基洪. 바르톨로메오) 신부를 지난 1월 9일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에서 만났다. 그는 춘천교구 초대 홍보실장으로 부임해 뉴미디어를 통한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2010년 3월 25일 현 교구장 김운회(루카) 주교 착좌 이후 홍보실이 문화홍보국으로 승격되면서 국장으로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가운데 2012년 8월 말일부터는 제17대 소양로 본당 주임을 겸하고 있다. 최 신부를 만난 때는 마침 소양로 본당 설립 64주년을 지낸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소양로 본당은 1950년 1월 5일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의 아일랜드 출신 고 안토니오(Peter Anthony Collier) 신부가 당시 지목구장 구인란 토마스(Thomas Quinlan ㆍ 1955년 춘천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됨) 신부의 명에 따라 봉의산 자락의 당시 윤안자(골롬바) 자매의 집터를 매입해 설립한 춘천교구 두 번째 본당이다.
소양로 본당은 전망 좋은 위치와 반원형 성당의 건축학적 가치보다 신앙 선조들과 초대 주임 고 안토니오 신부의 고귀한 희생과 순교의 얼을 품고 자라온 공동체로 더 유명하다.
“고 안토니오 신부님은 본당이 설립되던 해 터진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오후 복사 겸 사무장 김경호(가브리엘) 씨와 함께 지목구장이 지키고 계시던 죽림동성당으로 가든 길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 당하셨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춘천교구 첫 번째 순교자가 되신 겁니다. 인민군은 두 사람을 체포하자마자 시계와 묵주, 돈을 모두 빼앗은 뒤 다짜고짜로 ‘스파이지?’하며 다그쳤으나 고 신부님은 ‘나는 천주교 신부요.’라며 당당하게 말씀하셨지요. 인민군 임시본부가 있던 춘천우체국에서 소양강 쪽으로 가면서도 그 같은 신문과 답변은 이어졌습니다. 소양걍변에 이르자 인민군은 포승줄로 함께 묶여 있던 두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 순간 고 신부님은 김 씨에게 ‘총을 쏘면 내가 즉시 당신 몸을 감싸 안을 테니 죽은 척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총알들이 날아왔고 김 씨를 껴안은 고 신부님은 그 자리에서 선종하셨습니다. 김 씨는 고 신부님의 ‘살신성인’의 정신과 몸짓으로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고 신부는 그에 앞서 전쟁이 터진 6월 25일과 26일, 포탄이 떨어지는 숨 가쁜 상황에서도 미사를 봉헌하고 저녁기도를 바쳤다. 전황이 더욱 악화되자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뒤 자신은 “끝까지 성당을 지켜야 한다.”면서 성체를 모두 삼켜 안전하게 모신 뒤 지목구장과 다른 골롬반 형제들이 머물고 있던 죽림동 성당으로 가던 중 순교한 것이다. 고 신부의 유해는 순교한 그 자리에 묻혔다가 1951년 10월 10일, 한국전쟁 때 순교한 다른 선교사들의 유해와 함께 죽림동 성당 내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춘천교구는 현재 고 신부를 포함한 한국전쟁 순교 성직자 일곱 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면서 기도한다.
소양로 본당의 초기 관할지역은 조선시대 참혹한 박해를 피해 산간오지로 피신해 온 다른 지역 신자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던 북산면과 신북면 등이 포함된 ‘거룩한 땅’이기도 하다.
교회 자체가 미디어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뿌려진 때는 1791년 첫 박해인 신해박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해가 시작되자 서울에 살던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인 최한기가 가솔을 이끌고 홍천으로 이주한 뒤 홍천과 풍수윈 일대에서 살면서 부터다.
최기홍 신부가 1971년 7월 24일 태어난 철원 역시 신앙 선조들이 숨어 들어와 초기 신앙 공동체를 이뤘던 곳이다. 최 신부는 아버지 최신박(요셉, 2003년 59세로 선종) 님과 어머니 김종운(체칠리아, 65) 님 사이의 3형제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철원에서 초 ․ 중 ․ 고교를 나온 뒤 1990년 수원 가톨릭대학에 입학해 대신학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2000년 1월 25일 사제품을 받았다. 감리교회에 다니던 초등학교 2학년 때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어머니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 친절한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이끌려 복사를 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다. 중학생 때는 군 교육청 주관의 과학경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 과학자 되기를 원했으나 복사를 하면서 친하게 된 신부님들을 보면서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고교 진학 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제로 살아가는 것도 보람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대신하교 입학 후 기도하고 규칙 잘 지키는 모범생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여유를 가지고 생활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잘 도와줘 무난히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뒤 후평동 본당 보좌를 거쳐 홍천 본당 보좌 신부로 청소년 사목에 열중하던 2003년 유학 준비 발령이 났고, 이듬해 6월 아일랜드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교구장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의 권고로 미디어를 공부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메이누스(Maynooth) 신학대학에서 언어 연수와 함께 이론 30%에 실습 70%의 ‘교회와 미디어’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면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제작과 편집 실무를 먼저 익혔다. 이어 더블린대학교(DCU)에서 멀티미디어를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레스터대학교(University of Leicester)에서 ‘매스컴 일반학’을 전공해 다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했다.
“유학 중 유럽 교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 자체가 미디어다.’라며 미디어를 영성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미디어를 단순한 매체로만 보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청중들 수준에 맞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으며 치유해 주셨듯이 교회도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면서 수용자의 수준에 맞게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나 사제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야 합니다.”
최 신부는 한국 교회도 유럽 교회처럼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전국의 신학교에서 한 학기만이라도 미디어 관련 과목을 개설해 미래 사목자들이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확실해기를 바라고 있다.
인터넷 방송 직접 제작 ‧ 편집 ‧ 진행하는 사제
세계 교회의 흐름을 파악하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대비했던 당시 교구장 장익 주교는 최 신부가 귀국하자마자 홍보 담당자로 발령을 냈다. 그때까지 사목국에서 주보와 달력을 만드는 등 홍보 업무를 함께 하고 있었다.
최 신부는 우선 전공인 멀티미디어를 통한 홍보활동을 하기 위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걱정되었다. 가난한 교구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때마침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뉴미디어의 열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매체들을 운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할 지역이 넓고 고령화가 심각한 교구 사정을 감안해 온 ‧ 오프라인을 모두 활용해 교구장의 사목지침과 교회 소식, 교구민들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편안하게 묵상하며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을 전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교구 사이트를 개편했다. ‘접근성’과 그 안에 담을 내용(콘텐츠)에 중점을 두었다. ‘모바일 시대’가 곧 전개될 것을 확신하고 컴퓨터뿐 아니라 핸드폰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바로 이듬해인 2010년부터 불기 시작한 ‘아이폰 열품’은 2011년이 되자 온 세상을 뒤덮었다. 이에 발맞춰 2010년에 인터넷 방송국을 개국한데 이어 2011년부터는 팟캐스트 방송까지 시작했다. 그 안에 담을 내용을 작성하는 일에서부터 제작과 편집, 진행은 모두 최 신부의 몫이었다.
교구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200명 정도이던 접속자 수를 최대 1,000명으로 끌어올리자던 목표는 2013년 상반기에 이미 돌파했으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뉴미디어의 특성상 외국에 사는 교구 출신 유학생이나 교민들이 “우리 교구에서 이런 방송을 하다니 너무 고맙다.”는 가슴 벅찬 댓글들이 있었다.
이와 함께 시작한 일은 주보 제작의 혁신이었다. 그동안 1면에는 언제나 성화가 실렸으나 이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교구행사 사진을 실었다. 교구민들은 성화도 좋아했지만 자신의 모습이 담긴 최근 사진을 더 좋아했다. 내용면에서도 여러 가지 소식과 함께 신앙생활에 유익한 ‘읽을거리’를 많이 내보냈다. 지난해 11월 대림 제1주일부터는 주보의 크기를 B5에서 A4 사이즈로 키우고 활자도 크게 했다. 지난해에는 ‘읽을거리’로 신앙의 해를 맞이하여 공의회 문헌 해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니 노인들이 특히 좋아했다. 일선 사목자들의 격려와 칭찬도 큰 힘이 되었다.
최 신부는 이와 함께 2010년부터 매년 상 ‧ 하반기에 ‘미디어학교’를 개설해 교리교사와 청년들, 수도자 등 수강자들에게 미디어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그동안 간단한 이론 및 동영상 촬영과 편집 기법 등을 배운 수강자들은 각 본당과 단체, 수도회에서 미디어를 통한 복음화 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신자 언론인들 사회의 소금 되게 기도해야
“대신학생 때 사목학을 가르쳐주신 교수 신부님의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신부님은 ‘사목은 하느님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일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니 사제는 양들을 목자에게 이끄는 ‘양치기 개’의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상처받고 목말라 하며 헐벗은 영혼들과 억눌린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바로 사목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서를 잘 읽고 실천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 신부가 보좌 시절이나 소양로 본당 주임으로 와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점은 ‘십계명 지키기’와 ‘4복음서 읽기’다. 소양로 본당에 와서는 미사 전에 반드시 공동으로 성경을 봉독하게 한다. 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돈이 없으면 지난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생활한 삶을 담아서 빈 봉투 채로 내면 된다고 했다. 한국 교회가 언젠가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발붙일 데 없는 곳이 되었다며 안타까워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사제들에게 ‘교회 안에 머물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가라.’고 하신 것은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니 그들을 찾아 나서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을 바라보는 최 신부의 시선 또한 날카롭다. 과거에는 ‘힘의 독재’에 이어 ‘자본의 독재’에 예속돼 있더니 지금은 ‘권력과 자본’ 모두에 예속돼 있다고 비판했다. 허약한 한국 언론의 속성을 너무 잘 아는 권력층은 이미 언론을 장악하고 있어 진실이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일부 언론인들이 ‘제3의 권력’이 되어 진실을 호도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은 더 마음 아픈 현실이라고 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디어에 대한 국민들의 올바른 이해가 절실하며 이를 위해 미디어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디어교육은 정부가 주도해야 하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나서서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는 미디어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이런 때 신자 언론인들만이라도 이 혼탁한 사회에서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 같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신자 언론인들뿐 아니라 모든 언론인들이 제 할 일을 다 할 수 있게 기도하고 영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인영오 05ernst@gmail.com